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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백의총 참배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전국에서 모인 통일의병들과 함께 의병 정신이 깃든 충남 금산의 칠백의총을 참배하고 '평화통일 기원제'에 참석한 후 오후에는 ‘통일의병’에서 주관한 통일의병대회에 참석해 ‘의병이 가야할 길’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오늘은 지금으로부터 5913년 전 배달나라의 환웅 천왕이 새 나라를 건설한 신시 개천의 뜻깊은 날입니다. 그 의미를 되살려 스님은 통일의병들과 함께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간절한 뜻을 담아 통일의병대회를 하였습니다.
새벽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 스님은 발우공양에 참석해 공양을 드시고 아침 7시 30분에 서울 정토회관을 출발하여 오늘 행사가 열리는 충남 금산으로 향했습니다.
차 안에서 스님은 미국에서 귀국 후 시차 때문에 밤새 한 숨도 못 잤다고 하며 단잠을 주무셨습니다.
오전 10시가 되자 칠백의총 입구에는 전국에서 모인 통일의병들로 북적거렸습니다. 경기도 파주와 고양에서, 강릉에서, 부산에서, 창원에서, 순천에서, 광주에서 모두들 새벽 일찍 출발해 총 230여명이 자리한 가운데 드디어 통일의병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 칠백의총 안으로 입장하는 통일의병들
통일의병들은 먼저 1592년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700명의 임진 의병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그 뜻을 마음 속에 새기기 위해 칠백의총을 참배했습니다. 제일 선두에는 조성식 통일의병 대표님과 스님이 앞장서고 뒤이어 각 지역 의병들의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우선 위패가 안치되어 있는 ‘종용사’ 앞에 서서 조성식 대표님이 헌향을 한 후 나머지 의병들도 다함께 선열들의 뜻을 기리며 묵념을 올렸습니다.
▲ 칠백의병의 위패가 안치된 종용사
묵념을 마친 통일의병들을 위해 스님은 ‘칠백의총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적을 막을 임무를 맡은 사람은 관군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월급과 무기를 받고 여러가지 배려를 받은 사람들이죠. 그런데 국방을 맡아야 할 관군들이 나라를 지키는 역할을 제대로 못 했습니다. 그래서 왜군이 침입하자 순식간에 영남이 초토화 되고 결국은 수도가 함락되어서 왕이 백성을 버리고 혼자만 살려고 의주까지 피난을 가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바로 그 때 백성들이 일어났어요. 조선시대의 백성들은 나라로부터 보호받기보다는 주로 착취를 당했습니다. 그렇게 가렴주구를 당하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거예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군사적인 지식이나 무기를 갖춘 것도 아니고,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키겠노라 스스로 일어난 사람들을 ‘의병’이라고 합니다.
의병은 국가에 불만이 있어서 관군과 싸우는 반군이 아니라, 관군을 도와서 나라를 지키고자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역사를 보면 관군이 제대로 못 싸웠어요. 제대로 못 싸운 정도가 아니라 아주 사기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의병의 도움을 필요로 하면서도 의병을 무시하고, 협동 작전을 약속해놓고도 세가 불리하면 도망을 가버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희생자는 민간인들, 즉 의병들이었습니다.
여기 모셔진 조헌 선생을 비롯한 칠백여 분 뿐만 아니라 고경명 선생 휘하에 있었던 분들도 관군과 협동 작전을 펴다가 관군이 중간에 도망가 버려서 결국은 전투에서 패배하고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권율 장군과 합동 작전을 하기로 했지만 결국은 왜군의 위세에 눌린 관군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 무고한 희생을 당했습니다. 설령 의병이 참가하지 않더라도 관군이야말로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텐데 정작 관군은 세가 불리하다고 참가를 하지 않은 반면 의병은 끝까지 한 사람도 도망가지 않고 싸워서 전원이 순국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비록 전투에서는 졌다고 하더라도 그 기상이 참으로 높았습니다.
그 당시 조선군은 일본군에 비해 세가 어림도 없이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은 삽시간에 한국을 점령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7년 전쟁으로까지 가면서도 조선 점령에 실패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왜군이 계산 못 한 건 딱 한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민간인이 의병이란 이름으로 일어나고, 산속에 있던 스님들마저도 계율을 어기고 승병을 일으킬 줄 일본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결국 우리나라를 지킨 것은 백성들이었던 셈입니다. 군사적 훈련도 못 받았고, 무기도 변변찮아 낫이나 쇠스랑 같은 농기구를 들고 싸워야 했고, 식량 보급도 원활하지 못한 가운데서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백성들이 일어났어요. 특히 지리를 잘 알다 보니 잘 훈련되고 좋은 무기를 갖고 있는 왜병마저도 이들의 엄청난 자발적 기상에 눌려서 결국은 침략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관군이 다 무너져도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를 지킨 칠백의병들의 기개가 더 가슴 깊이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과연 우리는 이런 순국선열들의 정신을 잘 되살려서 살고 있는지 반문하며 최근 벌어지고 있는 한일 간의 군사협력 움직임에 대해 우려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오늘 행사를 통해 의병정신을 기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정신을 본받아서 더 이상 우리나라가 이런 불행에 처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늘 기념식만 하고 과거만 기리지, 우리 스스로는 잘 행동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혼란을 겪고 간신히 나라를 유지했지만 300여 년이 지난 뒤 또다시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곳에서도 칠백의총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순의비가 일본에 의해 폭파당하는 수모를 겪었어요. 그래도 항일독립운동을 통해 독립군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서 나라를 되찾았죠. 하지만 작년부터 한국과 일본이 북한을 상대로 군사협력을 맺고 앞으로 군사적인 동맹 관계로 발전하려는 움직임이, 우리가 상상도 못할 그런 일이 현실에서 또다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우리의 의병 정신과 역사의식에 맞지 않아요. 아무리 북한이 우리를 위협하더라도 우리 힘으로 조국을 지키고 체제를 유지해야 합니다. 행여 부족하면 동맹국인 미국의 협력을 얻으면 되지, 굳이 여기에 일본을 다시 참여시켜서 일본의 도움을 얻겠다는 것은 아무리 북한에 대한 경고의 뜻이라고는 해도 이런 발상을 하는 사람들은 도무지 민족 정신도 없고 혼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광복 70년이 채 안 되었는데 옛 역사를 잊어버리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니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게다가 일본이 이제 전후 체제를 벗어던지고 군비를 증강하면서 한반도에 언제든지 군사작전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 겨우 한다는 소리가 ‘우리의 허락 없이는 한국에 못 온다’입니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청중 웃음)
이렇게 말해야죠. ‘우리의 강토는 우리가 지킨다. 우리 힘으로도 능히 지키고, 부족하다면 맹방인 미국의 도움을 얻어서 지키겠다. 민간교류나 협력은 좋지만 일본의 군사적 도움은 필요 없다. 어떤 이유로든 일본군은 한반도에 한 발도 들여놓을 수 없다.’ 이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해야죠. 어느 나라든 다 영해 안에서 작전 하려면 당사국의 허락을 받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왜 이런 문제가 생길까요? 사실 일본은 우리의 허락 없이도 우리 영해 안에서 군작전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시작전권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미국이 허락하면 전쟁을 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은 단호하게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미국에게 여러 가지 신세진 것이 있으니까 세계적인 견지에서는 우리가 미국의 맹방으로서 미국의 이해에 협력하며 한미동맹을 견고하게 해야 되지만, 적어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고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한국의 이익을 우선해야 합니다. 한반도에서마저도 미국의 이익이 우선되는 동맹을 해서는 안 됩니다. 미국이 분단을 고착화시키겠다고 하면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최소한 한반도에 있어서는 우리의 이익이 우선하는 한미동맹을 만들어나가야 해요. 이렇게 지금까지의 종속적 한미동맹에서 앞으로는 자주적 한미동맹으로 관계를 바꾸어가야 합니다. 패전국인 일본도 자주적으로 미일동맹을 바꾸고 있는데, 미국의 패전국도 아니고 일본의 피해자인 우리가 아직도 종속적 한미동맹 관계에 있다 보니 이런 비극이 다시 또 시작되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행사를 할 수 있는 것도 다 선조들이 희생하신 결과입니다. 그동안 찾아뵙지 못한 것도 죄스럽지만, 찾아뵙는 것뿐만 아니라 이런 정신을 우리가 이어받아 되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다음으로는 하루빨리 통일을 해야 합니다. 통일한국이 되면 일본과도 군사적 협력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제 동족을 상대로 일본과 군사협력을 한다는 것은 이 칠백의총 선조들의 뜻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뜻을 좀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원래 스님들은 출가하면 개미 한 마리도 안 죽입니다. 스님들이 창과 활을 든다는 것은 사실 승려로서의 본분을 저버린 겁니다. 그런데 왜 승병이 일어났을까요? 백성들을 살리려고 승려들이 지옥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본군이라면 죽여도 된다는 계율은 없습니다. 일본군도 생명입니다. 생명을 죽이면 과보로 지옥을 가지만 ‘내가 지옥 가는 한이 있더라도 백성과 나라를 살려야 한다’고 해서 일어난 것이 승병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나라를 지켜도 양반이 아니기 때문에 관직을 줘서는 안 된다고들 했어요. 사명대사 같은 경우는 워낙 공로가 크다 보니까 선조가 사명대사에게 왕의 특사 자격을 주고 일본에 보내 희생자들의 유골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왕의 특사니까 왕을 대신한 것이지요. 그런데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왔을 때 동래부사가 사명대사가 중이라는 이유로 마중을 안 나갔어요. 당시에 중은 천민이었거든요. 왕의 특사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처형감입니다. 개인이 미워서가 아니라, 나라의 법도를 지키려고 처형을 했어요. 그래서 그 자손들이 원한을 품었습니다. 사명대사가 정승의 직위를 받았는데 서산대사가 ‘나라를 지킬 때 그런 직책이 필요하지, 전쟁이 끝났는데 네가 왜 거기 있느냐’ 해서 일주일 만에 그만두고 절로 돌아왔어요. 그 후에 원한에 맺힌 그 자손들이 사명대사를 독살해버렸어요. 이렇듯 양반이라는 관념에만 젖어서 나라가 위급하면 도망가고, 나라를 살려놓으면 자기들끼리 다해먹으려 들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나라를 일본에게 또 빼앗기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이곳에서 장렬히 순국한 의병들의 넋을 오늘 기리면서 우리도 그 정신을 잊지 말고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전쟁이 난 뒤에 나라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쟁이 없도록 하는 게 최고의 승전입니다. 그리고 단순한 평화를 넘어서서 남북을 통일해야 합니다. 선조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이웃나라에게도 얕보이지 않는 통일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하겠다고 오늘 이 순국 선열들 앞에서 굳게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스님의 설명을 통해 칠백의총을 참배하는 의미를 다시 되새기니 더욱 경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라의 위기 앞에 분연히 일어났던 의병들과 불살생을 최고의 계율로 여기는 승려들도 의병에 참여한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통일의병 운동은 이런 선조들의 넋을 계승한 것임을 더욱 분명하게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한일 군사협력의 움직임에 대해 어떤 역사적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단호한 입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참배를 마치고 나서는 칠백의병이 묻혀 있는 묘지로 이동했습니다. 묘지 앞에서 조성식 대표님이 먼저 헌화를 하고, 이어서 모두가 함께 묵념을 했습니다. 단순히 그 뜻만 기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통일의병이 되어 그 뜻을 오늘날에 되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였기에 오늘의 참배가 더욱 뜻깊게 다가왔습니다.
▲ 칠백의병이 묻힌 봉분 앞에서 헌화
칠백의총을 나가는 길에는 기념관에 들러 칠백의병의 전투 모습 등 행적을 그린 7폭의 기록화와 유물이 전시된 것을 둘러보았습니다.
▲ 기념관
그리고 맞은편에 있는 중봉 조헌 선생의 일군순의비를 참배했습니다. 순의비에는 의병장 조헌 선생이 이끄는 칠백의사가 순국하기까지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폭파된 것을 주민들이 일제의 눈을 피하여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광복 후에 다시 파내어 보관하다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 조헌 선생의 일국순의비
칠백의총을 나온 통일의병들은 ‘평화통일 기원제’를 지내기 위해 칠백의사순의탑으로 향했습니다. 순의탑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952년 조헌 의병과 영규 승병이 합군하여 청주성을 수복하고 금산으로 진격하다 왜군과 혈전을 벌여 전원이 순절한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탑입니다.
평화통일 기원제는 고구려 때부터 해왔던 천제의 형식을 현대적으로 살려 진행되었습니다. 통일의병을 대표하여 제주로서 각 지부를 대표한 의병들이 나와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의 순서에 따라 술잔을 올리고 큰 절을 했습니다. 나머지 의병들은 뒤에 선 채로 큰절 대신 목례로 그 뜻을 기렸습니다.
▲ 통일의병을 대표해 탑 앞에서 큰 절을 올리는 조성식 대표
위패에는 9000년 전 세계최고 문명을 창조했던 한나라 환인님, 6000년 전 요하문명을 창조한 배달나라의 환웅님, 4000년 전 조선의 단군왕검님, 부여의 왕 해모수님, 고구려의 동명성왕님, 이렇게 다섯분의 조상을 차례로 모신 후 마지막으로 칠백의병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 순의탑 앞에 모신 위패. 왼쪽에서부터 한인, 환웅, 단군, 해모수, 동명성왕, 칠백의병.
조성식 대표님의 축문 낭독에 이어 충청본부 오수진 의병의 발원문 낭독이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스님의 평화통일 발원문 낭독이 있었습니다.
▲ 충청, 전라, 영남, 수도권을 대표하여 순의탑을 참배하고 있는 통일의병 본부장들
스님은 통일 한국을 이룩하여 우리 민족의 번영 뿐만 아니라 인간성 상실, 공동체 붕괴, 자연환경 파괴라는 현대 문명의 위기도 함께 극복하여 인류의 공영에 이바지할 것을 발원해 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크신 환인 하느님, 이 땅에 처음 하늘의 뜻을 기리어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배달나라를 창건하신 환웅 천왕님, 우리 민족의 조상신이며 신시를 새롭게 하신 단군왕검님, 부여의 해모수님, 고구려의 고주몽님, 백제의 온조님, 신라의 박혁거세님, 발해의 대조영님, 가야의 김수로님, 고려의 왕건님, 조선의 이성계님, 이렇게 우리 민족 우리나라를 면면히 이어오신 하늘의 천신과 조상님들께 두 손 모아 합장하며 발원하옵나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 땅의 주인인 백성들이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구하였습니다.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고자 일어난 다물 의병, 고구려의 기상을 회복하고자 한 고구려 부흥군, 백제 부흥군, 발해 부흥군, 고려 시대 민족의 기상을 지키고자 항몽 투쟁을 했던 항몽 의병군, 임진의병, 병자의병, 1차 의병, 2차 의병,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광복군, 고통 받는 민족을 구제하고자 했던 동학혁명군 등,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늘 백성이 일어나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했습니다. 또한 한국전쟁을 겪고 초토화되었던 우리 대한민국의 경제를 부흥시킨 산업역군, 사람답게 살고자 민주화를 이끌어낸 민주투사들이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우리 시대의 시대적 사명이자 우리 민족의 비전인 통일을 위하여, 과거 역사의 혼을 계승한 통일의병이 되어 반드시 이 땅에 통일을 이루고자 이렇게 칠백의총 순국선열 앞에서 발원하고 맹세하옵니다.
대륙의 변방으로 전락하여 약소국으로 살아온 지 1천여 년, 나라를 빼앗기고 두 동강이 난지 1백여 년입니다. 나라의 자주독립과 통일국가를 이룩하여 천 년의 한을 풀고 백 년의 한을 치유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다가오는 동아시아 시대에 주변국들과 힘을 합쳐 새로운 문명의 꽃이 되고자 합니다. 과거 인류 최고의 문명이었던 배달문명을, 조선의 옛 문명을 다시 한 번 일으키고자 합니다. 단지 우리 민족의 번영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에게 닥쳐온 환경 위기, 공동체 붕괴 위기, 자아 상실 위기라고 하는 현대문명의 위기 속에서 그 대안을 만들어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우고 그 중심이 되고자 합니다. 우리 민족을 넘어, 온 인류를 평화롭고 행복하게 하여 함께 번영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런 우리의 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천신과 조상신들은 우리를 보호하소서. 통일의병들 개개인을 모두 보호하소서. 이들의 뜻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
통일의병들도 스님의 간절한 발원을 들으며 두손 모아 합장하며 그 뜻을 함께 새겼습니다.
이어서 충청본부의 김란 의병이 나와 왜군에 의해 장렬히 산화한 칠백의병의 영혼을 달래는 진혼무를 추었습니다. 애절한 진혼무를 보니 순국 선열들의 넋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듯 했습니다.
▲ 진혼무
마지막으로 다함께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른 후 조성식 대표님이 지방을 소지하는 것으로 기원제를 모두 마쳤습니다. 순의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데 ‘통일 의병! 의병!’을 외치는 목소리에는 아주 늠름한 기상이 살아있었습니다.
▲ 칠백의사 순의탑
순의탑에서 내려와 넓은 잔디밭에 앉아 각자 집에서 준비해 온 도시락을 펼쳐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시원한 가을 하늘 아래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며 먹는 밥과 반찬은 꿀맛이었습니다.
▲ 점심 식사 시간
스님은 점심 식사 후 화장실 뒤편에 코스모스 길이 있다고 해서 잠시 산책을 했습니다. 막상 가보니 코스모스가 거의 다 지고 몇 송이만 남아 있었습니다. 스님은 “씨를 가져가서 시골집에 뿌려두면 내년에 코스모스가 잘 자랄 것 같다” 며 씨를 주섬주섬 한 손 가득이 담았습니다. 넓직한 공터는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는데 스님은 “정토회도 이런 평지에 수련장이 하나 있으면 참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 코스모스 길
▲ 시골집에 가져다 심으려고 모은 코스모스 씨앗
이어서 오후에는 대전 가오중학교로 이동해 ‘새로운 100년을 여는 통일의병’에서 개최하는 제1회 통일의병대회가 열렸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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