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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불교대학 특강 수련에 참가해 오전에는 '즉문즉설' 법문을, 오후에는 ‘예불문’에 대해 법문했습니다.
새벽 4시, 문경 정토수련원 대웅전에서 대중들과 함께 예불과 기도를 마친 스님은 원고 교정 업무를 보다가 6시20분부터 문경 공동체 발우공양에 참석했습니다.
▲ 문경 공동체 발우공양
발우공양에는 3천배 정진을 하러 온 분들, 불교대학 특강수련을 위해 바라지 온 분들, 깨달음의장과 명상수련을 위해 바라지 온 분들, 백일출가 수련생들 등 다양한 분들이 참석했습니다. 스님은 수행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됨이 없이 여일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참석한 대중들 각각을 위해서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해진 시간에는 수행이고 휴식 시간에는 수행이 아니다’, ‘여기 문경에 오면 수행하고 집에 가면 수행 안 한다’ 이렇게 자꾸 나누게 되면 수행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집니다. 휴식 시간은 수행을 안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수행하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수행하는 시간에는 앉아서 좌선을 한다면 휴식 시간에는 걸으면서 행선을 하거나 밥을 먹으면서 동작이나 느낌에 깨어 있는 거예요. 이렇게 수행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지 수행하고 안 하고의 차이가 아닙니다.
공간도 마찬가지예요. 여기에 오면 여기에 맞는 수행을 하고, 회사에 가면 회사에 맞는 수행을 하고, 집에 가면 또 그 처지에 맞는 수행을 하는 거예요. 가족을 만나면 내가 방심하기 쉽기 때문에 무의식이 더 자연스럽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긴장이 풀어져서 그래요. 편안하다는 측면을 보면 수행의 관점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자기 업식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측면에서는 나쁜 환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경수련원과 같은 수행도량에 와서 수행할 때는 알아차림이 유지된다는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긴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업식의 미세한 반응을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측면에서는 수행이 더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데 와서는 좀 긴장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계율을 잘 지키고 알아차림을 유지하기에 유리하다면, 집에 가면 편안해서 알아차림을 약간 놓치긴 하지만 오히려 업식이 잘 드러난다는 측면에서는 좋은 점이 있습니다.
수행을 할 때는 편안한 상태에서 뚜렷이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편안한 상태에서는 방심하기 쉽고, 알아차림을 잘 유지하려다 보면 긴장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지요. 편안하다고 하면 방심하니까 알아차림을 놓치고, 또 알아차림을 유지하려면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어 미세한 느낌이나 마음을 알아차리기 어려워집니다. 이런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수행도량에서만 수행을 하고 집에 가면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언제든 장소가 어디든 늘 그에 맞게 해야 합니다. 그 시간과 장소만이 갖는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집에 가서 편안히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방심할 수밖에 없을 때 조금 수행의 원칙을 지키고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오히려 수행도량에 있을 때보다 더 세세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내가 게으르구나,’ ‘내가 욕망에 끄달리는구나,’ ‘내가 성질을 잘 내는구나’ 이런 것은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리기가 더 쉽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처소와 시간에 구애를 받게 되면 수행하는 시간과 수행 안 하는 시간을 나누다 보니 수행하는 시간에는 긴장해서 본질을 놓치고 수행 안 하는 시간에는 방심해서 또 수행을 놓칩니다. 수행도량에 오면 긴장하고, 밖에 나가면 방심해서 업에 끌려가고, 이렇게 늘 일상적 수행을 못하기가 쉬워요. 그러니 그 점을 명심하셔서 수행관점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기 와서 하는 것은 운전면허를 딸 때 교습소에서 연습하는 것과 같고, 일상생활은 도로에서 실제 주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100일 동안 연습이 되었으면 운전면허증을 땄으니 도로 주행 연습을 꾸준히 하듯이 일상에서 꾸준히 정진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여기 14명이 기도를 하러 다시 들어왔듯이 수행의 관점을 놓치기 쉽기 때문에 매주 들어오든 한 달에 한 번 들어오든 정기적으로 돌아와서 ‘아, 내가 수행자이지. 내가 여기에 항상 살아야 하는데 지금 밖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항상 여기 사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밖에서도 살아야겠다’ 이런 관점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아, 내가 원래 수행자이다’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몸을 어디에 두더라도 늘 수행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백일출가 행자님들은 만 배 하고 들어올 때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합니다. 아까운 시간을 100일이나 내어서 입재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해요. 그런데 이제 내일모레 회향한다 하면 이 하루하루를 그냥 허비해 버립니다. 낭비한다는 말이에요. 똑같은 하루인데 첫 하루는 소중히 여기고, 마지막 하루는 하잘 것 없게 여겨요. 또, 처음 들어올 때는 바짝 긴장하죠. 그런데 지금은 몇 일만 있으면 회향한다 해서 마음이 들뜬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긴장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려고 해야 하고, 지금은 들뜬 마음을 살펴 편안히 해야 합니다.
수행에 집중하지 않고 ‘모레 회향하면 뭐 먹고 어디 가고 뭐 해야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100일 동안 자기의 까르마를 잘 살펴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게 아니고 그걸 억제하고 억압했다는 뜻입니다. 억제하고 억압했기 때문에 ‘끝난다’ 하니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는 거예요. 먹는 걸 억압했으면 나가서 먹는 걸 먼저 찾고, 노는 걸 억압했으면 놀 계획을 세워요. 그런 마음이 일어날 때 ‘아, 내가 이것을 해소한 게 아니고 억제했구나’ 이렇게 자기가 업식의 작용을 알아차려야 해요.
그래서 들뜬 마음을 살펴서 들뜨지 않도록, 입재할 때의 마음과 나갈 때의 마음이 여일하도록 하십시오. 오늘부터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해서 3일이나 남았잖아요. 3일이면 성불할 수도 있는 긴 시간입니다. 그 3일은 단순히 3일이 아니라 97일이 축적된 위에 이루어진 하루, 98일이 축적된 위에 이루어진 하루입니다. 오늘 하루가 97일, 98일이 쌓인 시간과 무게를 갖는 겁니다. 그러니 막판에 들떠서 시간낭비를 하지 않도록 지금까지 정진한 것을 잘 챙겨서 오늘 하루를 살펴야 합니다. 졸업 리허설을 한다 뭐 한다 하다 보면 마음이 들뜨고 수행자의 본분을 놓치기가 쉬우니 이를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회향 후에 돌아와 정진하시는 분들에게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가장 중요한 관점은 여기에서 늘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밖에 사는 것이기 때문에 첫째는 밖에 사는 것을 허용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는 밖에 살 때도 몸이 여기 저기에 놓였을 뿐이지 이 정진의 원칙과 삶의 원칙은 똑같이 여일하게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놓친 것을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자각하고, 나가서도 똑같은 마음이어야 해요. 명상할 때는 명상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고, 밭에 가서 일하라 그러면 행위만 다르고 처소만 다를 뿐 마음이 기본적으로 여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리 안 됩니다.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을 여일하도록 하는 게 수행이란 이야기예요. 그렇게 되면 옛 스승들이 말했듯이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이 모두 참선이 됩니다. 앉아 있는 것만이 참선이 아니라, 움직이고 앉고 서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하는 게 다 수행이에요. 그래서 평상심이 도(道)입니다. 이런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라지 오신 분들에게는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이렇게 다른 사람이 깨달음을 얻도록 뒷받침을 해주는 것은 큰 복을 짓는 일입니다. 이 세상의 복 중에서 수행자를 공양하고 후원하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고 합니다. 바쁘신 중에도 오셔서 수행자들을 위해 공양을 짓고 뒷바라지를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큰 공덕을 지었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발우공양에 참석한 대중들 전체를 헤아려서 이야기를 해주시니 대중들도 모두 기쁜 마음이 되었습니다. 장소와 시간에 관계 없이 모든 생활이 그대로 수행임을 명심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10시부터는 정토불교대학 특강 수련이 열렸습니다. 지난 6월에 예정되어 있던 수련이 메르스 때문에 연기가 되면서 1박2일이였던 수련이 하루 프로그램으로 조정되어 오늘의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전국에서 900여명의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이 참석해 정토수련원 대수련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빼곡이 사람들로 드러찼습니다.
▲ 정토불교대학 특강 수련
스님은 새벽부터 출발해 이곳 문경까지 온 대중들을 반갑게 환영한 후 곧바로 미리 올라온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시작했습니다. 오전에는 불교대학 학생들이 지난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들으며 궁금했던 점에 대해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 법문이 약 3시간 동안 있었습니다.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졌고 스님은 하나씩 읽은 준 후 각각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 먼저 실천적 불교사상 과목에 대해서는 8개의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20세 이상 여성은 바로 비구니가 되지 못하고 2년이 경과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남녀 차별이 아닌지, 이미 아이를 낳은 여성이 출가를 하면 어찌 되는지, 괴로움의 원인이 욕망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욕망은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아닌지, 욕망을 다스니는 법이 무엇인지, 남들을 신경쓰지 말고 그냥 살아라고 말씀하셨는데 사회적인 기준과 최소한의 잣대도 무시하며 살면 과연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이 사회를 벗어날 수 없다면 만족하며 살기 위해선 사회의 기준들에 어느정도 맞춰서 살아야 하지 않는지, 불교에는 경전이 많은데 경전을 보고 읽기만 해도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인지, 윤회에 대한 말씀이 기존의 불교와 상충되어서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불교에서는 살생에 대해서 일반 중생들에게 어느 정도까지 허용이 되는지, 가령 활어회를 먹는 건 괜찮은지, 회충을 죽여도 살생인지, 불교는 윤리 도덕을 지키되 윤리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무슨 뜻인지 등 각각의 질문에 대해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의 일생’ 과목에 대해서는 5개의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변이 있었습니다. 실제 역사적 사실과 종교적 신화적 이야기의 구분이 애매한데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천상천하 유아독존에서 ‘존’의 의미가 무엇인지, 무상과 무아를 깨달은 부처님이 왜 유아독존을 이야기한 것인지, 부처님이란 용어는 일생 중에서 어느 때부터 사용해야 하는지, 부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탁 하고 깨달은 제자들을 보면서 그들도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지 않았는지, 부처님의 제자들은 왜 자급자족을 하지 않고 구걸을 했는지 등 각각의 질문에 대해서도 스님은 지혜로운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중도에 대해 질문한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일 중요한 게 중도인 것 같은데요. 일상 생활에서 적용 사례를 들어서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생각이 끊기거나 깊은 숙면을 할 때처럼 그냥 일상에서 아무 생각없이 생활하는 상태가 중도인지요?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는 지고한 행복이라는데 어떤 느낌인지 궁금합니다.”
“옛날에 정토회 회원 중에 한 명이 서암 큰스님께 여쭈었어요. ‘차타고 가면서 차창 밖을 보다보면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멍할 때가 있잖아요. 그것이 무념무상의 경지인 선정에 든 때입니까?’ 하고요. 무념무상이라 하니까 그럴 때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물은 거예요. 그러자 큰스님께서는 ‘그건 멍청한 거야’ 이러셨어요. (청중 웃음)
선정은 세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해요. 첫째, 마음이 고요해야 합니다. 마음이 들뜨거나 긴장하면 안 돼요. 두 번째, 어느 한 군데에 딱 집중이 되어 있어야 해요. 코끝의 호흡이면 호흡, 화두면 화두, 이렇게 한 군데에 집중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볼록렌즈로 햇살을 모아 집중시키면 불이 붙죠? 그럴 정도로 딱 집중해야 해요. 그런데 어떤 것에 집중하려면 긴장이 됩니다. 그러니 이게 상호모순이잖아요. 편안하면 멍청해져요. 아니면 잡생각이 가득 납니다. 편안한 가운데 집중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집중을 하려면 긴장이 되고, 긴장을 풀면 집중이 흐트러집니다.그래서 연습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 집중된 상태에서 알아차림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아주 미세한 것까지 또렷이 알아차려져야 해요. 잠들 때는 알아차림이 없어요. 편안하긴 한데 멍청한 거예요. 군인이 초소에서 총 들고 서서 개미 한 마리 지나가는 것까지 알아차릴 정도로 집중해서 살피고 있다 해도 이때는 긴장되어 있어요. 긴장되어 있으니 선정이 아니에요. 고요한 가운데 딱 집중해서 또렷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걸 다 갖추어야 해요.
실제로 해보면 어때요? ‘편안히 긴장을 푸세요’ 하면 멍청해지고, ‘알아차림을 유지하세요’ 하면 이를 악물고 있죠. 그렇게 이리저리 한쪽으로 치우치다가 시간이 경과하면서 치우치던 것이 조금씩 덜해집니다. 긴장이 떨어지면서 졸리기는 하지만 처음에 졸거나 멍청하게 있던 것에 비하면 조금 알아차림이 생기고, 또 긴장도 조금 줄어들고, 이렇게 해서 편안한 가운데 눈 감고 또렷이 알아차림을 유지할 수 있게 돼요. 지금 여러분들은 눈 감고 10분만 있으면 다 졸아요. (청중 웃음)
눈 뜨고 있으면 덜한데 눈 감고 있으면 머릿속에서 온갖 망념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일어나요. 그런데 그런 가운데 또렷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코끝에 집중해서 호흡에 집중하면 들숨과 날숨에 깨어 있고, 화두를 주면 ‘이 뭣고’ 하고 깨어 있고요. 당연히 처음에는 안 돼요. 자전거 타기를 처음 배우면 힘든 것과 똑같아요. 그러나 자꾸 연습하면 넘어지고 넘어지는 걸 반복하다가 나중에는 탈 수 있게 되듯이 이것도 됩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합니다. 편안한 가운데 집중해서 또렷이 알아차려야 해요. 편안하기는 한데 멍청하다면 그건 선정이 아니에요. 알아차림은 있는데 긴장되어 있다면 그것도 선정이 아니에요. 애쓰면 선정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참선하면 애쓰지요? ‘안 졸아야지, 망상을 없애야지, 놓치지 말아야지’ 이렇게 ‘...해야지’ 하는 것은 긴장하는 것이에요. ‘해야지’ 하는 마음이 없어져야 합니다. 아무 할 일이 없어야 해요. ‘깨달아야지’ 하는 것도 망상이에요.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다 내려놓으면 5분 안에 머리 박고 졸아요. (청중 웃음)
그렇다고 머리 박고 조는 게 잘못됐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다는 말이에요. 자전거로 치면 넘어지듯이 그렇게 졸다가 졸았다고 뭐라 그러면 또 이를 앙 다물고 하고, 긴장 풀라고 하면 또 졸고, 또 졸지 말라고 하면 또 긴장하고... 이러다 보면 처음에는 왔다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치우치는 폭이 줄어들어요. 5일 하고 10일 하고 한 달 하다 보면 조금씩 진폭이 줄어들어서 ‘이런 게 명상인가’ 하고 감이 오면서 잡혀 갑니다.
그런데 ‘알았다, 이게 명상이구나’ 하면 마음이 들떠요. 들뜨면 다시 또 잘 안 되요. ‘안 되네’ 하고 좌절해도 또 잘 안 되요. 그러니 되고 안 되고에 좌우되면 벌써 명상은 안 됩니다. 꾸준히 해야 해요. 농구선수가 연습할 때 공이 들어가면 연습 그만해요? 들어간 공도 다시 주워들고 또 던져요? 안 들어가고 튀어나오면 ‘에잇!’ 하고 그만둬요? 그래도 계속해요? 공이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연습할 땐 아무 상관이 없어요. 들어갔다 나와도 받아서 다시 던지고, 옆에 부딪혀서 튀어나와도 주워서 다시 던지면서 계속 연습하듯이, 되고 안 되고를 논하면 명상은 벌써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도 안 된다고 악을 쓰다가 또 조금 되면 되었다고 좋아하다가 다음 시간에 또 안 된다고 하죠. 들뜨면 안 돼요. 되고 안 되고를 따지면, 되면 들뜨고 안 되면 가라앉잖아요. 되고 안 되고를 다 놓아버리고 다만 할 뿐이여야 합니다. 꾸준히 해나가면 흔들리는 간격도 저절로 좁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걸 중도라고 해요. 중도가 다른 게 아닙니다. 중도는 이쪽도 저쪽도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중도를 설명하자면 간단해요. 이 건물과 저 건물 사이에 밧줄을 매달아 놓고, 작대기 하나 쥐고 걸어가라고 해요. ‘무서워서 못 하겠어요.’ ‘그래도 해봐요.’ ‘어떻게 해요?’ 이렇게 물으면 ‘왼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오른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가면 됩니다.’라고 답해요. 이게 중도예요. (청중 웃음)
왼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쾌락의 극단, 오른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고행의 극단입니다. 이쪽은 멍청해지는 것이고 이쪽은 긴장하는 거예요. 긴장하지도 않고 멍청해지도 않고, 그저 편안한 가운데 알아차림이 유지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줄 위에 올라가서 해보면 한쪽으로 자꾸 처박게 돼요. 처박고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가서 이번에는 이쪽으로 안 처박으려고 하다보면 다른 쪽으로 또 처박아요. 그쪽으로 안 처박으려면 또 반대쪽으로 처박아요. 그렇게 열 번, 스무 번 해도 계속 한 발도 못 가고 떨어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나는 안 돼’라고 하거나 ‘줄타기 이건 원래 안 되는 거야’라고 하거나 ‘줄이 문제야’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렵지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어려움은 현실이고 가능성은 비전입니다. 비전을 성취하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백 번, 천 번, 만 번, 십만 번, 백만 번, 연습할 때 몇 번 떨어졌다는 건 계산할 필요 없어요. 떨어지면 또 올라가고 떨어지면 또 올라가고 다만 할 뿐입니다. 그러면 한 발 가다가 떨어지고, 두 발 가다가 떨어지고, 세 발 가다가 떨어지겠죠. 처음에는 제자리에서 한 발도 못 가다가 한 발 갔다고 ‘되네!’ 하면 탁 떨어집니다. 무작정 연습하는 게 아니라 바른 관점에서 연습을 계속 하면 조금씩 발전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가다 떨어졌으니까 반대쪽으로 힘을 줬는데 또 너무 많이 줘서 떨어졌어요. 그러면 다음에는 기울어질 때 힘을 좀 작게 주겠죠? 그런데 또 너무 작게 주면 다시 떨어집니다. 그렇게 자꾸 연습을 하면 계속 떨어지는 가운데에서도 꾸준히 좋아져서 나중에는 저절로 그 때 그 때 힘을 조절하면서 까딱까딱 앞으로 나아갑니다. 줄타기 하는 사람들 한번 보세요. 마냥 편안하게 가요? 까딱거리면서 가는 거예요.
일상생활에서 중도를 설명하자면, 지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걸 중도라고 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 알맞게 먹으라고 하죠. 너무 많이 먹으면 과식이고 너무 적게 먹으면 영양실조가 됩니다. 알맞게 먹는 것, 그게 중도에요. 일을 할 때도 일에 집착해서 너무 많이 하면 '과로'이고, 몸에 집착해서 너무 적게 하면 '게으름'입니다. (청중 웃음)
일에 집착하면 몸을 상하게 되고 몸에 집착하면 일을 못하게 돼요. 그걸 적절히 조절해서 몸도 건강을 유지하고 일도 효율적으로 하는 것이 중도입니다. 중도는 이렇게 생활의 모든 면에 적용됩니다.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수다스럽다 하고 말을 너무 적게 하면 화났냐고 하죠. 그러니 적절하게 해야 해요. 이 ‘적절하다’가 모든 경우에 똑같은 게 아니에요. 상대편에 따라서 달라져요.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 적절함은 늘 바뀌는 거예요. 그 시간에 따른 중도, 그 때 그 때에 맞는 중도를 ‘시중’이라고 해요. 우리 삶은 시중을 해야 해요. 그 때 그 때 중도를 지켜야 해요. 중도라는 것이 ‘이것과 저것의 중간’ 이런 식으로 정해진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 중도를 먼저 이치로 알고, 연습을 많이 해서 증득하고 나서는 한 군데가 아닌 모든 곳에 적용하면 됩니다. 부부지간에도 중도를 지켜야 해요. 너무 집착하면 상대가 속박당한다고 싫어하고, 너무 놓아두면 무관심하다고 또 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적절하게 조정해야 합니다. 속박이다 싶으면 약간 놓아주고, 무관심이다 싶으면 약간 간섭해주세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쩌란 말이냐?’ 이러잖아요. (청중 웃음)
조금 말 붙이면 '귀찮다' 그러고, 조금 놓아두면 '외면한다' 그러고, '나보고 어쩌라고?’ 이렇게 악을 쓰잖아요. 애들도 마찬가지예요. ‘이러면 이게 문제고, 저러면 저게 문제고. 도대체 어쩌란 말이야?’ 대부분 그렇죠. 중도가 안 돼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어쩌란 말이야’ 하지 말고 ‘조금 과했구나,’ ‘조금 모자랐구나’ 이렇게 조절할 줄 알아야죠. 상대의 반응을 봐야 중도가 됩니다. 사람에 따라 이게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사람은 좀 놓아주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조금 간섭받아야 자기에게 관심가져 준다고 좋아합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 사람에 따라 다 달라요. 같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 또 다르고요. 아플 때는 약간 더 관심을 가져주는 게 좋고, 자기 일에 몰두해 있을 때는 약간 관심을 내려놓아주는 게 좋겠죠. 그럴 때도 늘 똑같이 하면 안 돼요.
방에 불을 때는데 겨울에는 장작 10개를 땠어요. 그러면 봄에는 5개를 때고 여름에는 안 때야 합니다. 그런데 겨울에 한달 내내 10개를 때다 보면 봄이 되어도 계속 10개를 때는 거예요. 옆에서 덥다고 해도 계속 땝니다. 여름에 10개 때면 사람 죽어요. (청중 웃음)
그것처럼 갓난아기 때는 100퍼센트 극진히 돌봐줘야 하지만 점점 크면서 돌봄을 떼서 20살이 되면 완전히 끊어야 해요. 그런데 오래되면 습관이 되잖아요. 돌보는 습관이 붙어서 계속 가는 거예요. 어릴 때는 자기를 잘 돌봐준 최고의 은인이 부모였는데, 크면 인생의 최고 장애물이 부모가 돼요. 그래서 우리 속에는 부모를 향한 애증이 있는 거예요. 어릴 때 도와준 걸 생각하면 너무너무 감사하지만 간섭하는 걸 생각하면 너무너무 귀찮죠. 미워하다가도 도움받은 생각이 무의식에서 올라오니까 또 그리워하고, 그리워서 가보면 간섭하니까 또 싫죠. 그래서 멀리 떨어지면 그립고 가까이 가면 귀찮고 그렇잖아요.
제비가 새끼를 키우는 걸 보면 중도를 알 수 있어요. 제비를 딱 보면 언제 새끼가 나고, 언제 세게 울고, 언제 새끼가 떨어지는지, 어떻게 먹이는지, 한 번 보고 마는 게 아니라 올해도 보고 내년도 보고 그 다음해도 보고 한 10년 보다보면 ‘아, 새끼를 저렇게 키우는구나’ 하는 게 있잖아요. 여러분은 탐구하는 자세가 없어요. (청중 웃음)
이렇게 예의주시하면, 다시 말해 탐구를 하면 온갖 것에서 다 배울 수 있어요. 일이 안 된다 해도, 안 되는 속에서도 가만히 보고 왜 안 됐는지를 안다면 그건 된 것보다 더 큰 성과라고 볼 수 있어요.”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중도란 무엇인지 명쾌하게 다가왔습니다. 중도란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경험을 통해 증득해 가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미리 제출된 질문에 대해 거의 다 답변을 마치니 어느덧 3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은 쉼 없이 열강을 해준 스님에게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어서 점심 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900여명의 불교대학 학생들은 대수련장 뒤 감나무터와 대웅전 앞마당 등 곳곳에 흩어져 각자 싸온 도시락으로 맛있게 점심을 먹었습니다. 하늘도 청명하고 햇살도 따뜻해서 마치 소풍을 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 각자 집에서 도시락을 싸와서 함께 먹고 있는 사람들
식사 후에는 많은 대중들이 대웅전에 올라가 참배를 하고 사진을 찍는 등 오랜만에 정토수련원은 곳곳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며 활기를 띠는 모습이었습니다. 파란 하늘 아래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휘양산을 뒤로 하고 많은 분들이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자연을 만끽하는 휴식 시간이 끝나고 오후 2시 30분부터는 다시 스님의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강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스님은 정토불교대학의 교과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면서 담마를 주되게 공부를 하게 되지만 그 배경이 되는 불교 문화와 인도 전통문화도 함께 알면 좋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은 가능하면 역사 상의 실존 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공부하고자 합니다. 2,500년의 역사가 흘렀기 때문에 많이 덧붙여져서 좋게 말하면 풍부해졌고 나쁘게 말하면 먼지가 많이 묻었다고 할 수 있어요. 먼지를 다 털 수는 없지만 그 중에 그래도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공부하자고 해서 정토불교대학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일생’ 과목은 그 동안 제가 '인간 붓다' 책을 통해 굉장히 설명을 많이 했는데도, 들으면서 좀 허황되다고 느낀 사람들도 있다고 해요. 인도의 문화나 전통이 함께 있다 보니 그런가 봐요. 특히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같은 걸 들으니까요. 전생 이야기를 싹 빼버려도 부처님에 대해 설명하는 데는 아무 문제는 없어요. 그런데 인도에 가면 동굴이나 유적에 있는 벽화며 그림에 전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전생 이야기를 모르면 가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는 까막눈이 됩니다. 서양 역사를 공부하고 서양 문화를 이해하려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알아야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인도 문화를 이해하려면 이런 인도의 전통, 인도의 우주관, 인도의 신관을 알아야 합니다. 절에 가면 화엄성중이니 금강역사니 사천왕상이니 하는 말 들어봤죠? 모두 인도의 전통문화입니다. 그런 걸 이해하지 못하면 문화적으로 까막눈이 되기에 그런 공부도 조금씩 곁들여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불교문화를 공부하는 게 아니라 담마와 법을 공부하는 게 주입니다.”
이어서 스님의 ‘예불문’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절에 가서 하룻밤을 자게 되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예불입니다. 정토불교대학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무척 많은데, 스님은 “비록 타종교를 갖고 있더라도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하듯이 절에서 하룻밤 자거나 밥을 얻어 먹으려면 전통 불교의 예식은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1시간 30분 동안 예불문의 의미와 뜻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예불문을 읽어보고 있는 정토불교대학 학생들
불교대학 학생들은 한자로만 적혀 있어서 그 뜻이 무엇인지 몰라 막막했던 내용이 스님의 설명 덕분에 명쾌하게 가슴에 와 닿자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예불문에 대한 설명을 모두 듣고 나서 다함께 곡조에 맞춰 예불문을 따라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900여명이 한 목소리로 내는 예불문은 거룩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스님은 예불문 강의를 마치고 나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수업을 듣게 될 불교대학 학생들을 위해 당부의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불교는 세월이 흐르면서 변형되었어요. 발전했다고 할 수도 있고, 변질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새로운 불교가 일어납니다. 근본불교가 소승불교가 되니까 거기에 대한 비판으로 대승불교가 일어났고, 대승불교가 발전하면서 또 변형되어 너무 학문화되니까 거기에 대한 비판으로 다시 새로운 불교가 일어났는데 그게 선불교입니다. 우리는 지금 선불교의 전통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이것도 또 지금 변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불교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근본으로 돌아가자, 본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도 본래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어요.
본래의 가르침은 수행해서 해탈 열반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복 빌어서 돈 버는 게 본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해탈, 열반은 지고한 행복, 지고한 자유를 뜻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괴로워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고, 속박 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목표란 말입니다.
돈이 있어도, 없어도, 젊어도, 늙어도, 예뻐도, 안 예뻐도 상관없이 그렇게 갈 수 있습니다. 예쁜 건 별로 안 좋아요. 예쁜 사람이 늙으면 충격이 클까요? 안 예쁜 사람이 늙으면 충격이 클까요? 예쁜 사람이 폼 잡으면 ‘늙어서 보자’ 이러면 돼요. (청중 웃음)
돈이 많은 사람이 돈을 잃었을 때 충격이 클까요? 돈이 별로 없는 사람이 돈을 잃으면 충격이 클까요? 지위가 높은 사람이 떨어지면 충격이 클까요? 지위가 낮은 사람이 떨어지면 충격이 클까요? 나무 위에 너무 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죽어요. 그러니까 너무 높이까지 올라가는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아시겠죠? 돈이 너무 많으면 이런 자리에 올까요? 안 올까요? 여기에는 재벌이 아무도 없잖아요. (청중 웃음)
유명한 탤런트나 가수, 지위 높은 장관급 이상 인사도 여기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런 사람들은 이런 자리에서 대중과 함께 못 있어요. 특별하기 때문에 항상 ‘스님, 돈 좀 많이 드릴 테니 호텔에서 우리만 모아서 법문해주세요. 우리만 모아서 깨달음의 장 하면 안 돼요?’ 이럽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 오지 말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처럼 이렇게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면 그 사람들은 이런 데 적응을 못 해요. 그래서 너무 잘 살아도 수행에 장애가 됩니다. 그렇다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도 여기 오기가 어려워요. 그러니 여러분처럼 그저 밥술이나 뜨는 수준이 제일 좋아요. 자꾸 잘나고 싶어 하는데 잘나면 수행에서 멀어집니다. (청중 웃음)
인생은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어요. 딱 원칙을 가져야 해요. 회사에 취직할 때 ‘나는 1년에 두 번 명상수련을 가야 하고 여름에는 역사기행도 가야 합니다. 월급은 좀 작아도 됩니다. 이런 조건 됩니까?’ 해서 된다 하면 다니고, 아니면 안 다니고, 결혼할 때도 남편한테 ‘나는 이거, 이거 해야 하는데 허용해 줄 수 있나?’ 해서 된다고 하면 결혼하고 안 되면 결혼 안 하는 원칙을 지켜보세요. 돈 좀 적어도 되고 못생겨도 상관 않지만 이건 돼야 한다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수행자이니까 수행의 원칙을 지키고 나머지 세속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세속에 흠뻑 빠져서 회사 다닌다고 수행 못 한다, 남편이나 아내가 반대해서 못 한다 이러면 죽을 때까지 끌려다녀야 돼요. 내 인생의 주인은 나입니다. 죽을 때 되면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 남편, 부모, 자식 누구 하나 잡아줄래야 잡아줄 수도 없어요. 그러니 자기가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런 공부를 하는 것이니까 빠지지 말고 하세요.
교과 과목 학습도 물론 해야 하지만 학습만 갖고 수행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봉사도 하고 보시도 하고 다 아울러서 하는 거예요. ‘인터넷으로 보면 되지, 왜 번거롭게 오가게 하느냐?’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배운 걸 체험을 해야 해요.”
정토불교대학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이고, 수업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스스로 수행을 체득해 나가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하루 종일 강의만 듣고 집으로 돌아가게 해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가을에는 경주 남산에서 또 봅시다. 여기는 절이니까 춤추고 노래하는 걸 못 했지만 경주 남산에 가면 좀 놀아도 돼요.” 라고 하면서 다음 만남을 기약했습니다.
이어서 소감문 작성 시간을 가진 뒤 회향식까지 모두 마치고 다함께 대웅전으로 올라왔습니다. 지부별로 대웅전 계단 앞에 올라서서 스님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 지부별 단체사진 촬영
불교대학 학생들은 “매주 스크린으로만 스님을 만나다가 가까이에서 스님을 뵙고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 행복하다”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스님 곁에 다가가 개인 사진을 찍고 싶어 했지만 너무나 인원이 많은 관계로 스님은 간절한 손길들을 뿌리치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대중들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모두 집으로 돌아가자 스님은 깨달음의장과 전법학교 등 곳곳에서 수련을 함께 마친 법사단과 함께 어제 산책했던 선유동 계곡으로 향했습니다. 원래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일요일 저녁에 벌초 다녀오는 인파와 여행 인파가 몰리면 차가 많이 밀릴 것 같아 늦게 출발하기로 하고 산책 길에 나선 것입니다.
어제 답사를 한번 다녀왔던 길이라 한층 더 여유롭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계곡 옆으로 난 산책길에는 밤나무가 무척 많았습니다. 스님은 “여기 밤 떨어진 거 봐라”고 하면서 즐거워했습니다. 법사님들도 곳곳으로 흩어져서 아직 까지지 않은 밤송이를 찾느라 한동안 산책은 잊어버리고 보물 찾기 놀이에 몰입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밤이 대부분 이미 알멩이를 주워 간 것들이 많아서 스님은 어릴 적 실력을 발휘하여 나무 작대기를 던져서 새 밤을 계속 떨어뜨렸습니다. 스님이 작대기를 던질 때마다 밤이 서너개씩 떨어지자 법사님들도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 스님이 따주신 밤
어린 아이 마냥 즐거워하며 밤을 줍고 까먹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다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어제처럼 이강년 선생 기념관까지 가지 않고 산책길 중간에서 도로로 빠져나와 다시 차에 올라탔습니다. 법사님들은 오랜만에 스님과 함께한 산책 시간이 너무 좋았는지 자주 이런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바램을 내비쳤습니다. 스님은 “가을에 경주 남산 순례 마치고 또 이런 시간을 갖자”고 하며 웃었습니다.
스님은 곳곳에서 수련을 진행하느라 많은 수고를 하고 있는 법사님들을 위해 가은으로 가서 저녁을 사준 후 문경 정토수련원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밤 10시에 문경을 출발한 스님은 밤 12시가 넘어서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한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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