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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경전반 특강수련에 참석해 오전에는 즉문즉설 강연을, 오후에는 ‘정토행자의 삶’을 주제로 강연했습니다.
어젯밤 새벽1시에 문경 정토수련원에 도착한 스님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불과 기도를 마치고 “어제 작업을 많이 해서 피곤하다”며 아침 시간은 휴식을 취한 후 10시부터 경전반 특강수련에 함께 했습니다. 이번 특강수련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1박2일이 아니라 당일 행사로 진행되었는데, 왜냐하면 지난 6월에 메르스 때문에 취소되었던 수련을 연기해서 다시 잡은 일정이라 오늘 하루 밖에 스님이 시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경에서 하룻밤 자면서 수련을 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수련 자체를 안 하기에는 더욱더 아쉬워서 오늘 하루 수련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수련에는 전국 정토회의 저녁부와 청년부 소속의 경전반 학생들이 참석했습니다.
새벽부터 전국에서 출발한 경전반 학생들은 매주 영상 강연으로 스님을 만나고 있는데, 오늘은 스님과의 직접 만난다는 기대감에 무척이나 설레였나 봅니다. 총 400여명이 대수련장에 자리한 가운데 죽비 소리와 함께 스님이 환한 웃음을 내비치자 경전반 학생들도 “안녕하세요” 라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스님이 먼저 “요즘은 무슨 공부하고 있어요?” 라고 묻자 경전반 학생들은 “금강경 공부 마치고 반야심경을 배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이해가 어렵다”고 하자 “아직 우리의 기술 수준이 제가 여러분들에게 (영상으로) 몸을 나투는 것까지는 되는데 여러분들이 동시에 저한테 오도록 하는 건 안 돼요. 몇 년 기다리면 곧 쌍방 소통도 될 수 있을 겁니다” 라며 수업을 들으며 궁금한 점에 대해 충분히 해소를 못 시켜준 점에 대해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1년에 한 두번 만이라도 스님과 직접 만나 궁금한 점을 해소하고 갈 수 있는 이번 특강수련이 더욱더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오전에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업을 들으면서 궁금했던 점들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시간입니다. 궁금함을 그 때 그 때 해소하지 못해서 다들 수업 내용에 대한 기억은 없어졌는지 수업 내용에 대한 질문은 4개 밖에 없고 대부분이 남편, 아내와 싸워서 힘들다 등등에 대한 질문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우선 수업내용에 대한 4개의 질문에 대해 먼저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불구부정’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아름다운 것도 없고 추한 것도 없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일상생활에서 정리정돈을 해서 깨끗하게 하고 꽃과 나무를 심어 자연을 아름답게 가꾸는 행동에 대해서는 이 교리와 어떻게 접목시켜서 이해해야 하는지, 공사상에 대한 설명이 이해는 갔지만 우리나라와 일본의 다툼 중 동해와 일본해라고 서로 부르는 이름에 대한 다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경전반을 다니면서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지만 최근에 일을 하면서 외국인 학생에게 한글로 된 안내 자료를 보내준 동료 직원에게 순간 화가 났었는데 이럴 때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윤회 전생에 대해 스님은 부처님의 사상이 아니라 힌두교의 사상이라고 하셨는데 수업 중에 부처님의 전생담을 이야기하신 부분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비유를 들어가며 쉽고 재미있게 대답을 해주어서 경전반 학생들의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5개의 질문은 개인적인 고민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명상 시 10분 20분 정도 지나면 몸이 열이 나는데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명상 시에 결가부좌를 하면 손을 배 아래에 두는 것이 불편해서 무릎 위에 놓아도 되는지, 명상할 때 무드라(손의 모양)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토회 일을 하면서 총무와의 갈등으로 일을 그만두신 분을 보았는데 총무를 견제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누가 해야 하는지, 법당에서 수행법회 담당을 맡고 있는데 열심히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잘 일어나지 않아서 어떡해야 하는지에 대해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
▲ 미리 제출된 질문지를 읽고 있는 법륜 스님
오늘은 그 중에서 스님의 법문을 들을 때는 마음이 편안한데 일상으로 돌아오면 공포심과 불안을 자주 느낀다는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스님은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떻게 수행을 해나가야 하는지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법당에서 스님 법문을 들을 때는 마음이 편안하고, 제법이 공하다는 생각이 참 와닿습니다.그런데 일상으로 돌아오면 어릴 때 죽을 뻔한 경험이 몇 차례 있어서 그런지 공포심과 불안을 자주 느껴 고민입니다. 깨달음의 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버스가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낮추자 ‘아,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무서움이 선명하게 일어나서 신기했습니다. 공사장 근처를 지나갈 때나 비행기 기체가 흔들릴 때, 높은 다리 위를 지나갈 때,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사람을 만날 때도 무서움이 일어납니다. 무서워질 때마다 스님께 배웠던 것들은 기억나지도 않고, 기억난다 해도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 외에는 수가 없습니다. 저는 경찰이 되고 싶은데, 무서울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불안하다, 무섭다는 것은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문제라는 것은 의식의 문제가 아닌 무의식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의식으로 컨트롤하기 어렵습니다. 마음의 밑바닥이 무의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의식의 제일 아래에 무의식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은 머리에 있고 마음은 심장에 있다고 말해요. 정말로 심장에 있다는 게 아니라 생각보다 아래에 있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표면 의식이라면 마음은 잠재된 의식입니다. 다 정신작용이라는 점은 같지만 마음 현상은 무의식으로부터 작동하기 때문에 의지로 컨트롤하기 어렵습니다. 거의 자동으로 일어나요. 마음 작용의 아래에는 소위 까르마, 습식, 습(習)으로 이루어진 업식이 있어서 그 업식으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자동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성질을 바꾸겠다, 마음을 바꾸겠다’ 해도 잘 안 바꿔집니다. 의식으로 컨트롤되는 영역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결심을 해도 작심삼일이 되어버려요.
물론 밥 먹는 것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의식으로 통제하지만, 실제 우리의 행위는 생각보다는 마음이 더 크게 좌우합니다. 마음에서 좋아해야, 즉 하고 싶어 해야 행해 집니다. 마음에서 싫어하면, 즉 억지로 하면 하기는 해도 오래는 못 해요.
그래서 이 마음은 컨트롤 하겠다 해도 컨트롤이 잘 안 돼요. 컨트롤 한다는 게 생각으로 마음을 컨트롤하겠다, 즉 의식으로 무의식을 컨트롤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원래 잘 안 되는 거예요.
공부 방법은 마음이 불안할 때 ‘불안하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걸 어떻게 하겠다고 자꾸 섣불리 하지 말고 그냥 알아차리세요. 불안하면 ‘불안하구나’ 하고, 화가 나면 ‘화가 나는구나’ 하고, 두려우면 ‘두렵구나’ 하고 알아차리세요.
알아차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증폭되는 것이 줄어들어요. 초기에 알아차리면 거기서 바로 사그라드는 쪽으로 가요. 나중에 알아차리면 어때요? 화가 굉장히 많이 난 상태에서는 알아차려도 화가 난 속도가 있기 때문에 바로 화가 가라앉지는 않습니다. 막 달리던 차는 브레이크 밟는다고 금방 서지 않아요. 브레이크 밟아도 앞으로 한참 가죠. 그러나 브레이크를 밟으면 일단 가는 속도가 줄어들기는 해요. 그러니 화가 났을 때 화가 났다고 알아차리면 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화가 나는 속도가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어요. 못 알아차리면 확 올라갈 게 여기서 알아차리면 조금만 올라가다가 멈춰요. ‘알아차려도 화가 나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때부터는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알아차리기입니다. 없애려고 하지 말고 알아차리기를 해야 해요. 알아차리고, 알아차리고, 알아차리고... 이렇게 한번 알아차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알아차리기를 하면 천천히 조금씩이라도 개선되는 효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제일 쉬운 방법이에요.
두 번째는 자기 암시 주기입니다. 암시를 준다는 것은 의식으로 시작했지만 무의식으로 옮겨간다는 뜻입니다. 암시라는 말은 무의식에 영향을 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편안합니다’ 이런 기도문을 가지고 절을 하면서 ‘제게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저는 편안합니다. 저는 잘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안한데도 계속 ‘나는 편안하다, 편안하다’라고 주문을 자꾸 외우세요. 뭐든지 오래 지속하면 습관화됩니다. 계속 똑같은 것을 반복하면 습관화된다는 거예요. 몸의 행동도 그렇고 마음 작용도 그렇습니다. 계속 암시를 줘서 마음이 편안한 것이 습관화되도록 하세요.
질문자가 지금 편안하지 못한 것은 어릴 때의 경험 때문에 지금도 특정 상황에 부딪히면 의지와 관계없이 불안이 일어나버려서입니다. 그러니 계속 암시를 주는 방법, 즉 기도를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말고 ‘저는 편안합니다, 편안합니다.’ 이렇게 자기암시를 줘야 해요.
세 번째는 깨달음의 장이나 나눔의 장에 와서 상처의 본질을 꿰뚫어 아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두려워하는지를 알아야 해요. ‘그런데 왜 두려우냐?’ 계속 뿌리를 파들어가야 해요. 계속 파들어가다가 어느 순간에 딱 들어가면 깨달아져요. 끊임없이 질문을 해서 ‘이래서 두렵다,’ ‘저래서 두렵다,’ 이렇게 자꾸 내려가다 보면 두려워해야 할 뚜렷한 이유가 없는 지점까지 자기 스스로 내려가게 돼요. 옆에서 누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해주는 말은 지식에 불과합니다. 자기 스스로 질문에 답하면서 ‘이래서 두렵습니다,’ ‘저래서 두렵습니다’ 하고 내려가다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무의식에서 그게 개선이 되는 거예요. 무의식에서 개선이 되면 실제 현실에서도 효과가 납니다. 아직 두려움이 일어나더라도 전보다는 강도가 한층 떨어집니다. 이건 깨달음을 통해서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무아(無我), 어떤 것에도 실체가 없다는 것을 체험하는 거예요.
상담심리 같으면 그걸 드러내서 옛날에 입은 상처를 치유합니다. 때로는 위로도 받지요. ‘아, 네가 어릴 때 그런 경험을 해서 힘들었구나. 엄마한테 이야기했는데 엄마가 이해하지 못하고 야단만 쳐서 상처가 되었구나. 아이고, 힘들었겠다.’ 이렇게 상처 입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다독이면서 치유가 됩니다. 그걸 다 드러내고 위로받고 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이렇게 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선불교는 탁 찔러서 본질이 텅 빈 줄 깨닫는 것이고, 상담은 그것을 다 드러내고 위로받아서 해결하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과 이야기할 때 위로도 하긴 하지만 주로 직설적으로 하지요.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라고 되물으니 여러분들이 어떨 때는 좀 답답하지요? 괴로워 죽겠다고 하는데도 ‘그래서 뭐가 괴로운데?’ 이러잖아요. 하하하. (웃음)
그러면 속에 불이 나죠. ‘스님은 결혼도 안 해보고 애도 안 낳아봤으니 저런 소릴 하지.’ 이러잖아요. 남편이 이러저러하다고 해도 ‘그래서 뭐가 문젠데?’ 하고, 남편이 이러저러해서 힘들다 하소연해도 ‘그래도 너는 좋겠다. 나는 그런 배우자라도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나오잖아요. 이것은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사람 이야기와 똑같아요. ‘제 친구는 좋은 담배 피우는데 나는 저질 담배를 피워서 속상하다’, ‘저 친구는 발렌타인 몇 년 산을 마시는데 나는 막걸리도 못 마신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담배며 술을 아예 못 하는 사람이 들으면 어때요? ‘그래도 너는 피우잖아,’ ‘그래도 너는 마시잖아’ 이럴 거 아니에요. 이 상대적인 요소를 탁 깨달아서 그 자체도 괴로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끔 하는 거예요. (청중들 웃음)
그래서 저와 대화할 때는 가끔 머리가 반짝 안 돌아가면 도로 상처를 입어요. 그래서 ‘스님이 나를 나쁘게 이야기했다’, ‘스님이 나에게 야단을 쳤다’ 하면서 화를 냅니다. ‘그래서 뭐가 문젠데?’라는 말은 무슨 소리예요? 그때 그 상처를 딱 움켜쥔 거를 텅 빈 것이라고 보게 하는 거예요. 그냥 하나의 스쳐지나간 일에 불과한 것에 사로잡힌 마음을 탁 내려놓게 한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섯불리 여러분이 흉내 내면 엄청난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위로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30년 된 상처도 단박에 팍 나아버릴 정도의 특효가 있는 반면에 잘못되면 부작용도 큽니다. 특히 30대 직장맘들은 제가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고 해서 반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해는 돼요. 그 분들은 현재에 사로잡혀 있으니까요. 지금 내가 힘든 것만 생각하지 그것 때문에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아이가 앞으로 30년 뒤에 어떤 고생을 하게 될 지는 지금 현실에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알아차림을 통해 어떻게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가 명쾌하게 다가왔습니다. 먼저 마음이 작용하는 원리에 대해 설명해준 후 그 원리에 맞게끔 마음을 다루는 방법들을 다양하게 제시해 준 점도 참 감명깊었습니다. 경전을 강의하면서도 이렇게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늘 접목시켜 주는 스님에게 경전반 학생들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 외에도 개인적인 고민이 담긴 질문이 더 많이 있었지만 모두 답변해 주지는 못하고 즉문즉설 시간을 모두 마쳤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문경까지 오셨으니까 경치도 구경하시고 위에 대웅전에도 한번 참배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환기를 시켜준 후 오전 법문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어서 점심 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두 각자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펴고 맛있게 식사를 했습니다. 정토회는 모든 것이 자원봉사로 운영되기 때문에 경전반 학생들을 위해 별도로 밥을 해줄 수 있는 직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도시락을 싸워서 식사를 해결하는데, 그 취지에 대중들도 모두 공감하며 즐겁게 식사를 마쳤습니다.
오후 2시부터는 ‘정토행자의 삶’을 주제로 스님의 특강이 이어졌습니다. 경전반을 수료하게 되면 대부분 정토회의 정회원인 ‘발심행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게 되는데, 스님은 정토회의 정회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정토회의 설립 취지와 근본 정신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수행, 보시, 봉사하는 삶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정토회는 근본 불교의 관점에 서 있습니다. 가능하면 역사적 실존 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2600년 전에 인도에서 직접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것을 모체로 하려고 해요. 그런데 현대의 불교는 그 분과 상관 없는 것들을 불교로 삼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정토회는 그런 것보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2600년 전에 사람들과 만나서 직접 얘기하고 직접 살아가셨던 삶의 모습과 말씀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는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 문명이 처한 난관을 극복하는데 부처님의 이 근본 가르침이 어떤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믿고 출발했습니다. 그 핵심은 수행이고, 이 수행적 관점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바라문들이 ‘저 강가강에서 목욕을 하면 죄가 다 녹아서 천국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그것이 맞습니까’ 물었어요. 물에 한번 들어갔다 나와서 축원 한 번 하면 죄가 다 씻어지는데 왜 우리들 보고 힘들게 명상을 하고 수행을 하라고 하느냐는 것이죠. 그것이 잘못되었으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오랫동안 해왔겠느냐 하는 의심도 들었겠죠. 이런 시대에 부처님은 첫째, 이 세상을 창조한 존재는 없다고 하셨어요. 그것을 믿는 건 자유이지만요. 둘째, 계급 제도를 부정하셨어요. 브라만은 고귀하고 수드라는 천하고, 남자는 고귀하고 여자는 천하고, 이런 건 없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하셨어요. 셋째,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자신을 정화시켜야지 죄는 엄청 지어놓아도 제사 한번 지내면 그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즉 뿌자(제사)를 지내서 해탈과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고 하신 겁니다. 부처님의 이런 말씀은 그 당시에 일대 혁명이었습니다. 인도의 전통을 근본적으로 뒤집은 것입니다.
종교가 성립하려면 신이 있고, 신의 힘을 빌리는 사제가 있고, 사제에게 신의 힘을 빌어 달라고 부탁하는 신자가 있어야 하는데,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빌 릴도 없고, 빌 일이 없다면 사제가 필요없어지죠. 오직 깨달음을 통해서 해탈 열반을 증득할 수 있기에 깨닫기 위해서는 수행을 통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도 없고, 그것을 대신하는 사제도 없고, 빌 신자도 없고, 오직 수행자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 불교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누구냐? 우리를 해탈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스승이시고 안내자입니다. 법륜 스님도 여러분들을 깨달음의 길로 안내하는 사람이지 숭배의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저를 숭배하면 안 됩니다. 바른 길로 인도하니까 존경할 만한 분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불교는 부처님이 신이 되어버렸고, 스님들은 사제가 되어버렸고, 여러분들은 신자가 되어버려서 이름만 다르지 브라만교나 힌두교나 기독교나 별 차이가 없어져 버렸어요. 그러나 정토회에는 오직 수행자 밖에 없어요. 그래서 ‘수행공동체 정토회’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표는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붓다의 길로 가는 것이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토회는 현실에 있는 불교의 한 종파가 되려고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그럴려면 그냥 어느 큰 절에 다니면 되지 왜 이렇게 시내 한복판에 손바닥만한 공간 하나 얻어서 하겠어요? 스님들 수백 수천명을 만들어서 하지 왜 이렇게 여러분들을 데리고 하겠어요? 여러분들 데리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청중들 웃음)
아무리 ‘여러분들은 수행자입니다’ 라고 얘기해줘도 자기들은 계속 신자라고 고집하잖아요. 머리카락만 붙여 놓았을 뿐이지 수행자라고 얘기해줘도 자기는 머리카락이 붙어 있다고 하면서 수행자 아니라고 주장해요. 평소에는 수행자라고 하다가 술 먹고 싶을 때는 또 수행자 아니라고 그래요. 반대로 머리만 깎아 놓으면 사제로 돌아가 버립니다. 왜냐하면 사제가 되면 대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길에는 먹물 옷을 입어도 수행자 아닌 사람이 있고, 머리를 기르고 있어도 수행자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공동체를 만들어서 정말로 부처님 당시의 상가공동체와 같은 역할을 해보자는 것이 작다면 소박한 꿈이고 크다면 장대한 꿈입니다. 이런 꿈이 실현되려면 여러분들이 뭐가 되어주어야 해요?“
“수행자!”
“그렇게 되어야 주위에서 ‘스님도 수행을 안 하는 시대에 무슨 재가자를 데리고 수행을 하느냐’ 하고 비웃는 사람들에게 제가 할 말이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제가 가진 역량을 오히려 스님들 교육에 투여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거든요. 스님들이 확 바뀌어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스님들이 확 바뀌어바야 좋은 사제와 좋은 신자 밖에 안 됩니다. 저는 좋은 사제든 나쁜 사제든 사제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좋은 신자든 나쁜 신자든 신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수준이 조금 떨어져도 무엇이 되기를 원한다고요?”
“수행자!” (청중들 박수갈채)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런 지향을 놓치면 안 됩니다. 두 다리는 현실에 서 있고, 그래서 현실을 적절하게 수용하지만 무릎 밑에 까지만 수용을 해야 돼요. 무릎 위에 까지 수용을 하면 나중에 머리까지 흐리게 하니까요. 무릎 밑에 까지는 적절하게 현실에 담궈놓고 그러나 머리와 눈은 근본을 바라보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현실에 바탕을 두다 보니 정토회 안에서도 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 힘들면 의지하고 싶어지죠. 이런 종교성은 나쁘지 않다면 유지하되 그 위에 수행자를 향해 나아가야 됩니다. 정토회의 정회원이 된다는 것은 이 수행자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정회원이 되면 정토회의 설립 취지에 더욱더 집중을 해줘야 돼요. 그리고 우리는 대승 수행자이기 때문에 내 마음공부만 하면 되지 않고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해야 합니다.
상구보리하는 것이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수행입니다. 이것이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다니면서 이론도 공부하고, 천일결사 입재해서 매일 아침 정진하고, 깨달음의장과 나눔의장에 다녀오고, 명상수련도 하는 것들은 모두 상구보리에 해당합니다. 하화중생은 보시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보시의 첫째가 삼보수호비이고, 그 다음에 인연에 따라서 인도와 필리핀 등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돕기 위해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토회는 월급을 주는 제도가 없어요. 월급을 주게 되면 사장과 종업원이라는 주인과 하인의 관계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것을 부정하셨어요. 부처님이 하인 데리고 다니지 않으셨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근본 불교의 입장을 고수하기 때문에 월급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공동체를 유지하려면 여러분들 모두가 주인이 되어서 자원봉사를 해야 하는 겁니다.
정토회를 큰 재벌이 후원을 해준다는 소문 들어본 적 있어요? 부자라고 해서 정토회에서 회장을 맡거나 이런 것 보셨어요? 전부 다 월급 받아서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후원을 해서 유지되는 단체예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첫째 수행을 해줘야 합니다. 수행공동체인데 수행 안 하고 성질 다 부리고 살면 남들이 볼 때 ‘수행 좋아하시네’ 이럴 것 아니겠어요. 둘째, 이 수행공동체가 월급을 주지 않고도 유지가 되려면 여러분들이 봉사를 해줘야 합니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경비가 필요합니다. 셋째, 그러니 때때로 보시를 조금이라도 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수행공동체를 유지해 나갈 수가 있고, 여러분들도 수행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 수행, 보시, 봉사를 안 하게 되면 돈이 많이 필요해지니까 사제를 한 명 데려와서 복을 빌어야 되고, 그러면 여러분들은 다시 복을 비는 신자로 전락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존경해주고, 나도 봉사자가 되고 싶어지고, 많이 못하면 적게라도 봉사해야겠다 이런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큰 돈은 못 내더라도 백일기도 입재 때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때때로 보시를 해야 합니다. 정토회가 돈에 쪼들리면 제가 이제 재벌들한테 구걸하러 가야 될지 몰라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고개 숙이고 싶지 재벌들한테는 고개 숙이고 싶지 않아요. (청중들 박수)
이렇게 수행 정진을 해나가는 것이 정토행자입니다. 정말로 수행을 통해서 자유와 행복을 얻는 문화를 만들어보자는 것이고, 우리나라 인구의 1% 정도라도 이렇게 되면 세상에 많은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사회가 어떤 급변기에 오면 이 1%가 모델이 되기 때문에 급격하게 확장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2차 만일결사 때는 전 세계에 그 씨앗을 심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수행정진하는 것도 좋지만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상담을 해서 구제하는 것은 티끌모아 태산인데 전쟁이 일어나버리면 사람들도 엄청나게 죽습니다. 그래서 남북 간에 절대로 전쟁을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더 발전하려면 통일을 해야 합니다. 일제 시대 때 선조들이 그렇게 원하던 독립이 완전한 독립이 안 되고 분단이 되어서 벌써 70년이 흘렀잖아요. 통일이 되어야 진정한 독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역사 속에서 원한에 사무쳐 죽은 많은 사람들의 한풀이를 다 할 수 있게 됩니다. 통일을 하면 미래의 희망을 가질 수 있고, 또한 과거의 한도 다 풀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늘 패배만 해왔기 때문에 승리에 대한 기쁨을 못 가지고 있고, 늘 외세의 간섭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나라의 주인이 되는 자주 의식이 굉장히 부족합니다. 사람은 작은 것도 하나 성취를 하면 자부심이 생기기 때문에 이것은 수행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고 삶의 전부를 이 일에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10% 정도는 이 일에 시간을 할당해서 참여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세속에 살면서도 세상이 그대로 수행처가 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꼭 머리 깍고 절에 안 들어와도 되고, 이혼도 안 해도 됩니다. 혼자 살면서 여자와 남자를 그리워하는 것보다 둘이 같이 살면서 서로 안 싸우는 것이 훨씬 더 나아요. 여러분들은 서로 싸워서 문제이고, 혼자 사는 사람은 외로워해서 문제인데,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으면 좋고, 둘이 살아도 싸우지만 않으면 좋아요. 결혼이 수행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니에요. 자식을 낳더라도 스무살이 넘으면 집착을 탁 놓아야 해요. 스무살이 넘은 자식에게 너무 신경쓰면 나도 무거운 짐을 지게 되고, 자식은 부모로부터 속박을 받게 돼요. 서로 안 좋아요.
이렇게 원칙을 갖고 인생을 살면 인생은 살 만해요. 살아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에요. 살아있을 때는 마음껏 살고 죽을 때는 기꺼이 죽어야 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살아있을 때는 내내 죽겠다고 하고, 죽을 때가 되면 또 안 죽겠다고 발버둥을 치잖아요. 그렇게 살지 말고 가볍게 한번 살아가 봅시다.” (청중들 웃음)
정토회는 수행자들의 모임이고, 수행을 기초로 보시하고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정토행자의 삶이라는 말씀이였습니다.
스님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웃다 보니 어느새 1시간 30분이 지나갔습니다. 쉽고 재미있게 설명을 해준 스님에게 경전반 학생들은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어서 다함께 대웅전으로 올라가서 기념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원래는 단체사진을 찍으려고 했으나 스님이 ‘그러면 얼굴이 너무 작게 나와서 누구 누구인지도 모르지 않느냐’고 하면서 ‘지부별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자 대중들도 모두 기뻐했습니다. 대중들은 지부별로 대웅전 앞 계단에 올라서서 함박 웃음을 지었습니다.
▲ 정토수련원 대웅전 앞
▲ 지부별로 기념사진 촬영
저 멀리 휘양산에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도 절경이고, 우뚝 솟은 대웅전의 기둥과 기와도 너무나 운치가 있었습니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잠시 대웅전 앞마당을 거닐며 경치를 구경하다가 다시 대수련장으로 내려와서 소감문 작성 시간을 가졌습니다.
▲ 소감문 작성
소감문을 쓰면서 ?은 하루였지만 오전과 오후 내내 스님의 감로 법문을 들으며 너무나 행복했던 시간들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대중들은 회향식을 끝으로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스님은 원고 교정 업무를 보다가 오후 5시가 되어 수련원 근처 선유동 계곡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연일 계속된 강연 일정으로 인해 걷기 운동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는데 스님은 행건을 양 발에 차고 오랜만에 제대로 운동을 해볼 작정을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선유동 계곡은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물이 아주 맑고 곳곳에 넓직한 바위들이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어서 걷는 내내 눈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 선유동 계곡
대야산 휴게소에서 시작된 산행은 4km를 걸어 한말 의병장이었던 운강 이강년 선생의 기념관에서 끝마쳤습니다. 약 40분 가량 신나게 걷고 나니 기분도 상괘하고 몸도 한층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만 마지막에 거의 다 와서 도로 공사 때문에 길을 파헤쳐 놓은 바람에 원래 놓여진 길이 아닌 쪽에서 개울을 건너려다 스님이 넘어져서 옷이 물에 젖기는 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개울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산책을 마치고 다시 정토수련원으로 돌아온 스님은 늦게까지 업무를 보다가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지난번 메르스 때문에 취소된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을 위한 특강 수련이 하루 종일 있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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