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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제1차 통일의병대회에 참석해 불심 도문 큰스님을 모시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새벽 6시, 황룡사지에 스님이 도착하자 이미 전국에서 많은 통일의병들이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는 어젯밤 10시에 법당에 모여 함께 300배 정진을 한 후 12시에 출발해 밤새 고속도로를 달려왔다고 합니다.
▲ 전국에서 밤새도록 버스를 타고 황룡사지 앞 주차장에 도착한 통일의병들
그 사이 빗줄기가 강해져서 오늘 행사를 무사히 할 수 있을까 모두가 걱정했지만 행사 시작 30분 전이 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비가 뚝 그쳐 신령스러운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비옷을 입고 해드랜턴을 낀 채 현수막을 설치하고, 법상을 옮기고, 매트를 깔고, 공양물을 차리는 등 밤을 꼬박 지샌 사람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죠. 수백 명이 한 마음이 되어 온 정성을 기울여 행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니 천지신명도 감응을 해서 도움을 주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 시설물을 설치하기 위해 밤을 샌 통일의병들
6시 20분이 되자 전국에서 1510명의 통일의병들이 황룡사지로 모두 집결하였고 드디어 제1차 통일의병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삼귀의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각 지부별 참가자 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울제주, 인천경기서부, 대전충청, 광주전라, 부산울산, 경남, 청년대학생, 공동체 순서로 차례대로 소개가 되자 각 지부는 큰 함성과 구호로 통일의병대회의 열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습니다.
이어서 법륜 스님이 앞으로 나와 오늘 통일의병대회를 시작하는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신라와 가야의 합의 통일 속에 지금의 남북 갈등을 푸는 해법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황룡사입니다. 진흥왕 때 이곳에 왕궁을 지으려고 터를 닦는데 큰 황룡이 나왔대요. 그걸 보고 이곳은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 부처님이 사실 곳이다 하여 궁터를 절로 바꿨기 때문에 터가 엄청나게 넓습니다. 절터의 규모로는 동양에서 가장 큰 절터라고 해요. 이렇게 신라 최대, 동양 최대의 절인 황룡사 터에 우리가 지금 앉아 있습니다.
왜 우리가 지금 이곳에 이렇게 모였느냐? 남북의 긴장이 완화되고 갈등이 해소되어 서로 화해 협력해서 평화를 유지하자는 평화 발원 기도를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나아가 평화를 넘어서서 남북이 통일을 하자는 통일 발원 기도를 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고자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입니다.
6세기 전까지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친 작은 부족국가였어요. 그런 작은 나라였는데 신라의 국력이 갑자기 비약적으로 증대된 것은 신라와 가야가 통합을 한 덕분입니다. 통합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 합의 통합을 했습니다. 둘이 서로 의논해서 통합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신라와 가야는 이웃 나라지만 친하기는커녕 원래 철천지원수였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적대 관계였고 통합 100여년 전에는 가야가 신라를 침공해서 신라가 멸망할 뻔한 것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구원병을 보내 겨우 살아난 원한이 있는 역사를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신라의 국력이 점점 커지고 가야의 국력이 약해졌을 때 신라가 가야를 침공했다면 가야는 죽기살기로 저항했을 것이고, 결국 가야를 무력으로 복속시켜 신라가 영토는 넓어졌을지는 몰라도 통일을 통해 이득을 얻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인명과 재산의 큰 손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후에도 또 가야 부흥운동을 한다고 반란을 일으키면 굉장히 사회가 혼란스럽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신라는 가야와 합의 통일을 했어요. 합의 통일이라는 게 말은 좋지만 쉽지 않습니다. 합의 통일을 할 때 신라가 강하고 가야가 약하니까 신라가 중심이 되어 가야를 흡수 통일 할 수 있겠죠. 이러면 가야가 끝까지 저항을 하겠지요? 저항을 하지 않도록 하려면 신라 쪽에서 가야에게 엄청난 양보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강자가 양보하는 것을 포용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포용을 했느냐? 두 가지 어려운 결단을 내렸습니다. 첫째, 가야는 나라가 생길 때부터 불교국가였어요. 그러나 신라는 불교를 철저히 탄압하는 국가였어요. 요즘 말로 하면 북한은 공산 국가이고 남한은 반공 국가라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신라가 불교를 공인했습니다. 우리가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공산당 활동을 합법화해준 셈입니다. 이건 독일의 예도 그래요. 통일하기 전에 이미 서독은 공산당 활동을 합법화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서독 안에서 공산당이 합법적으로 의회에 진출해 있었어요. 이렇게 해서 가야 사람들에게 통일 이후에도 자신의 신앙과 사상을 지킬 수 있도록 허용해 준 것이 첫 번째 큰 결단입니다.
두 번째로는 가야의 귀족을 신라의 귀족으로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당시는 신분사회니까 전쟁에 지면 왕이라 해도 노예로 팔려가요. 그런데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왕족으로, 가야의 귀족을 신라의 귀족으로 신분을 그대로 인정해주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설명하면 북한에서 별 두 개짜리 사단장이면 통일코리아 안에서도 북한 장군이 통일 한국 군대의 장군이 되고, 북한 출신도 자기만 똑똑하면 장관도 대통령도 될 수 있도록 다 열어준 거예요. 지금 서독의 메르켈 수상도 동독 출신이에요. 정치적으로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인정해준 겁니다.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왕족으로, 가야의 귀족을 신라의 귀족으로 아무런 차이 없이 인정해준 신분 보장 정책을 취한 겁니다.
이럴 때 신라 안에서도 반대가 많았어요. 신라 안의 기득권 세력이 엄청나게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신라의 젊은이들이 ‘아니다. 가야와 통합하려면 가야의 신앙을 인정하고 우리가 먼저 문을 열어야 한다.’ 이렇게 불교를 공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보수 세력은 ‘무슨 소리냐, 150년이나 금지해온 불교를 어찌 공인할 수 있느냐?’ 고 맞섰어요. 그러는 중에 젊은이들이 흥륜사라고 하는 절을 지었어요. 법으로는 아직 금지되어 있고 논쟁이 되고 있는 중에 절을 지으니까,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보수세력들이 전부 일어나서 ‘왕이 국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저런 사태를 방치한다’고 난리가 났어요. 그 사건에 주범으로 지목된 사람이 이차돈이었습니다. 이차돈은 당시 왕궁의 서기관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행정관 정도 되는, 왕의 비서였습니다.
왕은 지금이라도 앞으로 불교를 믿지 않겠다고 하면 죄를 묻지 않겠노라 했는데 이차돈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꼭 필요하다, 이를 공인하지 않으면 신라의 발전은 없다’고 왕을 설득했어요. 왕은 그 말을 이해했지만 대신들이 정치적으로 엄청난 반대를 했기 때문에 그걸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법대로 이차돈을 사형에 처하게 되었어요. 그때 흰 피가 솟구치고 이차돈의 목이 하늘로 날아가서 저기 보이는 소금강산에 떨어졌다고 해요. 그 자리에 가보면 백률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 안의 여론이 뒤집혔어요. 그래서 보수세력이 후퇴하고 불교를 공인하자는 젊은이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어요. 이차돈이 527년에 죽고 1년이 지난 528년에 신라가 불교를 공인했어요. 그리고 4년 후인 532년에 가야와 통합을 이루었습니다. 신라가 가야를 포용할 준비가 된 것이 확인되니까 가야가 신라와의 통합을 승인한 거예요.
이때 가야 안에서도 반대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북한을 포용하자고 하면 남쪽에서도 반대가 있겠지만 거꾸로 북쪽의 지도층 중에도 자기 체제를 지키려 하는 강력한 반대 세력이 있겠죠. 그런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 결정을 찬성한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무덤을 여기 쓰지 않고 산청에 썼대요. 신라에 귀순했으면 죽어서 무덤도 이곳 경주에 써야 하는데 그리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무덤에는 잔디가 안 산대요. 이것은 정치적으로는 좋은 결정을 했을지 몰라도 조상님에게는 면목이 없다 하여 그렇답니다. 찬성한 사람도 이렇게 어려움이 있었어요. 신라가 고려에 통합될 때도 경순왕이 통합을 승인했지만 마의 태자는 끝까지 반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쪽은 절대로 통합은 안 된다고 하고, 또 다른 한쪽은 절대로 저들을 포용할 수 없다고 서로 맞서면 결국은 전쟁밖에 길이 없잖아요. 그런데 신라는 가야를 포용했고 가야는 그것을 받아들여서 합의 통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1 더하기 1이 2가 되는 통일이 아니라 5가 되고 10이 되는 통일이 되지요. 이 통합 이후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했어요. 그래서 법흥왕 다음인 진흥왕 때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동해로 올라가서 함경남도 지역을 차지하고 그 다음에 대가야를 복속시켜서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여 큰 국가로 등장했습니다. 그게 합의 통일의 시너지 효과입니다.
이런 우리 역사의 경험을 우리는 북한과 통일을 할 때 참고해야 합니다. 현재의 국력이나 조건으로 볼 때 북한 중심으로 통일을 해야겠어요? 남한 중심으로 해야겠어요? 반반씩 섞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남한에 산다고 남한 중심으로 되면 좋겠어요? 하하하. (웃음)
그러려면 신라가 가야를 포용했듯이 남한 중심으로 하려면 우리가 그만큼 자신감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북한에게 그만한 포용력을 베풀어야 합니다. 신분을 보장해주고 정치활동까지 다 보장해줄 정도의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보면 북한은 자기를 지키겠다는 게 강하고 남쪽은 북한을 포용할 의향이 없기 때문에 갈등이 심한 거예요. 우리는 이 신라와 가야의 통합 경험을 우선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원래 이 이야기를 법흥왕릉에 가서 들려주고 싶었는데 인원이 1510여명이나 되다 보니 법흥왕릉에 다 앉을 수가 없어서 이곳 황룡사지에서 바로 설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어서 황룡사지가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법흥왕, 진흥왕을 거치면서 신라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진흥왕 때 바로 이곳에 황룡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황룡사를 지을 때도 묘한 일이 일어납니다. 울산 앞바다에 배가 한 척 왔는데 글과 함께 철이며 황철 같은 것들이 많이 실려 있는 거예요. 글을 보니 인도의 아육왕, 즉 아쇼카왕이 불상을 조성하려 했는데 도저히 조성이 되질 않아서 인연이 없나 보다 생각하고 인연 있는 나라에서 불상을 조성해주길 빌며 배를 띄워 보냈는데 수백 년을 바다를 떠내려오면서 어느 나라에서도 불상 조성을 못 했다는 거예요. 이제 여기 이르렀는데 그 재료를 가지고 신라가 불상 조성에 성공해서 지금 저기 금당 터에 장육존불을 모셨습니다. 부처님의 키가 1장 6척, 약 5미터 정도 되었다는 뜻입니다. 5미터면 지금도 큰 편이죠? 그 옛날에는 5미터짜리 불상을 주조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힘들었는데 그 불상을 만들어서 금당에 모셨습니다.
이렇게 신라는 넓어진 영토를 안정시켜나가면서 부강해졌습니다. 우리 남한도 옛날엔 가난했지만 지금 부강해졌지요? 그런데 세상사에는 다 장단점이 있어요. 신라가 강해지니까 부작용도 나타났습니다. 한강 유역은 원래 백제 땅이었어요. 장수왕이 빼앗아서 고구려 땅으로 삼았어요. 이후에 고구려가 약해진 틈을 타서 백제가 신라와 힘을 합쳐 다시 찾았는데, 신라가 다시 이것을 빼앗아버렸어요. 그러니 신라와 백제가 원수가 되었겠죠? 고구려와도 원수가 됐어요. 부강해진 건 좋았는데 백제와 고구려 모두와 원수가 되니까 백제도 힘을 추슬러서 성왕, 의자왕에 이르면서 다시 부흥을 이루었을 때 신라를 공격했어요. 고구려도 마찬가지예요.
이제 신라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어요. 북쪽에는 고구려, 서쪽에는 백제, 남동쪽으로는 일본이 위협하니까요. 그러니 이제 신라는 완전히 고립당한 처지가 되었어요. 이웃 나라들과 원한을 샀기 때문에 자칫하면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한 겁니다. 그래서 신라가 바다를 건너서 중국의 수나라에 도움을 요청한 겁니다. 그런데 수나라가 고구려를 쳤으나 실패해서 멸망하자 당나라가 천하를 통일했지요. 그래서 다시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때 신라의 왕은 진평왕의 뒤를 이은 선덕여왕이었고 이때 외교부 장관은 선덕여왕의 조카인 김춘추였어요. 김춘추가 당나라 왕인 당태종과 밀약을 맺지요. 두 나라가 힘을 합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가진다고 서로 합의한 겁니다. 그래서 당태종이 645년에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양만춘과의 안시성 전투에서 패하고 결국은 침공에 실패합니다.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이 실패로 끝나니까 백제와 고구려는 더욱 더 태도가 강경해져서 신라를 침공했어요.
이런 위기에 신라는 이 국난을 사람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우니 부처님의 도움으로 극복해야 한다 해서 황룡사 9층탑을 쌓았습니다. 1층은 왜, 2층은 중화... 6층은 말갈... 이런 식으로 층마다 신라를 위협하는 나라들을 정해서 불보살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신앙심으로 저 탑을 쌓았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리 했겠지요. 더 나아가 통일이 되면 완전한 평화가 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의미의 기도를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통일을 하겠다고 원을 세워 저 탑을 세웠습니다. 즉 황룡사 탑은 국난 극복 기도를 하는 탑이자 통일을 발원하는 탑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신라는 한쪽으로는 내부적으로 국가 개혁을 계속하며 국력을 기르고 한쪽으로는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해서 드디어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삼국 통일의 원을 이루었습니다.”
이어서 다음 이동 장소인 사천왕사지에서 기도를 하는 이유도 함께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신라가 제 힘으로 통일을 한 게 아니라 외세의 도움을 얻어 통일을 했기 때문에, 그것도 신라보다 강한 당나라와 협력했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두 나라가 멸망하자 당나라가 그 땅에서 물러나지 않고 백제와 고구려를 다 차지한 거예요. 백제 땅에는 웅진도독부를 세워서 자기들이 통치하고, 고구려 땅에도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자기들이 통치했습니다. 신라는 당나라가 약속을 안 지킨다 해서 여러 번 항의했지만 당나라는 오히려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임명하면서 신라까지 위협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손을 잡고 대당 선전포고를 하고 당나라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신라를 한국이라 치면 당나라는 오늘날의 미국보다 더 큰 나라였어요. 한국이 아무리 지금 좀 잘 산다 해도 미국과 전쟁하면 이길 수가 없겠죠. 그런데 신라는 결국 당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어 당나라의 침공을 받게 됩니다. 그때 신라 사람들은 이 당나라를 사람의 힘으로, 즉 현실의 국력으로 이기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항복하자는 사람도 많았지만 끝까지 싸워서 우리의 자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니까 신의 힘을 빌리자고 해서 사천왕사지를 건립했어요. 그 사천왕사에서 신의 힘을 빌어서, 다시 말해 제석천과 사천왕의 힘을 빌어 당나라군을 물리치자고 한 것이 문두루 비법입니다. 그래서 사천왕사에서 문두루 비법을 행해서 당나라의 20만 군대가 서해에서 폭풍을 만나 전멸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고 합니다. 2년 뒤에 당나라는 다시 10만 군대를 이끌고 침공을 해왔는데 이 때에도 역시 폭풍을 만나서 파선함으로써 신라는 위기를 극복했다고 합니다.
그 뒤로도 당나라는 크고 작은 침공을 계속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육지전에서는 매소성 전투에서, 바다에서는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함으로써 해서 당나라는 신라 침공의 야욕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676년에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기고 당나라와 신라는 다시 화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660년에 백제가 망하고 668년에 고구려가 망했으면 668년을 삼국통일의 해라고 불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이 땅을 당나라 군대가 지배했지 신라가 통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당 전쟁을 8 년간 벌여서 676년에 당나라가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기면서야 결국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기도를 한 것이 사천왕사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큰스님을 모시고 황룡사에서 남북통일 발원 기도를 하고 사천왕사에서 통일 성취 기도를 하겠습니다. 그렇게 온 힘을 모아서 통일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통일의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와 동맹 관계에 섰던 나라와도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원수가 되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미연에 예방하거나 아니면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대비하기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사천왕사지에서는 통일의 과정 중 통일이 성취될 수 있도록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오전은 통일 기도 장정입니다. 여기 황룡사지에서는 통일을 기원하는 발원 기도를 하고 사천왕사지에서는 통일을 성취시키고자 하는 통일 성취 기도를 하게 됩니다.
또 가는 도중에 당나라와 싸워 이긴 문무대왕의 화장터를 참배할 예정입니다. 문무대왕은 화장을 하고 뼈를 동해바다에 묻었어요. 그 화장한 자리에 능탑을 세웠어요. 이 능지탑을 참배하고 다음으로는 통일 발원을 한 선덕여왕릉을 참배하고 사천왕사지에 가서 다시 현대판 문두루 비법 기도를 하겠습니다. 이곳 황룡사지에서는 마하 비로자나 여래불 총귀다라니를 하고, 사천왕사지에서는 제석천 제구예진언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문두루 비법입니다. 그러니 오늘 정성을 다해서 기도를 함께 합시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오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서 통일의 길을 함께 열어보자고 호소했습니다.
“2012년에는 제가 전국의 시군구를 다 찾아다니며 법회를 하면서 남한 국민들의 정성을 모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북한의 시군구를 다 다니면서 옥수수 100톤씩 전해주려고 했어요.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베풀어서 이 공덕으로 통일을 하자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포들이 사는 해외 100개 도시를 다니면서 강의를 해서 그 공덕으로 통일을 하자고 했습니다. 국내와 해외는 했는데 아직 북한 방문을 못했어요. 그래서 남북관계가 조금만 개선되면 북한의 모든 시군구에 가서 옥수수 100톤씩, 북한의 시군구가 210개라니까 21,000 톤을 전해주고 이렇게 하면 아마 천지신명도 감동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니 오늘 여러분들이 기도로도 천지신명이 감동하고, 공덕을 지어서도 천지신명이 감동할 만큼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기도만 하고 있으면 되느냐?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정성의 징표일 뿐입니다. 실패했던 독립운동, 그 선배들의 뜻을 이어받아서 우리가 온 힘을 다해서 통일만큼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야 통일된 국가가 자주적인 독립 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용성진종조사님께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다가 독립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공덕이 부족하다, 공덕을 쌓아라 해서 10가지 유훈을 남기셨어요. 이 공덕을 쌓게 되면 앞으로 800년간 대한민국이 번영할 거라고 했습니다. 나라 이름도 정해주셨어요. 신라, 고구려, 백제 모두의 뜻을 하나로 모아야 된다고 해서 나제려 대국이에요. 공덕을 쌓으면 앞으로 나제려 대국이 800년간 번영할 거라는 예언을 하셨어요.
오늘 불심 도문 큰스님을 법사로 모신 이유가 저의 스승님이셔서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바로 이 10가지 유훈을 평생을 바쳐 실현해 오셨기 때문에 그 공덕이 기반으로 해야 우리가 이 통일 대원을 성취할 수가 있으니까 우리가 큰스님께 통일을 위해 기도의 공덕을 계승하려면 전 국민이 1인당 1원이라도 보시해야 하지 않겠는가 합니다.
다음으로, 저 앞에 보이는 절이 분황사입니다. 큰스님께서 저곳에 와 계실 때,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말에 큰스님께 귀의해 저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통일 발원뿐만 아니라 황룡사 복원도 발원했습니다. 그런데 40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도 못 이루었어요. 이번에 우리가 힘을 모아서 첫째는 황룡사 복원보다 더 중요한 통일, 그 다음으로는 황룡사 복원, 즉 황룡사를 복원해서 그 힘으로 통일을 하든지 통일을 해서 그 황룡사를 복원하든지 그렇게 기도해 봅시다. 큰스님께서 예시를 해주시고 제가 작은 씨앗이 되어 시작했는데 이제 여러분과 함께하면서 드디어 이렇게 가능성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온 힘을 기울여서 우선 불보살님께 기도를 하고, 다음으로는 한 3년 1000일 간 온 힘을 기울여서 노력한다면 통일의 길이 열릴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온 거예요. 오늘 비가 좀 오더라도 맞고 할 만하지요? 비가 오는 건 좋은 거예요. 이 정도 난관도 극복 못하고 벌써 비 온다고 안 온 사람들은 통일의병 자격이 없어요, 하하하. (대중 웃음)
또 신라는 호국 용이 나라를 보살폈어요. 서해 바다에 폭풍이 일어났다, 이런 건 다 비가 왔다는 거예요. 그러니 오늘 당연히 비가 와야 하는 겁니다. 비가 와야 기도의 영험이 있는 거예요. 비가 올수록 더 좋다는 마음을 가지세요.”
비가 하루 종일 내린다는 일기 예보가 있어 다들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비가 와야 기도의 영험이 더 크다는 말씀에 모두들 활짝 웃으며 큰 박수로 공감을 표현했습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자 저 뒤편에서 도문 큰스님이 주장자를 들고 뚜벅 뚜벅 걸어 나왔습니다. 큰스님은 석가여래부촉계대법 77세, 조선불교증흥율 제8조이며 백용성조사 탄생성지 장수 죽림정사 조실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대종사입니다. 대중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청법가와 삼배로 법을 청했습니다.
불심 도문 큰스님은 연기화엄부의 게송, 소승아함부의 게송, 대승방등부의 게송, 공해반야부의 게송, 실상법화부의 게송, 원적열반부의 게송을 각각 하나씩 읊고 해설해주고 또 대중들이 큰 목소리로 따라하게 하면서 통일의병들이 어떤 마음으로 통일운동에 임해야 하는지 경전에 근거하여 법문을 설해주었습니다. 연세가 80이 넘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가 황룡사 빈 절터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져서 대중들 모두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만약 인간계에서 삼세일체 부처님을 요달하고자 함을 알진데 마땅히 십법계의 성품을 관할지어다.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지은 바 이니라...
무릇 상이 있는 바는 다 허망함이니 만일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원효대사님께서 금강삼매경을 설한 법회를 이곳에서 하셨습니다. 원효대사님은 삼국 통일의 후유증을 이 금강삼매경의 사구게를 설해서 해결하셨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이 게송을 읊음으로서 호법선신이 옹호해서 남북통일 성취의 씨앗을 뿌리고자 합니다. 그 씨앗을 뿌리는 주인공이 누구이십니까?” (청중들 박수)
“통일의병입니다.”
“통일의병들이시여, 공이 무엇입니까? 집착만 놓으면 공입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어리석음의 굴레를 벗어버리면 지혜입니다. 이 민족이 집착을 놓도록 이 민족이 어리석음의 굴레를 벗어버리도록 우리는 해야 합니다.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남북 문제를 미국이나 중국이나 러시아나 일본에게 맡기고 뒷짐 지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남북 문제는 우리의 문제라, 저 매헌 윤봉길 의사가 대한의사군이 되었듯이 우리도 통일의사군이 되어서 한번 해보자는 것입니다. 실패하고 성공하는 것은 둘째 문제이고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청중들 박수)
아쇼카 대왕이 부처님께 모래 공양을 올려서 그 공덕으로 서역 인도를 통일했듯이 법륜 스님은 고등학생 때 이미 고철을 주어서 황룡사 대종 불사를 발원하고, 황룡사 빈터의 기와조각을 온 국민에게 보내면서 조상의 얼을 상기시킨 공덕을 지었기에 오늘 우리는 이 대 공덕주를 모시고 남북 통일 불사를 발원하는 것입니다.
성공이냐 실패냐 장사하는 사람들처럼 이해를 따지지 말고 해보자, 이 말이오. 하면 된다. 하지 않아서 안 되었다 이 말이오.
그리하여 여러분들은 나라가 편안하고 남북 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줄기가 되어야 합니다. 역대조사는 나무가 자랄 수 있는 뿌리가 되어주셨고, 용성조사님께서는 그 씨앗이 나오도록 만들어 주셨고, 도문 법사는 몸통이 나올 수 있도록 해주었고, 이제 그 몸통이 법륜 스님이 되었습니다. 몸통에서는 줄기가 나오지요. 그럼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줄기입니다.”
“그 다음에 1510명만 갖고 통일이 되겠습니까? 만 명이 되고, 백만 명이 되고, 2백만 명이 되고, 3백만 명이 되고, 5백만 명이 되어야 이 나라를 잡아 흔들어서 들썩 들썩 진동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줄기는 누구입니까?”
“통일의병입니다.”
“줄기에서는 가지가 나옵니다. 그 가지는 뜻있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래서 몸통에서 줄기가 나오고, 줄기에서 가지가 뻗고, 그 가지에서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된다 이 말입니다.”
큰스님의 하면 된다는 말씀에 통일의병들도 열렬한 환호와 박수로 그 의지를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도문 큰스님은 “동학교주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100년을 바라보는 안목을 가졌지만 그대는 1000년을 바라보는 안목을 가져라. 이것이 도문법사와 법륜스님의 인연입니다.”라고 하면서 1000년을 보는 안목을 가진 법륜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반도 통일의 길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웠습니다.
통일의병들의 열렬한 환호와 박수가 계속되자 큰스님은 어깨를 들썩이며 노래를 한 자락 불렀습니다.
“역대전등 제대조사와 용성, 동헌, 불심 3대 대사는 이제 썩고 희생을 다했다. 아무도 모르게 살았다. 거기에서 지광 법륜 스님은 이 겨레의 몸통이 되었다. 오호라. 1510명의 통일의병은 그 줄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만명, 백만명, 2백만명, 3백만명, 5백만명의 가지가 뻗어서 여기에서 잎이 핀다. 꽃이 핀다. 열매를 맺는다.”
다시 박수갈채가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큰 스님은 “이 공양 올린 공덕으로 만사가 여의하고, 만복이 운운하고, 대한민국 전 국민의 자손이 창성하고, 부귀와 공명과 행복과 영화가 대대승승하고, 만대에 번창이 되어지고, 이 덕화가 온 겨레, 전 인류, 만 중생에게까지 미치어지이다.” 라고 하면서 대원성취 진언을 외우며 법문을 마쳤습니다.
이어서 법륜 스님은 대한민국 국민 5천만 명의 통일 기원의 뜻을 담아 대중들이 보시한 5천만원을 불심 도문 큰스님께 통일발원 공양으로 올렸습니다. 큰 스님은 그 뜻을 받아 지극 정성을 다해 한반도 통일을 발원하는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통일의병 1510명도 함께 발원하는 마음을 모아 두 손을 합장하고 온 정성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큰스님의 염불 소리에 맞춰 통일의병들은 마하 비로자나 여래불 총귀다라니를 염했습니다.
“나무 마하 비로자나 여래불 총귀다라니. 나무 이바이바제 구하구하제 다라니제 니하라제 비니마니제 사바하”
정성을 다해 기도를 마친 후 드디어 민족의 역사와 의병의 역사를 상징하는 28개의 깃발들을 앞세우고 장대한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맨 앞에는 청룡과 황룡이 앞장을 섰습니다. 그 다음 14개의 깃발을 통해 한나라로부터 시작해 배달나라, 단군 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 조선, 대한민국, 북한을 모두 계승하는 마음을 담아 통일코리아 깃발을 그 마지막에 세웠고, 다음 14개의 깃발은 다물군, 고구려 부흥군, 백제 부흥군, 고려 항몽의병, 임진의병, 병자의병, 동학혁명군, 을미의병, 정미의병, 독립군, 순국열사, 산업역군, 민주투사를 모두 계승하는 마음을 담아 통일의병 깃발을 그 마지막에 세웠습니다.
30명의 청년들이 깃발을 곧추 세우고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스님을 맨 앞으로 해서 통일의병들도 그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앉아있던 백고좌 강당터를 출발해 금당지를 지나 황룡사 9층 목탑이 있던 자리를 탑돌이 하며 기도를 한 후, 그대로 대열을 유지하며 도보로 능지탑과 선덕여왕릉을 향해 행진했습니다.
“나무 도량교주 관세음보살, 나무 도량교주 관세음보살...”
1510명이 모두 탑돌이를 마칠 때까지 염불은 계속 되었습니다. 황룡사지에서 선덕여왕릉으로 걷는 길에서는 송수신기를 통해 한명씩 나와서 자신이 생각하는 통일은 무엇인지 말한 후 통일 노래를 불렀습니다. 준비된 통일 노래도 사이사이에 흘러나오는 등 작은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땅은 질퍽하고, 신발도 젖고, 옷도 점점 더 젖어갔지만, 통일의병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이어갔습니다.
즐겁게 노래를 부르다보니 어느새 능지탑에 다다랐습니다. 탑을 한 바퀴 휘이 돌고 선덕여왕릉으로 향했습니다. 선두는 선덕여왕릉을 지나 낭산 아래 자락에 이르고, 후미는 능지탑에 막 도달해서, 행진 대열의 중간 지점이 선덕여왕릉에 이르렀을 무렵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습니다.
▲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대왕의 화장터에 세워진 능지탑
▲ 선덕여왕릉
휴식을 하면서 스님으로부터 송수신기를 통해 능지탑과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를 순례하는 의미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다시 출발해 사천왕사지에 도착했습니다.
사천왕사지에 도착하자 행군을 할 때 내렸던 비가 갑자기 멈추고 잠시 소강 상태를 보였습니다. 모두들 하늘을 바라보며 신기해했습니다. 큰스님이 법문을 할 때만 비가 그쳤기 때문입니다.
사천왕사지에는 불상이 없기 때문에 대신에 삼존불 탱화를 모셨습니다. 가운데에는 부처님께 공양물을 올렸고, 왼쪽으로는 환웅 천왕님과 단군 왕검님 등 조상신들을 위해 영단을 차렸고, 오른쪽에는 제석천왕과 사대천왕, 화엄성중 등 신단을 차려서 남북 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염원 기도를 했습니다.
큰스님은 사천왕사지에서 신라 시대 당시에 이곳에서 행해진 문두루 비법인 3밀가지 수행법에 대해 알려주면서 통일의병들이 함께 기도를 하도록 안내해 주었습니다. 양 손가락을 펴고 오므리고 접으면서 지, 수, 화, 풍, 공의 5대 요소의 인연 가합상을 새기고 심념으로 발원하는 의식을 하며 진언 다리니를 외웠습니다.
마지막으로 큰스님은 “사천왕님이시여 옹호하여 주옵소서. 도리천 33천, 제석천왕, 환인 천주 하느님이시여, 보호하여 주옵소서.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의 하느님이시여, 이 민족 과 국가를 항상 보호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면서 설법을 마쳤습니다.
큰스님의 설법을 듣다 보니 정말 애국가에 나오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라는 구절이 절로 생각이 났습니다. 이어서 통일의병들은 큰스님을 따라 제석천왕 제구예진언을 함께 염했습니다.
“나무 제석천왕 제구예진언. 아지부 뎨리나 아지부 뎨리나 미아 뎨리나 오소 뎨리나 아부다 뎨리나 구소 뎨리나 사바하”
이렇게 기도를 마쳤는데 갑자기 해가 떴습니다. 그러자 큰스님은 “태양을 보라” 하면서 기뻐하시면서 “통일의병대회를 했으니까 이제 통일은 자연적으로 될 것이고, 그것만 갖고는 안 됩니다. 오대양 육대주 사바세계 남섬부주 전 인류가 성불 인연을 맺도록 해야 합니다. 우선 여러분들은 전 국민을 통일의병으로 만드세요!” 라고 하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법좌에서 내려오면서는 “남북 통일 만세!”를 삼창하며 마지막까지 통일의병들에게 기운을 넣어주었습니다. 통일의병들도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따라 외쳤습니다. 또 큰스님은 더 기운이 나셨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하느님이 보우하고, 천룡팔부님이 옹호해서, 남북통일 성취한 뒤에 한국, 일본, 중국이 삼형제가 되어서 세계만방이 하나 되자. 만만세!” 라고 노래를 불렀고, 통일의병들도 덩달아 어깨를 들썩이며 박수를 쳤습니다.
이렇게 통일성취기도를 모두 마친 후 마지막 장소인 통일암으로 다시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사천왕사지에서 통일암으로 향하는 2차선 도로는 통일의병들의 행진으로 길게 장엄이 되었고, 다시 빗줄기가 강해지면서 부슬 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비를 맞으며 30여분을 걸어 통일전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빗줄기가 너무 거세어져서 잠시 비를 피해 모두 버스에 탑승해서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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