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8.25 크라스키노 발해성 및 우수리스크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 발해의 성터가 남아 있으며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크라스키노 마을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러시아의 크라스키노 지역에 위치한 발해 성터를 답사한 후 우수리스크로 이동해 고려인문화센터, 이상설 열사 유허비, 최재형 열사 생가 등 독립운동 유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새벽 5시 정각, 아직 해가 뜨기 않은 컴컴한 새벽녘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숙소에서 출발하여 연해주의 광활한 벌판과 산길을 향해 달렸습니다. 오늘의 첫 답사지는 ‘크라스키노’에 위치한 발해성 유적입니다. 어둑한 산길 속을 한참 동안 달리다 보니 저 멀리 동해에서 붉은 태양이 뉘엿뉘엿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빵 몇 조각을 산 후 달리는 차 안에서 허기를 채우고 다시 쉼 없이 달렸습니다. 출발한지 4시간 만에 ‘크라시키노’라고 불리우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영웅적으로 전사한 크라스킨 중위를 기념한 동상이 세워져 있는 높은 언덕 위에 올랐습니다. 이곳 ‘크라시키노’라는 지명은 이 크라스킨 중위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것 같았습니다. 동상 앞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지형지세가 한 눈에 파악이 될 정도로 아주 전망이 좋았습니다. 탁 트인 시야와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마음도 활짝 열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 크라스킨 중위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언덕 위

 

오늘 스님 일행을 안내해 주기로 한 현지 교민 박은유 선생님이 이곳 조망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저기 보이는 고불고불한 길이 북한으로 가는 길입니다. 발해 성터는 저기 보이는 둥그스름한 곳입니다. 저기 철도 보이시죠? 이곳에서 다음역이 하산역이고 그 다음역이 두만강역입니다. 이쪽 지역 일대가 ‘연추’ 마을이라고 해서 상연추, 중연추, 하연추 마을이 있었고, 이 지역 전체가 우리 조선족들이 농사를 지었던 땅입니다. 어제 갔던 신한촌에 살았던 조선인들은 도시 빈민이였고, 여기 살았던 조선인들은 농민이였습니다. 이곳 연해주 안에 37만명이 살았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숫자였습니다. 그 중에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간 인구만 17만명이였습니다. 

 

헬기를 타고 이쪽 지역을 내려다보면 우리 조선족들이 경작한 농경지가 그대로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농사를 안 짓지만 논두렁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해요. 니꼴라이 황제 때 이곳 주지사가 중앙 정부에 보고서를 쓰면서 뭐라고 했냐면 ‘이곳은 무조건 조선족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농사를 기가 차게 잘 짓는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만강을 넘어온 조선족들에게 러시아 국적을 부여해 주기도 했다고 해요. 

 

저기 큰 산을 넘으면 중국의 훈춘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40분만 더 가면 북한이 나옵니다. 저기 동해 바다는 겨울이 되면 꽝꽝 업니다.”

 

스님은 박 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나서 비옥하지만 황량하게 버려져 있는 땅들을 보며 “북한 사람들이 많이 와서 농사 짓고 살게 해주면 좋겠네”라고 했습니다. 옆에서 김홍신 작가님도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이곳은 러시아 최초의 한인마을인 ‘지신허’와 함께 ‘연추’라고 불리우는 연해주 지역의 대표적인 한인 마을이 있었던 곳인데, 1900년도에 들어오면서 이곳은 최재형과 이범윤, 안중근 등이 동의회를 조직해 연해주 의병운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조국 독립의 꿈을 안고 원산 등에서 배를 타고 포스에트 항에 내린 뒤 말을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달려가던 독립운동가들의 동선을 바람을 따라 그려보았습니다. 

 

“오늘 저희가 답사할 곳은 저기 보이는 기차역 바로 뒤에 동그랗게 숲을 이룬 지역입니다. 옛날에는 염주성이라고 불린 곳입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이곳은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출항지였을 겁니다. 훈춘이 발해의 동경이였으니까요. 발해 사람들도 이 성에서 머물다가 배를 타고 동해로 나갔을 겁니다. 오늘 참 잘 왔어요.  

 

저기 보이는 곳이 포시에트이네요. 나진, 훈춘, 포시에트가 작은 삼각이고, 더 큰 삼각은 연길, 청진, 블라디보스토크이거든요. 큰 배는 자루비누로 들어오나봐요. 이곳으로는 큰 배는 못 오고요. 접안 시설이 없는 것을 보니까 바다가 깊지 않나 봐요.”

 


 

저 바다 건너에는 포시에트 지역이 보였습니다. 크라스키노는 중국 훈춘 및 한반도 북부를 연결시켜 주던 군항 ‘포시에트’ 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발해는 건국 이후부터 일본과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신이 오고갔다고 합니다. 험한 바닷길을 통한 교류라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가 상당히 적극적으로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발해의 사신단은 이곳에서 일본으로의 대장정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발해 시대에는 동경용원부 관할에 있던 염주성이었지 않았을까 예상하며 산 아래 성터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기차길 앞에서 차에서 내린 후 장화를 신고 숲속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 크라스키노 발해 성터로 들어가는 숲길

 

내일부터 폭우가 쏟아진다고 해서 10여명의 발굴 조사단은 마을로 철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물 웅덩이와 질퍽한 진흙 길을 장화로 철벅 철벅 걸으며 20여분을 가자 발굴 조사단이 머무르고 있는 베이스 캠프가 나타났습니다. 

 


 

스님 일행이 도착하자 이곳 성터에서 35년 간 발굴 조사를 해온 겔만 교수님이 가장 먼저 나와서 스님께 악수를 건냈습니다. 

 


▲ 크라스키노 발해 성터를 발굴하고 있는 겔만 교수님 

 

겔만 교수님은 가장 먼저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성터 안으로 들어가려면 강을 건너야 하는데 어제 비가 많이 와서 강물 수위가 높아져 도저히 강을 건널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대신 겔만 교수님은 성터에서 나온 유적들을 모두 책상 위에 펼쳐서 보여주었습니다.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청동 낙타상’입니다. 쌍봉 낙타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발해인들이 서역과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입니다. 이 외에도 많은 유물들을 보여주었는데 청동을 재료로 소규모 조형물을 제작했던 발해 장인들의 조형 감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 쌍봉 낙타 모양을 한 청동 낙타상 

 


▲ 신라와의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토기. 한쪽이 편평한 모습이 특이했습니다.  

 


▲ 제사에 쓰이는 동물을 잡기 위한 화살촉. 화살을 쏘아도 피가 나지 않도록 기절시키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글자가 새겨진 유물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밝히지 못했다고 합니다. 

 


 


▲ 글자가 새겨진 유물 

 

그리고 겔만 교수님은 자신이 발굴할 때 찍었던 사진과 지도, 유물들을 노트북으로 보여주며 이곳 성터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설명을 듣던 중 스님도 깜짝 놀란 유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환웅의 배달 문명으로 추정되는 요하 지역에서 많이 출토된 ‘옥환’이 이곳에서도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스님은 옥환 유물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듣고는 “가슴이 뛰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 크라스키노 발해 성터에서도 발굴된 옥환. 

 

이 외에도 겔만 교수님이 보여준 자료를 통해 절터, 우물, 지하창고, 온돌 주거지 등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이 성은 기단을 돌로 정갈하게 쌓은 흔적이 많았는데 대부분의 발해성이 토성인 것과는 달리 토석혼축성이거나 석성이 아니였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북 · 동 · 서 · 남쪽에 각기 1개의 성문이 있었고,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점은 성문마다 옹성이 쌓은 모습이였습니다. 겔만 교수님은 지도로 그 옹성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었는데 고구려의 것과 너무 닮아 있어 놀라웠습니다. 다만 옹성이 안쪽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바깥 쪽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이했습니다. 

 


▲ 남쪽 문에 쌓은 옹성 

 

겔만 교수님은 1시간 가까이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멀리서 찾아온 이방인들에게 게다가 초면임에도 정성을 다해 설명해주는 모습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스님은 정성껏 설명을 해준 겔만 교수님에게 선물을 건내며 합장을 하고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의 수위가 높아서 미처 건너가지 못한 성터를 먼 발치서 바라보기만 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 강을 건너지 못해 먼 발치서 성터를 바라보고 있는 스님 

 

크라스키노 발해 성터에서 나오는 길에 스님은 김홍신 작가님과 발해의 일본 출항지 역할을 했을 이곳 성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일본이 왜 발해를 중요시했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발해와 교류가 왕성했던 나라 중에 하나가 일본이였어요. 원래 일본을 처음 개척한 것은 가야입니다. 그래서 가야 왜 연합군이 신라를 침공한 기록이 있거든요. 가야가 망하자 그 교류를 백제가 대신했어요. 백제 뒤에는 고구려가 있었고요. 나중에 신라가 강대해지면서는 고구려가 백제와 동맹을 맺었거든요. 그래서 일본에는 백제 문화가 많이 전해졌고 고구려 문화도 일부 전해졌어요. 고구려가 망하고 이를 계승한 것이 발해잖아요. 일본은 자신들의 천왕의 연원이 한반도에서 왔기 때문에 발해가 그 원줄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발해를 중요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스님의 이야기를 듣던 중 다음 유적지인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 기념비에 도착했습니다. 크라스키노 발해 성터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단지동맹(斷指同盟)이란 안중근과 11명의 동지들이 1909년 3월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잘라 혈서로 대한독립이라 쓰며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 일을 말합니다. 기념비는 그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 안중근의 단지동맹 기념비

 

처음에는 2001년 쭈까노보 마을 천변에 세워졌지만 상습 침수 문제 등 보존 관리의 어려움이 있어 2006년 한국 기업인 유비콤 1농장 경비실 앞에 이전했다가 2011년 한국 기업 유니베라가 사회공헌 차원에서 더 안전하고 방문이 용이한 장소인 현재 이곳에 새롭게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곳에서 우수리스크를 거쳐 동만 철도를 타고 할얼빈으로 가서 조선 침략의 원흉이었던 이토오 히로부미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스님과 김홍신 작가님은 기념비 앞에서 묵념을 하며 단지동맹의 뜻을 기렸습니다. 

 


 

기념비를 참배하고 돌아서는데 저 멀리 유니베라 농장에서 빠른 속도로 차를 몰고 한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깜짝 놀라 확인해 보니 이곳 농장의 법인장으로 와 있는 장민석님이였습니다. 스님은 반가운 얼굴로 법인장님에게 악수를 건내면서 다음에 다시 이곳에 답사를 올 때는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우면서 이곳 지역 상황에 대해 잠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 유니베라 농장의 장민석 법인장님 

 

법인장님과의 짧은 인사를 뒤로 하고 스님 일행은 단지동맹 기념비가 처음 세워졌다고 하는 곳과 두 번째 이전했다고 하는 곳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 안중근의 단지동맹 기념비가 처음 세워졌었던 쭈까노보 마을 천변

 

주까노보 마을 천변을 먼 발치서 보고 다시 돌아나오는 길에 두 갈래의 도로를 만났습니다. 왼쪽으로 가면 북한 땅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면 중국으로 가게 된다고 합니다. 왼쪽으로 뻗은 도로를 따라 북한 땅을 향해 계속 달려가고만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북한으로 향해 있는 도로에서 반대 방향으로 러시아 쪽을 향해 이동하면서 ‘아마 한반도가 통일이 된다면 이곳 연해주 지역과의 교류가 더욱 활성화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들었습니다. 

 


▲ 왼쪽이 북한으로 가는 길, 오른쪽이 중국으로 가는 길

 

다음은 우수리스크로 향했습니다. 우수리스크로 향하는 도중에 라즈돌노예 역에 잠깐 들렀습니다. 라즈돌노예 역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이주되기 전에 집결했던 곳입니다. 1937년 9월 9일은 고려인 강제 이주가 최초로 실행된 날인데 당시 가장 많은 고려인들이 이 역에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기차에 올랐다고 합니다. 당시 고려인들의 한과 두려움은 지워진 채 한적한 시골 역의 풍경만 남아 있었습니다. 

 


▲ 라즈돌노예 역 

 

오후 2시가 넘어 우수리스크 시내에 들어온 스님 일행은 고려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러 국수 한그릇을 먹었습니다. 국수도 참 시원하고 맛있었지만 식당 주인인 고려인 아주머니의 웃는 얼굴이 무엇보다 기억에 남았습니다. 

 


▲ 고려인 4세인 식당 아주머니

 

고려인 아주머니가 한국말을 꽤 잘하자 스님이 몇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고려인 아주머니는 성이 밀양 박씨라고 하고 할아버지도 이곳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려인 4세입니다. 1937년에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할아버지는 우즈베키스탄으로 가게 되었고, 부모님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1998년이 되자 다시 할아버지의 고향인 이곳 우수리스크로 돌아와 식당을 차렸고, 고려인 남편과 결혼해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춥고 황량한 들판으로 강제 이주되어야 했던 고려인들의 얼굴이 자꾸만 생각났습니다. 

 

다음은 우스리스크 시내에 위치한 고려인 문화 센터로 향했습니다. 센터 입구에는 “러시아 한인 이주 1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을 건립했다”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 고려인문화센터

 

센터 안에는 고려인 역사관이 잘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입구에서 당시 고려인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들을 영상물로 시청한 후 고려인들의 이주 역사가 소개된 전시물을 차례대로 둘러 보았습니다. 

 


 

연해주 이주부터 독립운동 과정,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그 이후 고려인의 재이주의 역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다음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 선생이 체포 직전 살았던 곳을 찾아 갔습니다. 최재형 선생은 신한촌 참변 때 일본군에 의해 총살을 당하게 됩니다. 11세 때 집을 나와 러시아인 선장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장사를 통해 돈을 모으기 시작해 지신허 지역 땅을 사들여 농장을 운영했고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으로 군납 사업을 하며 재산을 형성했습니다.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재형 선생은 1908년 이범윤, 이위종, 안중근과 함께 의병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해 총장으로 추대되었고, 의병 활동 자금으로 거금을 내놓았습니다. 1911년에는 홍범도, 이상설과 함께 권업회를 조직해 ‘권업신문’을 창간했고, 1914년에는 마침내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합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제와 제휴한 러시아의 탄압을 받아 대한광복군 정부는 결국 해체되고 말지요. 

 


▲ 최재형 선생의 집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선생 거주지는 선생이 말년에 살았던 곳으로 이 집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끌려갔다고 합니다. 스님은 뒷발꿈치를 들고 담 넘어서 집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위한 모든 자금도 최재형 선생이 마련한 것이라고 하는데 선생이 없었다면 안중근의 거사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큰 업적을 남기신 분인데 이제야 이곳에 찾아와 인사를 드리게 된 점이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다음은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로 향했습니다. 인가는 물론 논밭 하나 없는 허허 벌판에 묘지도 기념비도 아닌 유허비가 세워졌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일까 궁금했습니다. 

 

고종의 헤이그 특사 3인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이상설은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는 특사 파견에 앞서 북간도 용정에서 서전서숙을 열고 청년교육운동에 헌신했습니다. 1908년 러시아로 망명한 뒤에는 의병군을 창설하고 권업회 등 독립운동단체를 지도했습니다. 그러나 병마로 우수리스크에서 숨지기 전 그는 “독립된 조국이 아니면 고국에 시신도 가지 않겠다”며 “내 몸과 유물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유허비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이상설의 뜻을 기리는 유일한 표지인 것입니다.

 

스님은 먼저 이상설 선생의 약력이 새겨진 유허비 앞에 묵념했습니다. 

 


▲ 이상설 선생 유허비 

 

묵념을 마치고 나서 스님은 “이상설 선생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 무장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조금만 더 사셨더라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고 지도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역만리를 누비며 독립에 헌신한 지도자의 자취는 유허비 만큼이나 외롭고 쓸쓸해 보였습니다. 하루 빨리 진정한 독립인 통일 한국의 꿈을 이루어서 이상설 선생의 넋이라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야 겠다는 간절한 발원을 해보았습니다. 

 

답사 일정은 오늘 하루 뿐인데 벌써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우수리스크 지역에는 발해 성터가 두 곳이 있다고 하는데 한 곳은 시간이 안 되어 답사를 포기하고 나머지 한 곳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우수리스크 지역은 중국에서 흘러오는 수이푼 강이 굽이지어 흐르고 있었는데, 이 수이푼 강을 자연 해자로 한 나지막한 언덕 위에 발해의 성터가 남아 있었습니다. 강이 절묘하게 반원을 그리며 언덕을 에워싸서 천연의 요새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 수이푼 강을 자연 해자로 한 발해의 성터

 

먼저 망루일 것으로 추정되는 산 언덕 부위까지 올라가 보았습니다. 광할한 허허 벌판이 한 눈에 보이면서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산의 안 쪽 또한 광할한 평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 망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언덕

 

스님은 성의 주위 지형 지세를 살펴보더니 “아마 발해의 15부 중에 하나인 솔빈부 자리가 아닌가” 하며 추측을 했습니다. 성의 주위를 흐르는 강의 이름이 ‘수이푼’인데 이 ‘수이푼’이란 용어는 ‘솔빈’이란 발음이 변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흘러오는 이 강을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수이훤허’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 발해 성터를 잘 연구하면 발해 솔빈부의 실체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란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망루에서 다시 안쪽으로 더 들어가보니 어느 고려인이 세웠다고 하는 포대화상 석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포대화상 석상 앞에는 발해 시대의 기와들로 정갈하게 탑을 쌓은 것이 보였습니다. 스님은 기와를 손으로 집어 보더니 뒷면에 삼베를 덧댄 무늬를 확인한 후 “발해 시대 기와가 맛네요” 라며 이곳이 발해 성터였음을 재확인 하였습니다. 

 


▲ 출토된 발해의 기와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탑

 

그런데 정말로 이곳은 길가에도 발해의 기와가 묻혀 있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 길에 묻힌 발해의 기와 

 

그리고 더 깊이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숲 속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니 성벽을 쌓은 흔적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침 스님 일행이 지나가던 숲길이 성벽을 허물고 뚫은 길이여서 숲길 양 옆으로 성벽의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 성벽이 지나가는 자리를 뚫고 낸 숲길. 길 양 옆에 보이는 것이 성벽. 

 

처음에는 나무가 울창해서 이곳이 성터인가 싶었는데 스님은 이곳을 보자마자 “여기가 바로 성벽이네” 하며 기쁜 표정을 지었습니다. 

 

성벽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발해의 기와들이 쌓여 있는 발굴 터가 보였습니다. 불과 20~30cm 정도만 발굴한 것 같은데 엄청난 발해 기와들이 출토된 것 같아 보였습니다. 

 


 

발굴 터에서 저 멀리 바라보니 수이푼 강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이 절경을 이루었습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더 많은 유적들이 있을 것 같았는데 수풀이 너무 무성해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스님은 “다음에는 수풀이 없는 봄이나 가을에 다시 와야겠다”고 하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스님과 김홍신 작가님은 발해의 성터를 찾은 기쁨에 다시 성벽 위에 올라 서서 성벽 위를 거닐어 보고 내려왔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발해 연구의 대가이신 방학봉 교수님이 이곳에 오셨더라면 참 좋아하셨을텐데...” 하며 아쉬움을 내비쳤습니다. 

 


▲ 발해의 성벽 위에 올라갔다 내려오고 있는 스님과 김홍신 작가님

 

우수리스크의 발해 성터를 둘러보는 것을 마지막 일정으로 모든 답사를 마치고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습니다. 

 

저녁 7시 무렵에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로 진입한 스님 일행은 다시 국제한민족재단의 이창주 교수님 일행과 만났습니다. 이번 답사는 이창주 교수님이 여러모로 신경을 써 준 덕분에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스님은 이 교수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저녁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스님 일행을 안내해 준 박은유 선생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직접 사인한 인생 수업 책을 선물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스님과 김홍신 작가님, 이창주 교수님 세 분은 이번에 답사한 연해주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와 발해 유적지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 또 동북아 역사기행 속에 어떻게 포함시킬 것인지 등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더욱 심도 있는 논의를 한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국제한민족재단의 이창주 교수님 일행이 먼저 공항으로 출발하고, 스님 일행은 오전에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 역과 항구를 더 둘러본 후 오후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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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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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bi

You know what, I'm very much inelincd to agree.

2015-10-16 10:21:40

^^^^

대단하네요!동북아역사기행에도 넣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스님 그럴 계획이시군요?^^*러시아에 있는 발해성터 유적지 유물들..이상설 최재형선생님의 발자취등..출토된 유물들도 기와들도 너무나 신기하고 가슴 벅차게 뿌듯하네요^^*북한으로 가는 갈라진 길도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2015-09-06 23:15:42

노진희

오늘에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역사는 과거에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되네요

2015-08-31 15: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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