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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위치한 독립운동 성지인 신한촌에 방문해 선열들의 흔적과 숨결이 남은 기념비 앞에서 묵념하고 그 뜻을 기렸습니다.
새벽 4시 30분, 서울 정토회관에서 도량석 소리와 함께 일어난 스님은 공동체 대중들과 새벽 에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기도 후에는 발우공양에 참석해 공양을 드신 후 2박3일 동안 연해주 출장을 가게 되었다며 일정을 공유해 주었습니다.
“오늘 연해주로 가서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을 방문하려고 해요. 우리 교민들이 19세기 말엽에 그 지역으로 이주한 후 나라를 잃어버리자 그곳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그 지역의 독립운동 유적지 보호 때문에 요청이 있어서 답사를 다녀오고자 합니다. 간 김에 최근에 그 지역에서 발견된 발해 유적지가 있어서 그곳도 답사하고 오려고 김홍신 작가님도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공동체 대중들이 새벽에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몇가지 우려되는 점들이 있었다며 전통 의식과 의례를 어떤 자세로 계승하고 간직해야 하는지 당부의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새벽에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약간 우려되는 것이 있어요. 의식과 의례는 일종의 관습이고 문화인데 이렇게 해야 된다고 정해진 것은 없지만 전래되어 오던 관습에서 벗어나게 되면 남이 볼 때는 예의가 없어 보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이비라는 소리를 듣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문화는 존중해야 하고,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전통은 계승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토회는 의식을 일부 바꾸어서 전통 의식을 아는 사람이 볼 때는 사이비 소리를 듣게 될 소지가 큽니다. 그래서 가르침은 참 좋은데 의식의 측면에서는 비판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은 기존의 불교를 잘 모르고 정토회만 접한 청년들이 많기 때문에 정토회에서 행해지는 의식이 것이 곧 불교의 전통 문화인 줄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여름에 덥기 때문에 법복 상의를 벗고 절을 하는 부분입니다. 저고리를 벗고 있었다면 어른이 왔을 때 다시 저고리를 입고 인사를 해야 하잖아요. 그것처럼 기도할 때는 저고리를 입고 기도를 해야 하는데 기도할 때 다같이 저고리를 벗고 티셔츠 차림으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체육 활동을 하기 전에 윗옷을 벗는 것과 같은 모양새입니다. 그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자세입니다. 기도란 것은 더워도 더위에 구애받지 않고 추워도 추운 것에 구애받지 않는 것인데 더운 것은 이해가 되지만 기도를 하면서 윗옷을 벗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문제는 개선이 되면 좋겠습니다.
연구를 좀 해보세요. 기도를 할 때 너무 덥다면 여름 한철은 아예 여름용 법복을 마련하든지요.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옷을 입고 끝까지 계속 하든지요. 중간에 벗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전통을 지키려면 그대로 지키고, 못 지킬 것 같으면 아예 안 하든지 해야 합니다. 이것을 속박으로 느끼지 마세요. 문화란 것이 원래 그래요. 수행자는 옷매무새를 소박하되 여법하게 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으니까 이 점을 염두에 두시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경직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문화를 잘 보존해서 밖에 사람들과 소통이 되도록 생활하는 것이 수행자다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님의 애정어린 조언에 많은 반성과 돌아봄이 있었습니다. 공동체 대중들은 스님의 조언을 명심하고 앞으로 전통 의식을 어떻게 계승해 나갈지 깊이 있게 연구하고 의논을 하기로 했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곧바로 정토회관을 나온 스님은 김홍신 작가님과 박지나 JTS 대표님과 함께 인천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오전 10시 10분 비행기로 인천을 출발한 비행기는 2시간 30분을 비행하여 러시아 현지 시간으로 오후 1시 30분 무렵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스님은 원고 교정 업무를 계속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인천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비행기 항로가 이상했습니다. 보통 동해 영공을 통해 바로 가는데 오늘은 북한의 영공을 피해서 중국의 단둥 쪽으로 갔다가 다시 꺽어서 중국 영공을 통해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능 항로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서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오늘은 예외적으로 이렇게 간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스님은 “지금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어서 그런 것 같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 남북 간 긴장 고조로 평소와 달라진 비행 항로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내리자 러시아의 상트페트르부르크 석좌 교수인 이창주 교수님과 국제한민족재단 간사님들이 반갑게 스님 일행을 반겨 주었습니다.
이창주 교수님은 광복 70년과 한러 수교 25주년을 기념해 지난 8월8일부터 엊그제까지 13박 14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 유라시아 대장정’을 마치고 스님 일행에게 연해주의 독립운동 성지 복원 사업을 안내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어제 먼저 와 있었습니다. 이창주 교수님은 공항에 내린 스님 일행을 곧바로 연해주에 위치한 ‘신한촌 기념탑’으로 데려갔습니다.
차로 이동하며 이창주 교수님은 스님과 김홍신 작가님에게 신한촌이 독립운동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목청껏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신한촌은 상해임시정부의 모체인 국민회의가 수립된 독립운동사의 성지란 말입니다. 그리고 연해주 조선인 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였고 재정적 후원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뒷받침해 준 최재형이 활동하던 곳입니다. 또 무엇보다 최초의 코리아타운입니다. 원래 처음 이주해 간 곳인 구한촌이 있었고, 신한촌으로 옮겨간 것이지요.”
설명을 듣고 스님이 이 교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여기는 ‘조선’이라는 표현을 안 쓰고 ‘한’이라는 표현을 써서 신한촌이라고 한 걸까요? 그 당시에는 다 조선이라고 불렀을 것인데...”
“이상설 선생이 대한제국의 ‘한’에서 따와서 한촌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있고요...”
“독립운동가들 중에 이곳을 안 거쳐 간 사람이 없잖아요?”
“그렇죠. 안창호도 그렇고 이동휘도 그렇고... 역사 기록으로는 1863년에 한인들이 처음으로 이곳에 이주해 왔다고 하는데 이런 황무지에서 농사를 지어서 성공을 한 겁니다. 그리고 이곳은 시베리아 대륙 횡단 철도의 출발지이자 종착지입니다. 연길에서 버스를 타면 여기까지 5시간이 걸린다고 하고요.”
이렇게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동해 바다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이곳 바다는 겨울이 되면 꽁꽁 언다고 합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톡 내항만은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극동 지역을 확보하고자 했는지 얼핏 짐작이 갔습니다.
블라디보스톡 시내에서 잠시 꽃집에 들러 카네이션 몇 송이를 산 후 신한촌 기념탑에 도착했습니다. 철창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고 길쭉한 기둥 모양을 한 세 개의 탑이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먼저 기념탑 앞에서 이창주 교수님이 신한촌과 관련된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 신한촌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창주 교수님
“여기가 바로 신한촌입니다. 당시 약 20만명의 조선인들이 살던 코리아타운이였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아파트 단지가 되어 있지만 바로 이곳이 상해임시정부의 모체가 된 국민회의 진영을 비롯한 모든 독립운동 세력들이 집결한 터전이였습니다. 원래 살고 있었던 구한촌이 있었는데 이쪽으로 옮겨 오면서 완전히 민족 세력화를 이루면서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이 일대에서 최재형의 재정적 지원 하에 안중근 같은 분들이 훈련을 하였고 많은 독립운동 세력들이 이곳에서 양성되었습니다.
그런데 1920년 4월에 일본의 대대적인 신한촌 습격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때부터 신한촌이 붕괴되고 뿔뿔히 흩어졌는데 그 때도 고려인들의 일부는 남아서 거주를 했습니다.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정책이 시행되고 나서는 그 흔적조차 사라져 버렸죠.
불행한 것은 1921년에 있었던 자유시 참변입니다. 러시아의 적군(붉은 군대)이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사살한 사건인데, 이 사건으로 독립군 960여명이 전사하고 1800여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어요.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 비극이죠. 그 배경은 독립군 세력들 간의 헤게모니 싸움에 러시아의 백군(하얀 군대)과 적군(붉은 군대)이 가담합니다. 짜르 왕조를 유지하려고 했던 반혁명 세력이 백군이고 볼셰비키 혁명 세력이 적군인데 이 두 세력이 계속 싸웠죠. 그러다가 백군은 일본군의 지원을 받습니다. 일본군은 백군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이곳에 출병해 들어오면서 우리의 독립군들도 소탕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독립군들은 적군에 가담하게 됩니다. 독립군과 러시아 적군은 일본군과 러시아 백군을 많이 전사시켰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군은 이곳 신한촌 일대를 습격하고 대토벌을 자행합니다. 이에 연해주의 독립군들도 북방으로 후퇴하면서 자유시에 집결하게 되었습니다.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들을 러시아의 적군은 대대적으로 포위 사살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연해주의 독립군 세력은 사실상 모두 궤멸됩니다.
이곳이 최고로 번성할 시기에는 해외와 국내의 모든 독립운동 세력들이 다 이곳에 집결했습니다. 여기서 전략을 수립하고 논의했습니다. 이곳 출신인 최재형은 나중에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재정 부장이 되요. 그 사람이 없었으면 독립운동은 어려웠어요. 러시아의 거부인 아버지에게 입양을 가서 아버지로부터 돈을 버는 방법을 배워서 엄청난 거부가 된 사람이거든요. 그 돈을 전부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한 겁니다.”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주는 이창주 교수님의 눈빛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화려했던 독립운동의 역사를 뒤로 하고 초라하게 남아 있는 기념탑을 가르키며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초라한 모습을 한번 보세요. 이곳이 과연 민족 독립운동의 성지이고 최초의 코리아타운이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에는 국회 외교통일위원 11명이 와서 참배하고 갔다고 하는데 그 이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그나마 해외한민족연구소라는 민간단체에서 이 기념탑을 세웠는데 가장 높은 것은 남한 동포를 상징하고 두 번째 높은 것은 북한 동포를 상징하고, 세 번째 높은 것은 해외 동포를 상징합니다. 이 기념탑 하나 덜렁 세워놓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교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에 계속 ‘쯧쯧’ 하며 혀를 찼습니다.
스님은 교수님의 설명을 다 듣고 나서 기념탑 앞에 서서 헌화를 한 후 묵념을 했습니다. 조용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눈을 가만히 감고 있으니 먼 이국땅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호국 선열들의 열망과 함성이 귓전에 들리는 듯 했습니다. 선열들의 못 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통일 한국을 꼭 이뤄내야겠다는 간절한 염원이 솟아났습니다.
스님은 함께 애국가를 부르자고 했습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독립군이 되어 애국가를 불러 보았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이국 땅에서 애국가를 부르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스님은 이창주 교수님에게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사업 계획을 좀 얘기해 주세요” 라고 물었습니다. 교수님은 주위를 가르키며 자세한 사업계획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곳이 워낙 방치되고 있으니까 우선 이 둘레에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한 열사들의 동상을 세우려고요. 안중근 의사, 최재형 열사, 홍범도 장군, 도산 안창호 선생, 이동휘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상설, 이위종, 이준 등 많은 분들이 신한촌에서 활동했거든요. 또 앞에 이 길을 막아서 저 아래까지 땅을 구입해서 ‘발해 통일각’이라는 정각을 세우고요. 왜냐하면 이곳에는 발해의 흔적이 서려 있거든요.
관리사무소도 지금 임시로 만들어서 쓰고 있는데 저기 서 계신 고려인 분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이곳에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할 것 같아요. 우스리스크에 가면 고려인문화센터가 있는데 거기는 고려인들의 삶을 전시했다면 여기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전시해야 합니다. 당시 사진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것들을 전시하려고요. 또 신한촌의 초기 조선인 가옥도 이곳에 복원하면 좋겠어요.”
기념탑 한쪽 구석에는 관리사무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관리사무실은 고려인 한 분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또 월급을 받는 분이 아니고 방문객들이 조금씩 기부를 하고 가는 것이 수입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방명록에 사인을 한 후 이곳 독립운동 성지의 복원을 발원하는 짧은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지키는 고려인 분에게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한 후 성금을 전달했습니다.
▲ 신한촌 기념탑을 지키고 있는 고려인
참배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한국에서 아주머니들 그룹이 미니 버스를 타고 찾아와 애국가를 부르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그 뜻을 기리는 모습과 마주쳤습니다. 스님은 “민족의 성지까지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대한민국은 아줌마들이 나라의 기둥입니다” 라고 인사를 하자 너무나 기뻐하며 스님과 함께 기념탑 앞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고려인 분이 이 옆에 50미터 떨어진 곳에 땅을 확보해 박물관을 지어보고자 설계까지 했다며 사진과 지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걸어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아파트 사이에 위치한 작은 둔턱을 가리키며 이 일대에 옛날에 학교, 출판사, 신문사가 다 있었다며 여기에 건물을 짓고 싶다고 했습니다. 일단 위치만 파악해 두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신한촌 방문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스님은 “왜 스탈린이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시켰어요?” 라고 교수님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이 답했습니다.
“고려인들 중에 일본인들의 첩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소수 민족들의 단결을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강제 이주를 시킬 때도 한 번에 이주시키지 않고 소규모 단위로 분산을 시켜서 전체를 조금씩 다 떨어트렸다고 해요. 강제 이주를 시키기 전에는 이곳에 조선인 학교가 있었고 조선말로 된 신문이 발행되었고 사람들도 다 조선말을 썼어요.
그런데 이주한 이후에는 조선말을 일체 못 쓰게 했습니다. 조선인 학교도 못 세우게 하고, 조선인 신문도 발간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또 조선인에 대해서는 공무원도 못 되게 하고 대학도 못 들어가게 하고 군인도 되지 못하게 했어요. 그 이유는 유일하게 융합이 잘 되는 민족이 조선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전체가 완전히 단결이 되어 있었으니까 나중에 민족 부락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죠. 그래서 그 민족성을 말살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끔찍한 건 1937년에 강제 이주시킬 때 조선인 지도자급들 1500여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점입니다. 지금까지도 어디로 추방했는지 파악할 방법이 없습니다. 아주 조직적이고 철저하게 조선인에 대한 숙청 작업을 한 것이죠.”
교수님 얘기를 들으니 정말 가슴이 메이는 것 같았습니다. 스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인들은 조선에서 이곳으로 이주를 해 온 사람들이고, 나라가 독립이 되면 다 자기 나라로 돌아갈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 했을까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고 있는데 교수님은 그 뿐 만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조선인들이 이 지역의 대표적인 경제 세력이며 민족 세력이었어요. 소련 정부로서는 위협이 되었던 것이죠. 고려인들은 지금까지 국적을 7번 바꾸었다고 해요. 대한제국 시절에 이쪽으로 왔어요. 그리고 나라가 망하자 일본 국적이 되었어요. 다시 일본이 패망하니까 무국적으로 있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이 되었어요. 그러다가 다시 소련 국적이 되었어요. 그런데 소련이 망했잖아요. 다시 러시아 국적이 되었어요. 그런데 지금 나이 먹은 사람들은 한국으로 많이 가는데 이제는 대한민국 국적으로 다시 바꾸게 된 것입니다. 무려 7번이나 국적을 바꾼 것이죠. 얼마나 서러운 일입니까.”
고려인들의 가슴 아픈 역사는 정말 끝이 없었습니다. 이 정도로 대화를 마무리 짓고 숙소로 올라가 짐을 풀었습니다.
다시 숙소에서 나와 걸어서 시내로 향했습니다. 숙소 앞에는 동해 바다가 넓직히 펼쳐져 있었습니다. 겨울이 되면 바다가 꽁꽁 얼어서 차가 바다 위로 다닐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여름 날씨여서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수영복을 입고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 블라디보스톡에서 바라 본 동해
바닷 바람을 맞으며 걷다가 원래 처음으로 조선인이 이주해 살았다고 하는 구한촌 지역에서 한 식당으로 들어가 저녁을 먹었습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고려인들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되었습니다.
내일은 새벽부터 발해 유적지 답사를 가기로 해서 아침과 점심을 제대로 못 먹기 때문에 마트에서 시장을 보기로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마트에 들러 시장을 본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그리고 마트로 가는 길에 블라디보스톡 기차역이 있었습니다. 이 기차역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출발한다고 해서 잠시 가까이 내려가 보았습니다. 기차역 플랫폼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 거리를 상징하는 ‘9288’이라는 숫자가 적힌 탑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출발역이자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톡 역
기차역에 멀뚱히 서서 ‘남북이 통일 되면 아침에 부산역을 출발하여 점심 때 이곳 블라디보스톡 역을 통과하여 저녁에 모스크바 역에서 보드카 한 잔 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통일의 그날이 오길 간절히 기도하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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