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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연해주 일대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와 발해 유적지 답사를 마치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인천공항으로 귀국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 위치한 숙소에서 새벽 3시 30분에 기상해 108배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한 스님은 업무를 보다가 아침 7시에 1층 로비로 내려와 국제한민족재단 이창주 교수님 일행과 아침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이번 연해주 일대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답사에 대해 간단히 평가를 했는데 국제한민족재단 이창주 교수님은 신한촌 기념탑 성역화 사업을 스님이 중심이 되어 추진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스님은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해서 해야할 일이니 김홍신 작가님께서 기념비문을 쓰시고, 이창주 교수님이 기본 설계를 하셔서 추진하고, 스님은 추진 위원회를 구성해서 적극 참여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숙소 앞에서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은 후 스님은 이 교수님 일행이 공항으로 출발하는 것을 배웅해 주었습니다.
▲ 국제한민족재단 이창주 교수님 일행과 함께
이동할 수 있는 차량이 없어서 오전에는 걸어서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과 인근의 부두를 산책해 볼 계획이였는데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리는 바람에 일정을 취소하고 숙소에 머물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12시에 숙소를 나와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으로 이동하면서는 연해주 지역의 항일독립운동사와 관련해 스님과 김홍신 작가님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작가님이 스님에게 “신한촌 참변이 한국 사람들에게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고 말씀을 드리자 스님은 “나도 이번에 자세히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곳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역사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러시아 적군과 한인 독립군이 1920년 3월에 러시아 백군과 일본군을 공격해서 승리를 했죠. 거기에 화가 나서 일본군이 신한촌 참변을 일으켰고, 그 영향으로 한인 독립군이 자유시로 물러나게 되죠. 즉 신한촌 참변이 있은 후 여기 있던 한인 독립군들도 북쪽의 자유시 쪽으로 갔고, 또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 후 북간도의 독립군들도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에 쫓겨서 먼저 밀산으로 집결해서 12개의 독립군 조직을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을 창립한 후 러시아 국경을 넘어 자유시로 갔습니다. 그래서 동북 지역에 있던 모든 독립군 세력이 자유시에 모인 겁니다. 즉 연해주에 있던 독립운동 세력과 북간도에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전부 자유시에 모이게 되어서 그 부대의 규모가 3500여명이나 된 것이죠. 그래서 통합 사령부의 군권을 누가 쥘 것인가를 갖고 러시아 내 독립군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된 겁니다.
즉 당시 러시아 극동 정부의 허락을 받은 세력인 상해파와 볼셰비키 정부의 코민테른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세력인 이르쿠츠크파가 서로 군권 다툼을 하다가 1921년 6월 적군의 지원을 받은 이르쿠츠크파가 상해파를 무장해제 시키려다 저항하는 상해파를 포위 공격해서 천여명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통해 쌓아놓은 엄청난 독립군의 영향력을 일순간에 잃어버린 것이지요. 이것이 자유시 참변입니다.
이 과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일본군이 독립의 가장 큰 적이였지만 강제 이주도 그렇고 자유시 참변도 그렇고 소비에트의 공산당 또한 우리의 독립운동 세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 겁니다. 왜냐하면 러시아 쪽에서는 노동자 혁명이 중요했지 약소 민족의 해방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거든요. 쉽게 말하면 독립군은 민족 해방을 중요시했고, 볼셰비키는 계급 혁명을 중요시 했으니까요.
이렇게 자유시 참변 때 독립운동 세력이 대부분 붕괴되었고, 이 사건 이후로 홍범도 장군 같은 위대한 군인도 러시아 적군에 편입되었다가 후에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고 말년에 극장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쓸쓸하게 죽게 됩니다.
통일이 되어야 이런 문제들이 모두 정리될 수 있어요. 러시아가 지금도 공산당 정부라면 진상규명이 어려울 것인데 러시아가 이제 공산당 정부가 아니기 때문에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이나 자유시 참변 같은 것들을 이제는 진상을 규명할 수 있을 겁니다.”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이런 아픔이 있었다니... 가슴이 아렸습니다.
스님은 말씀을 하시다가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아이고, 역사를 보면 참....”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그리고 스님에게 “그 많은 고려인들을 왜 고국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시켰을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이 지배하고 있었으니까 고려인들을 조선으로 추방하기 보다는 소비에트 전역에 분산 배치를 시킨 것 같아요. 고려인은 중앙아시아로 배치하고, 우크라이나 인들을 이곳 연해주로 배치하고요. 각 민족을 흩어 버린 것이죠. 당시 연해주 쪽에는 고려인이 많이 건너와서 굉장한 단결력을 보여주니까 민족주의를 우려한 것이죠.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고 난 후 그 빈 자리에 우크라이나 인들을 배치했는데, 우크라이나 인들이 여기 와 보니까 집도 깨끗하고, 텃밭도 그대로 있고, 가구도 그대로 있었다고 해요. 24시간 안에 무조건 짐을 싸서 나가라고 했으니 텃밭에 감자가 그대로 다 심어져 있었고, 추수를 앞두고 추수도 못하고 그냥 강제 이주가 된 겁니다. 중앙아시아로 가다가 엄청나게 많이 굶어 죽었거든요. 소련 공산당이 그런 식으로 했기 때문에 결국 망한 겁니다. 인간성이 없잖아요. 오직 자본가 계급에 대한 증오심으로 혁명을 했기 때문에....”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추수도 못하고 그냥 떠나야 했던 고려인들의 아픈 역사가 다시 가슴 속을 짓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선조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의 아픔을 모두 치유하고 그들의 희생을 가치있게 하는 길은 결국 통일 한국을 이루어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통한의 역사를 뒤로 하고 스님 일행은 블라디보스톡 공항에서 인천행 비행기에 올라탔습니다. 스님은 비행기 안에서도 김홍신 작가님과 역사 문제에 대해 긴 시간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2시간 40분을 비행하여 오후 5시 무렵 인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저녁 6시 30분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한 스님은 먼저 내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 선언 기자회견 실무 준비를 점검했습니다. 우선 기자회견 퍼포먼스에 사용될 철조망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기자들이 사진을 찍기에 모양이 적절한지 살펴보았습니다.
▲ 내일 기자회견에 사용될 철조망
그리고 내일 기자회견 퍼포먼스에서 철조망을 자르고 난 후 비둘기 모양의 풍선을 하늘로 날리는 장면을 연출하게 되는데 풍선이 어떻게 제작되었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저녁 7시에는 법당에서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예불을 올렸습니다.
이후에는 집무실에 머물면서 내일 오전 10시 30분에 있는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 선언 기자회견과 오후 3시 20분부터 시작될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24시간 1000일 기도 입재식 관련 실무 준비 사항을 점검하면서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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