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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흥륭사의 대불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5일째를 맞이하여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를 둘러본 후 봉오동 전투 기념비를 참배하고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동북아 역사 대장정 넷째날이 밝았습니다. 어제 백두산 천지를 보고 와서 즐거운 마음에 4시 40분까지 버스 탑승을 하고 오늘의 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은 발해의 유적을 보러 발해진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아침 식사는 버스에서 옥수수로 가볍게 먹었습니다. 발해진으로 이동하던 길에서 오전 6시쯤 요전자 24개석에 들러 다함께 유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 요전자 24개석
요전자 24개석은 돈화시 대산저자향 요전자촌 동쪽의 높은 언덕 위에 있는 발해시대의 유적입니다. 유적은 한적한 시골 마을의 옥수수밭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마을의 골목길로 들어서니 코스코스가 예쁘게 피어 있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아직 이 유물의 사용 용도는 밝혀지지 않고 있어서 스님은 “오늘 여러분들 중에 누군가가 이것을 밝혀내면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을 것” 이라며 웃었습니다.
다시 버스로 이동해 오전 7시 30분경 발해 시대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왕궁터가 있던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상경용천부는 발해의 세 번째 및 다섯 번째 수도로서 약 162년간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던 곳입니다. 우선 상경용천부 전체 모형이 있는 박물관에 들러 발해의 영토와 외성과 내성 및 궁성의 모습 등을 살펴보며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 상경용천부의 동궁 옆에 위치한 연못인 ‘어화원’이 있었던 자리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
스님은 발해의 내성이 외성의 뒤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었는데, 그 이유는 “옛날 문명에서는 앞으로만 공격하고 뒤로 공격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였습니다. 왜 신분의 차이가 나는 이민족에게 쉽게 망하는 약점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청년들이 “설마” 하며 웃음을 짓자, 스님은 즉문즉설에서 보듯이 관점의 전환은 쉽지 않음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사고가 그렇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나니 평소 우리가 풀 수 없는 문제도 관점만 바꿀 수 있다면 쉽게 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오봉루의 양쪽으로 난 문
이어서 상경용천부 일대를 거닐며 얼굴 모양의 연못으로 만들어진 어화원과 오봉루, 회랑의 주춧돌, 궁전터, 성터 등을 직접 발로 밟고 손으로 만져보며 1000년 전 발해 당시를 상상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양 옆으로 문이 나 있는 오봉루의 성벽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수풀이 우거진 옛 발해 궁터를 거닐며 그 옛날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회랑의 주춧돌을 가르키며 규모 면에서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궁성의 서쪽 회랑에 왔습니다. 회랑은 보통 비도 피하고 햇빛도 피하는 역할을 하죠. 여기도 주춧돌이 있고, 저기도 주춧돌이 있고, 저기도 주춧돌이 또 있죠. 여기에 집을 지어서 가운데로 다니는 것이 회랑이죠. 그런데 이곳 회랑은 길이 세 개예요. 그래서 회랑의 폭이 엄청나게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죠.
▲ 서쪽 회랑이 있었던 자리
가운데는 임금이나 왕족들이 다니는 길이고, 오른쪽은 시녀들이 다녔거나, 왼쪽은 대신들이 다녔거나 했을 것 같아요.
여러분들이 실눈을 감고 가만히 걸었을 때 회랑 바깥쪽 길로 가는 것이 편안하면 전생에 하인이였고, 여기 안쪽 길로 가는 것이 편안하면 궁중에 살았던 궁녀였고, 가운데 길로 가는 것이 편안하면 왕족입니다. 하하하.” (웃음)
스님이 이렇게 농담을 하자 청년들은 웃으면서 서로 가운데 길로 걸어가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오봉루, 제1궁전부터 제2궁전, 제3궁전, 제4궁전, 제5궁전과 북문까지 차례로 살펴보았습니다.
▲ 1,2,3호차 차량별로 단체 사진
▲ 제5궁전 터에서 바라본 제4, 제3, 제2, 제1 궁전 터의 모습
다시 성터를 걸어나오는 길에 꽃이 만발한 제1궁전 앞마당 터에 앉아 무변심 법사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법사님의 노래를 들으며 성터를 바라보니 그 당시 동북아 최대 영토를 가졌던 대국의 느낌과 감동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궁터 안에는 예쁜 꽃들이 많이 피어있어서 청년들의 얼굴에도 꽃이 피었습니다.
궁성을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북문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큰 호수인 현무호를 보았습니다. 현무호는 상경용천부 왕궁터의 성벽을 쌓는데 쓰인 돌을 채석하느라 생긴 얕은 호수라고 합니다. 호수의 크기를 보며 성벽을 쌓는데 얼마나 많은 현무암이 들어갔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 현무호
다음은 상경용천부 외성 안에 위치한 흥륭사를 방문했습니다. 흥륭사는 발해 시기에 건립된 절인데 발해가 멸망한 후에 불이 나서 없어졌다가 청나라 강희제 때 다시 복원된 곳입니다. 석등의 크기로 봐서 대웅전이 얼마나 컸을까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 흥륭사
스님은 발해 시대의 대불이 모셔져 있는 법당으로 들어가 사시불공을 올린 후 청년 역사기행팀을 위해 발원과 축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 법보와 보살성문 스님들께 지성귀의 하오며 간절히 발원하옵나이다. 발해 시대 상경용천부 내에 소재한 흥륜사 대불 앞에 선 저희들은 한국에서 온 청년정토회 대중 일동과 청년 포럼 대중 일동과 청년리더십아카데미 대중 일동 등 130여명이옵니다. 발해 멸망 이후 1100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렇게 부처님을 찾아 뵙고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예불을 드리오니 지난 천년 동안 저희가 찾아뵙지 못함을 굽어 용서하옵소서.
때가 이르러 이제 이렇게 찾아 뵙고 두 손 모아 합장하오며 간절히 발원하옵나니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고 갈라진 남북을 통일하고 온갖 갈등 속에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발원하옵나니 저희의 이 귀한 발걸음과 간절한 발원을 어여삐 여기시어 증명하여 주옵시고 옹호하여 주옵소서.
한나라를 계승한 배달 나라, 배달 나라를 계승한 조선 나라, 조선 나라를 계승한 부여 나라, 부여 나라를 계승한 고구려 나라, 고구려 나라를 계승한 발해 나라, 하늘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천손의 역사가 발해 멸망 이후 천년 동안 후손을 잃고 역사를 잃어버리고 민족 혼이 없는 백성으로 떠돌며 조그만 반도 이남에 갖혀 동북아 대륙의 변방으로 떨어져 스스로를 약소 민족이라 생각하고 용기를 잃고 실의에 빠지고 사대에 치우쳐 남의 손으로 무슨 일이든지 할려고 했었습니다. 오늘 발해의 기상을 받아 모든 부족함을 떨쳐버리고 스스로 자존심을 회복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하고 남북 통일을 이루고 동북아 이웃 나라들과 함께 손을 잡고 동아시아 문명의 꽃을 피워 인류 문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을 발원하옵고, 저희 ?은이들이 이런 기상을 갖고 큰 원을 발하고 그 발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살아갈 것을 맹세하오니 제불 보살님들께서는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과 조상 모든 신들은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
오늘 이와 같이 발원한 인연 공덕으로 동북아 역사기행에 참여한 청년 대중 일동은 사대가 강건하고 정신이 맑고 뚜렷하여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원을 성취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시고, 과거 생애 지은 잘못으로 받아야 할 인연의 과보가 있다면 기꺼이 받아 넘기는 용기가 있고 갖가지 재앙이 물러날 것을 발원하옵나니 이 젊은이들을 굽어살펴 주옵소서.
이 역사기행이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천신과 조상신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발해의 기상을 이어 받아 남북 통일을 이루고 동북아 공동체로 나아가 아시아 문명의 꽃을 피워보자는 스님의 간절한 발원을 나의 발원으로 되새겨보며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대불이 모셔진 법당 밖으로 나오니 큰 석등이 그 위용을 보여 주었습니다. 특히 석등은 교과서에 소개되어 있어서 발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유물 가운데 하나인데 대중들은 석등 앞에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었습니다.
▲ 발해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 석등
흥륭사를 나와 발해진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습니다. 11시 30분경 식사를 마치고 도문으로 출발했습니다. 버스에서는 그동안 역사기행을 하며 궁금했던 점에 대해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청년이 “스님이 북한돕기를 하시는 열정은 어디서 나오시는지 궁금하다”고 묻자, 스님은 “사람이 굶어죽는 모습을 직접 본 경험이 컸다”고 이야기해 주어서 경험이야 말로 가장 큰 원동력이 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후 3시경에는 1920년대 있었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 전투터인 봉오동 전투 기념비를 참배했습니다. 봉오동은 1920년 6월 7일 독립군의 홍범도 장군이 반일 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지핀 곳입니다. 역사기행단은 먼저 기념비에 새겨진 내용을 함께 읽으며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 봉오동 전투 기념비
“1920년 6월 7일 반일명장 홍범도를 사령으로 최진동을 부사령으로 한 조선민족독립운동 대한북로독군부(반일 독립군)는 협산벽곡 봉오골에서 두만강을 건너 침입한 야스가와소좌가 거느린 일본군 19사단 소속부대, 아라요시 중위의 남양경비대와 싸워 세계를 진강한 반일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지었다. 반일 독립군은 빈틈 없이 매복전을 쳐놓고 있다가 오후 한시경 일본군이 기여들자 삼면고지에서 일제히 불벼락을 퍼부었다. 이 맹격전에서 일본군 150여명을 사살하고 10명을 부상 입혔으며 보총 60여자루와 기관총 3정 및 권총과 탄약 등 무기를 로획하였다. 연번반일투쟁에서 거둔 이 승첩은 일본 침략자들의 기염을 여지없이 꺽어 놓았으며 인민 대중의 반일 투지를 크게 북돋아주었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 일제는 경신참변을 일으켜 민간인 3600여명을 학살하였다는 얘기를 듣고 당시 간도에서 독립군들을 위해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제공하고 희생된 수많은 조선족 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봉오동 전투터는 도문시에서 서북쪽으로 7.5km 떨어져 있는데 지금은 도문시 ‘봉오동 저수지’가 축성되어 전투가 일어났던 현장은 안타깝게도 수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봉오동 전투 기념비 앞에서 스님께 봉오동 전투의 경과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후 다함께 그 뜻을 기리는 묵념과 제사를 함께 지냈습니다.
참배를 마친 뒤 다시 버스를 타고 도문으로 이동했습니다. 도문시에서 두만강을 따라 10여분 올라가니 한반도 최북단 마을인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북위 43도)를 먼 발치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두만강을 끼고 우리 나라 최북단을 바라보니 마치 지도 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 한반도 최북단 마을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
도문시는 두만강과 부르하퉁하가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조선말 가렴주구와 일제 침략을 피해 이 지역으로 사람들이 피난오면서 이곳에 많은 조선족들이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만강을 바라보며 ‘눈물 젖은 두만강’과 ‘라구요’를 함께 부르면서 다시한번 울컥한 마음이 들었고, 다시 한번 통일에 대한 열기가 마음 속에 뜨겁게 올라왔습니다.
▲ 두만강
다음으로 인근의 조중우호다리를 찾았습니다. 조중우호다리는 민족의 삶과 애환이 점철돼 있는 곳입니다. 두만강 유역의 여러 세관 중에서도 북한과 인적 물적 교류가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도로와 함께 철도 교통도 편리한 요충지입니다. 이곳에서 좋은벗들 활동을 했던 이승용 선생님은 대중들에게 “북한이 고난의 행군시절 이곳으로 수많은 난민이 건너왔다”고 하면서 당시에 난민들이 중국으로 넘어와 겪어야 했던 고통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 조중우호다리
다음은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연길로 출발했습니다. 연길은 연변 조선족자치주 인민 정부의 소재지이며 자치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조선족이 인구의 59%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연길의 한 북한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북한 식당에서 북한 종업원들을 만날 수 있었고, 식사 후에 ‘반갑습니다’ 라는 노래를 시작으로 북한 노래와 한국 동요들을 부르는 공연을 볼 수 있었고, 노래 부르는 북한 공연팀을 보면서는 통일이 되어 자유롭게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 보았습니다.
식사 후 연길의 숙소에 도착한 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다섯 번째 주제로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강연을 했습니다.
먼저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된 독립운동을 통합해내는 힘이 부족했음을 언급하면서 지금의 우리는 어떤 점을 배울 수 있는지 말씀해준 부분은 많은 깨우침을 주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나름의 처지에 따라 무장투쟁을 하게 된 사람도 있고,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도 있고, 독립 준비를 해야 된다는 사람도 있고, 외교를 해야 된다는 사람도 있었던 겁니다. 미국에 간 사람은 미국에서 어떻게 무장 투쟁을 할 수 있었겠어요? 미국과 외교를 좀 잘해서 미국의 힘을 빌리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어쨌든 총 들고 싸우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이 사람은 잘 했고, 저 사람은 못했다가 아니라 각각 다 자기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외교도 해야 하고, 국내에서는 무장 투쟁을 못하니까 평화적인 운동을 해야 하고, 국경 넘어서는 무장 투쟁도 해야 하고, 그런 가운데 아이들은 교육시켜야 하고, 먹고 살아야 하니 산업은 진흥시켜야 하고, 모두 다 필요한 일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을 인정하면서 서로 역할 분담을 하지 않고 ‘너는 틀렸다’ 고 하면서 갈등을 했기 때문에 똑같이 독립을 지향하면서도 통합이 되지 못하고 분열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방식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서울로 가기 위해서 춘천에서는 서쪽으로 가고, 수원에서는 북쪽으로 가고, 인천에서는 동쪽으로 가면 되는데, ‘동쪽으로 가야 되는데 왜 너는 북쪽으러 가자고 그러느냐?’ 이렇게 싸운 겁니다. 이건 싸울 일이 아니였어요. ‘너는 너 처지에서 산업을 진흥해라’, ‘너는 너 처지에서 외교를 잘 해라’, ‘너는 너 처지에서 무장 투쟁을 해라’ 이렇게 해서 모아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수평적으로 같을 수는 없어요. 비중을 둬야 할 수 있습니다. 무장 투쟁을 1순위로 두되 외교도 한다든지, 비폭력 투쟁을 1순위로 하되 일부 소수 무장 투쟁을 한다든지 이렇게 역할 배치를 하는 것이 바로 정치입니다. 그런 정치력이 부족했습니다. 정치는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 관계를 조율하는 등 현실에서 가장 적절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절대적 선이란 정치에서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친미파는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하고, 친중파는 중국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하고, 친북파는 북한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하죠. 그런데 서로 다른 세력을 통합시켜서 우리의 이익을 최대화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친미파가 미국을 설득하기 쉬울까요, 반미파가 미국을 설득하기 쉬울까요? 친미파죠. 북한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친북파가 설득하기 쉬울까요, 반북파가 설득하기 쉬울까요? 친북파죠. 그래서 우리는 친미파도 필요하고, 친북파도 필요합니다. 자꾸 저 사람들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역할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가 중요한 겁니다.”
이어서 스님은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으로 기록된 청산리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전쟁을 과연 어떤 관점에서 조망해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약 일주일 동안 청산리 지역 인근에서 벌어진 7~8차례의 전투를 통해 일본군 사망자만 1500여명, 부상자까지 포함하면 33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즉 사단 병력의 4분의 1이 괴멸된 것입니다. 유격대에 불과한 독립군들이 일본의 정규군을 상대로 이뤄낸 성과이기 때문에 이 청산리 전투는 전쟁사에서도 길이 빛나는 일이 되었고, 한국 사람들에게도 큰 감흥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전투의 승리만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공격해서 승리한 것이 아니고 쫓겨 다니다가 반격을 해서 승리한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추격하는 정규군이 더욱 증강이 되고 그 성격도 더욱 악랄해졌습니다. 그래서 일본군들은 독립군도 쫓았지만 독립군을 협조했다는 명분으로 이곳에서 수십년을 대를 이어 땅을 개간하며 살아온 조선족 마을을 불질러 버리고 총을 쏘았습니다. 360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 당하고 엄청난 재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일본군의 만행을 우리는 ‘간도 참사’ 또는 ‘경신년 대참사’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청산리 전투에서 이겼다’, ‘봉오동 전투에서 이겼다’ 이것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 살던 민간인들은 아무런 나라의 보호도 못 받고 착취만 당하다가 겨우 이곳으로 넘어와 자기 힘으로 살고 있었고, 이 분들 입장에서는 나라가 독립되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었겠어요? 그런데 또 찾아와서 독립해야 된다고 해서 양식도 주고, 아들도 독립군으로 보내주고 했는데, 이번에는 일본군에 의해 독립군을 도와주었다고 목숨도 잃고 엄청난 재산도 파괴되는 고통을 겪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공로와 애환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김좌진 장군이 승리했다, 이런 이야기만 하잖아요. 백운평 골짜기에 20여 가구가 살았는데 독립군들이 찾아오니 밥을 해줄 수 밖에 없었겠죠. 그래서 독립군들은 밥 먹고 쉬고 올라갔을 뿐인데, 일본군이 추격해 왔다가 매복전에 당해서 사상자가 생기니까 산에서 내려오다가 화가 나 백운평 동네에 불을 지르고 ‘불이야!’ 하고 뛰어나오는 마을 사람 100여명을 다 조준해서 쏴 죽인 겁니다. 이런 참사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전쟁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항상 비극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에 참여한 일본 군인들도 나쁘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도 사실 무슨 죄가 있어요?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강제 징집을 당해서 그 먼 곳까지 와서 골짜기에서 개죽음을 당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전쟁을 새롭게 조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쨌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 위해서는 이런 희생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록되어 있는 몇몇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보다 열배 백배 천배 더 많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희생 위에 오늘 우리들의 삶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역사에 기록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분단으로 인해 독립운동사가 어떻게 왜곡이 되었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었습니다. 독립운동사의 재정립 필요성과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그 처지에 맞게끔 효과적으로 활동을 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승만은 무장 투쟁을 안 했나?’ 이렇게만 생각합니다. 이곳 만주는 조국과 가까워서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거리입니다. 또 강을 사이에 두고 있고, 이곳은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정글입니다. 은폐하기가 쉬웠죠. 그리고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동포가 살고 있었습니다. 유격전을 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일 합방이 될 당시에 북간도와 서간도 합해서 이미 30만 가까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무장 투쟁의 좋은 근거지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아무튼 미국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든, 장개석 밑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든, 모택동 밑에서 하려고 했든, 러시아 밑에서 하려고 했든,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하려고 했든, 사회주의를 통해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든, 민족주의로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든, 거기에 관계 없이 조선 민족이라면 누구나 독립을 원하고 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데 남북이 갈라지니까 남북이 서로 ‘내가 더 민족사적 정통성을 갖는다’고 경쟁했죠. 그러니 남한은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 했던 것을 가르치면 이승만 정권의 정당성이 훼손이 되니까 이 부분을 다 빼버린 겁니다. 천안 독립 기념관에 가보세요. 이에 대한 내용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무의식 세계에는 독립운동을 한 것이 별로 없어요. 유관순 누나가 만세 불렀다, 윤동주 시인이 시를 썼다, 이런 것 외에는 기억하는 것이 거의 없잖아요. 그 정신은 숭고했지만 그것이 식민지배를 종식시키는데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독립운동을 안 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엄청난 독립 투쟁을 하고 희생을 치뤘지만 분단 속에서 자기 체제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 부분들 다 제외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독립운동의 빈곤감을 갖고 있습니다.
반대로 북한은 이런 독립운동을 다 인정하면 김일성의 신화가 존재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 없애버리고 오직 독립운동은 김일성 혼자 한 것처럼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이 독립운동 한 것만 알지 나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렇게 남북이 모두 역사 왜곡이 심각한데 이것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체제 경쟁 속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근대사에 대한 열등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본에게 져서 나라를 빼앗겼다는 것도 열등 의식이지만 힘이 부족해 나라를 빼앗겼지만 어떤 노력을 해서 되찾았느냐 하는 이것도 없다 보니까 더욱 열등 의식을 갖게 된 겁니다. 또 해방이 주어졌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미국이 해방을 해주었다고 생각하니까 다시 미국에 대해 사대가 더 커진 겁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생겨도 우리가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미국 눈치만 보고 그러잖아요. 미국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예요.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이런 근현대사의 왜곡은 분단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왜곡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쉽지 않아요. 상고사 부분은 유물과 유적, 사례 등 많은 것을 연구해야 극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러나 근현대사 부분은 통일되기 전까지는 극복되기가 어렵습니다. 북한이 정당성이 있었다고 얘기하면 금방 종북주의자가 되고, 또 현재 북한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고 얘기하면 이제는 반북주의자가 되어 버립니다.
역사는 사실에 근거해야 되는데 남한과 북한의 인식이 너무 차이가 납니다. 남한에서는 김일성은 만주의 마적당 출신이고 김일성 장군이라는 독립운동가가 있었는데 그 사람 이름을 차용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하고, 그런데 북한에서는 모든 독립운동은 김일성 장군님이 다 했다고 합니다. 조금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고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겁니다. 김일성 주석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인정하고, 또 반대로 보천보 전투가 국경을 넘어가서 초소 하나 습격한 것이지 무슨 큰 전투는 아니였고, 홍기와 전투는 100여명 정도 사상한 규모 있는 전투였고, 또 1940년대에 그 정도의 성과를 낸 것은 굉장한 일이었고,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독립이 된 것은 또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사실에 근거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는데, 독립운동 했다고 인정하면 친북주의자가 되고, 별로 큰 성과가 아니라고 하면 수령님을 모독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 놀음입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사를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독립운동이 있기 까지는 그 전의 이민사와 의병운동을 알아야 합니다. 그 배경을 알려면 1800년대 이후의 민중의 고통의 역사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역사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하며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하고 어떤 것을 계승해야 하는지 이렇게 지금의 답을 찾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분단으로 인해 너무나 차이가 나버린 독립운동사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청산리 전투터와 대종교 3인묘, 일송정 등 독립운동 유적지를 가게 되는데 오늘 스님의 강의가 내일 답사에 큰 여운을 남겨줄 것 같습니다.
조별 마음나누기에서는 오늘은 발해 유적지를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것과 발해 궁터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얘기들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두만강을 보면서 ‘라구요’라는 노래를 부를 때 슬펐다는 얘기도 나왔고, 또 스님의 독립운동사 강의를 들으면서는 친미파, 친북파도 능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는 얘기, 항일무장독립운동에서는 역사에 기록된 인물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의 희생과 일본군들의 희생도 컸다는 사실을 크게 느끼게 되었다는 얘기 등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스님의 강의와 마음나누기까지 마치니 밤11시가 넘었습니다. 피곤한 몸이였지만 오늘은 발해의 역사로부터 독립운동의 역사까지 방대한 시간 여행을 해서 그런지 마음은 뿌듯한 충만함으로 가득찬 것 같습니다.
내일은 긴 시간 산행을 하며 청산리 전투터를 가보고 이어서 대종교 3인묘, 일송정, 대성중학교를 방문해 보며 독립운동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 더 깊이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볼 예정입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 오늘 현장 스케치는 이유미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 변지민님이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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