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8.12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4일째, 백두산 그리고 발해의 역사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4일째를 맞이하여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에 오른 후 북쪽으로 올라가 발해의 첫 수도 동모산을 둘러보고 발해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드디어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민족의 성산, 백두산을 가는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들뜬 마음으로 4시에 일어나 중국식 아침 뷔페를 먹고 백두산 매표소로 향했습니다. 보다 빠른 시간 안에 백두산 천지를 보고자 각 조에서 한명씩 가서 매표소가 열기 전부터 줄을 섰습니다. 

 


▲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매표소 앞.

 

6시 정각 매표소가 열렸고, 선발대로 출발했던 매표 담당팀이 표를 흔들며 정문 앞 일행에게 다가왔을 때 모두 환호를 보냈습니다. 표를 나눠받은 조원들은 최대한 빨리 천지에 올라서 스님과 함께 경치를 즐기고픈 마음에 어린 아이들처럼 버스를 타는 곳까지 신나게 달렸습니다. 

 


▲ 표를 받자 버스를 타기 위해 달려가는 청년들

 

천지를 올라가는 봉고차는 8~9명이 탈수 있는 작은 차였는데 높은 천지까지 가파른 길을 롤러코스터처럼 올라 커브를 돌 때마다 짜릿한 기분에 모두 소리를 질렀습니다. 중국인 기사 아저씨께서 흥겨워하는 저희를 위해 한국 노래까지 서비스로 틀어주셨습니다. 커브를 돌아 한단 한단 올라가 천지에 가까워질 때마다 옆으로 보이는 경치는 놀라웠습니다. 

 


▲ 백두산 천지로 올라가는 길

 

끝없이 펼쳐진 푸르고 너른 광원, 그리고 빛나는 아침햇살이 점점 짙어지는 안개와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었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햇살이 보기 어렵다는 천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어 매우 설레였습니다. 

 

직접 눈으로 본 백두산 천지는 어느 사진, 어느 그림으로 보았던 것과도 달랐습니다. 크기는 백록담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활했으며 호수의 푸르름은 영롱했습니다. 한반도에 이런 경치가 있었다니, 풍경을 보면서 이렇게 놀란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백두산 천지는 아름다웠습니다. 

 


▲ 백두산 천지

 

걸어도 걸어도 계속 바위사이로 보이는 천지의 모습 때문에 호수가 3~4개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전날 늦게까지 있었던 일정으로 인해 쌓인 피로가 천지를 보자마자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천지는 워낙 높은 곳에 있어 구름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날씨가 바뀌어 천지가 보였다 안보였다 했는데 저희가 올라갔을 때 눈부신 모습을 보여줘 참 감사했습니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청년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스님의 법복이 얇아 보여서 무척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천지의 감동을 뒤로하고 비룡 폭포로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에 유황 냄새와 함께 땅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백두산이 화산임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나무 계단을 지나 도착한 비룡폭포 역시 그 웅장함에 모두 탄성이 나왔습니다. 

 


▲ 비룡폭포

 

폭포에서 흘러내려온 물에 손을 담가 보았는데 유황 온천수와 섞여 그런지 제법 높은 고도였고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차갑지 않고 미지근해서 신기했습니다. 

 

스님은 참가자 전원과 개별로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청년들은 “스님 곁에서 있는 것만도 감사한데 사진까지 찍어주시니 더욱 감사하다”며 기뻐했습니다.    

 


 

비룡폭포를 감상하고 울창한 삼림을 지나 모두 함께 동요를 부르며 소천지로 걸어갔습니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동요를 부르니 마음도 함께 어려지고 순수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걸으면서 보이는 원시림의 자연그대로 모습도 감탄을 자아내었습니다. 용암으로 인해 생긴 커다란 바위를 뒤덮은 이끼와 군데군데 쓰러져있는 상태 그대로 있는 나무들이 멋스러웠습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큰 바위에 놀랐고 보송보송한 들풀이 예뻤습니다. 

 


▲ 비룡폭포에서 소천지로 내려가는 길

 

소천지는 정갈하고 고요했습니다. 물결이 없으면 완전히 거울같다고 하는 스님의 말씀에 그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경쾌한 저희 일행의 발걸음 때문인지 비온 뒤 수량이 많아져서인지 물결이 멈추지 않아 은거울의 모습은 보지 못해 살짝 아쉬웠습니다.

 


▲ 소천지

 

소천지를 나와 찾아간 녹연담은 정말 짙은 에메랄드빛의 녹색 호수였습니다. 군데군데 보이는 황금 잉어 때문에 호수는 더욱 신비로워 보였습니다. 

 


▲ 녹연담

 

어떻게 그리 아름다운 녹색이 나는지 궁금증을 가지며 지하삼림으로 향했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내 발 아래 숲의 모습에 놀랍고도 신기했습니다. 

 

 

▲ 지하삼림

삼림욕을 몇 시간에 걸쳐 했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백두산은 여러 가지 매력을 가지고 있는 웅장한 산이었습니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발해의 첫 수도인 동모산을 가는 길에 스님께서는 즉문즉설을 해주셨습니다. 각 차별로 한 명씩 질문을 했는데 통일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솔직한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통일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어렵다고 포기하는 방법이 한가지이고, 어려운 와중에도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이 한가지 방법이라고 하셨을 때 무엇인가에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단순하게 두가지 길이 있고 그 중 후자를 고르면 되는 것인데 어려운 문제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통일만 잘하면 모두가 살고 싶어하는 남부럽지 않은 나라가 될 거라는 말씀에, 우리나라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또한 통일을 하려면 우리 스스로가 주체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에 모든 상황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초자연적 존재, 운에 맡기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하였습니다. 종속적으로 살지 말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나와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강대국과 항상 부대껴 살아온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짚어 주시면서 하셨던 말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강대국에 치여 산게 아니라 강대국과 맞서 싸우며 살아온 것이고, 나라가 크다고 좋은 게 아니라 신라가 유지할 수 있었던 저력이 고유한 문화였듯이 우리나라도 작지만 자긍심을 가질만 하다는 말씀에 이때까지 해왔던 인식이 전환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보리수 나무도 그 씨앗은 콩알 만하다.”는 말씀에 정토회도 그 씨앗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씨앗이 발아하여 보리수 나무가 되어 남부럽지 않은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그려보았습니다.  

 

즉문즉설을 하며 언제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버스는 벌써 발해의 첫 수도인 동모산에 도착했습니다. 거대했고 찬란했던 발해의 자취를 느끼기에는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동모산의 경우 중국에서 출입을 금지한다고 하여 더욱 아쉬웠고 무력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 동모산

 

그러나 스님은 이런 실망한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비록 시작은 작게 했지만 얼마나 큰 나라가 되었냐며 오히려 더 의미를 부여하며 동모산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고구려 발해 유적지 답사를 할 때 누구의 안내도 안 받고 찾아 다녔어요. 그 때 제일 찾기 어려운 곳이 동모산이였어요. 아무리 봐도 성이 어디서 어디로 연결이 되어 있는지 못 찾았어요. 그런데 여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굉장히 작죠. 아마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렇게 조그맣게 시작을 했는데 그렇게 큰 나라를 이룬 것이잖아요. 그러니 시작이 중요한 거예요. 

 


 

서쪽에는 대석하라고 하는 조그만 강이 흐릅니다. 이 강을 자연 해자로 하고, 저쪽 능선을 따라서 성벽이 쌓여져 있어요. 저쪽에 꺽인 부분이 서문 자리입니다. 봉우리를 성벽이 빙 둘러싸고 있어요. 예전에는 서문 자리로 올라가서 성벽을 따라 빙 돌면서 함께 노래도 불렀는데 지금은 접근 금지를 시켜 놓아서 7~8년을 쳐다 보기만 하고 지나갑니다. 처음에는 쳐다 보는 것도 금지를 시켰었어요. 

 

봉우리에 올라가서 보면 ‘이곳에 성을 쌓을 만했구나’ 알 수 있는데 옆에서 보면 평면으로 보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겁니다. 사면이 다 평지예요. 섬처럼 되어 있죠. 어느 곳에서 적이 쳐들어 와도 다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가 이 먼 곳까지 쳐들어 올 이유도 적고, 쳐들어 오더라도 소규모 부대만 올 수 있으니까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겠다 싶죠. 

 


 

첫 시작은 이곳에서 했지만 여기서 계속 살지는 않았겠구나 알 수 있죠. 그래서 여기서 2km 정도 떨어진 목단강 변에 영승유지라는 곳이 있어요. 그곳이 평지성 자리가 아닌가 싶어요. 평지성은 토성으로 쌓았기 때문에 거의 다 붕괴가 되었지만, 산성은 돌로 쌓았기 때문에 지금도 그냥 남아 있죠.”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먼 길을 도망쳐 온 대조영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기에는 이곳이 적절했음이 헤아려졌습니다. 발해의 첫 수도 동모산 앞에서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다음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다음은 강동 24개석을 찾아 갔습니다. 24개석은 발해의 대표적인 유물인데 아직 이 건물의 용도가 무엇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도시의 도로가에 철창으로 둘러싸여 횡그러니 있는 모습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 강동 24개석

 

무엇보다 ‘돈화’라고 하는 이 도시는 조선족자치주에 속해 있는데 간판에 한자와 함께 한글이 써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말이 써있어 반가웠으나 법으로 규정되어 있어 무조건 사전적으로 직역하여 써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글자는 거꾸로 뒤집혀 있고 단순히 한자를 번역해 놓는 수준에서 한글이 간판 표기용으로 이용되고 있어 사실상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웠고, 이곳 사람들이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싶게끔 통일이 되어 한단계 도약하는 부국한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 한글을 잘못 붙인 간판

 

저녁 식사 후 이어지는 스님의 강의는 발해에 대한 강의였습니다. 발해의 수도에서 강의를 들으니 몇 천년 전으로 돌아가 발해 조상들의 정신과 이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발해에 대해서 일정이 원래 3일이었는데 1.5일로 줄어들 정도로 방문할 유적지가 없고, 있어도 중국의 방해에 의해 방문할 수 없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발해의 역사에 대해 강연하기에 앞서 스님은 고구려 패망의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60년간 당나라와 전쟁했고, 강력한 독재 정책을 썼던 고구려의 마지막 모습이 오늘날 북한과 닮아있어 놀랐습니다.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공도 잘 막아내었지만 결국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피폐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고개를 숙이자는 온건 세력과 끝까지 싸우자는 강경 세력이 생길 수 밖에 없기 마련이였습니다. 왕정파 세력은 온건 세력이 많았고, 연개소문을 비롯한 군인 세력 중에는 강경 세력이 많았습니다. 이것이 오랜 시간 지나면 내분이 일어나게 되죠. 왕이 강경 세력을 배제하고 온견 세력의 뜻에 따라 당나라와 화친 관계를 맺으려고 하자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을 갈아치워 버렸습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독재가 이뤄지고 천리장성을 쌓으면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어요. 현대판 천리장성이 바로 핵개발이예요.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북한의 핵개발과 닮았어요.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천리장성을 쌓듯이 북한의 핵개발은 미제국주의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죠.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도 미국을 때리기 위한 것이죠. 그로 인해 북한 주민들은 굶어 죽고 난리가 나죠. 

 

위기에 처해서 독재를 하게 되면 반대파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한도 지금 반대파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잖아요. 감옥에 넣어도 되는데 그냥 죽어버려서 누구도 반대를 못하게 하죠. 저도 옛날에는 연개소문이 나라를 위해서 외세를 막아내었다는 생각만 했는데, 북한을 경험하면서 저도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연개소문이 외적을 물리친 것은 잘한 것이지만 과연 백성들은 행복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결국 당나라로부터 고구려를 지킨 것도 연개소문이지만 장기적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것도 연개고문의 영향이 컸던 겁니다. 그것처럼 북한의 체제를 지켜내는 것도 강경 세력 때문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들 때문에 지탱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국가라는 것은 지켜내야 하는 것이고 자주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항상 그것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위하기 때문에 자주를 지켜야 하고, 사람을 위하기 때문에 안보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람은 죽어도 되는 것은 안 됩니다. 통일을 하더라도 그 속에 사는 사람을 외면한 통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념적인 강경 세력이 꼭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죠. 어릴 때 민족적인 성향을 공부하던 것과 현재의 북한에서 일어나는 사실들을 갖고 공부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가를 위하는 것은 참 중요하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국가주의가 되면 그 국가 안에 살고 있는 국민들이 희생된다는 것입니다. 

 

고구려가 단기적으로는 당나라에 강경하게 대응해서 굴복하지 않았지만 연개소문이 죽자 그 독재 권력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갖고 아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권력을 잃은 아들이 당나라를 끌고 들어와서 결국 나라가 패망하는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했습니다.

 


 

고구려 패망의 원인은 첫째 당시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인 당나라와 60년 전쟁을 하다보니 점점 피패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 그러다보니 강경 세력과 온건 세력이 있는데 온건 세력이 타협을 하려 하니까 강경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더욱더 강경하게 나가게 되었습니다. 셋째, 천리장성이라는 엄청난 공사가 주민들을 곤궁하게 만들었습니다.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애국심을 갖게 한 것이 아니라 강경한 강요에 의한 저항을 하게 되니까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되었고, 나라를 지켜야 할 자발적 저항 정신도 점점 약해졌습니다. 넷째, 마지막 계기는 권력 분쟁이 일어나면서 오히려 적에 가서 아부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연개소문이 적을 물리치는 강력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잘한 것이라 생각했으나 오늘날 북한을 겪으며 생각이 달라졌다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고구려의 백성들이 행복했을지, 오늘날 북한의 국민들은 어떨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역사가 이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북한 이야기가 나오자 통일과 인도적 지원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셨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통일을 하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도적 지원이 없는 통일, 북한의 체제가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는 통일은 ‘사람을 외면한 통일’이었습니다. 스님이 직접 북한의 대량 아사사태를 접하고 행하셨던 ‘북한동포살리기운동’에 대한 여러 가지 장애물 이야기를 듣고 우리도 북한하면 북한의 사람보다 막연히 김정은이라는 독재자 한명으로 대등시하고 있지 않았는지 반성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은 역사를 문명사적으로 접근하고 우리 나라는 민족적으로 접근하여 역사를 다루는 범위가 훨씬 중국에 비해 적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도 문명사적으로 접근하여 보다 폭넓은 역사관을 가지고 다양했던 우리의 선대와 이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해가 멸망하면서 동북아에는 큰 역사적인 전이가 일어났습니다. 요나라가 동북아를 지배하고 송나라를 압박했죠. 그 다음에 나라를 한 번도 세워본 적이 없던 여진족이 일어나서 금나라를 세워서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서 남송을 만들었죠. 송나라 황제가 금나라의 포로가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저 서쪽에 있던 몽골족이 일어나서 원나라를 세워서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저 아래로 내려가서 송나라도 멸망시키고 대제국을 건설했죠. 

 


 

아무튼 발해 시대까지는 우리 민족이 중심이 되다가 발해가 멸망하면서는 우리 민족의 아래에 있던 민족들이 전부 일어나서 제국을 건설합니다. 그래서 동북아의 역사를 우리 민족에만 한정하면 대륙을 잃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민족이 아니라 문명적으로 보면 동북아 대륙은 우리가 잃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아래 있던 다른 민족이 일어나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를 세웠고, 한족에게는 명나라 때 이 지역을 한번 빼겼을 뿐이죠. 다시 청나라가 일어나서 또 장악을 했죠. 그 뒤는 일본이 들어와서 만주국을 건설했죠. 그래서 동북아 지역이 한족의 지배를 받은 것은 첫번째가 한사군에 의해서였고, 두번째가 원나라가 망하면서 명나라에 의해서였고, 세 번째는 지금입니다. 이렇게 단 세 번 밖에 없어요. 

 

오히려 동북 민족이 중원을 재패한 것은 여러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 민족이였던 은나라였고, 그 다음은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였고, 그 다음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그 다음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가서 장악했습니다. 

 

이렇게 크게 문명사적으로 보면 자기 지역을 장악한 것이고 자기 지역 안에서 정권 교체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작은 민족 단위로 보기 보다는 문명사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역사를 민족사적으로 보지 않고 문명사적으로 보니까 원나라와 청나라도 자기 역사의 일부로 보지 외세의 침략을 받아 식민 지배를 받았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너무 좁은 의미의 민족사로만 보니까 우리 역사는 작아지는데, 중국은 그것까지 다 포용해서 자기들의 역사로 만드니까 역사가 어마어마하게 커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북방 민족과 남방 민족의 문명사적 갈등과 협력 관계로 본다면 지금까지는 아직 대등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민족사로 보면 발해 이후의 역사를 잃었다고 볼 수 있지만, 발해 이후에는 우리의 다른 종족들이 일어나서 동북아 대륙을 점령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서 이제는 인류 문명사적인 관점으로 크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럽도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이제는 하나로 연대하잖아요. 그것은 다시 이슬람 문명과 충돌하기도 하잖아요. 그리고 중국과 인도 문명도 있고요. 이제는 이웃나라만 보는, 적의 적은 동지라고 하는 원교근공책의 문제가 아니예요. 문명적으로 비슷한 나라끼리 통합해가는 이런 시대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배우면서 우리는 늘 미래를 생각해야 돼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을 기억하려고 이렇게 고생하면서 다니는 게 아니잖아요. 여기서 어떤 아이디어를 얻어서 어떻게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고 개척할 것인가가 핵심입니다.” 

 

문명사적으로 역사를 해석한다면 우리의 정신과 역사적 감수성이 좀 더 풍부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직접 찾아다니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도 중요하다는 말씀에 좀 더 우리의 역사관을 동북아 지역으로 확장시켜 생각의 깊이를 넓히고 싶어졌습니다.  

 

이어지는 조별 나누기에서도 가장 많이 나왔던 이야기는 단연 사람을 앞세운 통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동북아 역사기행을 왔던 이유도 모두 사람을 위해서인데 홍익인간을 제창했던 우리 민족이 왜 통일을 말할 때 자꾸 사람을 배제할까 하는 어느 조원의 나누기에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북한이 극한에 처해 있는 것은 알았지만 남한도 통일에 있어서는 극한에 처해있는 것 같아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더 많은 청년들이 동북아 역사기행에 와 선조들의 역사가 스며든 이 땅을 직접 두 발로 느끼고 같은 역사를 지녔던 북한의 국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커지기를 기원했습니다. 비록 동북아 역사기행의 하이라이트였던 백두산은 오늘 여정으로 끝이 났지만 우리의 가슴은 뜨거운 무엇인가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몇 천년 전 선조들과의 교감, 북한 주민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일은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 유적을 둘러본 후 오후에는 봉오동 전투터로 가서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리고 두만강 건너편으로 한반도 최북단 마을과 함북 온성군을 바라본 후 연길로 가는 일정입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 오늘 현장 스케치는 김다정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 변지민님이 해주셨습니다. 

전체댓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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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에 사진모습은 경상도 사투리로,스님 메란도없으시네요 ㅠ황금잉어가 산다는 에머랄드빛 녹연담은,정말 아름답네요^^ <<국가라는 것은 지켜내야 하는 것이고 자주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항상 그것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위하기 때문에 자주를 지켜야 하고, 사람을 위하기 때문에 안보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람은 죽어도 되는 것은 안 됩니다. 통일을 하더라도 그 속에 사는 사람을 외면한 통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 <민족사로 보면 발해 이후의 역사를 잃었다고 볼 수 있지만, 발해 이후에는 우리의 다른 종족들이 일어나서 동북아 대륙을 점령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서 이제는 인류 문명사적인 관점으로 크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아무튼 발해 시대까지는 우리 민족이 중심이 되다가 발해가 멸망하면서는 우리 민족의 아래에 있던 민족들이 전부 일어나서 제국을 건설합니다. 그래서 동북아의 역사를 우리 민족에만 한정하면 대륙을 잃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민족이 아니라 문명적으로 보면 동북아 대륙은 우리가 잃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아래 있던 다른 민족이 일어나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를 세웠고, 한족에게는 명나라 때 이 지역을 한번 빼겼을 뿐이죠. 다시 청나라가 일어나서 또 장악을 했죠. 그 뒤는 일본이 들어와서 만주국을 건설했죠. 그래서 동북아 지역이 한족의 지배를 받은 것은 첫번째가 한사군에 의해서였고, 두번째가 원나라가 망하면서 명나라에 의해서였고, 세 번째는 지금입니다. 이렇게 단 세 번 밖에 없어요. ><중국은 역사를 민족사적으로 보지 않고 문명사적으로 보니까 원나라와 청나라도 자기 역사의 일부로 보지 외세의 침략을 받아 식민 지배를 받았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너무 좁은 의미의 민족사로만 보니까 우리 역사는 작아지는데, 중국은 그것까지 다 포용해서 자기들의 역사로 만드니까 역사가 어마어마하게 커져 버린 것입니다.>

2015-08-22 07:07:02

조성권

아자 화이팅.^^.

2015-08-16 18:20:11

청원

발해 역사를 스님의 통찰력으로 들어 눈앞이 트이는 느낌입니다 . 문명사적 역사관을 가지라는 스님의 가르침 우리모두 가슴에 새기고 글로벌한 국가건설을 향해야 할것입니다 북한의 인도적인 지원도 필요하지만 북한동포와 우리가 하나되는 줄탁동시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스님 오랜 역사기행의 여로에 건강조심 하세요 감사 꾸뻑 ♡

2015-08-16 08:2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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