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8.7 동북아 역사기행 6일째, 독립운동 유적지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역사기행 6일째를 맞이하여 청산리전투터, 대종교 3인묘, 일송정 등 독립운동 유적지를 둘러보고 통일 한국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이른 3시 30분에 일제히 기상했습니다. 아침 식사는 연길의 새벽 시장에 가서 하는 것으로 하고 4시까지 버스에 짐을 싣고 연길 새벽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아침을 해먹지 않고 시장에서 사먹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그런지 새벽 시장이 굉장히 활성화 되어 있었습니다. 

 


▲ 연길 새벽 시장 

 

시장에는 두부, 야채, 어류, 과일 등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식사를 하고 시장를 볼 수 있도록 허용된 시간은 20분, 서둘러 식당에 들어가 순두부 한 그릇을 먹고 간식 거리를 구입해 버스에 올랐습니다. 

 

오늘 첫 방문지는 청산리 전투터입니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날씨 속에 역사기행단은 산으로 난 비포장 도로를 계속 올라가 백운평이란 곳에 이르러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백운평은 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후퇴를 하다가 화가 나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던 터입니다. 지금은 사람의 흔적이 없고 잡초만 무성한 쑥대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 백운평

 

잠자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의 총칼 앞에 목숨을 잃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련해졌습니다. 스님의 그 때의 정황을 잠시 설명해 주면서 “백운평에서 죽은 민간인 100여명의 원혼을 기리며 묵념을 하자”고 하셔서 다함께 묵념을 한 후 해탈주 일편 독송을 하였습니다. 

 


 

해탈주를 마치고 스님은 “이런 선조들의 희생이라는 기반 위에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며 그동안 잊고 지낸 수많은 선조들의 노고를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이어서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던 직소택이라는 곳까지 3km를 함께 행군했습니다. 아침 이슬로 바지가 젖고, 등 뒤로 햇살이 뜨겁게 비추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일렬로 줄을 서서 행군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 청산리 전투터로 향하는 길

 

예전에 독립군들도 이 길을 따라 올라갔을 것을 상상하며 한참을 오르다보니 얼음처럼 차가운 개울이 나타났습니다. 신발을 벗고 건너기에는 물살이 세고 깊자 스님은 “그냥 신발 신고 건넙시다” 하며 앞장을 섰습니다. 누군가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여성 분들이 물살에 밀려 넘어지려고 하자 남자 분들이 일렬로 서서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독립군들도 이렇게 서로 의지하며 지냈겠구나 하는 데에 마음이 가자 뭉클한 감정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물길을 겨우 건너자 이제는 다시 무너진 나무 다리가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먼저 다리를 건넌 사람이 뒤에 오는 사람을 손으로 잡아 당겨주며 금새 어려운 코스를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야말로 우리가 독립군이 된 기분입니다. 

 


 

모든 대중이 직소택에 다다르자 스님이 짧게 직소택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곳이 직소택이라는 곳인데, 이 협곡에 독립군이 매복을 하고 있다가 쫓아오는 일본군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또한 해란강의 원류입니다. 여기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저희들도 이곳까지 와서 독립군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온 것입니다. 힘들었지만 잘 왔죠?” 

 


▲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던 직소택

 

대중들도 “네” 라고 힘차게 대답했습니다. 이어서 이곳에서 숨져간 호국 영령들에게 우리들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편안하게 계시라는 뜻으러 담아 묵념을 했습니다. 묵념에 이어 스님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와 축원을 해주었습니다. 

 


 

“환인 하느님, 환웅 천왕님, 단군 왕검님 삼신님께 간절히 기도 드리옵니다. 신시 개천 이래로 나라를 위해 숨진 모든 호국 영령들에게 삼가 저희의 마음을 다해 공양을 올립니다. 특별히  나라를 잃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을 때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일신을 돌보지 않고 목숨까지 바친 애국 열사들에게 저희들 온 마음을 다해 존경을 드리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이곳에서 고이 잠드소서. 

 

뿐만 아니라 무참하게 학살된 수많은 양민들, 나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스스로 살기 위해서 나라를 떠나 이국 땅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아갔지만 나라를 잃으니 그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자신의 위험도 무릅쓰고 독립군들을 후원하고 아들 딸들을 독립군으로 보내었지만 자신들의 재산이 다 불타버리는 고통을 겪었던 수많은 이주민들... 그 뜻을 기리오니 이곳에 고이 잠드소서. 

 

또한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징집되어 이 먼 곳에 와서 비명횡사한 일본의 젊은 청년들도, 개인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잘못으로 희생된 그들도 이곳에서 고이 잠드소서. 

 

저희들은 평화를 발원하옵니다. 이제 다시는 서로를 죽이는 참혹한 전쟁이 없고, 서로를 돕고 이웃 나라 간에도 서로 협력하는 그런 동아시아의 평화를 발원합니다. 오늘 저희들이 이곳에서 간절하게 기도 드리오니 저희들의 이 간절한 염원을 받아주옵소서. 이 땅에 전쟁이 없고 남북이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통일을 발원하오니 저희들의 이 발원을 성취시켜 주옵소서.” 

 


 

스님의 간절한 목소리에 모두들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스님은 선조들의 숨결이 있는 곳마다 찾아가서 이렇게 계속 통일 염원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우리들도 노력을 하겠지만 돌아가신 선조들의 도움도 받게 되면 반드시 통일은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다시 3km의 산길을 내려오면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를 불러 보았습니다. 또 스님은 바쁜 걸음 가운데서도 길섶에 핀 들꽃을 형형색색 다양하게 한 송이씩 꺽으며 산길을 내려왔습니다. 이 들꽃들을 어떻게 하시려나 궁금했는데, 스님은 다음 방문 장소인 대중교 3인묘에 이 들꽃들을 올렸습니다. 스님의 손길에 들린 들꽃처럼 스님의 정성어린 마음이 느껴져서 순간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무산의 철광산을 보기 위해 다시 두만강 국경변으로 가려고 했으나 북중 간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출입이 통제가 되었습니다. 아쉽게 발길을 돌려 대종교 3인묘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대종교 3인묘에 도착하니 잔디가 많이 자라 있었습니다. 예전에 농사일을 좀 해보았다는 남자 분 3명이 나와서 낫을 들고 벌초를 하는 가운데 이어서 돗자리를 깔고 상을 차린 뒤 다함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 대종교 3인묘

 

이곳에 영면한 세 분의 무덤 비석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반일지사 나철, 서일, 김교현은 20세기 전반기에 동북지구에서 한때 화룡시 청파호를 기지로 반일 계몽 운동과 반일 교육 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민중의 반일의식을 높이고 인민의 반일사상각오를 높이기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였으며 반일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전개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서일이 령도한 <북로군정서> 소속의 반일무장부대와 <국민회> 소속의 반일무장부대가 1920년 10월 화룡지구에서 협동 작전을 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청산리 전투’는 일본 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반일 운동이 깊이 있게 전개되도록 힘있게 추동하였다.”

 


 

무덤 앞에서 절을 하면서 그 넋을 기리며 이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오늘날 내가 해야 할 역할을 다시 되새겨 봅니다. 

 

버스는 다시 화룡으로 향했습니다. 화룡에서 냉면으로 유명한 집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일송정으로 출발했습니다. 일송정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당시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선조들의 마음을 잠시 느껴보았습니다. 

 


▲ 일송정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가족, 고향을 떠나 낯선 중국 땅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조선 민족의 기개를 놓치지 않았던 그분들의 마음을 노래로 표현한 ‘선구자’를 다함께 부르니 가슴은 더욱 애잔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 참가자 중에 섹서폰을 늘 들고 다니는 통일의병 한분이 있었는데, 그동안 국경변 또는 역사 유적지이기 때문에 마음껏 연주 한번 못해보고 있다가 일송정에 올라서야 멋진 연주를 보여주었습니다. 섹서폰 연주로 듣는 선구자 노래는 또다른 느낌으로 대중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선주자의 노랫말에 나오는 ‘용두레 우물’을 버스 창 밖으로 잠시 엿본 후 역사기행단 일행은 대성중학교로 갔습니다. 대성중학교는 그동안 용정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윤동주 시인을 비롯하여 이곳에서 활동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사진과 기록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일은 후학을 바르게 양성하는 것임을 깨닫고 이곳에서 학교를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 대성중학교

 

이렇게 오늘의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이제 용정에서 길림으로 향했습니다. 용정에서 길림으로 가는 길은 버스로 5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버스 안에서는 어제처럼 즉문즉설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대중들은 그동안 역사기행을 하며 궁금했던 점들에 대해 스님에게 송수신기로 질문을 했고, 스님은 다양한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어 버스 안 5시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오늘밤은 길림에서 자게 되는데 역사기행 21년 역사 중에서 길림에서 숙소를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길림의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저녁 식사를 한 후 곧바로 저녁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강연에서는 지난 6일 동안의 역사기행을 총정리하면서 통일 한국의 희망에 강조를 해주었습니다. 

 


 

“6일 동안 우리는 꽤 먼 거리를 달렸습니다. 심양 공항에 내려서 1일째는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성을 올랐고요. 2일째는 집안에 있는 국내성을 둘러보았고, 3일째는 압록강과 백두산을 가로질러 왔고요. 4일째는 백두산을 보았고요. 5일째는 발해 유적지를 보았고요. 6일째는 독립운동 유적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내일 7일째는 심양으로 다시 가서 고구려 시대 산성으로 요동성을 보호했던 백암 산성을 보고 역사기행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지난 6일을 돌아본 후 우리가 배운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먼저 기행단이 가장 많이 본 자연 풍광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다닌 지역 중에서 자연적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백두산입니다. 백두산은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써 천지까지 있다 보니까 중국 사람들에게는 그냥 산이지만 동북 민족에게는 하나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만 신성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만주족도 백두산을 굉장히 신성시 했습니다. 얼마나 신성시 했으면 봉금 정책이라고 사람을 출입 금지시킬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이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백두산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흘러내리는 3개의 강, 송화강, 두만강, 압록강, 얘기만 들어도 가슴이 뛰잖아요. 우리에게는 단순한 강이 아니죠. 이런 자연의 풍광이 하나 있고요.”  

 

이어서 역사기행단이 다닌 이 지역은 민족적 자존심을 지켜준 고구려와 발해, 그리고 독립운동의 주된 활동 무대였음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지역이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국가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고구려와 발해의 활동 무대였다는 것입니다.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발해는 송화강과 두만강 유역에서 활동했고, 고구려의 중심 무대는 백두산의 서쪽 지역이였다면 발해는 백두산의 동쪽과 북쪽 지역이였습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청나라도 여기가 그들의 주 활동 무대였고, 그 전에는 금나라도 그랬습니다. 

 

청나라와 금나라는 여진족이고, 여진족의 뿌리는 말갈족이니까 고구려의 인구 구성도 고구려족과 말갈족, 발해의 인구 구성도 고구려족과 말갈족이었으니 여진족, 만주족은 우리와 거의 형제나 다름 없는 민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동질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긴 역사 속에서 보면 우리 민족이 중심 민족이고, 이 사람들은 이 지역에 살던 토착 세력의 일부였습니다. 국가를 구성해본 적이 없는 민족이였는데, 이들이 국가 경영을 배운 것은 발해 시대입니다. 부족장 수준에서 중앙 정부의 귀족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국가 경영을 터득하게 되고, 이것이 결국 금나라를 건국하게 되고, 그 경험을 토대로 다시 청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으로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역사란 것은 앞서간 자가 늘 앞서갈 수 없고 뒤에 간 자가 다시 앞서가기도 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 민족이 일제 침략기에 전세계에서 독립운동을 했지만 전체 독립운동의 80~90%가 이 지역에서 활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활동과 미국에서의 일부 활동, 연해주에서의 일부 활동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이뤄졌습니다. 다시 나누면 북간도와 서간도로 나눌 수 있고, 북간도에는 북로군정서를 중심으로 여러 부대들이, 서간도에는 서로군정서를 중심으로 여러 부대들이 있었습니다. 더 따진다면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있는 북간도 지역이 독립운동의 주 활동 무대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경험들을 잘 살려서 우리가 갖고 있는 민족적 열등의식을 극복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남한과 북한의 정부 구성의 뿌리와도 관련이 있고, 이들이 어떻게 정부 구성에 참여했느냐가 현재 남북한 정부의 성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북한은 자주성 측면에서는 역사적 정통성의 기질을 갖고 있다고 보이지만 남한은 많이 부족한 측면이 있고, 반면에 남한은 신라가 가졌던 섬세한 재능처럼 지금 세계 최첨단의 기술을 만들어가는 측면을 갖고 있죠. 역사적으로 돌아가보면 하나는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뿌리에 대한 자주성도 남아 있고, 하나는 중간에 역사가 왜곡되면서 흘러온 약간의 비굴함의 요소도 우리 속에 내재해 있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아주 앞선 문명을 가졌던 DNA를 통해서 굉장히 섬세하고 뛰어난 재능도 갖고 있고, 또 외래 문명을 좀 줏대 없이 받아들이는 문제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이런 과거의 역사적 경험들이 우리들 속에 내재해 있습니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우리 민족에게는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들이 함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물을 한 가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 성질 중에 조금 더 살리면 좋겠다 싶은 것은 계승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런 건 조금 부정적이라고 보이는 것은 개선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야지 자꾸 민족성이 문제라고 규정하면 자학적인 사람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면이 많이 있습니다.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가 이렇게 단시간에 다시 일어선 경우는 세계에 몇 나라가 안 됩니다. 아직은 식민지 근성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런 문명을 만들어내는 기질도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스님은 ‘통일 한국의 건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열등의식을 극복하는 길은 바로 통일입니다. 만약 일제 시대 때 우리가 일제와 싸워서 해방을 이뤄냈으면 열등의식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힘이 부쳐서 진 것은 다시 싸우면 된다고 생각하지 피해의식은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독립운동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피해의식도 강하고 열등의식도 강하고, 게다가 ‘우리를 이렇게 다 살려준 것은 미국이다’ 하면서 사대의식도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독립은 우리 힘으로 이뤄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제 통일은 우리가 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통일 마저도 누가 시켜준다면 우리는 또 그 나라의 속국이 될 것입니다. 

 


 

통일 만큼은 우리가 목표를 세우고, 우리가 계획을 세우고, 우리 외교를 통해서 주변국을 설득하고, 우리가 밀어부쳐서 남북 문제의 주도권을 잡고, 이렇게 우리 힘으로 통일을 해낸다면 일본이 아무리 ‘독도는 우리 땅이다’ 라고 말해도 지금처럼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도가 아무리 자기 땅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자기 땅이 됩니까. 위안부 문제도 얘기하든지 말든지 ‘일본, 너희들의 수준을 알겠다. 그 수준으로 경제력으로만 잘 살면 뭐하노’ 이렇게 하면서 대응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일본의 저런 태도를 봐서는 한일 간의 교류 협력은 하되 식민 지배에 대해 과거 반성이 없는 나라와 군사 협력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일 원칙을 지켜야 할 것은 일본과의 군사협력은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북한을 상대로 해서 일본과 군사협력을 한다, 이것이야 말로 민족적 수치입니다. 

 

미래의 창조성을 위해서도 통일이 필요하지만 근대의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통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문명의 뿌리에 대해 과거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열등의식을 극복해야 하지만, 또한 우리가 창조성을 가지면 열등의식이 극복됩니다. 지금 한 20년 동안 한국 문명과 기술이 중국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이것은 2천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니다. 조금 앞서 있는 이것을 지속시키려면 창조성을 가져야 합니다. 통일을 해야 창조성이 나올 수 있습니다. 중국으로의 문명의 수출도 몇 십년 몇 백년도 해나갈 수가 있겠죠. 그렇게 되면 서양에 대해서도 중국에 대해서도 주변국에 대해서도 열등의식이 모두 극복될 수 있습니다. 

 

통일은 문명의 새로운 꽃을 피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갖는 심리적인 열등의식을 극복하는 것도 그 첫발이 통일입니다. 통일을 못하면 극복하기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통일이 되면 다 된다는 것이 아니라 통일이 되면 다음 스텝을 밟기가 굉장히 유리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통일 한국을 우리가 만들어 낸다면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 나갈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여기 와서 정치 시스템을 배우고, 경제 시스템과 복지 시스템도 여기 와서 배우고, 환경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여기 와서 배우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지도자만 조금 잘 뽑으면 한국 사람들은 20~30년 안에 세계 최고 문명을 가진 나라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경제 계획을 잘 세워서 산업화에 성공한 것처럼, 민주화의 과정에도 성공한 것처럼, 국가의 혁신도 잘만 이끌어 나간다면 충분히 최고로 앞서가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똑똑해진 경우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굉장히 뛰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에너지를 제대로 쓰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진로가 안 열리니까 답답한 공부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누군가가 새로운 사회 건설로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쪽으로 비전을 열어준다면 우리 민족의 천년의 꿈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면 고조선 멸망이후 다시 한 번 배달 문명을 재현하는 것이 되니 3천년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지금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지금 몰락으로 가는 기로에 서 있는데 그 출발이 통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문명 전환 운동을 한다고 당장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출발은 통일입니다. 통일을 향해 일점돌파를 해서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면 되네’ 이게 있어야 사람들이 확 달라붙게 되지 그렇지 못하면 잘 안 됩니다. 통일이라는 일점돌파를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첫 번째로 이뤄내야 할 것은 한국에 통일 지향적 정부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이에 동의하는 수많은 통일의병을 만들어내는 활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해내면 그 다음은 어렵지 않습니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터서 땅에 올라오고 땅에 올라와서 요만큼 자라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요만큼 자랐다 하면 더 크게 자라는 것은 금새 됩니다. 작은 힘으로 큰 목표를 달성하려고 할 때는 여러 방면으로 힘을 분산시키면 안 돼요. 아주 집중을 해서 일점돌파를 해서 바늘 구멍 같은 작은 구멍을 내고 그 다음에 확대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가정 버리고 나와서 절에 들어라는 얘기도 아니고 스님이 되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직장 다니고 애 키우고 다 하면서 사는데 거기에 5%든 10%든 좀 낭비적인 요소를 뻬내라는 겁니다. 술 먹는 것을 좀 줄이고, 향수 바르던 것을 좀 줄여서 그 돈을 좀 모으고요. 그렇게 해서 역사기행 마치고 돌아가시면 생활에 있어서 다이어트를 좀 하시면 좋겠어요. 지나친 간섭으로 아이를 속박시키지 말고, 과음을 해서 건강을 버리지 말고요. 낭비의 요소를 줄인다면 나도 행복하고 세상에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직장이 있어야 직장 사람들도 이 운동에 동참시킬 수가 있지요. 자기 직업을 가져야 오히려 대중성이 있어요. 지금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조건이 하나도 불리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을 투여해서 큰 효과를 내는 새로운 운동 방식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서 여러분들의 전부를 다 달라는 것이 아니라 통일 지향적 정부를 선출할 수 있는 손가락 하나만 좀 달라는 겁니다. 그렇게 새로운 희망을 우리가 좀 가져 봅시다.” (대중들 웃음) 

 


 

모든 것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 하나만 좀 달라는 말씀에 대중들도 모두 크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통일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고,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가는 출발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콩닥 콩닥 뛰었습니다. 배달 문명으로부터 시작해 고구려와 발해로 이어진 광대한 꿈이 21세기 통일코리아를 통해 다시 발현될 수 있겠구나 하는 부푼 꿈이 가슴을 요동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길을 열어주고 계신 스님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저녁 강연을 끝으로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대중들은 내일 새벽부터 다시 움직이기 위해 잠자리에 들러 숙소로 돌아갔고, 스님은 원고 교정을 하며 업무를 하다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길림의 새벽 시장에 가서 아침 요기를 한 후 심양으로 이동해 고구려의 산성 중 그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고 요동성을 지켰던 백암산성을 본 후 7일 동안의 역사기행을 총정리 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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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통일은 문명의 새로운 꽃을 피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갖는 심리적인 열등의식을 극복하는 것도 그 첫발이 통일입니다. 통일을 못하면 극복하기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통일이 되면 다 된다는 것이 아니라 통일이 되면 다음 스텝을 밟기가 굉장히 유리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통일 한국을 우리가 만들어 낸다면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 나갈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여기 와서 정치 시스템을 배우고, 경제 시스템과 복지 시스템도 여기 와서 배우고, 환경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여기 와서 배우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gt;

2015-08-16 22:01:00

김성례

청나라와 금나라는 여진족이고, 여진족의 뿌리는 말갈족이니까 고구려의 인구 구성도 고구려족과 말갈족, 발해의 인구 구성도 고구려족과 말갈족이었으니 여진족, 만주족은 우리와 거의 형제나 다름 없는 민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동질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긴 역사 속에서 보면 우리 민족이 중심 민족이고, 이 사람들은 이 지역에 살던 토착 세력의 일부였습니다. 국가를 구성해본 적이 없는 민족이였는데, 이들이 국가 경영을 배운 것은 발해 시대입니다. 부족장 수준에서 중앙 정부의 귀족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국가 경영을 터득하게 되고, 이것이 결국 금나라를 건국하게 되고, 그 경험을 토대로 다시 청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으로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스님의 독창적인 창의적인 그러나 통찰지의 역사분석과 강해 감사합니다~ 이러한 우리가 이제는 통일이란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워내야 하고 그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통일지향적인 정부를 구성해야하며 그를 위해선 손가락 하나가 필요하다란 말씀 깊이 유념해야할 부분이라 봅니다 ^^

2015-08-12 22:28:48

박은희

스님 살짝 야위신듯 보여요 ㅜㅜ
스님을 꼭 뵙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그런 날이 올까요?? 정말 뵙고 싶습니다~

2015-08-11 2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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