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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역사기행 5일째를 맞이하여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유적과 봉오동 전투터를 둘러본 후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5시 정각에 모두 버스에 탑승한 기행단은 스님의 “잘 주무셨어요?” 하는 아침 인사와 함께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버스 창 밖으로는 돈화벌의 넓은 평야가 드넓게 펼쳐졌습니다.
1시간을 달려 어제 보았던 강동 24개석과 같은 형태의 요전자 24개석 유적을 찾아갔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기행단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
어제는 돈화 시내 한 가운데에 24개석이 있었는데 오늘은 밭 한 가운데에 24개석이 있었습니다. 옥수수밭 옆길을 한 줄로 들어가 한바퀴 돌면서 24개석을 보고 나왔습니다. 풀과 꽃이 무성하게 자라서 24개석이 모두 보이지는 않았지만 예쁘게 핀 꽃들과 함께 사진 몇 장을 남기고 다시 버스에 올랐습니다.
▲ 요전자 24개석
버스에 타고 나서 스님은 발해가 남긴 24개석은 과연 무엇이였는지 학자들의 견해를 빌어 몇가지 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상경용천부에서 중경현덕부, 동경용현부, 남경남해부 이 사이에 난 길에 이 24개석이 군데 군데에 있습니다. 이건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주요 교통로에 있는 ‘역참’이라는 주장도 있고요. 역참인데 돌을 왜 저렇게 놓았느냐 하기도 하지만 주요 교통로에 있기 때문에 역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둘째, 왕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 때 관을 받아서 보관하던 곳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셋째, 양식 창고라는 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춧돌이 이렇게 여려개 놓여있다는 것은 그 위에 엄청나게 무거운 것을 올렸다는 것을 말하거든요.
현재 확실하게 공통적으로 밝혀진 것은 건축 유지라는 것입니다. 기와 조각이 발견되면서 여기에 건축물을 세웠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 건축물이 어떤 건축물이냐는 문제죠.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확정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만약 이것을 연구해서 발표하면 박사 학위감이 될 수 있어요.”
어제부터 무척 궁금해 하던 내용이었는데 몇가지 제기된 설을 들으니 모두 다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발해의 역사가 조금 더 깊이 연구되길 기원해 봅니다.
다시 한참을 지나니 용암이 막혀 형성된 길이 23km에 달하는 ‘경박호’ 호수를 만났습니다. 저 멀리 작은 호수처럼 보이는 듯 시작된 경박호는 계속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은 채 마침내 마치 바다로 생각될 정도로 아주 넓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호수는 넓은 평야와 어우러져 또다른 아름다움을 주었습니다.
▲ 저 멀리 경박호의 꼬리 부분이 보입니다
오랜시간 버스가 달려 도착한 곳은 당시 발해의 수도 중 하나였던 상경용천부의 왕궁터 유적입니다. 스님은 버스에서 내리기 전 상경용천부 유적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주었습니다.
“발해는 비록 시작은 동모산에서 좁쌀 만하게 시작했지만 3대 문왕 때까지 오면서 50년 만에 동북아 지역을 거의 다 차지하는 대제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견현덕부의 경우 한 주의 중심도시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수도를 상경용천부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방어벽이 멀리 있고 가운데가 정말 넓은 터를 잡아서 자기들의 중심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 외성 위로 백양 나무가 늘어선 모습
외성의 길이가 4km 정도 됩니다. 돌과 흙을 같이 섞은 토석혼축성으로 지금도 비교적 형태가 잘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외성을 쌓고 외성 안에 내성을 쌓고 그 안에 궁성을 쌓았습니다. 기본 모형은 당나라와 교류를 하면서 장안성을 참고한 것 같아요. 돌로 쌓았기 때문에 많이 파괴되었다 하더라도 기본형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입니다.”
외성의 한 변이 4km 전체는 16km에 달한다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지금은 성벽 위로 백양 나무가 높게 자라고 있어 멀리서도 금방 그 윤곽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차창 밖으로 정말로 백양 나무가 나란히 늘어선 모습이 한눈에 보였습니다.
다음은 박물관으로 이동해 발해의 영역 지도와 궁성 조감도를 보며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상경용천부 성터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장안성 못지 않게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성터에는 토대와 흔적만 남아 있기에 그 위에 어떤 건물들이 지어졌을지 상상하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박물관에서 모형도를 보고 스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 성터로 가보니 단순한 돌덩어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돌은 어떤 역할을 했겠구나’ 떠올려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동궁 옆의 사람 얼굴 모양의 연못을 한 바퀴 돈 후 내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전생에 우리는 발해인이지 않았을까’ 하면서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내성 안의 궁성으로 들어가서 제1궁성부터 제5궁성까지 차례대로 걸어가 보았습니다. 뒤로 갈수록 지대가 낮아져 앞에서 바라보면 한 눈에 뒤쪽의 왕궁터가 보였습니다.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계획되고 관측되어서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 오봉루에서 바라본 주작대로
▲ 제1궁에서 바라본 제2궁, 제3궁, 제4궁의 모습
▲ 궁성의 북쪽에 난 두 개의 문
이렇게 상경용천부 성터를 모두 둘러본 후 다음은 성터의 정문 앞길인 주작대로를 따라 외성터 내에 위치해 있는 흥륭사를 찾아 갔습니다.
▲ 흥륜사
흥륭사는 상경용천부에 있는 9개의 절 중 유일하게 유물이 나온 곳이라고 합니다. 흥륜사 경내의 맨 뒤편에 위치한 법당에 들어가 큰 불상 앞에 선 기행단은 스님의 제안에 따라 예불 의식을 했습니다. 예불을 마친 후 스님은 기행단을 위해 축원과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 법보와 보살성문 스님들께 지성귀의 하오며, 저희 한국에서 온 동북아 역사기행 통일의병 대중 일동은 고구려, 발해,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독립운동 유적지를 답사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이곳 발해의 상경용천부 흥륜사 대법당 큰 부처님 앞에 찾아와 합장하고 발원하옵니다.
발해 멸망 이후 1100여년 만에 발해인들이 하듯이 저희들이 이와 같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부처님께 공양 올린 이 인연 공덕으로 환인 하느님, 환웅 천왕님, 단군 왕검님으로부터 시작된 민족사의 정통성이 잘 계승되고, 발해의 옛 터들이 다시 복원되기를 간절히 발원하오며, 참배한 우리 또한 부여 고구려 발해의 민족 정기를 잘 계승할 것을 다짐합니다. 이 인연 공덕으로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이 서로 협력하고 하나되는 통일을 간절히 발원하옵나니 저희의 이 간절한 발원을 제불 보살님들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과 조상 영가님들께서는 이 원이 성취될 수 있게 옹호하여 주옵소서.
또한 북녘 동포들의 생존권과 인권이 보장되어 사람답게 살 수 있기를, 또한 남한도 빈부격차가 해소되며 젊은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행복한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발원하옵니다.
오늘 이와 같이 발해의 옛터에 찾아와 왕궁터를 둘러보고 대불 앞에서 합장하고 불공 올린 이 인연 공덕으로 참여 대중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며, 갖가지 소원 모두 성취되게 하옵소서. 오늘 저희가 참배하고 발원한 인연 공덕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오니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지이다. 이 무량 공덕 조상 영가님들께 회향하오니 조상 영가님들과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 부디 왕생 극락 하옵소서. 제불 보살님들은 저희의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
스님의 간절한 발원에 역사기행 대중들도 함께 간절한 마음을 모아 보았습니다. 마음은 숙연해지고 곳곳에서 훌쩍 거리며 눈시울을 붉히는 대중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역사 속에서 점점 잊혀져간 발해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까움이 많았는데, 진정으로 발해인들의 뜻을 계승한다는 것은 통일 한국과 동북아 공동체 건설이 아닐까 상상해 보며 스님의 발원을 나의 발원으로 새겨 봅니다. 천년 전의 역사와 오늘의 내가 만나는 순간이였습니다.
다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이어서 성을 쌓기 위해 돌을 채취한 자리에 생긴 현무호 호수를 버스의 차창 밖으로 잠시 살펴본 후 목단강으로 향했습니다.
목단강 앞에 다다르자 스님은 당시에 거란으로 가는 통로가 있었다며 칠공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 목단강을 건너는 다리가 놓아져 있었는데 그 다리는 발해 당시에 거란으로 가는 통로였습니다. 돌을 쌓아서 다리의 기둥을 일곱개 놓았는데 그 유지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다리 이름도 칠공교라고 불렀습니다.”
칠공교를 먼 발치에서나마 보려고 도로가 지나가는 다리 위로 걸어갔으나 마침 공사가 진행 중이여서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발해의 유적지를 모두 살펴본 후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버스는 이제 독립운동 유적지를 향해 달렸습니다.
발해진에서 도문으로 가는 길은 버스를 오래 타게 되는데 스님은 “그동안 역사기행을 하면서 궁금했던 점이 있다면 대화를 나눠보는 시간을 갖자”고 했습니다. 1,2,3호차 각각에서 송수신기로 질문하고 스님이 다시 송수신기로 답하는 방식으로 버스 안 즉문즉설이 이뤄졌습니다.
총 8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1호차, 2호차, 3호차에서 골고루 질문이 나왔습니다. 중국에 와서 보니까 옥수수가 정말 많이 보이는데 옥수수를 어떻게 심고 어떻게 수확하는지 궁금하다는 분, 고구려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왜 그렇게 강력했던 고구려가 삼국 통일을 하지 못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는 분, 어머니가 만주에서 태어나셔서 만주가 정말 궁금했는데 만주가 어떤 곳을 말하는지 궁금하다는 분, 스님의 활동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분, 통일의병이 생긴지 1년 반이 넘었고 아직 걸음마 단계인 것 같은데 평가를 좀 해주고, 통일의병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이야기해 달라는 분, 동북아 역사기행 말고 또다른 역사기행 코스를 개발할 생각은 없으신지, 이번으로 역사기행이 끝나서 너무 아쉽다는 분 등 다양한 질문에 대해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중 아이들에게 어떻게 역사 의식을 심어주어야 하는지 묻는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책으로만 보던 역사를 직접 발로 걸으며 느끼니까 더 감동적이고 자부심도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3학년과 6학년인데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 아이들도 역사 의식이 있는 아이로 키우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 버스 안 즉문즉설
“아이들에게 역사 의식을 심어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만 엄마가 너무 욕심을 내어서 하면 안 됩니다. 엄마가 모든 생활에 있어서 그런 쪽으로 살아가면 아이는 저절로 역사 의식을 갖게 됩니다. 엄마가 강제로 책을 주고 읽어라고 하면 저항이 생기죠. 부담도 되고요. 어릴 때 잠시는 공부할 줄 몰라도 커서는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엄마가 모금할 때도 같이 데려가고, 기회가 되면 경주 남산도 손 잡고 가고, 천천히 같이 다니면 조금씩 안개에 옷이 젖듯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는 놔두고 본인이 그런 의식을 갖고 살아가세요.
두 번째는 아이들과 대화할 때 아이를 그렇게 만들려고 말하고 행동하면 안 됩니다. 정말로 기쁨으로 그런 얘기를 아이와 재미있게 나누면 아이도 조금씩 조금씩 변해 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기도 하다가 때론 저항이 생겼다가 다시 그렇게 가다가 다시 저항이 생겼다가 이런 과정을 계속 겪는 겁니다. 아이가 클 때 일직선으로 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말썽꾸러기가 되었다가 갑자기 착해졌다가 또 말썽꾸러기가 되었다가 그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니까 무엇이든지 욕심을 내어서 접근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본인부터 먼저 할 것. 그렇게 자기 삶이 변해나가면 아이도 저절로 됩니다. 아이와 손 잡고 무조건 놀이 공원에만 가지 말고, 한 번은 손잡고 놀이 공원 갔다가 한 번은 성곽을 찾아가 본다든지 할 수 있죠. 아이한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질리도록 하면 안 돼요. 저도 지금 여러분들에게 너무 질리도록 하는 거 아니예요? (웃음)
부모가 아이들에게 너무 그렇게 접근하는 것은 안 좋아요. 아이는 부모를 부모라고만 생각하지 선생님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자기 몸에 베인 것만 영향을 주지 선생님이 되어서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저는 질문자가 약간 걱정이 되네요. 역사기행이 좋았다고 또 집에 가서 아이들 데리고 못 살게 굴지 않을까 싶네요. 역사기행은 잊어버리고요. 아이는 놔두고 당분간 자기부터 먼저 그렇게 해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질문자는 환한 웃음을 보이며 “네, 알겠습니다” 대답했습니다. 버스 안의 대중들도 박수를 치며 공감도 하고 질문자도 격려해 주었습니다. 질문과 답변이 길어진다 싶을 때면 노래 한 자락이 불러서 금새 기분을 환기시켜 주었습니다.
스님의 지혜가 담긴 대답을 들으며 울고 웃다 보니 어느새 봉오동 전투 기념비에 도착했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3.1운동 실패 이후 만주에서 일어난 무장 독립운동 중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 준 최초의 성공적인 전투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기념비 앞에 선 기행단 일행에게 봉오동 전투가 일어났을 때의 정황과 그 의미에 대해 간략히 소개를 해주었습니다.
▲ 봉오동 전투 기념비
“저희는 지금 봉오동 전투터에 왔습니다.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은 19010년 나라가 망하자 급격하게 세력이 약해졌습니다. 물론 일제가 군대를 통해 진압을 강하게 한 것도 있었지만, 희망이 없어져 버려서 저항의지도 약해졌습니다. 독립운동이 급격하게 쇠퇴하면서 두 번째 나타난 증상은 의병을 했던 분들이 이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나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미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던 이곳으로 오게 된 겁니다. 처음 이주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이민이 이뤄진 것인데, 이때부터 넘어온 사람들은 독립이라는 목적 의식을 갖고 이민을 와서 학교를 세우고 다양한 독립운동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 안에서 1919년에 3.1 만세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고, 세계 정세에서도 민족 자결주의가 나오고, 이렇게 되니까 ‘우리도 독립할 수 있겠다’ 하는 희망이 생기면서 독립운동에 관심있던 모든 사람들이 상해에 모여서 임시 정부를 구성한 것입니다. 임시 정부를 구성했지만 국내의 3.1운동 세력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서 갈수록 약해지고,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 독립이라는 것이 손으로 만세 부른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였습니다. 상해 임시 정부는 모이기는 모였지만 아무런 대응책도 없었고, 누가 대통령을 할 것인지 내분만 일어났어요.
그래서 1919년 가을부터 현장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너무 너무 가슴이 아팠던 겁니다. ‘총을 쥔 놈들과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우리도 무장 투쟁을 할 수 밖에 없다. 앉아서 회의만 해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현장으로 가자’ 이렇게 하면서 현장으로 속속 복귀를 해서 무장 운동을 준비합니다. 독립군 자금을 모아서 무기를 사서 유격전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겁니다.
1920년에 들어와서 홍범도 장군은 여기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시작합니다. 무기를 구입하고 훈련을 시키고 양식을 모우고... 이곳이 이 지역 독립군의 근거지가 됩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약 300명 정도 되는 부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20년 6월 4일과 5일에 이 부대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고 돌아옵니다. 그러다가 6월 6일에는 대대 병력이 이 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월경을 해서 독립군들이 회의하고 있는 곳을 공격해서 모두 산 속으로 피신을 갔습니다. 6월 7일 추격군은 독립군의 본거지를 소탕하기 위해 봉오골로 기어들어 왔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상대는 최정예 부대이기 때문에 직접 대응해서는 이길 수가 없어 전략을 세운 겁니다. 이 봉오골은 아래에서부터 하동, 중동, 상동이 있는데 하동, 중동을 싹 비워버리고 상동에 매복해 있었습니다. 정찰병이 지나갔지만 공격하지 않고 계속 매복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찰병이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본대를 불렀고, 그 때 세 방면에서 매복해서 공격을 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일본군의 지원병이 들어왔는데 앞이 안 보이니까 저희들끼리 또 공격하면서 사상자가 더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300여명 중에서 157명이 죽었고, 이것은 게릴라전 치고는 굉장한 성과였습니다. 이 전투가 봉오동 전투입니다.
이 전투 때문에 나중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합니다. 항상 우리는 승리한 전투만 생각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일제는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하고 집을 불태우고... 그래서 주민들의 피해가 매우 많이 납니다. 일본은 다시 사단 병력을 데리고 공격을 준비하게 되고, 독립군은 백두산으로 후퇴를 하다가 청산리를 중심으로 다시 맞붙게 되어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세계 최강의 정규군과 약소 민족의 게릴라 부대가 싸워서 이런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니까 3.1운동의 패배감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오게 된 것이죠. 봉오동, 청산리 전투는 3.1 독립운동이 실패한 이후 첫 번째로 일어난 대단위 무장 투쟁이였습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참배를 하겠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조선 내에 반일투지를 높이는 데 기여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무장 독립투쟁이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일본의 대대적인 토벌이 이루어졌으나 우리 선조들은 많은 희생을 거치며 접경 지역인 중국, 러시아에서 무장 독립 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이런 소중한 독립 운동의 역사를 민족의 자긍심으로 끌어안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함께 기념비를 향해 제사를 지냈습니다.
참가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최가람님과 남자 참가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곽영술님, 여자 참가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최경숙님, 이렇게 세분이서 기행단을 대표해서 참배를 했습니다.
이어서 대중들도 모두 참배를 했고,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오늘 우리들은 통일 한국을 이루는데 기여를 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묵념도 하였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하류로 가서 우리 나라의 최북단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를 건너다 보았습니다. 좁은 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쪽의 풍요로움과 북한 쪽의 가난이 계속 대비가 되었습니다.
▲ 두만강 건너편에 보이는 우리나라 최북단 함북 온성군 풍서리
스님은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해 보기 위해 북한의 온성군 하나를 연결해서 비료를 제공해 주고 농법을 개선해서 식량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려보는 실험을 해보기도 했다”며 경험담을 들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지는 못했다”며 “앞으로도 꿈이 있다면 군 하나를 모델로 해서 식량 생산을 늘여서 그 모델을 전파해 보는 것” 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다음은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도문시에 있는 조중우호다리로 가서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읍을 바라보았습니다.
▲ 조중우호다리. 건너편은 함북 온성군 남양읍.
조중우호다리 앞에서는 극심했던 북한의 식량난과 탈북 난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식량난이 극심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 이 근처에서 수많은 북한 동포들이 탈북을 했다고 합니다.
강 사이에 섬처럼 되어 있는 부분에는 강을 넘다가 얼어 죽은 시체들도 자주 볼 수 있었고, 그 이후에도 중국에 친척을 둔 많은 북한 주민들이 친척들에게 먹을 것을 보내달라고 쪽지를 전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는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철조망이 이중 삼중으로 쳐지면서 경계가 삼엄해 지고, 탈북을 해도 중국에서의 인권 유린이 심한 점이 알려지면서 탈북은 거의 멈춘 상태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만강변을 따라 난 산책로를 거닐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두만강에 직접 손을 담가 보며 북한 땅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이 순간을 잠시라도 더 기억해 보고자 해 봅니다.
▲ 건너편 북한 땅을 바라보고 두만강에 손을 담가보며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연길시로 이동하면서 스님은 수월스님 이야기와 용성스님 이야기를 들려주며 지금 좋은벗들과 평화재단이 하고 있는 일은 우리가 새로 하는 일이 아니라 이런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한 것도 된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시대와 조건을 뛰어넘어 그 정신은 항상 계승되고 있음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연길시에 도착해 들른 식당은 북한 여성들이 공연을 보여주는 특별한 식당이였습니다. 스님은 “이곳까지 왔으니 북한 사람을 가까이서 보며 그들의 가진 재능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이라며 식당으로 안내했습니다. 우리들에게 낯익은 한국 가요와 북한 노래를 번갈아 가며 들려주며 정말 해맑은 목소리와 얼굴 표정을 보여주는 북한 공연단에게 대중들은 뜨거운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만약 통일이 되어 우리와 이들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면 또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날지 기대가 되고 설레였습니다.
그리고 역사기행을 처음 개척할 때부터 지난 21년 동안 많은 가르침과 애정을 보여주신 연변대학교 방학봉 교수님 부부가 식당을 찾아와 기행단 대중들을 위해 격려의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방학봉 교수님은 “20여년 간 스님의 지도 하에 역사기행을 해오며, 또 한국의 해결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면서 “이번 역사기행도 무사히 마무리 되길 기원한다”고 축원해 주셨습니다.
▲ 평생 동안 발해사 연구를 해온 방학봉 교수님 부부
또 좋은벗들이 북한돕기 활동을 할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도움을 준 조선족 사기 피해자 협회 분들도 식당을 찾아와 기행단 대중들을 위해 격려의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발걸음을 해준 모든 분들 한분 한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선물을 전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숙소로 이동해 짐을 푼 후 곧바로 저녁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저녁 강의는 항일독립운동의 역사를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
스님은 긴 시간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남한에서 중요시 여기는 독립운동 성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의 역사도 함께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또한 전쟁에 참여한 일본의 병사들의 아픔도 생각해야 함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와 있는 이곳은 단순히 과거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문제 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 문제의 뿌리도 여기에 있습니다. 첫째, 경신년 대참사라는 사건이 있어요. 청산리 전투를 승리할 때 우리는 승리만 이야기하는데 이럴 때 일본은 어떻게 하겠어요? 이곳에서 수십년 간 농경지 개간하며 살았던 사람들에게 농경지와 집을 다 버리고 내려오라고 그랬잖아요. 몇십년 땅을 일구고 집 짓고 살아왔는데 독립군의 근거지가 되니 내려오라고 하고, 안 내려오니까 집에 불 지르고 죽여서 수천명이 학살을 당하고 재산을 잃어버린 정도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겨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지면 그 부대만 죽고, 이기면 열배로 주민이 학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내일 가게 되는 백운평 마을도 일본이 청산리 전투에서 져서 후퇴하면서 이 마을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버렸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도 이런 그들의 아픔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을 승리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가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일본을 미워하지만 일본 젊은이들도 일제에 아무 이유없이 징집되어 와서 이곳에서 개죽음을 당한 것이잖아요. 그런데서 우리가 일본 군국주의를 반대해야지 일본 민중들을 미워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런 비극을 잊지 않고 개선하되 평화로 가야 하거든요. 희생자들 중에 우리의 독립군들만 추모할 것이 아니라 비극적으로 죽은 민중들의 영혼도 위로해야 하고, 죽은 일본 병사들도 우리가 위로를 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이 땅은 고조선 시대에도 우리의 영토였고, 고구려 시대에는 변방이였고, 발해 시대에는 중심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독립운동의 가장 주된 활동 무대였습니다. 어쩌면 시대가 좋아지면 김일성의 홍기와 전투터도 방문해야 합니다. 지금은 나무 푯말 하나만 세워져 있고 아무 것도 없거든요. 북한의 젊은이들과 남한의 젊은이들이 함께 청산리 전투터도 가고, 홍기와 전투터도 가보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조상들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조상들이 볼 때는 같은 민족인데 서로 싸우고, 한쪽이 굶어 죽고 있는데 식량을 주지도 않고 굶겨 죽이고 이렇게 하는 것은 조상들이 볼 때 적절치 않죠. 후손들이 그렇게 살아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였을 것이잖아요. 여러분들도 형제끼리 싸울 때 ‘부모가 볼 때는 어떻게 여기실까’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타협점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남한 만의 독립운동사에서 북한의 입장까지 생각해 보게 되면서 독립운동에 대해 더욱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는 소중한 가르침이었습니다.
밤 10시가 넘어 강연이 끝났고, 대중들은 모두 휴식을 하러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내일은 새벽 3시 30분에 기상하여 4시에 연길 새벽 시장을 방문해 아침식사를 할 예정입니다. 오전에는 깊은 산속으로 산행을 하며 청산리 전투터를 둘러보고 오후에는 대종교 3인묘, 일송정, 용정중학교를 둘러보며 독립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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