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8.5 동북아 역사기행 4일째, 백두산 그리고 발해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4일째를 맞이하여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 천지에 올랐고, 오후에는 발해의 첫 수도 동모산을 본 후 발해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오늘은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날입니다. 새벽에 눈을 뜨자 창 밖으로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며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아, 오늘 천지를 볼 수 있겠구나’ 약간 기쁜 마음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 일출 모습 

 

스님은 새벽 일찍 천일결사 기도를 한 후 대중들이 숙소에서 다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5시 정각에 버스에 탑승했습니다. 

 

이도백하를 출발한 버스는 백두산 북편산문까지 약 40분 가량 자작나무와 각종 침엽수림으로 우거진 원시림을 통과했습니다. 해발고도가 점점 높아질수록 공기는 차갑고 싸늘한 기운마저 느껴졌습니다. 기행단은 사람들이 붐비지 않은 이른 시간에 가장 먼저 백두산에 오르려고 6시 정각에 매표소 앞에 줄을 섰습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매표소 앞을 가득 메웠고, 6시 30분에 매표소 문이 열리자 많은 인파가 순식간에 셔틀 버스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순간 놀라기도 했습니다.

 


▲ 매표소 앞

 

이 모습을 보며 아직 중국은 공중 도덕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것 같다는 얘기들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지난 3일 동안 비가 계속 와서 천지를 못 봤는데 오늘 해가 뜨자 갑자기 사람들이 몰렸다고 합니다. 

 

미묘한 긴장감 속에 덩달아 우리 대중들도 종종 걸음을 걷게 되었는데 스님께서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오세요”라고 여러 차례 수신기로 알려주며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백두산 천지로 올라가기 위해 셔틀 버스와 승합차 두 번을 갈아탔습니다. 승합차에 타니 운전 기사는 신나는 리듬의 가요를 틀어주면서 마치 놀이 공원의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가파른 고개를 요리조리 꺾어가며 아찔한 운전을 했습니다. 짜릿한 즐거움과 두려움을 함께 느끼며 15분을 달려 천지에 도착했습니다. 정상 부위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바글 바글 모여 있었습니다. 

 


 


▲ 백두산 천지로 올라가는 길

 

드디어 백두산 천지가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아 천지의 호수 물도 아주 잔잔했습니다. 산과 하늘을 그대로 투명하게 비추며 ‘아!’ 하는 탄성을 자아내었습니다. 짙푸른 천지 호수와 웅장한 바위산들의 위용에 왜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이라고 부르는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백두산 천지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모여 있어 사진 한 장 찍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스님은 분주히 이곳 저곳을 살펴보며 조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적당한 곳을 찾았습니다. 스님은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적당히 틈을 보며 연이어 조별 사진을 함께 찍어 주었습니다. 

 


 

 

롤러코스터 같은 승합차를 다시 타고 천지에서 내려왔습니다. 꼬불꼬불한 길이 산 아래 마을로 이어져 있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 백두산 천지에서 내려가는 길

 

다음은 비룡 폭포로 향했습니다. 셔틀 버스에서 내려 나무 계단을 따라 1.2km를 걸어가니 군데 군데 김이 모락 모락 피어나는 온천 물이 보이고, 저 멀리 회색 빛깔의 화산 지형 사이로 새하얀 물줄기가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비룡 폭포가 보였습니다. 여름 햇살이 따가웠지만 스님은 비룡 폭포를 배경으로 참가자 전체에게 개별로 기념 사진을 함께 찍어 주었습니다. 

 


▲ 비룡폭포

 

그리고 비룡 폭포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수량의 70% 가까이가 지하수이고, 경사면에서 떨어지는 계곡물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구성되어 있어서 폭포의 양은 연중 큰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으니까 홍수는 물양에 큰 영향을 주지 않고요. 오히려 눈이 녹아 내리는 초여름에 확실히 물양이 좀 많아지는 편입니다. 1.25km를 하얗게 흐르다가 큰 바위 앞에서 양쪽으로 갈라서 떨어지는데 두 폭의 비단을 편 것 같다고도 하고, 또는 용이 승천하는 것 같다고 해서 비룡 폭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폭포의 높이는 약 68미터입니다. 이렇게 흘러 내려가서 이도백하를 통해 송하강으로 합류해서 흑룡강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나라의 폭포 중에서는 가장 웅장한 폭포라고 할 수 있죠.”

 

울창한 원시림 사이로 난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와 다시 셔틀 버스를 타고 소천지에 도착했습니다. 소천지는 작은 화산호인데 모양은 둥글고 아담하며, 주변에 빡빡하게 둘러 있는 나무들과 하늘에 떠 있는 구름들이 수면 위에 영롱하게 비춰진 모습이 어제 비가 많이 와서 평소보다 잔잔한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여전히 감탄을 자아내었습니다. 스님은 일찍 도착해 소천지를 한바퀴 돈 후 대중들이 모두 도착하자 간단히 소천지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 소천지

 

“물이 깨끗하죠? 입구로 들어오는 물은 골짜기 물이지만 빠져나가는 곳이 따로 없고 지하로 스며서 나가고 있습니다. 은환호라고 해서 둥근 은거울 같다고 하는 이름이 붙어 있어요. 바닥이 검어서 거울 역할을 합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비칩니다. 비가 오지 않고 유입되는 물이 소량이 되면 잔잔해서 호수가 완전히 거울 같이 됩니다.”  

 

소천지를 나와 녹연담으로 향했습니다. 녹연담은 원래 옥색의 맑은 물인데 어제 비가 많이 와서 황색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녹연담이 아니고 황연담이라면 대중들도 모두 웃었습니다. 

 


▲ 녹연담

 

녹연담을 나와 다시 셔틀 버스를 타고 지하삼림으로 향했습니다. 지하삼림은 말처럼 땅 속에 숲이 있는 것이 아니고 화산 활동의 영향으로 함몰된 넓은 면적의 땅에 숲이 형성된 것을 말합니다. 숲의 주변을 둘러싸고 절벽이 솟아 있어 마치 땅 아래에 숲이 형성된 것처럼 보입니다. 김홍신 작가님은 ‘대발해’라는 소설을 쓸 때 지하삼림을 보고 발해 군인들의 훈련장으로 묘사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바위 위에 붙어 있었는데 바위와 함께 툭 쓰러져 있는 나무들도 많아서 참 신기했습니다. 용암이 갈라진 틈 사이로는 깊고 좁은 계곡이 세찬 물살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길, 스님은 “백두산 보고 왔으니 백두산 노래를 다시 불러보자” 합니다. 올라갈 때 불렀던 노래보다 내려오면서 부르는 노래는 더욱 우렁찼습니다.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 만주벌판 말을 달리던. 전사들의 투쟁의 고향 ♬ 살아쉬는 백두산으로!”

 

스님은 대중들의 우렁찬 노래 소리를 듣고 “백두산을 다녀오니 점심도 안 먹었는데 노래가 어제보다 훨씬 우렁차다” 며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이도백하에 도착해 늦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전 내내 걸음을 걸었더니 다들 허기가 졌는지 밥맛이 꿀맛이라며 허겁지겁 먹는 모습입니다. 서로 먹을 것을 챙겨주며 조별로 친목도 한층 다져진 느낌입니다. 이렇게 해서 압록강과 백두산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오후에는 발해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중원 대륙의 깊숙한 한복판을 향해 달려 갔습니다. 고구려 영토보다 2배나 넓은 광활한 영토를 갖고 중원을 누볐던 발해인들의 기상을 상상해보며 발해의 첫 수도였던 돈화에 위치한 동모산을 향했습니다. 

 

버스 차창 밖으로 이도백하에만 있는 소나무인 ‘미인송’을 잠깐 볼 수 있었습니다. 미인송을 끝으로 노근한 몸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들 하나둘씩 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도백하에서 돈화까지 3시간 정도가 흐른 후 스님의 “동모산에 도착했다”는 알림 메시지에 잠에서 깨어 버스 밖으로 나왔습니다. 큰 평지에 삿갓을 덮어놓은 듯한 모양새의 낮은 산이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성을 쌓기에는 좀 밋밋해 보이는 산 같았습니다. 그러나 큰 평지 위에 있어서 저 정도만 올라가도 주변이 훤히 보일 수 있을 것 같기는 했습니다. 

 

동모산은 아직 발굴 중이라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직접 올라가 보지 못하고 먼 발치서 보기만 해야 해서 고구려의 산성 위에 올라가 봤을 때 보다 감흥은 조금 떨어지는 느낌이였습니다. 대중들의 이런 의구심을 읽었는지 스님이 간략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 동모산

 

“아무리 봐도 저기에 어떻게 성을 쌓았나 싶죠? 저도 제일 처음에 왔을 때 그런 느낌이였어요. 성이 어떻게 쌓여져 있냐 하면요. 이게 대석하라는 강이예요. 지금은 물이 많이 말라 있는데 강물이 많이 흘렀다고 보시면 여기가 자연 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숲이 우거져서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약간의 절벽이 있습니다. 저기 능선이를 따라 성벽이 주욱 올라갑니다. 

 

정상을 가운데에 두고 성벽이 뒤로 갑니다. 가까이 가보면 허물어진 성벽 위로 주욱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접근도 못하게 하고 있죠. 앞에 길을 닦고 하는 것을 보니까 조만간 관광지로 열려고 하든지 무슨 수가 날 것 같기는 하네요.“

 

스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아, 그렇구나’ 하며 그제서야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스님은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여기는 고구려 때 북쪽 국경 지대였습니다. 대조영이 고구려의 북쪽 국경 지대까지 도망을 온 것이죠. 그래서 이 성은 마치 발해에 있어서 고구려의 오녀산성과 같아요. 적이 공격하면 여기로 들어와서 은거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평지성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저쪽 넓은 들판에 영승유지라는 곳이 있어요. 거기가 평지성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북쪽으로 2~3km 떨어진 육정산에서 정혜공주묘가 발견되면서 발해의 왕실 귀족 공동묘지가 발견된 것이죠. 보통 공동 묘지가 궁성으로부터 3~5km 떨어져 있거든요. 그런데 아직 확정을 못하는 이유가 유물은 나왔지만 성벽이 분명하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항상 처음 나라를 세울 때는 산성을 쌓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방어가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동모산성을 첫 수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서 스님은 예전에 역사기행을 처음 시작한 초창기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역사기행 초창기에는 발해 유적지 답사가 주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지금은 많은 곳이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고 있어 지금은 예전보다 방문지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조금은 씁쓸한 느낌을 간직한 채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뒤돌아서 나왔습니다. 

 


 

현장 방문이 허용되지는 않지만 스님은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시려는 듯 버스를 서행시키면서 설명을 이어갑니다. 

 


▲ 버스 창 밖으로 본 육정산

 

“저기 동그란 봉우리가 6개 보이죠? 저곳이 육정산입니다. 발해의 3대 문왕의 세 번째 딸의 무덤인 정혜공주묘가 저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발해인이 스스로 쓴 역사 기록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 무덤 속에서 기록이 나오면서 발해 역사 연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 왔죠. 지금은 접근을 못하게 하고 있지만 영승유지는 육정산에서 오른쪽으로 더 가면 그 가까이에 있습니다. 여기 흐르는 강은 목단강입니다. 목단강 옆에 영승유지가 있습니다. 영승유지에서 동모산까지는 2~2.5km가 되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동모산성으로 피난도 할 수 있었겠죠.”

 

다음은 오늘의 마지막 방문 유적지인 강동 24개석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돈화 시내의 지하로 들어가는 도로 옆에 철책으로 둘러처진 채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채 덩그러니 있는 모습이 왠지 방치되고만 있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깝게 다가왔습니다. 

 


▲ 강동 24개석

 

스님은 24개의 돌이 무엇으로 쓰였는지는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이 수수께끼를 푼다면 아마 박사 학위는 따논 당상이라고 웃으면서 말씀 했습니다.   

 

이렇게 기나긴 오늘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서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한 후 8시부터는 발해의 역사에 대한 스님의 강연이 이어졌습니다. 

 

돈화시는 작은 도시라 큰 규모의 식당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가까스로 이 식당을 잡았는데 마침 식당의 에어컨이 고장나서 식사를 마치고 강연이 시작될 무렵 강연장은 찜통이 되었습니다. 찜통 더위를 대중들이 무척 힘들어하자 스님은 “사우나 하면 얼마나 시원해요? 기왕에 땀 흘린 거 흠뻑 흘립시다” 고 하며 대중들의 더위를 한방에 싹 날려주었습니다. 

 


 

스님은 고구려의 패망 과정과 발해의 건국 과정을 한편의 영화를 보듯이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발해와 신라와의 서먹했던 관계에 대해, 또 순식간에 대제국을 건설한 발해가 패망하는 과정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발해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발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당나라가 발해와 국교를 정상화 하면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발해는 자신들을 ‘진국’ 또는 ‘대진국’이라고 불렀습니다.

 

발해는 3대 문왕 이후 왕위가 짧게 짧게 바뀌어 오다가 10대 선왕에 와서 해동 성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제국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행정구역으로는 5경 15부 62주가 될 정도로 번성을 했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신라와는 앙숙이었습니다. 발해는 당나라와도 잘 지냈고, 거란족과도 잘 지냈고, 일본과도 잘 지냈는데 신라와는 전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밀접한 관계도 없었습니다. 신라의 기록에도 발해와의 밀접한 교류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강동 24개석 같은 것이 남경남해부 쪽으로 가는 길에 있고, 신라로가 있었다는 것을 보면 교류는 있었던 것 같은데 관계가 긴밀했다는 역사 기록은 없어요. 

 

거기에는 자신들의 선조인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발해인들의 섭섭함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신라는 발해에 대해 아쉬울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도 지금 미국 하고만 친하면 되지 북한한테 별로 아쉬운 것이 없듯이 신라도 모든 면에서 당나라가 더 앞섰지 발해한테서 배울 것이 많이 있는 게 아니였죠. 더군다나 신라가 그렇게 역사 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죠. 발해 입장에서도 신라와의 교류보다는 일본과의 교류, 거란과의 교류, 당나라와의 교류가 더 중요했죠. 그렇게 남북 관계를 유지해 간 것 같아요. 

 

그래서 당나라에서 황제가 외국 대사들과 회의를 할 때 신라와 발해는 항상 자리 다툼을 했다고 해요. 당시 당나라의 제일 친선국은 신라였죠. 그러나 발해는 대국이기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었죠. ‘서로 얼마나 친하냐’, ‘누가 더 대국이냐’ 이런 이유로 ‘신라가 상석에 앉아야 한다’, ‘발해가 상석에 앉아야 된다’ 해서 경쟁이 골치 아팠다 할 정도였던 것 같아요. 우리도 지금 미국이 일본과 더 친하냐, 한국과 더 친하냐 하는 얘기가 자주 나오잖아요. 그래서 한 번은 신라 대사를 옆에 앉히고, 한 번은 발해 대사를 옆에 앉히고 했다고 할 만큼 신라와 발해는 경쟁 관계에 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800년대 말부터 900년대 초로 넘어오면서 당나라의 힘이 약해지면서 요서 지역이 비어 있는 상태에서 거란족이 일어나서 각기 흩어져 있던 거란족들을 야훌라보기가 통합해 요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 힘을 빌어서 제일 먼저 공격한 것이 발해입니다. 상경용천부로 가는 길목인 부여성을 먼저 침공해서 함락이 되었고, 그러자 금방 상경용천부도 함락되어서 발해는 멸망하게 됩니다. 그 후 발해도 부흥군들이 일어나서 싸웠는데 결국 성공하지는 못하고 일부 지역에서 거의 100년 이상 독자성을 갖고 싸웠다고 해요. 

 


 

발해가 망하던 그 시기는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망한 후 5대의 혼란 시기이고, 신라 말에는 후삼국이 쟁패하는데 특히 신라는 거의 쇠약해졌고 견훤과 왕건이 서로 격돌하는 시기였습니다. 이런 시기이다 보니까 발해가 망할 때 아무도 여기에 관여할 여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해의 유민 일부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고려로 유입되는 그런 정도였습니다. 만약 고려가 강성했으면 발해의 역사를 좀 더 계승했겠죠. 현재 동북아의 역사 속에서 대제국을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자료가 가장 빈약한 것이 발해입니다.”

 

이어서 스님은 발해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말갈족,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일본의 이야기를 하면서 발해는 이런 동북아의 소수 민족들이 중원을 한벅씩 지배해 보도록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발해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인구 구성 상 말갈족이 많았던 데다가 나라를 세울 때 처음부터 고구려족의 산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의 둘이 힘을 합해서 나라를 세우다시피 한 점입니다. 그래서 고구려와는 다릅니다. 고구려 때 말갈족은 저 밑에서 자치권 정도 갖고 있는 수준이여서 중앙 정부에는 말갈 귀족이 진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중앙 정부까지 말갈 귀족의 대신들이 참여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갈족은 국가 경영에 대해 큰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발해가 망하니까 말갈족이 볼 때는 자신들이 고구려 때처럼 지배를 받는 민족이 아니였으니 발해는 자기들 나라라는 개념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발해가 거란한테 망하게 되니까 자기들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금나라입니다.

 


 

그래서 금나라가 일어나자마자 맨 먼저 한 것은 철저하게 거란족을 없애는 것이였습니다. 여세를 몰아서 송나라를 압박을 했죠. 송나라가 요나라에게 시달리다가 이번에는 금나라에게 시달리다가 못 견뎌서 남쪽으로 내려간 것을 남송이라고 말합니다. 요나라와 고려가 부딪힌 것은 서희의 담판에 의해 화친을 했고, 금나라는 원래 고구려의 일부이기 때문에 서로 크게 부딪힐 염려가 없었고, 금나라는 고려를 가장 가까운 형제국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큰 전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몽골족이 일어났습니다. 몽골족의 원나라가 일어나서 금나라를 쳐부스고, 그 힘으로 밀어 붙여서 남송까지 멸망시켜서 유라시아에 대제국을 건설했죠.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만주가 제대로 관리 안 되니까 말갈족인 여진족이 다시 후금을 세웠습니다. 거기다가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와 조선이 피폐해진 약한 고리를 타고 여진족이 이곳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금의 심양에 수도를 정하고 처음에는 후금으로 불리우다가 '청'이라 칭하면서 조선부터 항복 받고 명나라를 없애고 청나라를 건국했습니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몽골이 금나라를 멸망시켰으니까 철천지 원수잖아요. 그래서 청나라는 어떻게 했냐 하면, 몽골을 내몽고와 외몽고를 구분해서 통치를 했습니다. 내몽고는 직할 통치를 하고 외몽고는 자치권을 주고 간접 통치를 한 겁니다. 

 

그런데 청나라가 망하니까 직할 통치했던 내몽고는 중국 땅이 되고, 외몽고는 러시아의 도움을 얻어 독립을 하게 됩니다. 몽고족이 전체 1100만명 정도 되는데 현재 독립국가인 몽고에는 300만명 밖에 살지 않고 내몽고에 한 700만명이 있습니다. 훨씬 더 많은 수가 중국에 소속되어 있죠. 그 다음에 러시아쪽에 있는 자치공화국에 100만 정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몽골에 가면 몽골 공화국이 있고, 1100만의 몽골인들이 독립해야 된다고 하는 대몽고 공화국 운동이 있습니다.   

 


 

동북아의 여러 민족은 고대로 우리 민족의 아래에 같이 있던 소수 민족이였는데 그러다 결국 발해가 멸망하니까 종주자가 없어졌죠. 그래서 고조선이 약하니까 선비족이 제일 먼저 일어났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 일어난 것이 거란족이고, 그 다음에 여진족이죠. 그 다음에 몽골족이 일어났고, 그 다음에 일본이 또 일어나서 만주를 점령했죠. 이런 전체 역사 속에서 발해를 봐야 합니다. 발해를 어떻게 계승했느냐 하는데 꼭 발해를 우리 민족의 역사만이라고 보지 말고 발해는 동북아의 소수 민족들이 중원을 지배하도록 하는 대변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을 이해하고 내일 상경용천부를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스님의 역사관 속에는 꼭 우리 민족 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의 주변 민족까지 함께 보는 시각이 늘 함께하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그 깊이에 감명을 받게 됩니다. 

 

오늘 아침 백두산 천지를 보았다는 기쁨도 잠시 어느새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모두들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내일은 발해의 중심이였던 상경용천부의 성터를 둘러보고, 주작대로를 따라 외성터 내에 위치한 흥륜사를 방문한 후 두만강 유역으로 이동해 주요한 독립운동 유적지인 봉오동 전투터를 보면서 이제 독립운동에 대한 공부로 넘어가게 됩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전체댓글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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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느라 애많이 쓰셨습니다ㅠ백두산사진이나 비룡폭포들을 보고 있으니 정말 신령스럽기 그지 없네요..<br />잘 몰랐던 동북아를 둘러싼 역사에 대해서도 속시원히 알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발해는 거란(요)한테 멸망했고,발해민족가운데 많은 수를 차지했던 말갈족이 다시 후금을세운 여진족이군요?

2015-08-16 07:00:13

김혜현

발해까지 우리땅이었을 때 우리 한국이 아주 강력한 국가였다고 들었어요!!! 나도 백두산 가보고 싶어요~ 정말 아름답네요^^

2015-08-11 21:34:29

김성례

이 날 저녁 식당이 너무 더워서 그냥 저녁강의 졸았었는데 다시 강의를 재 복습하고 갑니다 ㅎ 발해를 세운 이들은 고구려와 말갈족이었기에 발해가 거란에 망하자 나중에 그 말갈 여진족이 거란인 요를 치고 금나라를 세우고 금과 고려는 형제국처럼 사이좋게 지냈고 또 다시 명나라를 치고 백두산을 기점으로 심양을 수도로 후금 즉 청을 세웠다는 것이 발해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 처럼 연결이 됩니다 ^^~~

2015-08-11 17: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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