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8.4 동북아 역사기행 3일째, 압록강과 북한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3일째를 맞이하여 압록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강 건너편 북한 땅을 보면서 ‘북한의 현실’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오늘도 스님은 새벽 3시에 일어나 기도를 한 후 4시 30분부터 숙소를 나오는 대중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역사기행 3일째 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5시에 집안을 출발한 버스는 4시간 30분 후 림강을 지났고, 다시 림강에서 압록강 상류를 향해 4시간을 올라가는 여정을 가졌습니다. 림강에서 백두산 최상류까지 올라가면서 많은 계곡 물들이 압록강으로 합류하게 되는데 특히 중국 쪽에서 흘러드는 계곡 물은 차례대로 번호를 붙여 24도구로 구분하고 있다고 합니다. 6도구, 8도구 지나갈 때마다 스님이 알려주어서 현재 기행단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대략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압록강 너머의 북한 땅을 바라보니 산이 온통 뙈기밭으로 개간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서 있기도 힘든 가파른 곳에 옥수수, 콩 등 작물을 심었고, 산에 있어야 할 나무들은 혁명 전적 유적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보이지 않아 중국의 울창한 산림과 너무나 대비가 되었습니다. 

 


▲ 압록강 너머로 보이는 북한의 뙈기밭

 

많은 북한 주민들이 출근하기 전이나 퇴근 후에 뙈기밭을 열심히 일군다고 합니다. 직장 일에 집중하기 보다는 각자의 뙈기밭에 연명해 식량을 마련하다고 하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스님도 ‘문전옥답에 인력이 효과적으로 쓰여야 할텐데, 산비탈에 가서 농사를 지으니 생산량이 거의 없지요. 먹고 살기 위한 몸부림은 이해가 되지만 소중한 인력이 얼마나 낭비되고 있습니까’ 라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간혹 보이는 집들은 아주 낡아 보여서 한눈에도 남루함이 느껴졌습니다. 날씨가 맑으면 빨래하는 주민들, 물놀이 하러 나온 아이들을 많이 목격할 수 있는데,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어서 북한 주민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 버스 창문으로 보이는 북한 혜산시의 모습

 

스님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멍하니 북한 땅을 바라보고 있는 대중들에게 북한이 왜 이렇게 어렵게 되었는지, 스님이 북한 동포 돕기 활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와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94년과 95년 대홍수가 있었고, 95년에 이곳에 역사기행을 왔을 때 북한이 많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96년에 왔을 때는 중국 친구가 저를 압록강으로 데려가서 영양 실조 상태의 북한 아이들을 직접 보여줘서 그때부터 북한동포돕기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정토회관 건립 불사를 하기 위해 7층 건물 짓는다고 땅도 구해놓고 설계도까지 다 만들어놓고 공사를 시작하려는 순간 이 소식을 접했어요. 그래서 제가 ‘사람이 죽어가는데 무슨 불사는 불사냐? 건물은 지금 못 지으면 10년 후에 지으면 되지’ 하고는 건물을 포기하고 북한동포돕기를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는데 심지어 어떤 신도는 ‘스님 평생에 서울 시내에 이 땅 팔아먹고 다시 땅을 사서 절을 짓게 되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 고 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해서 96년 겨울부터 97년, 98년, 99년, 2000년 겨울까지 매일 울고 다니며 인도적 지원을 호소했습니다. 

 


 

97년에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울고 불고 하면서 죽어가는 북한 동포를 살리자고 강의를 하고 다녔는데 그 해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어요. 선거가 시작되니까 북한 동포 돕기는 뒷전이 되었지요. 한국에서는 도저히 안 되니까 그해 가을부터는 미국으로 가서 호소를 했고, 그 때 미국에서 한반도 문제 관련해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어요. 그 사람들을 통해서 대북 인도적 지원을 하도록 요청했고, 마침 다음 해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 내의 분위기도 바뀌고 이렇게 해서 98년부터 대북 인도적 지원이 시작되면서 1999년에 대량 아사가 멈추었습니다. 저희들이 낸 통계에 의하면 95년 8월부터 98년 8월까지 만 3년 동안 300만명이 아사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북한이 대량 아사가 일어날 정도로 경제가 붕괴하게 되었는가? 1989년 동유럽이 붕괴되고 중국이 시장 경제를 도입해서 실물 거래를 하게 되어 북한은 외환 확보를 못했고, 결국 그로 인해 에너지 난을 겪었고, 에너지 난으로 모든 공장이 멈추었고, 농자재를 생산하지 못하니까 농업 생산량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노동자들에게 배급을 주지 못해서 함경북도의 노동자들이 먼저 대량 아사를 하게 되고, 시간이 지나니까 농업 생산량이 더 떨어져서 노동자 뿐만 농민도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즉 노동자에서 농민으로, 동부에서 서부로, 평민에서 당원으로 이렇게 확대가 되면서 군인들까지 굶어죽는 일이 벌어지게 된 거예요. 북한은 이 시기를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부릅니다. 어쨌든 일단 국제적인 지원과 함께 죽을 만큼 다 죽고 난 뒤에야 대량 아사는 멈추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사회의 기초가 무너지니까 장마당에서 장사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생기고, 북한 정부는 이를 단속하고, 굶어죽으니까 다시 풀고, 이렇게 국가 정책에 의해서 시장화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민중들의 투쟁이 시장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뙤기밭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허가 받고 다니는 것도 거의 없어지고, 북한 사회 안의 정보도 유출되면서 북한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생존 조건이 되었고, 그래서 주민들의 이탈을 막으려고 하다 보니까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인권 침해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국가 안보의 취약함을 보완할려고 핵 개발을 시도했는데 미국과의 합의로 그 핵을 동결시키면서 미국에서 유류 지원을 했죠. 그러나 부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것을 중단시키니까 북한은 핵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이 핵문제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진척 없이 북한은 핵보유국을 선언하고 이에 대해 미국은 봉쇄를 강화해서 대치 국면에 계속 놓여 있는 상태입니다. 

 

북한은 처음부터 저렇게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60년대에는 대동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할 만큼 제3세계 가운데에서는 잘 사는 축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미소의 분쟁과 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체 사상을 내세운 독재 체재의 강화, 이런 것들로 기술 보다는 이념을 강조하면서 정체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나 서유럽이 급격히 혁신 기술들을 개발했는데 이와 차단되면서 기술 혁신이 뒤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동유럽의 붕괴와 중국도 시장 경제로 가면서 배후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미국의 경제 봉쇄로 국제사회에 나올 수 없게 되면서 경제가 급격하게 붕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째 외환 위기, 둘째가 에너지 난, 그로 인한 모든 공업의 붕괴, 이것이 농업의 붕괴로 이어지면서 사회 붕괴로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와 군대라고 하는 상부 구조는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부 구조만 보면 내일 망할지도 모를 정도로 허약하지만 상부 구조는 내일이라도 한국을 제압할지도 모르는 극과 극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북한 정권은 불안정합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그렇게 쉽게 붕괴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가지 측면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그러면서 북한만 볼 것이 아니라 국제 사회가 바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북한을 어떻게 포용을 해서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보장하고, 우리들도 더 성장할 수 있는 해답을 찾아내느냐. 이것이 통일의 과제입니다. 통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 통일 이후에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이냐. 이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이예요. 

 

북한을 무조건 적대하는 일부 우파도 바른 관점이 아니고, 북한에 대해서 동조하거나 동경하는 일부 좌파도 바른 관점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와서 보고 아픔도 느끼고 그들의 모순도 보고 이 속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뙈기밭을 구경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행동하기 위해서 역사기행을 온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다행이 이번 기행단은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모인 통일의병들이 주축이 되어 있어서 그런지 스님의 간절한 호소에 더욱더 큰 공감을 보여주었습니다. 

 

긴 시간을 달려 버스는 어느덧 장백현에 도착했습니다. 장백에는 발해 시대의 탑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영광탑이 있습니다. 비가 오는 와중에 끝이 보이지 않은 계단을 쉼없이 올라가니 정상 부위에 높은 탑이 하나 보였습니다. 

 


▲ 영광탑으로 올라가는 계단

 

스님은 “발해 시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불교인이였고 옛 법도에 따라서 참배를 하려고 한다” 면서 “불교식으로 예참 공양을 함께 올리자”고 했습니다. 

 


▲ 발해 시대에 세워진 영광탑

 

정성껏 예참 공양을 올린 후 곧바로 평화와 통일에 대한 발원을 스님께서 해주었습니다. 

 

“오늘 저희 한국에서 온 고구려 발해 역사기행 참가자 140여명은 발해 시대에 건립한 장백현 영광탑 앞에서 지난 1100년 동안 이 탑을 참배하고 공양 올리지 못한 잘못을 참회 드리옵고, 늦게 나마 이렇게 시간이 되어 저희 대중이 다시 찾아와 옛과 다름 없이 공양 올리노니 저희의 이 간절한 소원을 성취시켜 주시옵소서. 

 


 

저희 한민족은 하느님을 받들고 대대로 이 땅에 강과 산을 지켜왔는데 인연이 다했는지 저희의 공덕이 모자랐는지 저희가 살던 고향을 잃어버리고 반도에 갇혀 1100년 동안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그 강토 마저 일제의 침략을 받아 지배 당하고 또 해방이 되자 마자 외세에 의해 분단이 되어 올해로 분단 70년이 되도록 남북 간에 갈등이 잠들지 않고 곧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갈등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저희가 피땀 흘려 쌓아온 재산과 인명이 전쟁의 참화로 잿더미가 되지 않도록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는 항구적 평화를 발원하옵니다. 

 

더 나아가 북쪽은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고, 남쪽은 성장이 둔화되고 정체와 후퇴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 민족사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통일만이 유일한 길이오니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하여 평화를 지키고 통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제불 보살님과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옹호하여 주시옵고, 환인, 환웅, 단군 삼신님과 역대 조상 영가님들은 저희의 이 발원이 곧 성취될 수 있도록 저희에게 온갖 힘을 불어넣어 주옵소서. 

 

저희의 통일은 저희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이웃과 더불어 사이좋게 서로 도우며 살아갈 새로운 문명, 새로운 세상으로의 출발로 통일을 발원하옵나니 통일의 첫발을 딛고 동아시아의 평화 공동체를 형성하고 인류의 평화와 복리와 번영을 발원하오니 저희의 이 평화와 통일에 대한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시고, 또한 보살펴 주옵소서. 

 

또한 이렇게 고단한 몸을 이끌고 이곳 혜산과 장백에 이르고 탑산에 올라와 간절히 발원하옵나니 순례 대중 일동들 건강하고 다생겁래 모든 업장 소멸되고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하여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 

 

대중들도 스님의 간절한 발원을 가슴에 새기며 광활한 만주 벌판을 누빈 발해인들의 기상을 이어받아 새로운 통일 코리아를 열어갈 것을 함께 다짐했습니다. 

 

발원 기도 후 스님은 “발해 시대의 탑이 다 없어졌는데 이 탑 만이라도 웅장한 모습으로 산 정상에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큰 복이다” 라고 하면서 올라온 김에 함께 기념 사진을 찍자고 했습니다. 카메라가 찰칵 하자 모두들 ‘통일 의병’을 외치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양강도의 수도인 혜산을 내다보며 이곳에서 좋은벗들이 북한 난민 돕기를 했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독립운동 할 때 만큼이나 위협을 무릅쓰고 춥고 배고픈 난민들을 도왔던 이야기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버스는 드디어 점점 백두산에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압록강 상류로 갈수록 강폭은 좁아지고 나중에는 작은 냇가처럼 좁아졌습니다. 폭짝 몇 발자욱만 건너 뛰면 곧 넘어갈 수 있는 거리가 되었습니다. 

 

버스 안에서의 시간이 길어지자 스님이 “자기 소개 시간을 갖자”고 했습니다. 한명씩 앞으로 나와 어떻게 역사기행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3일을 함께 보낸 소감이 어떤지 속깊은 나누기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역사기행에 참가하기 위해 2년 전부터 적금을 들었다는 분, 남편의 반대가 심해 참가신청 한달 전부터 남편에게 고분고분 숙였다는 분, 전생에 독립운동가였는지 이곳에 오니 매일 매일 가슴이 뛴다는 분 등 다양한 사연과 이야기를 들으며 버스 안은 웃음이 넘쳐 흘렀습니다. 

 

 

어떤 분은 통일 노래를 힘차게 부르기도 하고, 마음나누기가 일찍 끝난 버스는 자료집에 있는 통일 노래를 함께 배워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오후가 되자 저 멀리 구름 사이로 붉은 해가 모습을 비추었습니다. 중국에 온 지 3일이 지나가고 있지만 아직 햇살 한번 구경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해를 보고 대중들은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내일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는데 천지를 선명하게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모두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스님도 “너무 오랜만에 해를 봐서 그런지 저녁에 지는 해인데도 마치 아침에 뜨는 해 같다”며 웃음을 내비쳤습니다. 

  

 

백두산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와 서쪽 문 밖 송강하 지역에 도착해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저녁식사 후에는 이번 기행의 실무를 맡고 있는 조춘호 선생님이 기행단 전체를 위해 통화 포도주를 보시해서 다함께 건배를 했습니다. 

 


 

이어서 장기자랑 시간을 가졌습니다. 각 지역별로 노래 부르고 싶은 사람들이 나와서 노래 한자락씩을 뽐내었습니다. 온갖 노래들이 이어지면서 후끈 열기가 달아올랐습니다. 

 

장기 자랑을 마치고 스님은 내일 오르게 될 백두산에 대해 설명을 해준 후 오늘은 하루 종일 북한 땅을 보면서 왔는데 북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과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강연을 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안개가 많이 껴서 북한의 모습을 그렇게 선명하게 보지 못하여 아프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거예요. 정말 가슴 아픈 것은 뙈기밭입니다. 안 죽고 살려고 발버둥친 인간의 처절한 노력 같아서 너무 가슴 아프거든요. 이념을 떠나서 저렇게까지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식량 버리는 게 엄청난 죄라는 것을 아시겠죠? 

 

식량 정도 주는 것은 북한 정부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거예요. 현재 유엔에서 말한 인도적 지원이라는 것은 사상과 이념, 종교, 체제, 남녀, 모든 것을 떠나서 인간은 굶어죽으면 먹여살려야 되고 병들면 치료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북한 주민만 유엔이 정한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외면하느냐 말입니다. 이게 증오심이에요. 남북한의 증오심이 문제지요. 

 


 

북한에 끌려 가라든지 북한을 좋게 보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이 정치를 잘못하고 그들이 나쁜 짓을 한 것과 인도적 지원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굶어죽으면 일단 살려야 돼요. 극악한 범죄자도 최종적으로 판결이 나서 죽일 때 죽이더라도 살아있을 때까지는 보살펴야 되는 거예요. 북한 정권에 대해서도 나중에 심판을 할 때 하더라도 주민들은 살려야 하잖아요. 더구나 주민들은 범죄자도 아니잖아요. 그런 면에서 인도적 지원의 문제는 반드시 해야 되는 거예요. 저렇게까지 살고 싶어 하잖아요. 내가 북한 체제를 반대하는 것과 인도적 지원은 별개로 생각해야 되는데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면 이런 일이 생겨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친일배를 미워한다고 친일배의 후손까지 미워하면 안 됩니다. 당사자를 미워하는 것은 친일을 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만 그 자식은 친일에 대해 알고 태어난 것이 아니잖아요. 그걸 가지고 차별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일본의 군국주의를 미워하고 비판하고 경계하는 것은 좋지만 일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예요. 그들이 저지른 침략의 범죄는 그들의 조상이 한 것이지 지금 태어난 아이들이 한 건 아니잖아요. 막연히 일본놈이라고 해서 미워하는 것은 옳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북한 주민들은 북한 정부로부터도 피해를 입는 사람들인데 이중적 피해를 준다는 것은 맞지 않아요. 이것을 너무 이념적으로 접근하면 안 돼요. 북한 체제의 유지와 붕괴에 관계없이 굶어죽는 사람은 구제해야 한다는 게 기본적인 관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통일은 우리 남한의 미래의 비전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이 해결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북한이 개혁 개방이 되어서 생존권이 보장되고 인권이 개선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고 또한 그것은 쉽지도 않습니다. 긴장이 조성되면 어떤 나라든 체제를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서는 사람이 굶어죽는 것도 외면하고 인권 침해도 외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 관계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통일로 가는 것이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을 제일 빨리 보장하고 인권 개선을 가장 빨리 하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미래 이익을 위해서나 북한 주민들의 이익을 위해서나 평화와 통일은 우리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남한은 지금 경제가 정체되어 있는데 정체 국면을 돌파하려면 통일 만이 살 길이라고 하듯이 북한 주민의 생존권과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통일만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한쪽의 이익을 위해서 한쪽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위해서 다 필요한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통일 문제는 같은 민족이니까 통일하자고 하는 것과 같은 옛날 운동권적인 통일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좌니 우니 옛날에 잘했니 못했니 같은 얘기는 더 이상 불필요해요. 우리들의 현재 이익을 훼손하지 않고 미래의 이익을 위해서도 통일만이, 이념적 통일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통일만이 우리의 미래에 희망을 가져올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것들을 현장에서 보는 게 필요하다 싶습니다.”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통일은 큰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말씀에 대중들도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내일 올라갈 백두산과 관련해 잘못 이해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며 간략히 설명하면서 강연을 마쳤습니다. 

 


 

“내일 백두산에 올라가서 그 기상을 느껴볼 텐데요. 왜 환웅 천왕님이 태백산 아래에 신시를 건설했을까요. 한국적으로 산을 생각하니까 태백산 아래라고 하면 자꾸 골짜기 같은 것을 생각하는데 백두산은 동북아 대륙인 몽골과 만주, 중원 북부 지역 전체에서 제일 높은 산이에요. 만주벌의 어디에 나라를 세워도 다 백두산 아래에 세운 것이 됩니다. 백두산이 머리 부분이에요. 그래서 이름이 ‘백두’이잖아요. 인도나 양자강 이남 어디에 세웠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북아 대륙, 한반도와 만주, 이 지역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산이 백두산입니다. 백두산에 대한 그런 이해를 하면서 내일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동북아 대륙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산이 백두산이라는 말에 선조들도 자연적으로 백두산을 향한 마음이 남다를 수 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식당에서 간단히 강연을 마치고 숙소가 있는 이도백하로 향했습니다. 밤하늘에는 별도 보였습니다. 왠지 내일 백두산 천지가 맑게 개인 모습을 보여줄 것 같은 기대감과 함께 잠자리에 듭니다. 

 

 

내일은 이도백하에서 백두산 북편으로 올라 천지를 봅니다. 또 비룡 폭포와 소천지, 지하삼림을 본 후 발해의 땅으로 넘어 갑니다. 동모산, 강동 24개석을 본 후 돈화로 들어가는 일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전체댓글 40

0/200

^^^^

&lt;&lt;정토회관 건립 불사를 하기 위해 7층 건물 짓는다고 땅도 구해놓고 설계도까지 다 만들어놓고 공사를 시작하려는 순간 이 소식을 접했어요. 그래서 제가 ‘사람이 죽어가는데 무슨 불사는 불사냐? 건물은 지금 못 지으면 10년 후에 지으면 되지’ 하고는 건물을 포기하고 북한동포돕기를 시작했습니다.&gt;&gt;눈물이 울컥나네요~언젠가 지금의 정토회관이 3층으로 된 이유를 읽은 적은 있었지만.. ㅠ<br />&lt;&lt;백두산은 동북아 대륙인 몽골과 만주, 중원 북부 지역 전체에서 제일 높은 산이에요. 만주벌의 어디에 나라를 세워도 다 백두산 아래에 세운 것이 됩니다. 백두산이 머리 부분이에요. 그래서 이름이 ‘백두’이잖아요. 인도나 양자강 이남 어디에 세웠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북아 대륙, 한반도와 만주, 이 지역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산이 백두산입니다.&gt;&gt;

2015-08-15 12:02:54

^^^^

동북아대륙,한반도와 만주 이지역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산,백두산!

2015-08-13 08:29:09

김성례

사람이 굶어 죽어나가는데 불사는 무슨 불사냐?
스님의 그러한 마음이 지금의 정토회와 Jts등 많은 돕는 후원의 손길을
낳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날 백두산 아래에서 우리는 밥 고기 포도주를 먹고 즐기는 동안
스님은 웅크리고 원고교정을 마치시고 바로 옆 테이블에서 겨우 죽등을 드시는 듯~
그 모습이 간디옹처럼 야위게 보여 저는 순간 밥맛을 잃는듯 했습니다
그래도 우린 잘 먹고 잘 떠들고 잘 놀고 하는 동안 내내 스님은 그런 우리들의
흥도 복돋워 주시면서 여흥도 즐기게 하셨습니다
스님의 대발원심과 북녁동포들을 동체대비하시는 그 원력으로
통일은 반드시 이뤄질 것입니다
스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불러 일으키시듯 저희 통일의병도 그러한 마음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의식을 일깨워 나간다면...말입니다 ()()....

2015-08-11 16:48:57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