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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를 맞이하여 집안에 위치한 고구려 유적들을 안내하며 고구려인들의 기상과 생활 모습, 그 의미에 대해 안내했습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기도를 한 후 4시 30분부터는 버스 앞에 서서 환한 웃음으로 숙소에서 나오는 기행단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편안히 잘 주무셨어요?” 라고 스님이 묻자, 대중들은 “네” 라고 흔쾌히 대답하며 기쁜 마음이 되었습니다.
버스가 출발하자 먼저 스님은 오늘 일정을 간략히 브리핑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전체 역사기행 일정 중에 유적지를 가장 많이 보는 날입니다.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홀본성을 출발해서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으로 가는 일정이고 총 7개의 유적지를 둘러볼 예정입니다.
가장 먼저 국동대혈을 시작으로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국동대혈로 가는 길에 보이는 압록강변의 북한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습니다. 가파른 산 전체를 둘러싼 뙤기밭을 보면서는 굶주린 북한 주민들이 얼마나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북한의 뙤기밭. 압록강도 북한 쪽은 흙탕물인 반면 중국 쪽은 물이 맑습니다. 아마도 나무가 없는 북한의 민둥산에서 쓸려내려온 토사가 원인인 듯 합니다.
또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는 북한 아이들의 모습은 통일이 빨리 되어 저 아이들이 더 이상 배를 굶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번져 가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버스는 국동대혈이 있는 산 아래에 도착했습니다. 국동대혈은 국내성의 동쪽에 있는 큰 동굴을 의미하며 고구려의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빗줄기는 더 굵어지고 비옷 속에 땀을 뻘뻘 흘렸지만 기행단은 준비한 제물을 가지고 정성을 다해 국동대혈로 향했습니다.
올라가는 도중 관음굴이라는 큰 동굴이 나왔고 동굴 안에 마침 불상이 있어서 스님이 잠깐 기도를 하고 가자고 하셔서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잠시 우리 모두의 행복을 발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장상애’라고 적힌 큰 바위가 나타났습니다. 두 바위는 손을 마주잡고 입을 맞추려는 연인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고구려의 2대 유리왕에게는 권력가의 딸과 사랑하는 애첩 두 부인이 있었는데 다툼 끝에 집으로 돌아가는 애첩을 데리러 갔다가 혼자 돌아온 유리왕이 두 마리 꾀꼬리가 노니는 것을 보고 이곳에서 ‘황조가’를 불렀다는 설화가 있다”며 “두 사람의 사랑이 바위가 된 곳”이라고 알려주면서 그 설화를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바쁜 숨을 고르며 한바탕 웃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 바위 앞에서 유리왕의 황조가에 얽힌 설화를 이야기해 주고 있는 스님
다시 조금 더 올라가니 드디어 앞뒤로 뻥 뚫린 국동대혈이 나타났습니다. 하늘로 통한다고 하여 ‘통천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정성스레 제단을 차리고 한나라 환인 하느님, 배달 나라 환웅 천왕님, 조선을 건국한 단군 왕검님, 부여를 창건한 해모수님, 그리고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님 이렇게 다섯 분의 위패를 모신 후 다함께 천제를 지냈습니다. 안개가 자욱해서 그런지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 국동대혈
기행단 138명을 대표하여 이번 역사기행 참가자 중에 한명인 김두관 전 지사님이, 통일의병을 대표하여 해군 장군 출신인 이병록님, 정토회 통일의병을 대표하여 박금주 의병, 이렇게 3명이 앞에 서서 술잔을 올렸습니다.
스님은 고구려의 후예로써 1300여년 만에야 이렇게 찾아온 것을 참회하면서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을 천지신명께 간절히 발원하였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이루신 한나라의 환인님,
우리 민족 최초 국가 배달 나라를 건국하신 환웅 천왕님,
신시를 새롭게 하여 조선 나라를 건국하신 단군 왕검님,
조선 나라를 계승하여 부여를 건국하신 해모수님,
조선의 잃어버린 옛땅을 되찾고자 다물군을 이끌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신 고주몽님,
백제의 온조 대왕님, 신라의 박혁거세 대왕님, 가야의 김수로 대왕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대조영 대왕님,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고려 나라를 세우신 왕건 대왕님,
고려를 계승한 조선 나라의 태조 대왕님,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님,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주석님,
모든 천신과 조상님들께 두손 모아 합장하오며 발원하옵니다.
한반도에 영원한 평화가 이루어지고 우리 민족이 통일되어 번영하는 통일코리아를 발원하옵나니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고구려 패망 이후 1300여년이 지나도록 천신님들과 조상님들을 찾아뵙지 못한 저희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고, 대한민국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이렇게 저희 대중 일동과 통일을 발원하는 통일의병들이 이곳에 왔습니다.
천제님께 발원하오며 조상님들께 발원하옵나니 저희들의 이 통일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온갖 가피를 내려주시옵소서. 한 핏줄로 태어나 함께 피를 나눈 형제인 북한 동포들 수백만이 굶어 죽어가는 데도 외면한 저희들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옵시고 저희들이 다시는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함께 공존하고 함께 번영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가겠사오니 저희들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이 원이 성취된다면 과거 고구려 때처럼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매년 이곳에 와서 천신님들과 조상님들께 감사의 제사를 지낼 것을 약속하오니 저희에게 그런 날이 돌아올 수 있도록 저희들을 옹호하여 주옵소서. 오늘 이 자리에 참여한 통일의병 각각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나라의 평화와 통일의 역군이 될 것을 발원하오니 이들의 건강과 안전을 지켜주시옵소서. 다시한번 환인, 환웅, 단군 삼신님과 해모수, 고주몽, 대조영 등 민족의 정통성을 계승한 조상님들께 저희들이 그 정신을 길이 이어갈 것을 발원하옵나니 저희들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삼배로써 발원을 하옵나니 저희들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
스님의 발원에 따라 대중들도 삼배를 했습니다. 많은 대중들이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제물로 올렸던 음식과 술로 음복을 한 후 둥글게 서서 손을 맞잡고 남북한이 하나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기행단은 점점 통일에 대한 열기로 한껏 달아올랐습니다.
국동대혈에서 일찍 내려온 사람들은 압록강에 손을 담궈보기도 했습니다. 압록강변을 따라 가다보니 건너편에 북한의 만포시가 보입니다. 이곳과 만포시 사이에는 하루에 한번씩 기차가 다니고 있다 합니다.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만포에서 평양을 거쳐 서울로 갈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도해 봅니다.
이어서 400년이 넘도록 고구려의 수도로 사용된 국내성과 집안시 곳곳을 꼼꼼하게 돌아보았습니다. 장군총, 광개토대왕릉, 5회분5호묘 벽화, 환도산성, 산성하무덤떼, 국내성, 그리고 압록강까지 집안시를 모두 하루 동안 둘러보았는데, 누군가가 “여기가 우리 집안이네” 라는 농담을 던져 다함께 웃기도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 민족이 살았구나. 중원의 문화와는 다른 배달 문명의 역사를 이어 받은 선조들의 무대는 바로 이곳이였구나. 두발로 걷고 눈으로 보니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이야기, 우리의 역사가 그들의 역사관으로 해석되고 알려지고 있고, 중국 역사의 한 부분으로 편입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왜 역사 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우리 스스로 올바른 사관을 가지는 것의 중요성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먼저 장군총은 이제껏 몰랐던 고구려의 무덤 축조 기술에 대한 놀라움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역사를 이제껏 모르고 살았을까요.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대해 감탄할 줄만 알았지 이런 역사를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것이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 장군총
이어서 광개토대왕비와 광개토대왕릉을 보았습니다.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 때 만든 것으로 높이가 6.39m나 되는 웅장한 비석입니다. 장수왕은 그의 아버지가 이룬 역사를 기록하고 건국부터의 역사를 이 비석에 기록했습니다. 그 당시에 어떻게 이 어마어마한 돌을 옮겨서 이렇게 다듬었는지 놀랍기만 했습니다.
▲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비 앞에서 지역별로 기념촬영을 한 후 바로 옆에 위치한 광개토대왕릉으로 이동했습니다. 18세에 왕위에 즉위하여 39세에 죽을 때까지 광활한 영토를 확장했던 광개토대왕은 그 업적에 걸맞게 무덤의 크기가 장군총에 비해 훨씬 컸습니다. 장군총의 한 변이 32m라면 광개토대왕릉은 65m나 되었고 기단을 받추고 있는 호석도 장군총은 한변에 3개인 반면 광개토대왕릉은 5개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급히 쌓다 보니 강돌이 아닌 산돌까지 넣고 쌓아서 상당 부분 무너져 내려서 돌무더기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보존 작업이 시급해 보였지만 남의 나라 땅이여서 어찌할 수 없는 점이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 광개토대왕릉
가까운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은 후 오후에는 5회분 5호묘 무덤에 도착해 무덤 속에 그려진 벽화를 보았습니다. 이곳에서는 여러 가지 고구려의 신앙과 생활 모습 등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특히 여러 가지 생활 모습이 담긴 벽화를 가르키며 이 벽화 속에는 단군 신화가 그려져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것은 종합생활도인데 여기 보시면 신단수가 보이시죠? 신단수 아래에 동굴이 하나 보이죠. 이 동굴 속을 가만히 보면 곰이 한 마리 앉아 있습니다. 보입니까? 잘 안 보이는 사람은 업장이 두터워서 안 보이는 겁니다. (웃음)
호랑이는 동굴 밖에 있는데 화살을 맞고 있죠. 이것은 단군 신화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벽화는 5세기 그림이고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시기는 12세기입니다. 그러니 삼국유사에 소개된 단군 신화는 일연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고대로부터 전해내려 온 이야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빼버렸기 때문에 일연은 삼국유사에 추가를 한 것이거든요.”
단군 신화를 벽화 속에서 실물로 만나고 나니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결코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500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벽화에 놀라움이 일었습니다. 어떻게 돌에 색깔을 넣어 지금껏 남아 있게 했을까요. 궁금함과 더불어 무덤에서 벽화를 그리고 있었을 선조들을 상상해보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환도산성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통구하라고 하는 강을 건너니 깊숙한 산 속에 큰 성벽으로 둘러쳐진 천연의 요새가 보였습니다. 환도산성으로 들어가는 남문 앞에 서서 다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스님은 환도산성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여기가 환도산성 남문이예요. 옹성형 성벽이죠. 여기는 비상시에 잠시 피신하는 행궁만이 아니고 임금이 한 때는 완전히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와서 상시로 산 적이 있는 있는 곳입니다. 궁궐을 지었든 큰 초석들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전체 지형으로 봐서 처음에 이곳으로 먼저 수도를 옮긴 것이 아닌가 싶어요. 여기 터가 넓고 저 아래에 물도 있고 곡식도 재배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나라가 점점 커지면서 저 아래에 평지성인 국내성을 쌓게 되고 이곳을 산성으로 삼았겠죠. 국내성에는 서쪽으로 문이 2개, 동쪽으로 문이 2개, 남쪽으로 1개, 북쪽으로 1개 이렇게 6개의 문이 있는 줄 알았는데 발굴을 해보니까 북쪽에 문이 1개 더 나왔습니다. 그것은 환도산성으로 비상시에 피하기 위한 가장 빠른 문이 아니었나 싶거든요.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평양으로 천도할 때 까지 425년 동안 국내성은 세 번 함락이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요동 태수에게, 3세기에는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 4세기에는 모용왕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이곳 환도산성은 두 번 함락이 되었습니다. 요동 태수가 침입했을 때는 환도산성은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잉어 작전이라고 해서 적이 환도산성을 포위해서 이곳에 물이 마르고 양식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는데 을두지 장군이 여기서 잡은 싱싱한 잉어를 요동 태수에게 선물로 줘서 물이 풍부함을 보여주어서 스스로 물러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국내성은 함락되었지만 환도산성은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고구려는 산속 깊숙한 곳에 본거지를 마련해 놓고 주된 활동은 요동벌에 가서 했습니다. 그러니 적이 침입하기가 굉장히 어렵죠. 공격을 하면 자기들이 이겨보았자 변방 밖에 점령하지 못하잖아요. 다 산속에 숨어버리니까 따라 들어가면 첩첩산중이여서 추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러나면 또 벌떼처럼 나타나서 공격을 했죠. 이렇게 고구려는 자신들의 본거지를 안전하게 유지하면서 대륙을 경영했습니다.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는 중원과 늘 갈등이 있다가 중원에 북위라는 왕조가 들어섰어요. 북위의 왕후가 고구려 사람이 되었어요. 그래서 그 이후의 황제는 다 고구려의 외손이 되잖아요. 그래서 평화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북방의 외침이 잦아드니 남으로 백제를 치고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지요. 좀 더 넓고 기후가 따뜻한 곳으로 온 것이죠. 그러나 고구려가 가장 왕성할 때는 바로 국내성에 수도가 있을 때죠. 고구려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 산능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환도산성 성벽
환도산성을 내려와서 해질녘에는 산성하 무덤떼 사이를 걸어 보았습니다. 많은 무덤들이 무리를 지어 늘어서 있는데, 이곳이 바로 고구려의 중심지였음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무덤들이 도굴되어 무덤 안에 있는 유물들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 산성하 무덤떼
이어서 국내성을 둘러보았습니다. 국내성은 다 보지는 못하고 반바퀴 정도만 둘러보았습니다. 북쪽과 동쪽 성벽의 모서리 지점에서 순례를 시작하면서 국내성에 대해서 스님이 간략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 국내성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그 유명한 국내성입니다. 국내성의 서쪽 성벽에는 통구하라고 하는 자연 해자가 흐르고, 남쪽 성벽에는 압록강이 흐릅니다. 동쪽과 북쪽 성벽에는 바깥에 땅을 파서 인공 해자를 만들었습니다. 일제 시대 때만 하더라도 높이가 6미터 이상인 성벽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3미터도 채 안되는 상태로 남아 있는데 원래 성벽의 높이는 10~12미터 정도 된다고 합니다. 저기 보이는 아파트의 5층 정도의 높이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성벽의 안정성을 위해서 바닥에서부터는 피라미드식으로 쌓고 그 위에 일직선으로 쌓았는데, 피라미드식으로 쌓은 부분은 안전해서 지금도 남아있는데 그 위에 일직선으로 쌓은 부분은 많이 무너졌습니다.
▲ 모서리 부분을 둥글게 한 고구려의 국내성
그리고 모서리가 각진 부분이 방어하기가 좀 위험합니다. 그래서 고구려 사람들은 지혜가 있어서 모서리 각을 없애버렸습니다. 동그랗게 만들면 방어할 수 있는 면히 훨씬 넓어지죠. 여기에 툭 튀어나온 치를 만들어 여기서도 공격할 수 있게 했어요. 둥글게 한 것은 각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양쪽에 치를 만든 것은 각루를 지키는데에도 효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지혜롭게 성벽을 쌓았습니다.”
뛰어난 성벽 축조 기술과 방어 체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선조들의 지혜에 더욱더 감탄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두뇌는 예전보다 퇴화가 되어버린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연을 적절히 이용하여 방어하고 활용하는 지혜는 우리가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이어서 국내성의 북편을 따라 걷다가 다시 서편으로 난 강둑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서편에는 통구하라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국내성의 남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다시 압록강과 합해지는 장구한 모습이 펼쳐졌습니다. 이렇게 국내성은 자연 강을 해자로 해서 아주 절묘하게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 서쪽 성벽에 만들어져 있는 ‘치’의 기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스님
강이 있는 성벽에도 치가 툭 튀어나온 부분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적의 공격 뿐만 아니라 홍수가 났을 때 강물로부터 성벽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압록강을 옆에 끼고 걸으면서 스님은 이곳 국경변에서 처음으로 북한의 식량난을 접하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오늘처럼 역사기행을 안내하러 왔다가 북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처음에는 믿지를 않았다고 하면서 영양 실조 상태의 깡 마른 아이들을 보고 나서 대북 인도적 지원을 호소하는 일을 시작하게 된 사연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의 얘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강 건너 북한 땅과 이쪽편 중국 땅이 크게 비교가 되었습니다. 해가 지고 어둑해졌음에도 강 건너 북한에는 아무런 전기불이 켜지지 않고 있었고, 이쪽편 중국은 현란한 광고판과 조명등이 번쩍이며 빛을 발하는 모습이 비교되면서 무척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 강 건너 북한의 모습
▲ 중국 쪽의 화려한 조명들
압록강변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숙소로 들어왔습니다. 일정이 많이 늦어져서 가방만 숙소에 올린 후 곧바로 강의장에 모여서 스님의 저녁 강연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역사기행 2일째 저녁을 맞이하여 어제의 ‘민족의 시원’에 대한 강연에 이어 오늘은 ‘고구려의 역사’에 대한 정리 강연을 해주었습니다.
먼저 일제 시대 때 실증주의 사학으로 인해 우리의 상고사는 실증을 삼을 만한 사료가 없다는 이유로 단군 설화를 신화처럼 치부했다며 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상고사를 통해 정체성과 자기 긍정성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과 함께했던 여진, 몽골, 거란, 왜, 선비 등 이웃 민족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의 역사를 찾아내며 역사관을 더욱 넓혀가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광개토대왕비를 보면 첫머리가 이렇게 시작하죠. ‘우리 할아버지 추모왕은 북부여를 창건한 해모수의 아들이다’. 이것이 고구려의 정통성이죠. 그런데 우리 남한은 이런 부분에서 좀 부족한 것 같아요. 없는 것을 가짜로 만들어서 과대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미 역사 속에 있는 것임에도 신화라거나 전설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아요. 독립기념관을 가봐도 상고사에 대한 아무런 내용이 없습니다. 박물관도 민족사의 기본 정신이 없고 그냥 유물만 보여주는 식입니다. 정체성을 갖고 자기 긍정성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언어가 아니라 유대의 역사를 가르칩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대해 우선 진위를 가려야 하겠죠. 중국에서 유물 유적이 대량으로 발견되면 그것을 연구해서 진위를 가릴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언어에 대한 연구를 엄청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 밑에 있었던 몽골족, 여진족, 거란족, 왜, 선비족 등 이들의 역사와 언어에 대해 연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사촌 민족들의 역사와 언어를 연구하면 이들이 모두 우리 아래에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속에 우리들의 역사가 남아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해모수’라고 했을 때 한문으로는 아무리 해석해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데, ‘해를 모시는 제일 높은 사람’이라고 우리말로 쉽게 해석을 하듯이, 몽골어, 거란어, 여진어, 일본어 중에서도 우리말을 통째로 전해내려가는 언어가 있을 겁니다. 그 언어를 연구해 보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라는 경전도 한문으로는 아무리 해석해도 뜻이 안 나오는데, 산스크리트어로 해석하면 바로 뜻이 나오듯이 이렇게 국가적 차원에서 언어에 대해 연구해 볼 수 있습니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을 무조건 의사, 변호사만 시키려고 하지 말고 이렇게 역사에 대해 국가가 정책적으로 연구를 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 시대 때는 발해사를 우리 민족사 안으로 인식했다는 점과 서희의 담판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등에 대해 강조를 해주었고, 마지막으로는 고구려가 어떻게 멸망하게 되었는지 그 마지막 여로에 대해서도 정리 말씀 해주었습니다.
“7세기로 들어오면서는 고구려 안에서도 왕의 역할이 유명무실해지고 대대로, 대막리지 같은 사람들이 독재를 하는 등 권력 투쟁이 심해졌는데, 왕은 가능하면 당나라와 타협해서 넘어가려고 했으나 연개소문 등은 이에 반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중앙 귀족들이 당나라와 화해하는 쪽으로 가니까 연개 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을 죽여버리고 새 왕을 세웁니다. 당태종은 ‘어떻게 신하가 왕을 죽일 수 있냐’ 하는 것을 핑계 잡아서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양만춘이 지키는 안시성은 함락하지 못하고 결국 당태종이 물러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가 결국 연개소문의 독재는 계속 강경정책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로 인해 국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게 됩니다. 전쟁을 계속 준비하니까 생활이 핍박해지고 지금의 북한과 비슷한 모습이 되어 갔습니다. 당 고종 때 백제가 취약한 틈을 타서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는데 신라는 백제 땅이 당연히 자기 땅이 될 줄 알았는데 당나라가 독자적으로 관리를 하려고 해서 신라는 완전히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습니다. 당나라는 그 여세를 몰아서 고구려도 침략했지만 신라는 여기에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결국 당나라가 연개소문에게 패하게 되죠.
그런데 연개소문이 병환으로 죽고 세 아들이 서로 대막리지가 되려고 싸우게 되었습니다. 첫째 아들인 남건이 대막리지가 된 후 지방 시찰을 간 사이 동생인 남생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다시 그가 대막리지가 됩니다. 쫓겨난 남건은 당나라로 가서 당나라 대군을 끌고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이렇게 내분이 일어나서 서로 싸우는 것이니까 백성들도 당나라와 싸울 명분이 없어지잖아요. 그래서 그 강력했던 고구려가 순신간에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데 당나라는 고구려 마저도 안동도호부를 설치해서 직할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에 신라가 화가 나서 문제 제기를 하니까 신라에도 계림도독부를 설치해 버립니다. 또 문무왕이 저항을 하니까 그 동생인 김인문을 신라의 왕으로 임명해 버립니다. 그러자 신라도 외세를 끌여들이긴 했지만 나라의 자주권을 지켜내야 겠기에 신라는 당나라 군대를 공격해서 물리쳐 버립니다. 그러자 당나라도 화가 나서 20만 대군으로 공격합니다. 그러나 신라는 여기에 대해 사람의 힘으로는 이기기 어렵다고 보고 사천왕사에서 기도를 해서 신불의 도움을 받아 당나라 대군들은 서해 바다에 수장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8년 동안 당나라와 전쟁을 하다가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이김으로 해서 당나라를 완전히 물리치게 됩니다. 나중에 나당 관계는 다시 회복이 되게 됩니다.
결국 고구려는 이렇게 멸망하게 되고, 고구려의 왕실은 항복했지만 지방 성주들은 거의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습니다. 몇 년이 지나면서 하나씩 하나씩 항복해 들어갔는데 고구려 부흥군들은 신라군들과 협력을 해서 대당 전쟁을 함께 했습니다. 신라군들만 갖고는 당나라를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같은 민족이라도 서로 싸우고 나면 철천지 원수가 되는데 당나라와의 관계에서는 고구려도 철천지 원수였고, 신라도 대당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서로 협력해서 안동도호부를 몰아내는 일을 해내게 됩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들 중 전체의 5%가 유배를 당하게 됩니다. 고위 간부들은 다 중국의 내주로 데려가고 중간 이하 간부는 요서 지역인 영주에 유배를 시켰는데 대조영은 거기에 유배되어 있다가 탈출하면서 당나라 추격군을 물리치고 결국 발해를 건국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짧게는 700년의 역사, 길게는 부여와 고구려가 같은 역사라고 보면 민족사의 주체로써 900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되고, 그 유산을 발해로 넘겨주게 됩니다.
우리가 제대로 고구려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평양으로 가야 돼요. 그래서 평양 천도 이후에 200여년간 이룬 고구려의 웅장한 문화를 봐야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가보질 못하고 있죠. 다음에는 집안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가서 평양의 고구려 성들과 벽화들을 보면서 고구려의 정신을 새겨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열정적으로 강연을 해준 스님께 모두들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걸어서 많이 피곤했을 법 한데 기행단은 마지막까지 스님의 강연에 열심히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강연을 마친 후 밤 10시가 넘어서 다들 숙소로 향했습니다.
내일은 전체 일정 중에 버스를 가장 오래 타는 일정입니다. 집안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따라 달리며 북한 국경변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장백에 이르러 영광탑을 참배하고 북한의 혜산시를 내려다 보고 백두산 아래 동네인 이도백하까지 가는 일정입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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