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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공동체 안거 회향 수련 2일째를 맞이하여 지난 22일 동안 근면하고 성실하게 정진해온 정토회 실무자들을 격려하고 회향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새벽 4시, 봉화 정토수련원의 맑고 청아한 종소리와 함께 공동체 안거의 마지막 22일째 아침이 밝았습니다. 스님은 가사를 수하고 안거 중인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정성껏 예불을 올렸습니다.
▲ 봉화 정토수련원 새벽 예불
예불과 기도를 마치고 6시 30분부터 산책을 나섰습니다. 이곳 봉화 정토수련원은 바른 불교의 확산과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청춘을 바쳐 일한 정토회 실무자들이 노후에 이곳에 내려와 농사를 짓기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스님은 산책길을 따라 걸으며 어디서 어떤 농사를 지으면 좋을지 살펴보며 지팡이로 이곳 저곳을 가르켜 주었습니다.
스님의 오랜 꿈이 은퇴 후에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인데 어쩌면 그 꿈이 이곳 봉화에서 실현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른 아침이라 풀잎에는 맑은 이슬이 가득 맺혀 있었습니다. 스님을 따라 걸으며 대중들은 그동안 수련에 집중하면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8시부터 시작된 수련에서는 어제에 이어서 지난 22일 동안 정진하면서 미진했던 점에 대해 스님께 더 물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가끔씩 대중들 사이에 있다보면 자꾸 혼자만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며 이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스님이 바로 답변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질문자를 가까이서 지켜봐 온 법사님들이 먼저 이야기를 해주고, 이어서 스님의 생각을 들려주었습니다. 질문자의 고민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들으면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더욱 명료하게 다가왔고, 마지막 스님의 답변은 화룡점정이 되어 큰 깨우침을 주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정토회 활동가 간의 내부 소통을 위해 어떤 방식을 도입하면 좋을지 제안을 했고 이에 대한 대중들의 열띤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오전 수련을 모두 마치고 나서 12시부터는 지난 22일 동안의 안거 수련을 마치며 소감문을 작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중들은 이번 안거 기간 동안 자신이 느끼고 깨달은 바에 대해 정성껏 글을 써내려 갔고, 스님이 함께 자리한 가운데 자신이 쓴 소감문을 한 명씩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명 한 명의 소감문은 그 자체로 각기 다양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자기를 알아가기 위해 또 도반들의 깨달음을 위해 모두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 지난 22일 동안의 안거 수련 소감문을 읽고 있는 정토회 실무자들
스님은 소감문 발표를 모두 경청한 후 근면하고 성실하게 안거에 임한 대중들을 크게 칭찬하면서 이렇게 회향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선재 선재라. 참으로 착하고 착하구나’ 라고 제자들을 칭찬한 말씀이 생각날 만큼 여러분들의 수행 소감은 아주 감동적이였습니다. 듣는 저도 매우 기뻤고요. 여러분들이 이제 상가에 귀의한다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알았구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하는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는데 ‘상가에 귀의합니다’ 하는 것은 듣기만 들었지 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도반들에게 정말 감사하다’, ‘도반들이 바르게 정진해가는 것을 보는 것이 좋았고, 그것을 보고 나도 깨달음을 얻어가고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도반이 수행의 전부이다’ 라고 말한 부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스스로 체험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아난 존자가 ‘도반이 이렇게 소중하니 적어도 수행의 절반은 되지 않겠습니까?’ 물었을 때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도반은 수행의 전부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여러분들은 오늘 그것을 경험 속에서 알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도반이라고 하는 개인을 넘어서서 우리가 모여 있는 이 공동체가 얼마나 소중한가’ 이런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상가에 귀의합니다’ 하는 것이 됩니다. ‘해탈과 열반을 향해서 나아가는 수행자들의 모임인 이 청정한 공동체에 지성귀의 하옵니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 모두가 오늘 스스로 발했습니다. 누군가가 하라고 해서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소감 속에 그것이 다 발해져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제야 말로 참으로 불법승 삼보에 귀의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불’과 ‘법’에만 귀의했지 ‘승’에는 귀의하지 않았다면 오늘 드디어 ‘승’에 까지 귀의함으로 해서 여러분은 이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불자가 되었습니다.
해탈과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불자는 반드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스스로 돌아보고 뉘우치고 있다는 것은 계율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고, 자기 알아차림을 끊임없이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선정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여러가지 마음 작용의 원리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는 것은 지혜를 조금씩 터득해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들은 계정혜 삼학을 닦는 진정한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밖으로부터 복을 빌거나 누구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아직도 그런 습성이 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겠다’ 하는 자각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들은 진정한 수행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이 저의 안내에 따라서 수행하는 관계였다면 이제는 여러분들끼리 진정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 것입니다. 10여년 전에는 제가 문경 수련원에 내려와서 중심 역할을 해야 수행 공동체가 형성되지 그렇지 않으면 어렵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문경으로 내려올 형편이 못 되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너희들이 내려가서 공동체를 한번 구성해봐라’ 이렇게 해서 법사님들이 일체 행정 업무를 그만두고 문경에 내려온지 이제 12년이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같은 부서에서 일하지 않고 따로 따로 일했기 때문에 하나가 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처음 3년 간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나서 이제는 수행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법사님들과 실무자들 사이에도 그동안 간극이 있었는데 이제는 법사다 실무자다 하는 간격도 거의 없어졌고 이제 우리는 하나의 수행 공동체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첫 번째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이웃과 세상에 잘 쓰인다’ 하는 것입니다. 이제 수행자로서의 이 과제는 분명해졌습니다. 이제 두 번째 목표인 ‘청정과 화합의 수행 공동체를 만든다’ 하는 것도 시작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전에는 항상 안거 대중 중에 몇몇은 수행 대중 그룹에 들어올 수 없는 상태였다면 이번에는 거의 다 수행자로서의 방향은 잡았다고 보여집니다. 아직 자기 업식이 남아서 조금 흔들린다 하더라도 이제 방향은 확실하게 잡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큰 법당이 지어지는 것이 축하해야 할 일이 아니고, 정토회 회원이 많아지는 것이 축하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오늘 같이 이렇게 수행 공동체인 상가가 구성된 것이야말로 정토회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고 축하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제가 없더라도 여러분들이 함께 의논해 나가면 이 순수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개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은 독립적으로 떨어지면 이 좋음을 계속 유지해 갈 수가 있겠느냐. 아직은 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함께 그리고 다시 홀로 더 정진을 하시고, 이제는 억지로 하거나 의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 속에 ‘아, 이 길 만이 행복과 자유로 가는 길이다’ 라고 분명해지면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상가가 되는 것이예요.
아직 여러분들 한 명 한 명은 상가로서 존경할 만한 정도가 못 되지만 어울러서 힘을 합한 상태에서는 상가의 역할을 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 한 명 한 명이 그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전법의 길을 떠나라고 말할 때 ‘홀로 가라’ 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제자들에게 ‘너 하나도 이미 온전하기 때문에 세속에 물들 염려가 없다’ 하는 확신이 드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내일이라도 전 세계 어디에라도 파견되면 거기서부터 씨앗을 심어서 뿌리내릴 줄 알아야 합니다. 현재 만들어진 정토회의 기반 위에서만 일할 줄 아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떨어져도 내 삶이 평온하고, 비록 내가 생계는 그들의 도움을 받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들에게 연민을 갖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나가면 그곳 사람들도 이 법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귀의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가게에 취직을 한다면 내가 모시고 있는 사장님이 이 법에 귀의해서 수행자가 되고, 내 가게에 오는 손님이 수행자가 되고, 이렇게 해서 똑같은 정토회 복제품이 전 세계에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인도에 떨어지면 인도의 토양에 맞게 이런 모델이 만들어지고, 북한에 떨어지면 북한에 맞게, 중국에 떨어지면 중국에 맞게 이루어져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정도가 될 때까지 개인 정진이 더 나아져야 되고, 그래서 부처님이 처음에 이루고자 하셨던 그 길이 여러분들에게 더욱 분명히 심어져야 합니다.
이제야 말로 그 출발점에 들어섰습니다. 성인의 대열에 발을 딛어 놓고 방향은 잡았습니다. 앞으로는 수없이 넘어지더라도 이제는 한발 들여놓았다 이렇게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업에 끌려가면서도 다시 돌아오는 정진을 꾸준히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들 정진하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축하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이런 수행의 증득은 모든 정토회 대중들과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에게 큰 복이 되고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공동체 대중들이 성인의 대열에 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는 칭찬과 격려의 말씀이였습니다. 그리고 ‘상가에 귀의합니다’ 하는 마음까지 발하면서 드디어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불자가 되었다는 말씀이였습니다. 개개인을 보면 아직 부족한 점이 있지만 공동체가 조금씩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말씀에 공동체 안거 대중들도 기쁨을 느꼈고, 이렇게 될 수 있게 지도해 준 스님께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회향 법문을 한 후 이어서 공동체 대중 중 한 명이 수련 중 질문을 하지 못해 미진한 점이 있었다며 휴식 시간에 스님께 개인적으로 찾아와 이런 질문을 했다고 공유해 주면서 인간 관계를 맺어가는데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중도’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깊이 있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자신이 맡고 있던 업무를 새로운 담당자에게 맡기고 물러나게 되었는데 새로운 담당자가 실무는 잘 하지만 사람 관리를 부담스러워 하고 업무를 겁내는 것 같아서 자신 때문에 새로운 담당자가 정착을 못하는구나 싶어서 자신이 빨리 물러나 주는 것이 좋겠다고 총장님에게 건의를 했다고 해요. 그런데 총장님은 새로운 담당자가 아직 부족하니까 조금 더 도와주라고 했고, 그래서 조금 더 일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새로운 담당자에게 잔소리를 많이 한 것으로 평가가 되어서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도와주라고 해서 도와주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는 간섭한 것이 되었다’ 하는 질문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해 준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너의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총장님이 도와주라고 해서 도와주었는데 지금은 간섭했다고 평가하니까 섭섭해 하는 것 같다. 너의 입장에서는 ‘총장님이 왜 평가가 왔다갔다 하느냐. 이중 잣대를 들이대느냐’ 이렇게 볼 수도 있는데, 다시 총장님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에는 너가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어, 아직 인수가 덜 되었는데... 더 도와주어야 하지 않냐’ 해서 도와주라고 한 것이고, 그러나 나중에 평가를 해보니 새로운 담당자가 많이 부담스러웠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너가 간섭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얘기를 한 것이죠. 얼핏 보면 모순 같은데 총장님 입장에서는 처음에는 자기 생각에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서 도와주라고 한 것이고, 나중에 평가 하면서는 새로운 담당자가 부담스러웠다고 하니까 간섭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얘기를 한 것입니다. 앞에는 이런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했고, 뒤에는 저런 생각이 들어서 저렇게 한 것이죠.
저도 이 집이 지어진 것을 보고 처음에는 ‘잘못 지었다’ 고 해놓고, 살아보고 나서는 ‘잘 지었다’고 또 얘기하지 않습니까. (대중들 웃음)
왜 이랬다 저랬다 할까요? 그 때는 그런 모습을 보고 그렇다고 이야기 한 것이고, 이번에는 이런 모습을 보고 이렇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사람은 늘 이렇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간섭하는 것도 되지 않고, 외면하는 것도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인 평가는 나는 도와주었지만 상대가 간섭으로 느끼면 간섭이 되고, 나는 상대가 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떠났는데 상대가 그것을 섭섭하게 느끼면 외면이 됩니다. 이것을 내가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 이것은 상대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내 마음 속에 내 뜻대로 하려고 하는 욕구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총장님이 도와주라고 하면 도와주고, 간섭이라고 하면 조금 물러나고, 외면한다고 하면 조금 더 접근해 보고, 또 간섭이라고 하면 조금 물러나고, 이렇게 이래저래 해보면 간섭한다는 소리도 조금 덜 듣고, 외면한다는 소리도 조금 덜 듣는 쪽으로 가게 됩니다. 그렇게 조금씩 중도에 접근해 가는 것입니다. 중도는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딱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 혼자 하는 일도 이렇게도 치우치고 저렇게도 치우쳐서 중도를 맞추기 어려운데 사람과의 관계는 내가 중도에 맞춰 놓아도 상대가 ‘너는 고행하고 있다’고 하면 고행한 것으로 평가가 되고, 상대가 ‘너는 쾌락에 빠져있다’고 하면 쾌락으로 평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에 딱 맞춰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도 내 생각대로 하려고 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상대가 빨리 가자고 하면 빨리 걷다가 너무 빠르다 하면 천천히 걷다가 또 너무 늦다고 하면 좀 빨리 걷고, 이런 것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처음에는 총장님이 도와주라고 해서 도와준 것이고, 평가는 간섭한다고 나오니까 조금 떨어져 있다가, 또 새로운 담당자가 ‘왜 안 도와주십니까’ 하면 다시 조금 도와주다가, 또 ‘그만둔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간섭하고 있냐’ 고 하면 ‘저 사람은 간섭한다고 느끼는구나’ 알면 됩니다. 이렇게 편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간섭하는지 의지하는지 하는 문제가 아니고 이 사람은 이렇게 느끼고 저 사람은 저렇게 느끼는 것에 대해서 거기에 모두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분별심을 내어서도 안 되고,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냐’ 해서도 안 되고, 그냥 ‘이렇게 느끼시구나’, ‘저렇게 느끼시구나’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서 이렇게 조금 조절하고 저렇게 조금 조절하면 시간이 흐르면 간섭한다는 소리도 예전보다 덜 듣게 되고, 외면한다는 소리도 예전보다 덜 듣게 됩니다. 이것이 중도로 가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칭찬해 줄 때도 있고, 칭찬 안 해줄 때도 있고, 간섭한다고 할 때도 있고, 못한다고 할 때도 있는데, 그 뜻을 존중해서 ‘아, 그래요?’ 하면서 조금씩 움직여 가면서 적절함을 찾아가는 것이 중도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자기 생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다 자기 식대로 하려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도는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함인데 중도라는 것도 자기가 정해놓은 식으로 중도를 고집하니까 상대가 볼 때는 또 다른 극단이 됩니다.
도반들의 얘기나 법사님들의 얘기나 후배들의 지적이나 선배들의 지적에 너무 민감하게 대응하지 말고, ‘아, 저 사람은 저렇게 느끼는구나’ 이렇게 좀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 보세요. 너무 무시하지도 말고 거기에 너무 놀아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명상할 때 다리를 펴지도 말고 참지도 말라는 얘기와 같은 것입니다. 지적을 받아들이면서 적절히 조정하면서 몇 번 시행착오를 거치면 처음보다는 경직성이 완화가 되어 갑니다. 명상을 할 때도 처음에는 마음을 편안하게 가진 것 같았는데 더 편해져서 보면 ‘아, 조금 전에는 경직되어 있었구나’ 이런 것을 알 수 있잖아요. 그것처럼 중도라는 것은 딱 이것이다 하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모인 40명 사이에서의 중도는 40명 각자의 뜻을 적절히 조정하는 것입니다. 귀가 얇아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에 다 끌려가면 치우치게 되고,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다고 누구의 말도 안 듣고 자기 혼자의 뜻대로 나가면 그것도 치우치게 됩니다. 그래서 중도는 40명의 생각이 바뀔 때 마다 조금씩 조금씩 바뀌는 것입니다. 40명의 견해가 하나로 딱 뭉쳐지지 않습니다. 이 40명도 아침에 생각이 다르고 저녁에 생각이 다릅니다. 시간과 공간이 시시때때로 바뀌어 나가고, 같은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생각이 바뀌고, 같은 장소에서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이렇게 요소가 바뀌면 그만큼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연의 도리입니다. 본래는 정해진 것이 없지만 시공간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입니다. 시간이 바뀌면 또 바뀌고, 공간이 바뀌어도 또 바뀝니다. 이렇게 이치적으로도 분명히 알아야 하고, 또한 실천적으로도 경험이 되어져야 중도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적절함,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 이러지도 않고 저러지도 않고, 얼마나 말이 애매합니까. 경험하지 않고 논리로 설명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경험되어진 만큼 유연해지는 것입니다.
공부가 끝이 없는 이유는 까르마가 끝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황이 매번 바뀌기 때문입니다. ‘아, 이것은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정하는 즉시 상황이 바뀌어 버리기 때문에 또 안 맞게 됩니다. 답을 찾아 놓아도 상황이 바뀌어 버리면 또 안 되게 됩니다. 그래서 늘 깨어있어야 됩니다. 중도란 것은 사람처럼 늘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탁 깨치면 그 이후로는 그대로만 하면 된다 하는 것은 없어요. 이것이 수행에 있어서 큰 모순입니다. ‘아(我)’가 없다고 늘 이론으로 배우지만 이것 자체가 아(我)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일체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또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늘 유동성 있게 작용하는 것이 진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변하는 것이 진리일 수도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일 수도 없고, 변화 속에 변하지 않음이 있고, 변하지 않는 것 속에 변화가 있는 것이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중도란 살아움직이는 것이라는 말씀이 크게 와 닿았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과학적 측면, 집을 짓는 것, 혜능 대사의 법문 등 다양한 예를 보여주며 중도가 무엇인지 더욱 쉽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현재 밝혀진 과학으로 설명하면, 화학 변화에서는 물질은 변하지만 원자는 변하지 않는다, 핵 변화에서는 원자는 변하지만 소립자는 변하지 않는다, 상태의 변화에서는 상태는 변하지만 물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변하는 것 속에 변하지 않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또 변하고, 그렇다면 변하기만 하느냐 하면 그 속에 변화의 주체는 또 변하지 않은 것이 중심이 되어 있고, 변하지 않는 것 속에는 또 변화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한 것이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입니다. 이것은 이론으로 만들기 위해 나온 표현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와 우리들의 삶이 늘 이렇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 좋은 사람이 오늘도 반드시 좋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신 어제 좋았던 사람은 오늘도 좋을 확률이 높은 것이죠. 왜냐하면 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제 좋았던 사람이 오늘도 반드시 좋다고 말할 수 없고, 오늘 좋다고 내일도 반드시 좋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리로 집을 지어놓으면 겨울에는 ‘진짜 따뜻하고 좋구나’라고 평가했지만, 여름이 되면 ‘유리로 해놓으니 도저히 더워서 못 살겠다’ 이렇게 다시 평가가 됩니다. 그래서 적절함이라는 것은 상황이 바뀌는 대로 계속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맞게 유동성 있게 대응해야 합니다. 여름에 100% 맞을 수도 없고 겨울에 100% 맞을 수도 없지만 약간 창문을 조정하면 여름에도 시원하고, 약간 가리개를 열면 겨울에도 따뜻하고, 이렇게 집에 살면서 수리를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름에 더운 문제는 무엇을 조정하면 될까, 겨울에 추운 문제는 무엇을 조정하면 개선할 수 있을까, 이렇게 완전히 더위와 추위를 없앨 수는 없지만 현재 온도보다 2,3도 낮추고 높이는 것은 조금만 손을 보면 가능합니다. 이렇게 유동성 있게 적용하는 것이 중도입니다.
이것을 혜능 대사는 ‘중생이 깨달으면 부처이고, 부처가 미혹하면 중생이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했습니다. 즉 깨달음은 항상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항상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찰나에 깨어있어야지 한번 깨달으면 영원히 밝아진다는 것은 없는데 모든 수행이 거기에 너무 집착되어 있습니다. 늘 유동적이기 때문에 항상 지금의 조건 속에서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는 늘 자기 감정이나 상대나 세상을 자꾸 고정화 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공부를 잘 해나가고 있는데 본인은 공부가 늘 뜻대로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일부러 잘못한 것이 아니라면 잘못한 것을 통해 ‘나에게 이런 욕망이 있었구나’, ‘이런 어리석음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 또한 큰 소득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날이 수행입니다.
이런 관점만 딱 잡고 있으면 엎어져도 수행이고 자빠져도 수행이예요. 이 관점을 놓쳤을 때 수행자가 아니라고 평가해야지 이 관점을 잡고 있는 한 자빠지고 넘어진 것을 기준으로 수행이 잘 되고 안 되고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의 관점만 잘 잡고 있다면 넘어져도 수행이고 자빠져도 수행이라는 말씀에 대중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경전에 나오는 수다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주면서 안거를 마치고 내일부터 일상으로 돌아가면 어떤 자세로 계속 수행을 해나가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수행이 잘 된 것은 분위기가 좋아서 잘 되는 것 같았던 겁니다. 착각하면 안 돼요. 일상 속에서도 이대로 유지되면 좋겠다 하는 것은 꿈도 꾸지 마세요. (대중들 웃음)
여기서는 분위기가 좋으니까 덩달아서 다 된 것 같은데 일상으로 돌아가서 옆 사람이 또 짜증내고 성질내면 금방 휘둘리게 됩니다. 다만 좋아졌다면 돌이키는 힘이 좀 생겨서 ‘어, 내가 또 경계에 휩쓸리는구나’ 이렇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진 것을 기반으로 해서 다시 이런 시간을 가지면 또 더 깊어지고, 더 깊어져서 가면 다시 휘둘리더라도 더 나아지고, 이렇게 주욱 나아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이대로 계속 잘 되면 바로 부처가 되겠지요.
그래서 ‘수다원’을 증득했다는 표현이 있는 것입니다. ‘수다원’은 성인의 류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지 성인이 아닙니다. 앞으로 성인이 되기 위해서 몇 번 엎어지고 넘어질지는 모르지만 일단 관점은 잡았다는 것이죠. 그러다가 이번에 넘어지면서는 이제 한번만 더 넘어지면 다시는 넘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은 수준이 되면 ‘사다함’이고, 이제 넘어지는 것은 이번으로 끝이다 하는 수준이 되면 ‘아나함’이고, 이제 더 이상 넘어지지 않은 경지로 가면 ‘아라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라한’은 더 이상 넘어지지 않는다고 또 정하면 안 돼요.
가장 중요한 것은 길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길을 찾은 다음에는 목적지에 도달하고 안 하고가 뭐 그리 중요해요? 꾸준히 발걸음을 내딛기만 하면 되지요. 빨리 가면 뭐하고 늦게 가면 뭐해요? 놀지 않고 꾸준히만 가면 된단 말이예요. 그렇게 공부를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잘 될까 안 될까’ 하는 것도 다 놓아버리고 그냥 편안하게 가십시오.”
길을 찾았다는 것이 중요하고 이제 남은 것은 꾸준히 가는 것이라는 말씀에 대중들의 마음은 환하게 밝아졌고, 이렇게 소중한 가르침을 준 스승님에 대한 큰 박수도 터져나왔습니다.
이렇게 7월9일 명상 수련부터 시작된 공동체 안거는 일체의 장과 정일사 수련을 거쳐 오늘 22일째를 맞이하여 스님의 회향 법문을 끝으로 원만히 회향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수행 정진한 공덕이 고통받는 많은 대중들에게 널리 베풀어지기를 간절히 발원해 봅니다.
비쩍 마른 몸에 힘없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아낌 없는 애정을 담아 바른 길을 지도해 준 스님께 공동체 성원들은 삼배로 감사 인사를 올렸습니다.
8월2일부터 고구려 발해 백두산 역사기행이 시작되기 때문에 실무를 준비하는 스텝들은 수련이 끝나자 곧바로 서울로 올라갔고, 스님은 봉화 정토수련원에 밤 늦게까지 머물면서 세계 100강 출판 원고 교정 업무를 다 마친 후 새벽 1시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스님은 무거운 원고를 늘 들고만 다녔지 교정을 제대로 못 봐서 짐이 되었는데 역사기행을 가기 전에 무사이 원고 교정을 다 마쳐서 아주 가벼워 했습니다. 좋은 책이 나오기를 고대해 봅니다.
내일은 아침 7시부터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시작으로 저녁 늦게까지 연이어 회의와 미팅이 있을 예정입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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