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5.24 청년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 및 부처님오신날 점등식


▲ 부처님오신날 점등식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께서는 오전에 청년대학생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에 참석하셔서 즉문즉설 법문을 해주신 후 오후에는 서울로 이동해 서울정토회 부처님오신날 점등식에 참석하셨습니다. 

 

어제밤 문경정토수련원에서 주무신 스님께서는 새벽4시30분 대웅전에서 백일출가 행자님들과 함께 새벽 예불 및 천일결사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천일결사 기도 후에는 문경공동체 상주대중들과 함께 발우공양을 함께 하셨습니다. 

 


▲ 새벽 예불

 

여법하게 발우공양을 마친 후 스님께서는 대중들 모두에게 “발우공양 게송을 할 때는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음이 너무 늘어지지 않게 하고, 한박자 쉬어야 하는데 숨가쁘게 이어지는 부분들도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또 스님께서는 발우공양 전에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어떤 행자님이 화장실을 나오면서 수도꼭지에서 물을 과하게 트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시면서 “수행자는 물이 나오는 양을 고려해서 수도꼭지를 틀 때도 자신의 행동에 깨어있어야 한다” 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 발우공양

 

그리고 일주일 뒤에 회향을 하게 되는 24기 백일출가 행자님들을 위해 회향을 할 때의 마음 자세에 대해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일주일 남았다고 하더라도 ‘일주일 남았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고 마치 영원히 여기에 살 것 같은 마음으로 하루 하루 자기에게 주어진 일과 정진에 매진하시기 바랍니다. ‘일주일만 있으면 간다’ 하는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은 지금 여기 생활이 힘들었고 참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일주일 뒤에 간다는 사실이 섭섭하게 다가온다면 이곳에 있을 때 ‘조금 더 충실하지 못했다’ 하는 후회나 미련이 남아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속마음은 다 내려놓고 여기에 죽을 때까지 살 것 같은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정진을 해나가야 진정한 회향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몇일 뒤에 나간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백일 수행의 공덕은 다 없어지고 원래의 까르마대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입재해서 처음으로 귀중한 하루를 보냈듯이 지금도 매일 매일이 소중한 하루입니다. 오히려 93일이 축적된 위에, 즉 그 모든 경험과 실패를 딛고 일어선 하루이기 때문에 처음 하루보다 더 소중한 하루입니다. 이것을 잘 알고 마무리 정진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살든 세속으로 돌아가든 생활이 여여해야 수행자입니다. 머리를 깍아놓으면 승려라고 말하고, 머리를 기르면 속인이라고 말하고, 승려가 되면 승려라고 목에 힘주고 살고, 속인이 되면 속인이라고 함부로 행동하고, 이런 자세는 자기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붙었든 떨어졌든, 승려라고 불리든 속인이라고 불리든, 백일출가 행자라고 불리든 아무개씨라고 불리든, 그것은 하나의 모양이고 이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백일출가 행자라고 규정이 되든, 실무자라고 규정이 되든, 법사라고 규정이 되든, 회사 직원이라고 규정이 되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부르고 저렇게 부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는 늘 한결같아야 합니다. 그 한결 같은 것이 무엇이냐? 바로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첫째,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 늘 자기를 점검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둘째, 수행자라면 검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치하고 낭비하고 살면 안됩니다. 셋째, 수행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돈이 있거나 지위가 있거나 인기가 있다고 목에 힘주고 살면 안됩니다. 넷째, 수행자는 성실해야 합니다.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매사에 부지런하되 집착은 없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개인의 자세에 해당하지요. 

 

다섯째, 수행자는 남에게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주는 일을 하든,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하든, 괴로운 사람을 위로하는 일을 하든,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수행자는 매사에 연구를 해야 합니다. 연구하는 삶은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는 삶입니다. ‘내일 초파일 행사를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이렇게 연구해야지 ‘어떡하지?’ 하면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는 것은 수행자가 아닙니다. 연구하면서 하되 그 결과에 대해 반드시 평가를 해서 그 경험을 살려야 합니다. 그런데 늘 초조 불안 근심 걱정하다가 일이 끝나면 잘했든 못했든 그냥 덮어버립니다. 아무런 경험을 살려내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늘 똑같은 실수가 반복됩니다. 그러니 여러 경우를 고려하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이고 사람들에게 편리하고 기쁨을 줄 수 있을까 연구해야 합니다. 

 


 

이런 자세로 여러분들이 살아간다면 직장에 다니든 가정생활을 하든 절에 살든 자신이 처한 처소는 중요해지지 않습니다. 용성조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처처에 불상이고 사사에 불공이다”, 우리가 이르는 곳마다 부처님 아니 계신 곳이 없고, 우리가 하는 일마다 불공 아닌 것이 없습니다. 청소를 할 때는 청소하는 데에 정성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이건 중요하고 저건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이런 자세로 어디를 가든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수행자는 늘 한결 같아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봅니다. 특히 수행자의 여섯가지 자세에 대해 말씀해주신 내용은 경계에 끄달리며 지내온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발우공양 후 요사채에서 업무를 보시다가 오전 8시50분부터 청년대학생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에 참석하셨습니다. 

 

“잘 주무셨어요?” 하고 청년들에게 다정한 안부 인사를 건네주신 스님께서는 법문을 시작하기 전 자리에 앉아 있던 청년들에게 모두 방석을 들고 일어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무 뒤에 있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잘 들리지 않을까 하는 배려였습니다. 스님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뒷자리에 앉아 있던 청년들도 모두 스님 가까이서 법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초심자들이고 이른 아침 기상과 300배 정진으로 다소 피곤했던 기색의 청년들도 스님의 자비로움에 모두 밝은 표정으로 법문을 들을 준비를 마쳤습니다.

 


▲ 청년대학생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

 

자리가 정돈되고 스님은 청년들에게 간단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나잇대는 어떻게 되는지, 어느 지역 정토회 소속인지 등 한 명 한 명 정성스레 학생들을 살펴보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학습법은 궁금한 점이 생기면 바로 질문을 통해 그 해답을 찾는 것인데 쌍방향 소통을 못해서 죄송하다”고 하신 후 “오늘은 연애, 취업, 학업 등 개인적인 고민보다는 불교대학 교과과정을 들으며 생긴 의문, 인생이 아닌 학문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져보자”고 말씀하시며 법문을 시작하셨습니다. 

 

오전 8시30분부터 11시10분까지 2시간 40분 동안 총 6명의 질문에 스님께서는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고민을 놓아버리는 것과 회피하는 것의 차이가 궁금하다는 분, 사로잡혔다는 것과 경계에 끄달린다는 것의 자세한 뜻이 무엇인지 궁금한 분, 욕구와 욕심의 차이는 무엇이고 욕구가 없으면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 없어질 것 같아 고민인 분,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신화적 요소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묻는 분, 육식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채식도 환경을 파괴하긴 마찬가지지 않는지, 정명을 지키려면 어떤 마음으로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지 묻는 분, 언론사에 일하는데 기업의 광고주를 의식하다보니 진실을 보도하지 못하는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들이 나왔습니다. 

 

오늘은 그 중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괴로운 고민을 내려놓는 것과 회피하는 것의 차이가 궁금합니다. 내려놓음은 근본적인 해결 방법으로 보이고 회피하는 것은 임시 방편의 방법 같은데 두 가지는 어떻게 다른지 정확히 잘 모르겠어요. 알고 싶습니다.“

 


 

"놓아버렸다 하는 것과 회피했다는 것의 차이는 놓아버린 것은 재발하지 않고, 회피했다는 것은 재발한다는 것입니다. 애인과 헤어져서 속상한 마음에 저녁에 술을 먹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똑같은 괴로움이 반복된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나 ‘아이고, 그동안 저와 함께 있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인사를 해버리면 그걸로 끝이 납니다. 즉 놓아버리는 것은 해결된 것이고 회피하는 것은 계속 재발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부모님과 관계가 좋지 않아서 부모님의 전화를 받지 않고 피하기만 한다면 그 갈등과 괴로움은 계속 재발합니다. 그런데 부모님에 대한 거부 반응을 기꺼이 놓아버리면 전화가 오면 받고 안오면 안받고 그것이 더 이상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를 놓아버려서 해결이 되었어도 무의식 세계에 있다가 그것이 다시 생겨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다시 생겨나더라도 앞에 일어났던 문제보다는 다소 약하게 나타납니다. 즉 놓아버린 것은 완전히 해결이 되거나 설령 그것이 다시 나타나더라도 갈수록 나타나는 세력이 약해집니다. 이와 반대로 회피는 단지 참는 것이기 때문에 갈수록 더 강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한번 참고 두 번 참고 세 번 참으면 나중에 그것이 터지게 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단순히 회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맞딱드려서 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출가와 가출의 차이도 이와 비슷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도저히 힘드니까 더 좋은 집이 있을까 하고 나가는 것은 가출입니다. 즉, 가출은 현재의 집보다 더 좋은 집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도 못살겠다 하게 되면 또 다른 집을 찾아 나갑니다. 이런 것을 가출이라고 합니다. 

 

출가는 위와 같이 힘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집을 불살라 버리는 것입니다. 집은 두가지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안온함을 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속박을 한다는 것입니다. 집은 안온함과 속박이라는 두가지 성질을 갖고 있는데,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집이 안온함만 있고 속박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라지요. 그런데 그렇게는 안됩니다. 두가지 성격이 늘 같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을 뛰쳐나가면 속박은 벗어났는데 안온함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다시 안온함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안온함을 찾아서 돌아오면 처음에는 안온해서 좋은데 시간이 지나면 속박 때문에 또 뛰쳐나갑니다. 이렇게 반복이 되는데 이것을 윤회라고 말합니다. 고와 락이 반복됩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즐겁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로운 것, 이러한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안온함도 같이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집을 불살라 버리는 것입니다. 한번 집을 나가면 다시 돌아가야 할 집을 찾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제자들은 출가를 하면 두 번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무 밑이나 숲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것처럼 회피하는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피하지만 어디를 가든 다시 맞딱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일어난 거부반응을 회피하게 되면 결국 다시 남편에게서 나타나게 되고, 남편으로부터 일어난 것을 회피하게 되면 결국 자식한테서 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 그 원인을 해결해버려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상대로부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업식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해결을 해버려야 윤회의 사슬이 끊어집니다. 이것을 ‘놓아버림’ 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안 놓아지죠?” 

 

“네” 

 

“그러면 다시 이렇게 묻고 싶죠. ‘어떻게 놓아요?’ 저의 대답은 ‘그냥 놓아라’입니다.” (청중들 웃음) 

 


 

“어떻게 놓아요?” 

“그냥” 

 

“어떻게 놓는다구요?” 

“그냥” 

 

“그러면 또 다시 묻고 싶죠. 어떻게 그냥 놓아요? ‘어떻게’ 라고 하면서 방법을 찾는 것은 놓기기 싫다는 것을 말합니다. 방법을 모르는 문제가 아니라 놓기가 싫어서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자꾸 방법의 문제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놓아지지 않는 것은 놓기가 싫어서 그렇습니다. 

 

여기 뜨거운 불덩이가 있는데 빨갛고 너무 보기가 좋아요. 참 예쁘다 하고 짚었더니 뜨거워요. 그러면서 저에게 ‘앗, 뜨거’ 그럽니다. 그래서 제가 ‘그럼 놓아라’ 하니까 ‘어떻게 놓아요?’ 그럽니다. 이때 방법을 몰라서 못 놓는 거예요? 놓기가 싫어서 안 놓는 거예요?” 

 

“놓기가 싫어서 안 놓는 것이예요.” 

 


 

“그럴 때 ‘그냥 놓아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뜨거우면 ‘앗, 뜨거!’ 하고 바로 놓습니다. 어떻게 놓았어요? 그냥 놓았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그냥 놓습니다. 뜨거우면 그냥 놓게 되는데, 뜨겁다고 하면서도 계속 쥐고 있는 것은 놓기가 싫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제가 ‘그냥 쥐고 있거라’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 ‘뜨거운데요!’ 하지요. 그러면 ‘손을 대면 된다’ 그럽니다. 그러니 뜨거움에도 불구하고 갖고 싶으면 손을 대는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손을 대기 싫다면 놓아야 합니다. 

 

수행은 한가지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좋은 것은 놓는 것이지만, 놓기 싫다고 해서 수행이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놓기 싫으면 손을 대는 과보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일반적으로 네가지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데 해도 되는 상황, 하고 싶은데 하면 안 되는 상황, 하기 싫은데 안 해도 되는 상황 그리고 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고 싶은데 해도 되는 상황이면 하면 됩니다. 하기 싫은데 안 해도 되는 상황이면 안 하면 됩니다. 이 두가지는 아무런 문제가 안됩니다. 이렇게 인생의 절반은 자기가 좋은대로 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머지 절반입니다. 하고 싶은데 하면 손해가 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고 싶더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기 싫은데 하면 큰 이익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하기 싫어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늘 ‘하고 싶은데 어떻게 안해요?’, ‘하기 싫은데 어떻게 해요?’ 이럽니다. 

 

쥐가 몇일 굶고 헤매다가 접시에 담긴 아주 맛있는 고구마를 발견했어요. 왠 떡인가 하고 먹으려고 하는 찰나에 제가 “쥐야, 거기에 쥐약 들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면 안 먹어야 되겠지요. 부처님은 “거기에 쥐약 들어있으니까 먹지 마라” 이렇게 말하기 보다는 “거기 쥐약 들었다” 이렇게만 말합니다. 항상 사실만 말합니다. 먹고 안 먹고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으셔요. 그건 개인의 자유이니까요. “거기 쥐약 들었다”고 하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살려는 생각이 있으면 안 먹게 되지요. “어떻게 안 먹어요?” 이렇게 말하지 않죠. “어, 그래요?” 하면서 그냥 안 먹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먹으면 안될까요?” 계속 얘기하면 부처님은 “쥐약 들었다” 라고만 반복하십니다. 항상 진실만 말씀하시죠. 그러나 법륜 스님은 어떨까요? “조금만 먹으면 안돼요?” 두 번 세 번 얘기하면 “그러면 먹고 죽어라” 이렇게 말해요. (청중들 웃음)  

 


 

내가 살려고 하면서 먹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죠. 그러나 죽기 위해서 먹는 것은 선택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니 그것이 손해라면 하고 싶더라도 멈출 줄 알아야 되고, 그것이 이익이라면 하기 싫더라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중생은 오직 하고 싶은 것은 해야 하고, 하기 싫은 것은 안해야 된다는 이 생각만 하기 때문에 손실이 늘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기 싫어도 능히 할 수 있어야 되고, 하고 싶어도 능히 안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고 싶을 때 할 자유, 하기 싫을 때 하지 않을 자유는 반쪽짜리 자유입니다. 완전한 자유는 하고 싶을 때 하지 않을 자유, 하기 싫을 때 할 자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나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밖의 백만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 진정한 장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원리를 알아도 잘 실행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꾸준히 연습을 해야 됩니다. 이런 연습이 바로 수행입니다.”

 

스님의 쉽고도 재미있는 명쾌한 답변에 2시간 30분이 금새 지나갔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 청년들의 간곡한 요청에 스님께서는 함께 단체 사진도 기꺼이 찍어 주셨습니다. 모두들 어제의 서먹함은 다 사라지고 입가에 환한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특강수련 법문을 마치고 수련원에서 점심공양을 하신 후 원고 교정 업무를 보시다가 오후1시30분에 서울로 출발하셨습니다. 

 

서울로 출발하기 전, 마침 깨달음의장 수련을 마친 수련생들이 스님을 알아보고는 너무나 반가운 얼굴로 환호를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아니, 깨달음의장 수련을 잘 마쳤으면 어떤 경계에도 끄달리지 않는 여여한 마음이 되어야지 왜 이렇게 들뜨고 그러세요?” 라며 농담을 하셨고, 수련생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스님을 붙잡고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 깨달음의 장을 방금 마친 수련생들과 함께

 

오후5시부터 서울 정토회관에서는 내일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이를 기념하는 사전 행사와 점등식이 열렸습니다. 5인의 정토행자들로 구성된 사물놀이패의 힘찬 장단으로 시작한 점등식 사전 행사는 서울제주지부 활동가들의 합창, 부처님의 일생 OX 퀴즈, 수행문 외우기 대결, 세존팀과 아난다팀으로 나누어 진행한 삼배 릴레이로 웃음과 배움이 가득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당초에 스님께서는 5시부터 사전행사에 참석하여 대중들과 함께 하시려 하셨으나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같이 참여하지는 못하시고, 잠시 뒷자리에서 대중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지켜 보셨습니다.

 

7시부터는 저녁 예불을 거행한 후 스님의 점등식 기념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올해가 불기 2559년이지만, 정확하게 따지자면 오늘까지는 2558년이고 부처님이 오신 날인 내일부터가 2559년의 시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사월 초파일을 부처님오신날로 삼습니다만, 인도에서는 인도 달력으로 2월 만월이 부처님오신날입니다. 부처님이 탄생하신 인도에서는 보름이 15일이 아니라 말일이고, 인도의 2월 말일을 우리 달력과 맞추어보면 4월 15일이 됩니다. 우리의 사월 초파일보다는 1주일이 늦게 되는데, 이는 나라마다 신년을 세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부처님오신날이 양력화 되었기 때문에 우리와는 날짜가 또 다릅니다. 

 

이처럼 소승불교냐 대승불교냐, 어느 나라이냐에 따라 부처님오신날은 제각기 다르지만, 날짜란 말 그대로 날짜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짜 부처님이 오신 날은 어떤 특정한 날짜라기 보다는 나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무지에서 벗어난 날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을 부처님 오신 날로 만들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내일 하루라도 마음을 맑게 가져서 진정한 부처님오신날을 맞아야겠습니다.” 

 

이어서 스님께서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마음자세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대해서 묘사할 때는 “가볍다, 무겁다”,“밝다, 어둡다”, “맑다, 탁하다” 라고 합니다. 마음이 가볍다는 것은 웃으며 풀 한포기처럼 가볍게 사는 것을, 무겁다는 것은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밝다는 것은 지나간 일에 괴로워 하지 않고 오지 않는 일에 걱정하지 않는 것을, 마음이 어둡다는 것은 근심걱정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맑다고 하는 것은 어린 아이들의 눈이 맑다고 하는 것처럼 욕심이 없는 청정한 마음을 일컫고, 탁하다는 것은 속이 시커멓다, 욕심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대해 얘기할 때는 이 세 가지를 다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부님, 수녀님, 스님들 같은 종교인들은 마음이 맑기는 하지만, 사명감으로 인해 마음이 무거워서 꼭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를 다 갖춘 가볍고, 밝고, 맑은 마음을 가지면 이를 부처의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것을 어둠에 비유하고 깨달음은 밝음에 비유하는데, 어리석음인 어둠을 밝혀서 밝은 행복과 열반의 세계로 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불을 켠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대승불교에서 등을 연꽃 모양으로 표현한 이유는 혼자 조용한 곳에서 수행하며 자신만의 해탈을 추구하는 소승불교와는 달리 진흙 속에서도 아름답고 청정한 꽃을 피워내는 연꽃처럼 번잡하고 어지러운 속에서도 물들지 않고 자기 마음을 평화롭게 갖는 대승 불교의 정신을 상징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대승불교를 표방한다고 하면서도 소승의 수행법에 관심이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일상이 너무 복잡해요, 어디 조용한 데 가 있고 싶어요” 라고 하시는데, 이는 혼탁한 세상을 떠나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대승의 정신에 따른 수행을 한다면 시끄러운 저잣거리에서도, 갈등이 많은 직장에서도, 복잡한 가족관계 속에서도 늘 나의 마음을 잘 간직하고 편안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는 이러한 대승적 자세를 견지하지 못하고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좋은 사람 만나게 해주세요”, “합격하게 해 주세요” 라며 기복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민속신앙이지 불교라 할 수 없습니다. 대승불교는 출가자들로만 상가를 구성하는 소승불교와는 달리 출가자와 재가 신자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상가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가 되기를 발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겉모습에 구애받지 않고 상가의 구성원이 될 수 있고, 마음의 평화를 이루어 열반과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오늘 이렇게 전야 법회로 점등식을 거행하는 것은, 오늘까지가 어두운 중생의 세계였다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세상이 밝아졌다는 것을 축하하고 이의 상징적인 의미를 마음에 새기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점등식의 의미를 짚어 주신 후 부처님 당시의 일화로 ‘가난한 여인의 등불’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구걸로 목숨을 연명할 수 밖에 없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여인이 주변에 수 만개의 등불이 환히 밝혀진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물으니 사람들은 이 나라의 왕이 야외에 머무시는 부처님을 위해 이렇게 많은 등불을 밝혔다고 말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가난한 여인은 ‘왕은 전생에 많은 복덕을 지어 왕으로 태어났고 또 이생에서도 이렇게 큰 공덕을 지었으니 다음 생에는 더 많은 복덕을 누리겠구나. 그런데 나는 전생에도 복덕을 짓지 못했고, 이생에서도 가난하여 복을 쌓지 못하는데, 이를 다음 생으로 이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이생에서 가난한 가운데에도 꼭 복을 지어야겠다’ 하고 생각했어요. 

 

가난한 여인은 하루 종일 일해서 번 두 닢의 동전으로 등불을 밝힐 기름을 사러 갔습니다. 기름가게 주인이 이 여인의 갸륵한 이야기를 듣고 자비심을 내어 이 여인에게 두 배의 기름을 주었어요. 가난한 여인은 자신의 초라한 등불을 들고 부처님 처소로 갔으나 이미 그 곳은 왕의 등불로 가득하여 놓을 자리가 없자 숲의 제일 가장자리에 자신의 등불을 놓고는 ‘다음 생에는 성불하여지이다’ 라고 소원을 빕니다. 이렇게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다음 생에는 부자 되게 해 주세요’ 가 아니라 ‘다음 생에는 성불하여지이다’ 라고 원을 세웁니다. 

 


 

부처님께서 잠자리에 드실 시간이 되어 아난 존자가 한쪽에 켜진 그 여인의 작은 등불을 끄려했으나 손으로도 가사 장삼으로도 끌 수가 없었어요.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야, 헛수고를 하지 마라, 그 등불은 비록 작으나 너의 힘으로 끌 수가 없다. 그 여인은 이 작은 등불을 켠 공덕으로 미래세에 부처를 이룰 것이다’ 라고 수기를 주셨습니다. 이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왕이 수 일에 걸쳐 수 만개의 등불을 켠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큰지 부처님께 여쭈었더니 부처님께서는 ‘대왕이시여, 진리라고 하는 것은 너무도 미묘해서 하나를 주고도 백을 얻을 수 있고, 백을 주고도 하나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면 성불의 기회가 올 것입니다’ 하시니 대왕이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고 합니다. 

 

가난한 여인의 등불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베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공덕을 바라는 보시는 바라밀다가 아니며 공덕을 바라면 그것은 장사나 거래이지 진정한 보시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항상 거래를 합니다. ‘다만 할 뿐’ 이라는 생각으로 이러한 거래와 계산의 관계를 넘어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진정한 행복의 길로 가려면 거래와 계산의 관계를 넘어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계산을 넘는 사랑의 길, 이것이 부처님이 오신 진정한 뜻이니 이를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법문을 마치신 후에는 대중들과 함께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며 앞마당으로 나가 탑돌이를 하였습니다. 장엄한 북소리에 맞추어 가난한 여인의 등불을 상징하는 작은 등불을 든 정토회 회원들은 탑 앞의 큰 연등 주위에 큰 원을 그리며 섰습니다. 

 


▲ 부처님오신날 점등식

 

조용한 음악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등장해 불을 밝히자, 앞마당 위에 줄지어 설치된 수백개의 연등과 탑에도 일제히 불이 들어와 주변을 형형색색으로 밝히는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스님께서도 밝게 켜진 연등을 보며 환한 웃음을 보이셨습니다. 

 

서울제주지부 상임법사님이신 자재법사님께서 맺음말로 해 주신 “우리들의 마음 속 등불에도 스위치를 켜자” 는 말씀은 오늘 점등식에 참석한 모든 대중들에게 행사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감로수와도 같은 말씀이셨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사홍서원과 산회가를 합창한 230여명의 정토행자들은 사물놀이패의 신명나는 장단에 맞추어 정토회관 앞마당을 빙글빙글 돌며 흥겨운 대동 한마당으로 점등식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이어서 밤11시10분부터는 SBS에서 부처님오신날 특집으로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이 방송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방송을 시청하지 않으시고 휴식을 하셨고, 서울 공동체 대중들은 강당에 모여 함께 방송을 시청하였습니다. 방송이 끝나자 대중들은 지난 2개월 동안 다큐 촬영을 위해 스님 곁을 주야로 쫓아다니며 고생한 SBS스페셜 제작팀에게 감사의 박수를 함께 보냈습니다. 

 

내일은 불기 2559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스님께서는 아침7시 활동가들과 함께하는 1부 법회를 시작으로, 아침10시 주간반을 대상으로 한 2부 법회, 오후1시 저녁반을 대상으로 한 3부 법회, 오후4시 이웃종교인들과 함께하는 4부 법회, 저녁7시 청년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5부 법회까지 하루 종일 법당을 찾아오는 대중들을 위해 법문을 해주실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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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우리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기 싫어도 능히 할 수 있어야 되고, 하고 싶어도 능히 안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고 싶을 때 할 자유, 하기 싫을 때 하지 않을 자유는 반쪽짜리 자유입니다. 완전한 자유는 하고 싶을 때 하지 않을 자유, 하기 싫을 때 할 자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나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gt;&gt;스님께서도 '사명감'으로 마음이 무겁지않게,가볍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ㅠ<br />

2015-06-01 00:47:36

민숙영

수도꼭지를 틀때도 깨어있으라..는 말씀 맘에 남습니다.

2015-05-28 06:18:27

감사합니다♥
뜻깊은날 스님 뵐 수있어서 행복했습니댜.

2015-05-27 00: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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