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5.10. 불교대 특강수련 법문, 문경공동체 즉문즉설 법회

 

 

 

오늘 스님께서는 불교대학 특강을 위해 문경 수련원에 밤 1240분경에 도착하셨습니다. 잠시 주무신 후 새벽 430분 대웅전에서 문경공동체 수행자들과 함께 새벽예불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어 자비당에서 대중들과 함께 발우공양을 하셨습니다. 발우공양 후 대중들에게 수행자로서 살아가야 할 여섯가지 지침을 주셨습니다.

 

여기 백일출가생, 행자대학원생, 봉사하러 들어오신 분들도 있는데, 여러분들이 여기서 배운 것을 사회에 나가면 잘 써야 합니다. 여기 있을 때만 여법하게 하고 사회에 돌아가면 한 때의 추억이 돼서는 안 됩니다.

 

첫째, 제일 중요한 것은 수행자는 몸이 이곳에 있든, 세속에 나가든 남을 핑계잡고 자기를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남편 때문에 괴롭다, 아내 때문에 괴롭다, 자식 때문에 괴롭다, 누구 때문에 괴롭다 이렇게 남을 탓하면서 자기 괴로움을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나도 모르게 잠시 경계에 빠져서 괴로울 수는 있지만 금방 , 내가 경계에 사로잡혔구나.’, ‘내가 내 업식에 놀아났구나.’ 이렇게 알아차리고 바로 돌아와서 늘 자기를 괴롭지 않은 상태로, 행복한 상태로 유지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행복한 사람,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수행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 수행자는 내가 돈이 아무리 많아도 검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 그 사람 부자라고 알았는데, 인기인이라던데, 유명하다고 알았는데 참 소박하게 살구나이런 인상을 줘야 수행자입니다.

 

셋째, 수행자는 겸손하게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나가서 국회의원이 되고 도지사가 되고 시장이 되고 이런 높은 지위에 가더라도 사람이 목에 힘을 주고 뻣뻣하게 해서 잘난 척하고, 거만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넷째, 수행자는 성실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든지, 맡은 일이나 주어진 일이 있으면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느 가게에서 일을 하든, 직장에서 일을 하든, 무슨 국회의원 보좌관을 하든 아이고, 정토행자들은 참 성실하다.’ 이래야 됩니다.

 

다섯째, 수행자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수행자가 참선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 됨됨이가 먼저 돼야 합니다.

 

여섯째, 수행자는 꾸준히 정진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예불하고 108배를 한다든지, 30분 명상 등 한 가지는 꾸준하게 정진하는, 인생의 기둥이 있어야 됩니다.

 

인생의 기둥이 분명히 있으면 정신질환이나 뇌졸중이 훨씬 적어집니다. 그렇다고 안 걸린다는 건 아니에요. 그런 질환에 걸릴 확률이 확 떨어집니다. 아무리 수행해도 뇌졸중에 걸리는 이유는 그 사람의 체질이거나, 또는 집안의 체질 때문에 나이 들면 걸릴 수 있습니다. 그건 수행과 관계없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위해서도 한 가지를 꾸준히 정진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하루하고 포기하고, 기분나면 하고, 기분 안 나면 안하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불안정한 삶이 아니라 꾸준히 정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모가 한 가지를 꾸준히 하면 자녀들이 그것을 보고 심리가 안정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연습을 하는 건데, 정진을 여기서만 하고 나가서는 안하면 안됩니다. 학교 다닐 때 시험치기 위해서 공부하고, 시험치면 지식을 다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기 때문에 학벌만 높지 물어보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비효율적인 학습이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에서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만 그럴 듯하게 행동하지, 실제로 일상사에서 그것이 적용 안되는 삶을 살면 이 백일출가기간이 낭비일 뿐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백일 연습하여 나가서 꾸준히 정진하며 생활한다면 여러분들의 인생이 행복해지고, 가정이 화목해지고, 우리 사회가 여러분들로 인해서 정화됩니다.

새로운 문명은 누가 연구해서 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런 삶을 지향하면 환경은 저절로 보호되고, 세계는 평화로워지고, 인생은 행복해지고, 사회적 갈등은 줄어들게 되고, 과소비는 줄어들어 저절로 세상이 바뀌면서 더불어 사는 삶이 됩니다.

 

우선 나부터 그런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걸 연습하는 거니까 걸레를 빨든, 빨래를 하든, 풀을 베든, 이렇게 배우는 자세로 해야 됩니다. 여기서 배운 것이 다 인생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참고 견디다가 끝나면 아이고, 살았다고 하며 가버리는 낭비적인 인생을 살지 않길 바랍니다. 그런 연습을 하는게 여기 백일출가고 행자교육입니다. 정진 꾸준히 잘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70일이 넘어가 후반기로 접어든 백일출가생들에게 오늘 법문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는지, 다들 새로운 열기가 얼굴에 돕니다. 힘찬 해탈주와 함께 발우공양이 끝났습니다.

 

 

오전 830분부터는 봄불대 특강수련에서 즉문즉설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이번 봄불대 특강수련에는 대구경북지역과 대전충청지역 불대생들이 스탭 포함해 총 320여 명이나 참석했습니다. 불대생 중에는 불교를 처음 접하거나, 교회나 성당에 다니다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불대에 입학한지 어느덧 두 달이 흘렀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도 많고, 낯설기도 합니다. 더더군다나 이번엔 소속법당을 떠나 또 처음으로 문경수련원에 온 분들도 많았습니다. 전혀 낯선 사람들과 같이 모여 밥을 먹고, 잠자고 토론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 그래도 하룻밤 자고나니 어느새 많이 친해진 분위기입니다.

 

녹음이 우거진 문경수련원은 나날이 초록빛으로 짙어만 가는데, 여전히 새벽공기는 차갑기만 합니다. 그래도 오늘 참가하신 분들은 지도법사님을 만나 그동안 배운 내용과 수행하면서 들었던 궁금증을 여쭤볼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설레어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영상으로만 뵙던 스님을 직접 만나다니 꿈만 같다는 참가자들이 많았습니다. 질문하고 싶은 사람들도 너무 많아서, 스탭들은 미리 질문지를 받아두었습니다. 중복되는 질문들을 간추리고 간추려서 스님께는 약 십여 명의 질문지가 올라갔습니다. 질문지를 써냈던 학생들은 과연 내 질문에 스님께서 답변해주실지 두근두근 좀 더 설레는 모습입니다.

질문 내용을 보면 상대가 잘못한 것 같은데, 내가 왜 참회를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공수래공수거라는데, 사람은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얘기와 모순입니다. 어떤 게 맞는지요?”, “제행무상 제법무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저는 웃음치료사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치매예방을 위해 율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재능봉사를 하며 잘 쓰이고 싶은데 가무를 하지 말라는 법문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것을 하면 안 되는지요?” 등등 다양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다른 사람의 잘못이 눈에 보여도, 그 사람에게 얘기를 안 하고 그저 내 잘못을 돌이키면 좋은지요? 그런데 그게 그 사람에게 고통이 된다면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말을 해줘도 돌이키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에게 직접적으로 해가 된다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스님 말씀을 좀 길게 소개해보겠습니다.

굉장히 정제된 질문을 했네요. 누가 질문했는지 손들어보세요. 스님한테 혼 안 나려고 머리를 많이 굴렸는데 허점이 있어요. ‘나에게 직접적 해가 된다면 이야기해도 되나요?’ 이게 허점이에요. 결국 지적해주고 싶은 마음이 그 사람을 위한 것인지, 내가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것인지가 이 말에 드러나 있어요. 아시겠어요?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할 때 내가 불편하면 누구 문제다? , 내 문제라는 겁니다. 화나거나 괴롭거나 섭섭하거나 미워지거나 짜증날 때는 내 문제라는 거죠. 상대가 잘못 했다 안 했다 논하는 게 아니고, 괴로우면 내 문제라는 겁니다.

 

 

동산에 달이 두둥실 뜬걸 보고 눈물이 핑 돈다. 그래서 시구를 오늘은 달마저도 나를 슬프게 하는구나라고 써요. 달을 보지 않았으면 눈물이 나지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눈물이 난 게 달이 원인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거죠. 달을 보고 입가에 웃음을 띠면 달이 나를 웃긴 것인가요? 달은 다만 떴을 뿐이에요. 그것을 보고 내가 울고 웃는 것이기 때문에 내 문제라 이겁니다. 달이라고 하는 경계에 부닥쳐서 일어나는 내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죠.

 

괴로움을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 괴로움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가 잘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어린 아이가 하는 행동을 보면 아이가 아직 어리석어서 그러는 것이기 때문에 기분이 하나도 안 나쁘죠. 그렇지만 아이를 위하는 마음이 든다면, 아이에게 그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고 얘기를 해주면 됩니다.

 

내 기분이 안 나쁜 상태에서 그 사람한테 얘기하면 보살행이 되는 것이에요. 그 사람이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는 상관없어요. 그 사람을 위해 하면 되는데 그 사람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으면 시비를 일으키는 게 됩니다. 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해서 이야기 해주면 자비심이라고 하죠. ‘자자라고 하는 것은 도반과 둘러앉아서 서로 상대방이 계율을 어긴 잘못을 지적해주는 것입니다. .

 

 

수행이 덜 된 사람은 내가 뭐라고 다른 사람을 지적하나꺼려지는 마음이 듭니다. 반대로 받는 사람이 수행이 덜 되면, ‘네가 뭔데 나를 지적하냐? 네 차례 되면 두고 보자고 하며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고 논쟁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자할 수준이 안 됩니다. 자자는 수행자의 범주 안에 들어오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자자(自恣)내가 스스로 허물을 지적해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혹시 계율을 어긴 게 없는지, 저를 위해서 지적해 달라고 청하면 상대방이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그에 감사하고 잘 받아서 고치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나 무조건 고친다는 건 아니예요. 상대가 지적한 게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 그때는 해명을 할 수도 있습니다. 변명이 아니고요. 수행자는 자자 시간이 아닌 경우에는 상대방의 허물을 지적을 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자자 시간이다. 도반을 위해 허물을 이야기 해주자고 할 때가 아닌 평상시엔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시비가 되기 때문이에요. 자기 분별심 따라 도반을 위한다고 착각하는 거죠. 내가 상대방에게 마음이 불편한 상태에서 얘기하면 시비가 되기 쉽고, 참았다가 이야기 하면 나가는 이야기에 창이 들어가기 때문에 푹 찌르게 됩니다. 신경질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다시 자극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불편함이 있을 때는 지적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보통 어때요? 내 마음이 불편한 상태에서 내 맘에 안 드니까 상대에게 지적하죠. 마치 상대를 위하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아이들을 야단치는 엄마들을 보세요. 자기 기분이 나빠서 애들을 때리고 야단치고 그럽니다. 선생님들도 그렇고요. 아이가 잘못한 점이 있으면, 정말 아이가 개선됐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염원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너를 잘못 키운 내 죄가 크다. 네가 엄마를 때려라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할 때는 타인의 허물을 말하지 않고 가능하면 자기의 허물로 돌려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내 허물을 도반들에게 지적해주길 청한다는 자자말씀을 들으니, 그 옛날 부처님 당시의 승가공동체가 얼마나 평화롭고 청정하게 유지됐을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내가 다른 이의 허물을 말해주는 것도 쉽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내 허물을 지적하는 것도 듣기가 불편한 데, 진심으로 내가 모르는 내 허물을 지적받아 고쳐나간다는 점이 정말 대단하기도 하고, 희망이 되기도 합니다. 선지식들의 그 길을 우리 역시 걷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아직은 첫걸음이지만, 이렇게 스승님의 자상한 안내를 받으며, 안되도 해보고 다시 해보다보면 어느덧 수행자의 범위에 들어가게 되지 않을까요?

 

 

스님께서는 이외에도 많은 질문들에 아주 세세하게 답변해주시면서, “정토불교대학에 온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기 바랍니다라는 격려말씀을 끝으로 3시간에 걸친 특강수련 법문을 마무리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불교대학 특강수련이 끝난 후 간단히 점심 공양을 드시고 SBS 스페셜 팀과 촬영을 위한 인터뷰가 3시간이나 있었습니다. SBS 촬영팀은 스님과의 인터뷰가 끝나자 오늘이 마지막 촬영이라며 아쉬워 하면서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문경을 떠났습니다.

 

 

SBS 촬영을 마친 스님께서는 오늘 깨장, 나장 수련이 끝난 수련생 약 80여명에게 간단히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수련하면서 혹시 해소하지 못한 질문들이 있으면 해보라는 스님의 말씀에 몇분이 손을 들고 스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에 부딪힐때마다(세월호 사건등) 수행자로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묻는 분, 윤회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 목숨을 내놓고 수행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등에 대해서 묻고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오늘 수련을 통해 새로 태어난 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후 스님께서는 원고교정등의 업무를 보신 후 저녁 7시 저녁예불을 대중들과 함께 드린 후 문경공동체의 상주대중들과 백일출가, 행자대학원 행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법회를 시작하자마자 따뜻하고 평화로웠던 봄날의 날씨는 어느새 흐린 하늘에 거센 바람이 부는 날씨로 바뀌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렇게 인생에서도 평온하던 나날이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고 고통이 닥칠 수 있습니다. 이때 거센 바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안전한 집과 같은 것이 계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계율을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우리를 속박하는 감옥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마치 태풍이 불지 않는 날은 집의 소중함을 모르고 감옥처럼 여기는데, 계율 역시 큰 어려움이 없다고 지키지 않고 살면 세속의 거센 물길에 휩쓸려 다니기 쉽습니다.”

 

 

이번 상단법문의 주제는 참회수행이었습니다. ‘참회를 하려면 계율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참회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계율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자란 무엇인가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는 자입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이유는 해탈과 열반, 참자유와 참행복의 증득이라는 수행의 목표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입니다.

 

먼저 참자유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참자유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것을 하고 싶어서 할 수 있는 상황, 하고 싶지만 못하는 상황,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되는 상황, 이렇게 4가지 경우을 만나게 됩니다. 만일 자유라는 것을 하고 싶을 때 하는 것과 하기 싫을 때 안하는 것만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늘 자유와 속박을 윤회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고 싶을 때 하지 않을 자유, 하고 싶지 않을 때 능히 할 자유를 갖게 되면 어느 상황에도 속박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 참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의 불만족, 기분 나쁨을 괴로움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늘 즐거움과 괴로움이 반복되는 윤회를 겪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즐거움만 떼어내서 갖고 괴로움은 버리려고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고락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즐거움과 괴로움이 돌고 도는 윤회가 되풀이되지 않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 즉 참행복입니다.

 

이런 참자유와 참행복의 경지를 누리는 사람이 붓다입니다. 그리고 불법승에 귀의한다는 의미를 좀더 말씀드리면 첫째,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이 경지에 최초로 도달하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더 넓혀서 보면 나도 부처가 되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둘째, 법에 귀의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안내한 길, 즉 담마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또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심에 놓되,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그 이치와 진리에 합당한 것은 모두 법으로 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셋째, 승에 귀의한다는 것은 그 길을 따라 정진해서 실제로 열반과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에게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진실에 입각해서 해탈의 길과 열반의 길로 가는 사람은 꼭 불교 신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나의 스승이고 도반입니다.

 

 

이 중 어떤 입장을 갖든지, 결국 목표는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 모델을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하고, 그 과정을 석가모니 부처님의 담마에 의존해서 가고, 이 과정으로 가는 사람들은 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나의 분신들로 여긴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면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해탈과 열반의 길로 갈 수 있을까요? 그 길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일들은 가능한 행하고, 그 길로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되는 일들은 가능한 행하지 않는 것, 즉 마땅히 행해야 될 일을 마땅히 행하고 마땅히 행하지 않을 일은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쌓인 습관들이 찰나에 깨어있지 못해서 습관적으로 나오는 것,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것들이 바로 참회의 대상입니다. 내가 놓친 것을 지나고 나서라도 알아차리고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참회입니다. 만일 놓친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어긴 것이라면 그것은 수행자로서 계율을 받아들인 태도가 아니기 때문에 참회의 대상조차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먼저 계율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리 삶의 목표의식,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상태로 가겠다는 불자로서의 분명한 삶의 목표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참회에는 세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일반 첫 번째로는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알아차리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 두 번째로는 대중들과 다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어 밝히고 참회하는 포살, 세 번째로는 내가 내 허물을 알지 못할 때, 도반에게 나의 허물을 지적해줄 것을 요청하여 내 허물을 알고 참회하는 자자가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문경대중들에게 수행자로서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계율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상주대중들이 수행하면서 궁금했던 것을 질문하는 즉문즉설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첫 번째 질문자는 법사님이었습니다.

유수스님은 대중들로부터 호위를 받는게 자연스럽고 편안하세요. 그런데 저는 그것을 보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그걸 넘어서서 행자님들이 스님을 거들어 주면 오히려 시비가 일어납니다. 저는 인색하다는 기도문을 받았습니다. 제가 어릴 때 어머니가 굉장히 헌신적이셨는데 저는 그걸 보면서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중간에 결혼을 안한 이유도 어머니처럼 살 것 같고 남자 시중들면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굉장한 저항감이 있더라고요. 남자일 때 거부감이 드는 것은 뿌리와 같은 시비심이라서, 도리어 더 발심하고 마음내서 시키지 않아도 받들고 보좌하면 극복이 될지 헷갈려서 가르침을 듣고 싶습니다.”

 

스님께서 두 가지 면을 모두 짚어주셨습니다.

 

내가 그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에게 서비스를 하고 받드는 건 자유에요. 자기가 좋아서 하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데 남자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과거 문화가 그렇다 하더라도 앞으로 개선해야 할 문제입니다.

 

또 자기가 존경하는 마음때문에 존경하는 건 괜찮은데, 스님이기 때문에 존경한다는 건 정토회에서 개선되어야 할 점입니다. 일반 절에서는 스님은 밭드는게 예의에 속하지만 정토회에서는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에 지금 스님과 같은 사제직분에 있었던 사람이 브라만이에요. 그러면 브라만이 부처님 제자가 되면 크샤트리아나 바이샤, 수드라가 상가 안에서 브라만을 받들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게 못하게 하셨습니다. 정토회는 수행자 모임입니다. 그래서 정토회 안에서 스님이라고 존경해야 한다면 그것은 정토회 원칙이 아닙니다. 그가 머리를 길렀든, 장가를 갔든 관계없이 존경받을 만하다 하면 존경합니다.

 

여기는 수행자 집단입니다. 사제도 없고 신도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도라는 말 안 쓰고, 회원 아니면 행자라는 말을 쓰는 거에요. 정토회 어디에도 공식적으로 신도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의 선호는 있어요. 이건 어쩔 수 없어요. 우리가 남녀 평등을 주장해도 남자법사님은 법사님 같고 여자법사님은 별로 법사님 같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것은 우리가 남자를 높이는 유교문화에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무의식 세계에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개선되어야 합니다. 그처럼 스님이라고 특별히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관습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스님이라고 특별히 예우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자타아카데미에 누가 봉사한다고 하면 승복 벗고 승려 대우 포기하고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너무 쉬운 거 아니에요? 근데 못해요.

 

여러분들이 정토회 원칙을 모르니까 늘 이런 부분을 판단하기 어렵죠. 앞서 말했듯이 존중받을만 해서 존중하는 건 개인의 자유이니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편하다면 내 까르마의 문제에요. 내가 불편할 때는 문제제기하면 안되고 오히려 내가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토회에 개선되어야 할 문제라고 여겨지면 개선될 수 있도록 제안을 해야 합니다. ‘스님을 시비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 또한 수행자의 자세가 아니에요. 언제든지 문제제기를 하는게 수행자입니다. 언제든지 돌아보고 이런 것은 개선하는 게 좋겠다고 가볍게 말하고, 내가 문제제기를 잘못했으면 내가 문제제기를 잘못했구나 깨우치는 그런 관점을 가지면 됩니다.”

 

 

뒤 이어, 행자대학원 1학년 2학기 과정을 밝고 있는 행자님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2살 아래 남동생이 있는데 2년 전에 결혼을 했어요. 6월 말에 출산을 한다고 하는데 아이를 낳는다고 하면 축하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이 안 나옵니다. 행자대학원에 온 후 부모님에 대해선 입장정리됐다고 생각했는데 동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입장정리가 안된 기분인거에요. 축하는 해줘야 될 것 같고 형으로서 뭔가 해줘야될 것 같은데 현재 입장에서 해줄 것이 없네요. 동생에 대해서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면 돼요. 그냥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축하 안하면 되고, 하기 싫어도 축하해야 될 상황이면 문자메세지 보내면 됩니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축하한다는 말이 꼭 안 나오면 애기 선물이라도 사서 축하한다는 말 빼고 선물을 보내세요.

 

20살 넘은 성년들끼리는 어떤 의무도 없습니다. 어떤 것도 부모에게 요구할 권리가 없고, 부모 말을 들어야 할 어떤 의무도 없습니다. 동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 생태계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동생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은 집착이지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해도 아무런 죄가 안됩니다. 스무살이 넘었는데 출가하는 건 아무런 죄가 안돼요. 그게 죄가 되면 부처님도 죄인이 되고 불교 자체가 잘못된 것이 됩니다.

 

출가자는 세속의 끈을 놓고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메일 필요 없어요. 그렇다고 인색한 것하고 다른 겁니다. 그에 대해 사랑하지만 내가 그 인생에 대해서 특별히 간섭할 필요도 없고 연연할 필요도 없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정리해서 말하면

첫째는 여러분들이 분별심을 내더라도 여기서 사는 것만으로도 장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사는 사람 이 세상에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격려합니다. 두 번째는 여기서 산다고 수행이 되는 건 아니에요. 목표를 세우고 연습을 해야 되는 겁니다. 억지로 하는게 아니라 내가 분별심 일어날 때 마음을 돌아보면서 또 분별심 내는구나’, ‘또 분별심 내는구나하면 재미있잖아요. ‘업이 끈질구나. 내가 나를 봐도 가관인데 남이 보면 진짜 가관이겠다.’(웃음) 이렇게 마음을 돌아보면 됩니다. 마치 자전거 못타는 애가 자전거에 빠져서 매일 붙어 있듯이 이걸 극복해보려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거기에 재미를 붙이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마음 일어나는걸 보면서 극복하는 것 보다 더 재미있는건 없어요. 그러면 친구가 지적해주는 것 도 고맙죠. 지적해줘야 기분 나쁜게 일어나고 내 까르마를 볼 수 있습니다. 억지로 타성에 젖어서 하지 말고 자기 개선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접근해야 여기 사는 것도 재미있어요. 남이 보기엔 저렇게 자전거 타도 되나라고 해도 자기는 어쨌든 타보려고 애를 쓰잖아요. 그래서 남의 비아냥 마저도 괜찮아요. 그거 신경 쓸 여력 없어요. 남이 보기에 웃기든지 말든지 나는 어찌됐든 자전거를 타볼 거다 이렇게 몰두를 해야 돼요. 그래야 얼굴이 펴져요. 안 그러면 얼굴이 늘 우울해져요. 그렇게 부지런히 연습해서 어떻게 수행해야 된다는 건 터득해서 나가야해요. 여기서 기본 틀을 배워 나가서 살면 여기 살았던 것이 자기 인생에서 최고로 소중한 인생이 됩니다.”

 

이제 갓 들어온 상근자도 1년이 넘은 상근자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질문 속에 의미 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법회를 마친 뒤 문경공동체에서는 스님과 자주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조금 이르긴 하지만 스승의 날을 맞이해서 스님께 꽃다발을 증정하였고, 스님께서는 다시 그 꽃다발을 자행스님께 바쳤습니다. , 2명의 행자님들이 스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모두들 이곳에 와서 살아가면서 느낀 감사함을 담아서 스승님께 감사의 뜻을 전하는 모습이 감동스러웠습니다.

 

 

 

 

내일은 애광원 거주인들과 진주성과 사천 항공우주박물관 나들이를 가지고 창원 강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전체댓글 17

0/200

김제니

감사합니다

2019-06-01 23:05:03

이규원

스님의 귀하고 소중한법문 감사드립니다.오늘도 행복합니다.

2015-05-14 11:33:56

박미건

제생각에 부처님법은 무슨 이유를 들어서라도 긍정의 힘을 모으는것이라 여겨집니다.그렇게 하는것이 행복한 삶의 바탕이라 여겨 긍정의 힘을 기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무탈하시길빕니다.

2015-05-13 16:35:32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