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5.9 평화리더십아카데미 경주 역사기행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께서는 ‘역사의 전환기, 통일 신라의 리더십을 배운다’는 주제로 제12기 평화리더십아카데미 수강생들을 위해 경주 역사기행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법흥왕릉을 시작으로 진흥왕릉, 태종무열왕릉, 김유신장군묘, 사천왕사지, 선덕여왕릉, 능지탑, 황룡사지를 차례대로 둘러보면서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신라가 어떻게 삼국 통일을 이루었으며, 그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스님께서는 깊이있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어제 두북에서 하룻밤을 머무신 스님께서는 오전11시 무렵 법흥왕릉에 먼저 도착해 평화리더십아카데미(이하 평리아) 수강생들을 환한 미소로 맞이해 주셨습니다. 지난 4월에는 정토불교대학, 경전반, 청년정토회 등 최소 300여명이 넘는 대중들에게 매주 경주 역사기행을 안내하셨는데, 오늘은 조촐하게 23명을 대상으로 안내를 하는 날입니다. 비록 인원은 적었지만 스님의 설명은 한결같이 정성과 열정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 법흥왕릉 

 

법흥왕릉 앞에 모두 서서 삼배로 참배를 한 후, 스님께서는 오늘 역사기행을 하는 취지와 함께 삼국 통일의 기틀을 닦은 법흥왕의 업적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경주역사기행에서 설명하는 삼국 통일에 대한 초점은 두가지예요. 첫째, 동쪽에 치우친 작은 부족 국가였던 신라가, 즉 비주류였던 신라가 어떻게 민족사의 주역으로 등장했는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신라의 내적 동력은 무엇이였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둘째, 신라는 민족사에서는 비주류였기 때문에 역사 의식이 부재했죠. 역사의식이 부재한 세력이 통일의 주역이 되다보니까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잃어버렸는가? 이 두가지 주제입니다. 먼저 신라가 어떻게 비약적 성장을 하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보면 신라는 AD 57년 지금으로부터 2100년 전 쯤에 처음으로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경주 분지 주위에 6개의 씨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 6부 촌장들이 모여서 ‘우리도 나라를 만들자’고 하면서 임금을 선출했다고 합니다. 인류문화사적으로 보면 씨족이 모여서 만든 것이 부족이지 않습니까? 기록에는 신라가 고대 국가를 세웠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부족 국가가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신라는 동쪽에 치우친 작은 부족 국가이니까 외부와 문명의 교류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이라는 칭호도 없었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이라는 칭호를 쓰다가 22대 지증왕대에 와서야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썼습니다. 지증왕이 즉위한 때가 AD 500년이니까 557년 동안이나 아직 고대 왕국이 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죠. 

 

AD 400년 경의 역사를 보면 낙동강 유역의 가야·왜 연맹군이 신라를 침공했는데 신라는 거의 나라가 망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라는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고 원병을 청했어요. 그 때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5만 군대를 보내서 가야·왜 연맹군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고구려의 원군을 받아서 나라를 유지할 만큼 신라는 가야보다도 약했습니다.  

 

그런 나라가 어떻게 갑자기 부강하게 되었느냐? 하나는 내부 개혁을 했고, 하나는 외부 개방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법흥왕릉 앞에 와 있는데, AD 514년에 법흥왕이 즉위를 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개혁 개방 정책을 쓰게 됩니다. 개혁 정책이라는 것은 율령을 반포한 것을 말합니다. 즉 법제를 정비했습니다. 개방 정책이라는 것은 불교를 공인한 것을 말합니다. 즉 외래 사상의 유입을 받아들인 것이죠. 

 


 

이렇게 내적인 준비가 된 후에 신라는 가야와 통합을 하게 됩니다. 100년 전에는 가야가 신라를 침공해서 신라가 위기에 처했기 때문에 신라 입장에서는 가야가 철천지 원수였어요. 가야 입장에서는 신라를 내리깔보는 입장이였죠. 그런데 거꾸로 이제는 신라가 국력이 강해지고 가야가 국력이 약해졌어요. 이럴 때 보통 신라는 무력으로 가야를 복속시키고, 가야는 끝까지 저항하다가 멸망하는 것이 역사인데, 특이하게도 신라와 가야는 합의 통합을 했습니다. 가야는 나라를 세울 때부터 불교 국가였지만 신라는 불교를 철저히 탄압하는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개방을 해서 불교를 공인했죠. 요즘 말하면 남한은 철저하게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국가이고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인데, 남한이 북한과 통합하기 위해서 공산주의 활동을 허용한 것과 같은 포용 정책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가야의 귀족을 신라의 귀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가야의 왕족들은 신라의 진골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북한의 군장성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군장성으로 임명하고, 북한의 관리들을 통합된 나라에서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는 통일의 역사에서 극히 드문 일입니다. 대부분 무력으로 진압해서 합병을 하지요. 합의 통일을 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야와 신라는 합의 통일을 했습니다. 지금의 강자인 신라는 옛 원한을 생각하지 않고 가야를 포용했고, 반대로 가야는 끝까지 저항을 하지 않고 통합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를 통해 신라는 법흥왕 이후로 급격하게 성장을 하게 됩니다. 특히 신라는 가야로부터 굉장히 많은 인재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통합을 통해 풍부한 인재와 물량을 갖고 영토 확장을 했기 때문에 진흥왕 때는 영토 확장을 3배 가까이 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라가 성장한 비결입니다. 그러나 역사에서 아무도 여기에 주목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우리가 통일을 연구할 때 자꾸 외국의 사례만 찾는데, 지금 시대에서는 독일 통일의 사례를 통해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지만 우리 역사 속에서는 신라와 가야의 통합이 어떤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는가 이 부분을 유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합의 통일을 했기 때문에 나중에 신라가 약해져도 ‘후가야’라는 나라가 등장하질 않았어요. 백제와 고구려는 무력으로 통일했기 때문에 200년 후에 후백제, 후고구려가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강자가 포용을 해서 합의 통일을 하게 되면 완전한 통합이 되지만, 약자가 힘에 밀려서 굴복해서 통일하게 되면 반드시 다시 재기를 하게 되는 역사의 반복을 볼 수 있죠.”

 

스님께서는 동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인 신라가 어떻게 민족사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었는지 가야와의 합의 통일이 갖는 의미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지금의 남북 관계만 살펴보아도 포용 정책을 펴기란 쉽지 않은데, 당시에 그런 과감한 정책을 폈다니 신라인들의 지혜에 절로 감탄이 되었습니다. 

 

다음은 진흥왕릉으로 향했습니다. 태종 무열왕릉을 지나 선도산을 향해 걸어올라오니 산 중턱에 진흥왕, 진지왕의 무덤이 함께 있었습니다. 무덤을 향해 참배를 한 후 신라가 어떻게 영토를 확장하고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되었는지 스님께서는 진흥왕의 업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특히 한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영토 뿐만 아니라 생산 물량까지 확충하는 과정,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을 받고 위기에 처하자 당시 강대국인 당나라와 외교를 하면서 국제 관계를 통해 통일의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 진흥왕릉 

 

진흥왕릉에서 내려오니 거대한 무덤 4개가 있고 그 밑에 태종 무열왕릉이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태종 무열왕릉 위에 위치한 거대한 무덤 4개를 가르키며 “이 무덤들은 누구의 무덤일까요?” 라며 깜짝 퀴즈를 내어 주셨습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하자 스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 태종 무열왕릉 위에 자리잡은 4개의 큰 무덤 

 

“무덤을 파봐야 알겠지만 전해내려오는 이야기 속에는 누구의 무덤이라는 기록이 전혀 없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태종 무열왕이 성골이 아니고 진골이잖아요. 즉 아버지가 왕이 아니란 말이예요. 그러니 아버지를 왕으로 추대해서 무덤을 하나 만들었을 수 있겠죠. 그런데 무덤이 한 개쯤 있으면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데, 무덤이 4개나 되기 때문에 그렇게만 추정하기는 좀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자 수강생 중에 한명이 “혹시 진짜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가짜 무덤을 만든 것은 아닐까요?”라고 대답하자 스님께서는 웃으시며 “타지마할에 가면 관광객이 구경하는 관은 가짜이고 진짜 관은 지하에 있거든요. 옛날에는 비석을 안 만든다든지 하는 방식의 가묘를 많이 했죠” 라며 일리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튼 역사 속 수수께끼를 뒤로 한 채 태종 무열왕릉을 참배하고 이어서 스님의 설명을 계속 들었습니다. 태종 무열왕릉 앞에서 스님께서는 태종 무열왕의 업적 뿐만 아니라 신라의 삼국 통일이 갖는 한계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태종 무열왕은 선덕여왕때 주로 당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면서 외교부 장관 같은 역할을 한 분입니다. 당시에는 당나라의 협조를 못 얻으면 나라를 존립시키기 어려웠거든요. 특히 백제는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정치를 잘하는 바람에 신라가 40여개의 성을 빼앗겼어요. 태종 무열왕은 당 태종과 대화하면서 ‘만약에 고구려가 멸망하면 대동강 이남은 신라에게 주겠다’는 언지를 받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고 해요. 그렇게 외교를 발전시켜서 나중에는 당나라와 신라가 협공을 해서 백제를 660년에 멸망시키게 됩니다. 태종 무열왕릉은 661년에 죽었습니다.

 


▲ 태종 무열왕릉

 

그러나 이 전쟁을 통해서 신라에서는 굉장한 실망이 있었습니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자 그 영토를 신라에게 통합해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통치했습니다. 신라는 엄청난 군대와 군량미를 지원했는데 전쟁의 성과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나라는 이 여세를 몰아서 고구려를 침공하려 했지만, 신라 안에서는 김유신 등 강경한 세력들이 여기에 소극적으로 대응했습니다. 마침 이 때 당나라 군대가 연개소문에게 참패를 당해서 소강 상태에 이르렀다가 연개소문이 죽자 고구려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고구려도 나·당 연합군의 협공에 패하고 당의 직할 통치로 들어갑니다. 이 때 민족주의자인 김유신의 영향을 받은 문무대왕은 대당 전쟁을 선포하고 당나라가 세운 안동도호부를 습격해 버립니다. 

 

이것은 요즘으로 비유하면 한미 연합군이 북한을 점령해서 우리는 당연히 통일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미국이 북한에 미군정을 실시하니까 여기에 반발해서 우리가 주한미군을 습격한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니 미국 본토에서 20만 대군을 한국에 파견해서 한·미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죠. 그것처럼 당나라 황제가 화가 나서 20만 대군으로 신라를 침공해 왔는데 이것이 나당 전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을 삼국 통일의 해라고 말하지 않고,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몰아낸 676년을 삼국통일의 원년으로 삼습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 비판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라가 외세와 결합해서 제 민족 국가를 제압했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과연 오늘 같은 민족의식이 있었느냐 하는 것이 재검토 되어야겠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자주성이 당나라를 몰아낼 만큼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라의 한계를 비난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남한이 신라만큼의 자주성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죠. 만약 한·미 연합군이 북한을 점령했는데 미국이 북한에 들어가서 미군정을 실시하면서 합법적인 정부를 들어서게 한다는 핑계로 북한을 관할한다고 하면 한국이 주한미군을 공격할 수 있을까요? 어떨 것 같아요? 

 


 

아무튼 신라는 그런 정도의 자주성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정통의 민족사적인 역사의식이 부재했기 때문에 광할한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신라가 만약 역사 의식이 있었다면 고구려의 옛 영토까지도 사실은 회복을 해야되지요. 그러나 신라는 그런 역사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영토가 2~3배가 된 것에 감격하고 말았죠. 이것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하나의 위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통일 문제를 다룰 때는 앞서 얘기한 가야와의 통합과 더불어 역사 의식의 부재가 가져오는 폐해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한반도의 통일 문제도 한반도로만 그쳐선 안되고 동북아 공동체라고 하는 더 큰 꿈을 갖고 통일 문제를 다뤄야 합니다.” 

 

역사 의식의 부재가 불러온 결과를 듣고 나니 동북아 공동체를 향한 꿈은커녕 분단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우리들의 현실이 떠올랐고, 당시 신라가 가졌던 한계가 21세기 지금에도 더 나아진 것이 없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몰아낸 신라인들의 자주성 측면에서 볼 때도 오늘날 우리들은 여전히 부끄러운 것 같습니다. 

 

이렇게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태종 무열왕릉을 나와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서 아버지의 대당 외교술을 잘 계승해 태대각간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하는 김인문묘를 살펴보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김유신 장군묘입니다. 스님께서는 김유신묘가 왜 왕릉처럼 가꿔지게 되었는지, 김유신의 인간 됨됨이는 어떠했는지 재미난 일화도 들려주셨고, 또 김유신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어떤 기여를 했고 그 한계는 무엇인지 신라와 오늘날 한국의 공통점에 대해 짚어주시면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 김유신 장군 묘

 

“이 묘는 둘러싼 석축으로 봤을 때 왕릉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김유신은 패망한 가야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와서 대성공을 한 케이스입니다. 왕이 아닌 사람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신라에서는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것이 ‘상대등’이고 행정부의 수장인 총리가 ‘각간’입니다. 그런데 김유신은 ‘대각간’의 지위에 올랐죠. 죽고 나서는 ‘태대각간’이라는 극존칭을 받았습니다. 후대에 가서는 ‘흥무왕’이라는 존칭까지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무덤은 흥무왕이라는 칭호를 받고나서 왕의 무덤에 준하게 개보수를 했다고 본다면 크게 이의를 제기할 것은 없을 것 같아요. 

 

김유신은 당시 신라의 왕권을 안정시켰습니다. 왕위 쟁탈전으로 혼란이 계속 있었는데 김유신이 무력으로 뒷받침을 해서 태종 무열왕을 등극시킴으로서 정치안정을 시켰죠. 국내 정치가 안정이 되어야 통일의 큰 위엄을 달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은 아니였지만 내분이 일어나지 않도록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앞세워서 국정을 안정시킨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김유신의 영향력이 크다고 하더라도 역시 가야의 왕손이다보니 민족사의 전통을 계승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민족사의 정통은 배달나라, 조선나라, 부여, 부여를 계승한 백제와 고구려, 동부여, 이런 나라들인데 비해 가야와 신라는 민족사의 정통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신라가 굉장히 융성해서 통일의 중심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 역사 의식이 부재했던 이유는 이런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신라를 가만히 보면 우리 한국이 신라를 닮은 것이 굉장히 많아요. 역사 의식이 부재한 것도 그렇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굉장히 강성해 있죠. 또 외세의 줄을 잘 잡은 것도 그렇고요. 신라가 개방적으로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서 당나라에 버금갈만한 문화예술을 발달시켰듯이 우리도 지금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되 서구 문명에 버금갈만한 문명을 지금 만들어가고 있잖아요. (웃음)

 


 

이런 장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역사 의식과 민족사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자부심이 부족해서 주어진 기회를 못 살리고 있죠. 통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이 되지만 역할을 못하는 것은 역량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설령 역량으로 인해 통일을 하더라도 의식이 부재하면 신라가 통일을 한 후에 민족사의 약화를 가져왔듯이 우리의 통일도 어쩌면 민족사에서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통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죠. 그래서 어떤 기본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우리는 과거 역사 속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계속 듣다보니 어느덧 신라 시대의 한복판으로 수욱 들어간 느낌입니다. 

 

다음은 사천왕사지로 이동했습니다. 사천왕사는 나당 전쟁으로 인한 당나라의 침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지은 호국 사찰입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사천왕사에서 문두루 비법을 행했더니 마침 그때 태풍이 불었는지 당나라 군대가 서해 바다에 수장이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신앙의 힘으로 나라의 위기를 이겨내었다고 신라인들은 믿은 것입니다. 이후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를 통해 신라는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게 됩니다. 

 


▲ 사천왕사지

 

이렇게 호국의 의미가 담긴 곳이 이곳 사천왕사이기 때문에 스님께서는 한반도가 통일이 되려면 사천왕사를 잘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신라처럼 혹시나 미국과 중국 같은 강대국과 싸우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대비를 해야 할 것 아니예요?” 라면서 웃음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일본 사람들이 신령스러운 사천왕사의 지맥을 끊기 위해 대웅전과 강당 사이에 철도를 놓았다는 얘기가 전해내려 온다고 합니다. 마침 스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찰나에 기차가 사천왕사지를 막 가로질러 가자, 스님께서 “왜 저렇게 지맥을 끊는거야” 라고 말씀하셔서 모두들 크게 웃었습니다. 

 


▲ 문두루 비법이 행해졌다고 하는 절터

 

그리고 사천왕사지에서는 일반 절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10cm 크기의 구멍이 뚫린 주춧돌이 12개가 박혀 이었습니다. 문두루 비법을 열두명의 법사가 행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주춧돌이 12개인 것 같습니다. 원래 이 땅은 그냥 밭으로 쓰이던 곳이였는데 스님의 스승이신 불심 도문 큰스님이 이 땅을 구입하고 문화재청에 기증해서 발굴을 하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스님의 역사 의식은 어릴적부터 이런 스승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천왕사지에서 시원한 솔숲길을 산책하듯이 걸어 올라가니 선덕여왕릉이 나타났습니다. 오르막길로 인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스님께서 선덕여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주셨습니다. 

 


▲ 선더여왕릉

 

“삼국 통일의 주역들이 대부분 선덕여왕 때 발굴이 되었습니다. 선덕여왕 당대에는 통일을 못했지만 선덕여왕 때 외교적인 기초와 인재 양성 등 통일을 위한 대부분의 기초가 닦여졌습니다. 그래서 선덕여왕의 리더십은 연구해 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어쨌든 여자가 왕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인정을 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는 세력이 많았습니다. 또 중국이나 주변 나라들이 여왕을 우습게 여기는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황룡사 9층탑을 쌓은 이유도 자장 율사가 나라를 걱정하니까 어떤 신선이 나타나서 ‘너희 나라 임금은 지혜는 있는데, 여자라서 세상 사람들이 다 얕본다. 이를 보강하기 위해서는 큰 위용을 보여야 한다’ 라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스님께서는 선덕여왕이 보여준 세 가지 신비한 기적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한미 동맹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 대해 함께 말씀해 주셨습니다.  

 


 

“세번째 기적은, 선덕여왕이 아무 날 아무 시에 죽을 것이라고 얘기하면서 ‘나를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신하들 입장에서는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언제 죽는다고 하니 이것도 믿어지지 않았지만, 도대체 도리천에 어떻게 묻을 수 있을지 난감해 했습니다. 그러자 선덕여왕은 ‘낭산 남쪽 봉우리에 묻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그날 그 시간에 갑자기 여왕이 돌아가셨고, 신하들은 그 유언을 생각해서 이곳에 여왕을 묻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묻어 놓고도 여기가 왜 도리천인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20여년이 지난 후 이 밑에 사천왕사가 지어졌습니다. 사천왕사를 지어놓고 보니까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수미산 중턱에 사천왕 세계가 있고 그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 낭산을 수미산이라고 한다면 저 아래에 사천왕사가 지어졌으니 여기가 선덕여왕의 유언대로 도리천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얘기는 선덕여왕이 이미 20여년 후에 통일의 기운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고 볼 수 있고, 사천왕사가 당나라와의 갈등으로 지어진 절이니까 현재는 당나라와 굉장히 친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당나라와 갈등이 있을 것이라고 선덕여왕은 예측을 했다고 볼 수 있죠. 

 

우리도 앞으로 미국 없이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지만 통일에 있어서 마지막 최대의 장애가 미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예측하면서 국정을 살펴야 합니다.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죠. 한미 동맹은 굉장히 필요하지만, 지금의 동북아 정세에서 미국의 이익과 한국의 이익이 딱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통일 문제는 일치한다고 볼 수 없어요. 북한이 패망하고 한국이 북한까지 흡수하는 통일을 하고, 그 통일된 한국이 친미 세력이 된다면, 미국은 통일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죠. 그러나 그것을 보장할 수가 없잖아요. 지금도 미국은 한국을 미국으로 끌어들이려는데 한국이 중국의 눈치를 보고 잘 안 움직이기 때문에 미국은 지금 한국을 굉장히 의심하고 있거든요. 반대로 중국은 통일된 한국이 중국 편은 아니지만 중립이라도 지켜준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러니 현안적으로 두 강대국이 제일 안심하는 것은 남북을 짤라서 중국은 북한이라도 자기들 편으로 남겨두는 것이 낫고, 미국은 한국을 한미일 삼각동맹체제의 일원으로 넣는 것이 손에 잡히는 이익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을 설득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까지 어떻게 설득하느냐 하는 외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종속적 한미 관계에서는 이 문제를 풀기가 어렵습니다. 미국을 최고의 우방으로 두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자주적인 동맹이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서 선조들이 겪었던 고뇌를 통해 오늘날 우리들이 배울 수 있는 점입니다.”

 

과거 역사 속에서 오늘날 외교 관계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니 스님의 지혜에 또한번 감탄하게 됩니다. 다음은 문무대왕의 화장터에 세워진 ‘능지탑’으로 이동했습니다. 능지탑을 참배한 후 스님께서는 문무대왕이 얼마나 나라를 위해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가졌는지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 능지탑 

 

“문무대왕이 돌아가실 때는 고구려가 망하고, 백제가 망하고, 가야도 망했을 때니까 이제 신라에는 적이 없잖아요. 당나라와는 화친 관계를 맺었으니까요. 그런데 아닙니다. 바다 건너 왜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신라에게 유일한 안보 상의 위협은 이제 왜만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문무대왕은 ‘왜는 바다 건너 있으니까 내가 죽어서 동해 바다 용이 되어 왜의 침공을 막겠다’고 유언을 했습니다. 이때 한 스님이 ‘아무리 용이 힘이 있다고 해도 축생이지 않소. 인간보다는 더 올라가야지’ 하니까 문무대왕은 ‘축생이면 어떠냐? 나라만 지킬 수 있다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신라 고위층들의 이런 솔선수범이 있었기 때문에 국론이 통합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죠. 

 


 

그래서 왕의 시신을 이곳 낭산에서 화장을 한 후 유골을 수습해서 동해 바다로 가져가 바위에 물길이 십자로 퍼지도록 해서 유골을 안치해 용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근처에 감은사라는 절을 지어서 용이 항상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도록 대웅전까지 수로를 연결했다고 합니다. 화장한 이곳에는 재를 모아서 탑을 세웠는데 이것을 ‘능지탑’이라고 합니다.”

 

축생이 되어서라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대왕의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스님께서는 문무대왕의 애국심을 소개하면서 김구 선생님이 “나라가 독립이 된다면 문지기라도 되겠다”고 얘기한 것을 상기시켜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어째든 지도자들의 솔선수범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되새겨 봅니다. 이곳 능지탑 역시 스님의 스승이신 도문 큰스님께서 땅을 구입하여 복원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황룡사지로 향했습니다. 황룡사지는 지금은 터만 횡그러니 남아 있지만 동양 최대의 절인 9층탑이 자리했던 만큼 그 터는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넓은 터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남문 위에 자리를 잡고 앉으신 후 황룡사의 유래와 각각의 건물 위치와 용도를 함께 설명해 주셨습니다. 

 


▲ 황룡사지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곳은 남문입니다. 그 다음에 있는 것이 중문이고, 그 다음에 9층탑이 있고, 그 뒤에 동금당, 중금당, 서금당 3개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있습니다. 이 건물들이 모두 일직선상에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절의 원형이 이 황룡사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여기서 황룡사의 복원을 서원했는데, 살아있는 동안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황룡사를 복원하는 것은 단순히 옛날 절을 복원하는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 통일의 꿈을 성취하는 마음을 모으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가 금당터입니다. 장육존불이 모셔진 곳이예요. 워낙 불상이 크니까 마루에 얹으면 마루가 내려앉을 것 아니예요? 이렇게 큰 돌을 파서 좌대로 만들고 이 위에 불상을 고정시킨 겁니다. 이 장육존불을 금방 복원하는 방법이 있어요. 스님 3명이 여기 좌대 위에 나란히 앉아서 사진을 찍으면 돼요.” (웃음) 

 


▲ 장육존불이 모셔져 있었다고 하는 금당 터

 

스님께서 알려주신 장육존불의 간단한 복원 방법에 모두들 웃었는데, 문제는 이 자리에 스님이 한분 밖에 안계셔서 그 간단한 복원법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어서 또한번 크게 웃었습니다. 

 

이어서 황룡사 맞은 편에 위치한 분황사로 들어가서 원효 스님의 일화를 들려주려고 하셨으나 수강생들의 얼굴에 조금 피곤한 기색이 보였는지 스님께서는 버스를 타고 숙소로 들어가는 도중에 원효 스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 버스 안에서 원효 스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스님 

 

대안 대사와 방울 스님과 관련된 원효 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언제 들어도 생생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간단히 세면을 한 후 저녁을 먹고 7시부터 곧바로 저녁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신라의 삼국통일로 본 통일코리아의 전망’이라는 주제로 왜 통일을 해야 하는지 그 필요성에 대해 열정적인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단순히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해야 한다는 내용이 아니라 통일이 우리 민족에게 가져다 줄 희망과 비전에 대해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주셨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신라의 성장과 삼국 통일에 관련된 유적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과거 역사를 보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기 위함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하는데에 있어서 과거의 경험을 교훈으로 삼는 것에 초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라의 통일 과정과 그 역사를 살펴보았는데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 살펴보겠습니다. 

 


 

남북이 분단이 된 것은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던 일본 제국주의를 우리 힘으로 격퇴하지 못하고 미소를 중심으로 한 연합국이 승리하면서 타의에 의해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것의 대가로 우리가 받은 과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못지 않게 혹독했습니다. 즉 남북 분단이라는 결과를 빚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남북이 합의를 통해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기서 남북이 서로 누가 잘했는지 따지고 티격태격 하기만 하면 앞으로 통일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통일의 책임의식을 누가 가지는가 하는 문제이거든요. 지금까지는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을 안보적으로 잘 보호하고  발전시키느냐 하는 것이 남한 지도자의 최고 덕목이였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남한의 지도자는 남한 체제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북한까지 포함한 전 민족의 이익을 어떻게 보장할 것이냐 하는 의식까지 가져주어야 합니다. 전 민족적인 책임의식을 가지려면 역사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남북의 적대관계만 보지 말고, 적대 관계를 넘어서서 전민족적인 이익이 무엇인지를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통일의 필요성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민족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꼭 돈으로만 따질 수가 없는 문제라는 것이고요. 즉 통일의 당위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이것만으로는 설득이 안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어요. 젊은 사람들은 이익이 되느냐를 따집니다. 가난한 북한과 합쳐서 덕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 하거든요. 그래서 통일은 경제적으로도 이익이다 하는 것을 밝혀야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지난 50년간 고도 성장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성장, 마이너스 성장으로 갈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첫째, 모방 경제가 갖고 있는 한계입니다. 서구 문명과 우리의 경제력 차이가 50년 정도 된다면 고도 성장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간격이 점점 줄어들게 되면 성장 속도가 느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지금까지는 성장이 중요했는데 이제는 분배가 중요한 사회적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지비 지출이 자꾸 늘어나는 겁니다. 세 번째는 인구 구성이 급격히 고령화가 되면서 젊은 사람이 먹여 살려야 할 노인 인구가 많아지면서 성장 동력이 급격하게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출산율도 저하되고 있고요. 

 

그러니까 지금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조건은 더 이상 고도 성장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창조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창조력 키우기는 단기간에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임시 해결책이 있습니다. 양적 팽창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동부 지역은 유럽을 모방해서 빠른 속도로 성장을 했지만 유럽의 수준에 이르니까 정체 국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서부 개척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창조를 못하고 정체되어 있을 때 서부 개척이라는 새로운 돌파구가 열린 것입니다. 서부 개척이라는 양적 확대를 하는 동안에 전체 사회 분위기가 창조로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두가지를 병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산업화를 해나간 모든 나라들이 겪었던 문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분단은 우리에게 큰 고통이였는데, 이제는 남한의 정체 국면을 극복하는 데에 분단은 큰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통일이라고 하는 양적 확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즉 통일을 통해 북한 개발을 하게 되면, 있는 자본과 기술만 갖고도 앞으로 10년은 양적 확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경제의 성장 돌파구는 통일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통일만 되면 다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통일의 효과는 한 10년~15년 정도 밖에 안 갑니다. 이 기간 동안 전체 사회 분위기를 창조력 쪽으로 변화시켜줘야 합니다. 그러나 통일이라는 출구 없이 창조력 쪽으로 바꾼다고 하면, 창조도 안 되고 사회도 불만 속에 정체가 됩니다. 그럼 통일이라는 출구만 열어놓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10년 뒤에 또 똑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함께 해나가야 하는데, 먼저 북한 개발이라고 하는 통일 정책을 우선적으로 해나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 문제는 단순히 민족적인 문제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현안이 되어 있습니다. 

 

안보 문제에 있어서도 통일된 대한민국은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분단된 한국은 북한에 대한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일 군사동맹체제에 들어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보복을 받게 됩니다. 미일 군사동맹체제에 안 들어가게 되면 미국으로부터 보복을 받게 되고요.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여기서 북한도 개혁개방을 하면서 중국의 안보 우산을 받아들이게 되면 남북 통일도 물건너 갈 뿐만 아니라 결국 양 대국의 충돌 지점이 한반도가 되어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의 상황과 거의 비슷한 상황이 될 겁니다. 통일은 고사하고 평화도 위협받게 되죠. 그러나 통일을 하게 되면 우리의 평화만 담보되는 것이 아니고 동아시아의 평화도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중이 49대 51로 비슷한 상황이 될 때 한국이 어느 쪽으로 가느냐에 따라서 동아시아의 정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즉 캐스팅 보드를 쥘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한국은 자주성도 유지할 수 있고, 한국의 평화 뿐만 아니라 한국이 중심이 되어 아시아의 평화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또 한국이 중심이 되어서 한중일 경제공동체를 구성한다면 아시아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습니다. 

 


 

한중일 경제공동체가 되면 양적인 규모가 세계 최대가 되는데, 그 위에 창조성을 갖게 되면 문명의 중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시아 지역에서 창조성을 가진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요? 중국은 양적 팽창은 가능하지만 창조성은 없어요. 일본도 모방 쪽이지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어요. 한국도 비슷한데 창조성이 돋보이는 영역이 있어요. 대중예술 분야입니다. 왜냐하면 대중예술 분야에는 아무런 억압된 권위가 없거든요. 창조력이 생기기 위해서는 빨갱이니 종북이니 하는 제단이 없어서 생각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해요. 아마 통일이 된다면 노벨문학상도 나올 수 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이 분단의 아픔 속에서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이 적나라하게 표현될 수가 있기 때문에요. 그런데서 통일은 단순한 경제적인 성과나 외교적인 자주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맛보게 하는 것이 됩니다. 한국이 갖는 창조성과 중국, 일본이 갖는 경제력이 결합된다면 적어도 21세기 말에는 동아시아 시대가 도래할 수 있습니다. 

 

우선 통일만 갖고도 우리는 일제 침략 이후 100년의 한을 풀 수가 있게 되고, 또 통일을 한 후 동아시아 공동체의 중심 국가가 된다면 이것은 천년의 꿈을 실현하는 게 됩니다. 발해 멸망 이후 우리는 동아시아의 변방으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조금 더 나가면, 고조선 멸망 이후에 우리 문명이 중국 쪽으로 흘러간 역사가 있었습니까? 배달 시대에는 우리의 높은 문명이 중국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철기 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청동기 문명에 매몰되어 있다가 중국으로부터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고조선 말기에는 한사군이 설치되는 등 중국의 침략까지 받게 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것을 회복하고자 주몽이 다물 사상으로 고구려를 건국한 것이죠. 문명이 중국으로 흘러가던 것이 멈추고, 반대로 중국으로부터 문명이 우리 쪽으로 흘러온 역사가 지금까지 3천년 간 지속해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중국에 대해 근본적으로 열등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지금 우리의 기술과 문명이 중국 쪽으로 흘러가는 최근의 현상은 3천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 안해보셨죠? 우리가 세계 최고 문명에 중국보다 빨리 근접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과 우리의 이 격차가 점점 좁혀지고 있어요. 그러나 만약에 통일을 하게 되어서 낭비적인 요소를 잠재우고 창조력에 에너지를 쏟는다면 앞으로도 상당기간 중국에 문명을 전수해주는 입장을 유지해 갈 수 있어요. 다시 말하면, 아시아 전체 문명의 핵심은 한국에 있고, 규모로는 중국과 일본의 경제가 동아시아 공동체를 세계 최대 규모로 만들어주되 핵심키는 한국이 가지고 있는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비전이 없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자신감이 없는 것입니다. 

 


 

통일은 첫 스텝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나 통일이라는 첫발을 내딛으면 그렇게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데, 통일이라는 첫발을 못 내딛게 되면 아무런 가능성도 없어집니다. 남한만 갖고는 세계 정세나 안보 상황이나 경제적 조건을 고려했을 때 불가능합니다. 이제 통일 문제는 과거의 소극적인 자세를 넘어서서 세계 문명의 중심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첫발로서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좌파든 우파든 과거의 통일 운동 세력이 이 운동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미래를 보는 통일 운동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라도 작은 나라였지만 원효대사의 사상이 중국에 유행하고, 신라의 기술 일부가 당나라로 전래되어서 산둥반도에 신라방이 형성되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저력은 신라가 단순히 열심히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DNA가 배달 문명의 후예이기 때문에, 세계 최고 문명을 가졌던 우리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그러니 개인의 성공을 넘어서서 집단 지성으로 국가의 발전 계획을 세우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쪽으로 우리의 역할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돈이 있다면 이런 활동에 돈을 써야 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이 있다면 이런 활동에 쓸 때 죽어도 웃으면서 죽을 수 있지요. 겨우 돈 벌어서 골프 치러 다니고 술 마시러 다니고 집 좀 큰 것 사는 것으로 목에 힘주고 다니면, 죽을 때 되어서 하나도 자랑할 만한 것이 못돼요. 그냥 낙옆 하나 떨어지는 것과 똑같지요. 

 

이제는 여러분들이 개인적 삶에서 공적인 삶으로 전환을 해야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꿈꿨던 이상이 하나의 이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야말로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걸 능히 해결할 힘이 있습니다. 조금 더 자신감을 갖고 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스님의 강의는 2시간 30분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스님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습니다. ‘통일 한국’, ‘동아시아 경제공동체’,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가슴이 콩닥 콩닥 뛰었습니다. 통일 한국을 이루고 동아시아 문명의 꽃을 피우는 모습을 상상해 보며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느껴봅니다. 이렇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그려주시는 스님이 계셔서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열강을 해주신 스님께 큰 박수가 터져나왔고, 이어서 질의응답 시간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후 프로그램이 있어서 긴 시간 답변을 하지 못하고 두 명의 질문에 대해서만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한 분은 “앞으로 통일을 대비해서 북한 주민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북한 지도부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요?”라고 물었고, 한 분은 “스님은 경제, 문화, 역사에서 깊이 있는 식견을 갖고 계신데, 스님의 생각을 남한의 지식인들과 어느정도 공유하고 계신지? 또 북한에서도 스님과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두 분의 질문에 답변을 한 후 오늘 강연을 마무리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우리부터 열린 마음을 가지면서 사회 통합을 향해 나아가자고 당부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발전하려면 통일이 첫단계이고, 다음이 동아시아 공동체이고, 그 다음은 세계 문명의 중심이 되는 것을 목표로 세우고 추진해 나가야 합니다. 그 중에서 통일로 가는 첫발은 정부가 확실하게 통일을 목표로 하고 통일 지향적 외교, 통일 중심의 경제, 통일 중심의 안보 정책을 취하는 것입니다. 왕조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잖아요. 정부는 국민의 명을 받아서 집행하는 머슴이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머슴을 교체해서 통일 지향적인 정부를 구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심부름을 잘 해줄 머슴이 없다면 그 중에 좀 더 나은 사람이라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개인은 별 의미가 없어요. 통일지향적인 정치 세력이 구성되어야 하고, 여러분들은 통일지향적인 정치 세력을 후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국민적으로 형성되면 통일을 지향하는 정치 세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정치를 하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이런 활동을 밀어주는 역할을 여러분들이 해주면, 그 역할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마음 속에 ‘나라가 제대로 되려면 통일을 해야 되고, 통일을 하려면 북쪽은 주도를 못하고 남쪽이 중심이 되어서 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남쪽이 중심이 되어 북한을 포용할 수 있는 통일지향적 정부를 구성해야 된다’ 그런 목표 하에 판세를 봐가면서 여러분들이 행동하면 됩니다. 여기에는 진보여야 한다고 고집할 필요도 없고, 보수여야 한다고 고집할 필요도 없이 이 통일 문제에 중심이 딱 잡힌 사람에게 투표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미 기회는 조금 기울어져 버렸습니다. 지금 상황은 한국 안에서 여당과 야당의 갈등을 푸는 것이 남북 간의 갈등을 푸는 것보다 더 어렵고, 남북 간의 갈등을 푸는 것이 일본과의 갈등을 푸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희한한 일이죠. 여야 문제는 풀기 쉬워도 남북 문제는 풀기가 어려워야 하고, 남북 문제는 풀기 쉬워도 일본과의 갈등은 풀기가 어려워야 하는데, 지금 거꾸로 되어 있어요. 한일 갈등은 풀어도 남북 문제는 못 풀고, 남북 문제는 풀어도 한국 안에서 여야 갈등은 못 풀고, 여야 갈등은 풀어도 야당 안에 내부 갈등은 못 풉니다. 

 

진보 세력은 왜 분열이 심할까요? 내가 옳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보수는 옳고 그름을 안 따지고 그저 이익만 되면 서로 힘을 합하니까 결과적으로 분열이 덜 되는데, 진보는 자기 주장을 갖고 서로 싸우니까 분열이 더 많이 되는 겁니다. 국민이 볼 때는 분열을 더 싫어하니까 진보 쪽에 표를 안 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극복해야 될 것은 생각이 진보적인 것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람을 포용하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큰 목표가 있으면 작은 것을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과거를 갖고 논쟁을 하면 끝이 안납니다. 미래의 이익과 희망을 보고 과거는 서로 조금 봐주는 관점을 가져야 우리는 힘을 합해 나갈 수 있어요. 사람은 이런 주장도 할 수 있고, 저런 주장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열린 관점에서 포용력을 가져야 우리는 사상의 자유를 가질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들부터 조금 열린 마음을 가져봅시다. 대화를 할 때 견해 차이를 너무 따지지 말고 ‘아,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해보세요. 사유의 자유를 가져야 창조력이 나옵니다. 자기 잣대를 너무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통일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부터 조금 열려야 합니다. 이런 연습을 해야 우리 사회가 조금씩 통합되어 가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뜨거운 박수 갈채가 쏟아지면서 오늘 강의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스님의 간곡한 호소에 평리아 수강생들은 오늘 밤 통일 한국에 대한 희망에 대해 밤새 이야기를 이어갈 것 같습니다. 

 


▲ 오늘 스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민들레 홀씨 되어 많은 분들에게 희망으로 전해지길 기원해 봅니다.

 

스님께서는 강연을 마치고 두북으로 이동하셨고, 평리아 수강생들은 10시30분부터 늦은 시간까지 통일 한국을 향한 우리의 역할에 대해 토론하며 친교의 시간을 함께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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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분투

"큰 목표가 있으면 작은 것을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이런 주장도 할 수 있고, 저런 주장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열린 관점에서 포용력을 가져야 우리는 사상의 자유를 가질 수 있어요. ~이런 연습을 해야 우리 사회가 조금씩 통합되어 가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이런 법문 들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스님께서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015-05-12 11:34:26

박미건

넓게 보겠습니다.진리의 가르침 항상 품고 살겠습니다.무탈하시기바랍니다.

2015-05-12 05:33:48

정긍정

잘 읽었습니다.<br />감사합니다..

2015-05-11 21: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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