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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거제 애광원 장애우들과 봄나들이가 있는 날입니다. 이번 봄나들이는 애광원 장애우들 중 거동이 어느 정도 가능한 경증 장애우와 함께 진주, 사천 일원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제 문경수련원에서 특강, SBS 촬영, 수행대중법회를 하신 후 스님께서는 문경수련원에서 주무시고 오늘 새벽 대중과 함께 예불, 기도 후 5시 30분에 바로 진주로 향했습니다. 가다가 칠곡 휴게소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 후 오전 9시반경에 진주성에 도착하니 마산, 거제, 내서, 함안 정토법당 봉사자들이 먼저 와서 애광원 원생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진주성 북문에 애광원 원생을 태운 버스가 도착하자 봉사자들이 줄을 지어 따뜻이 환영하였습니다. 법륜스님께서 김임순 애광원 원장님을 반갑게 맞이해주셨습니다. 차에서 내리는 원생들 한 명씩에게 오늘 하루 동안 단짝이 되어 함께 할 봉사자 한 명씩을 맺어주고 본 일정에 들어갔습니다.
먼저 임진왜란 때 진주성대첩을 이끌었던 김시민장군 동상 앞에서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1차 진주성전투를 이끌었던 김시민장군은 셀 수조차 없는 화살을 쏘느라 엄지와 식지가 잘라져나갈 정도로 항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차 진주성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어 7만여명의 군인과 백성이 학살당했던 처절한 역사를 전해들으면서 장애우나 봉사자 모두 숙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손꼽히는 촉석루와 논개를 모시는 사당인 의기사를 들러 아름다운 남강의 정취를 보며 논개의 충절을 다시금 되새기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스님께서는 논개가 왜장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졌던 의암까지 내려가서 잠시 합장하며 의암에 서린 호국의 얼을 기리기도 하셨습니다.
진주성 안에는 국립진주박물관이 있지만 월요일에는 휴관일이라 애광원 원생들과 봉사자들은 진주성의 성곽을 따라 걸으며 진주성을 관람하였습니다.
스님께선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분들을 따로 모시는 사당인 창열사를 참배하고 바로 옆의 호국사에 들렀습니다. 호국사는 원래 내성사란 이름의 절이었으나, 2차 진주성전투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숙종 때 호국사란 이름으로 재건하였다고 합니다.
스님께서 호국사에서 부처님 전에 삼배를 올리고 나오자 애광원 원생들과 봉사자들은 잔디밭에서 한참 레크리에이션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원래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을 알차게 준비했지만, 일부만 계획대로 진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상치 못했던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모두가 함께 되는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애광원 원생들은 워낙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갈고 닦은 노래와 춤을 자랑하였고 봉사자들 역시 함께 흥에 겨워 즐겼습니다. 몇몇 원생들은 스님과의 재회가 기쁜 나머지 스님께 거리낌없이 애정 표현을 하여 모두 박장대소 하였습니다. 원생들은 멍석만 깔아주면 사회자가 연이어 “줄을 서시오~”를 외쳐야할 만큼 잘하고 못하고를 상관하지 않고 마음껏 노래하고 춤췄습니다.
정말 신나고 즐거웠던 레크리에이션은 점심시간에 걸려 아쉽게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점심은 진주성에서 20분 정도 이동하여 사천의 원산면옥에서 맛있는 갈비탕을 먹었습니다. 오전에 진주성을 둘러보느라 제법 걷고 또 흥겹게 놀았던 탓에 모두 시장기를 느껴 너무나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장애우들과 봉사자들도 대부분 스스럼없이 친해져 다정하게 손잡고 다니고, 식사도 함께 챙겨주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점심식사 후 예정대로 사천의 항공우주박물관을 관람하였습니다. 이 박물관은 사천공항 인근에 조성된 항공우주산업단지 가운데 위치하여 우리나라 항공산업의 수준과 전망을 보여주었습니다. 박물관 야외에는 과거 우리나라 대통령 전용기를 비롯하여 한국전쟁 때의 B-29폭격기부터, 수송기, 전투기 등이 넓은 정원에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큰 비행기는 내부에 직접 들어가볼 수 있어 호기심 많은 장애우들이 무척 즐거워하였습니다.
실내전시관에 들어오니 사천의 항공우주산업단지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실내전시관은 항공산업과 우주산업, 그리고 한국전쟁의 3가지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딱딱한 지식 중심의 해설은 짧게 마무리하고 박물관 정원에서 종이비행기 만들기와 날리기 시합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만든 종이비행기를 가운데 표적까지 날리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법륜스님께서 만든 종이비행기는 제트기처럼 잘 날아 모두가 감탄하였습니다. 애광원 원장님께서도 의욕적으로 날렸지만 그만 발 아래로 곤두박질해 우리에게 큰 웃음을 주셨습니다.
종이비행기 날리기가 마무리될 때쯤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해, 박물관 매점 앞에서 애광원 인솔교사님 주도하에 다시 레크리에이션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전에는 노래가 중심이었다면, 오후에는 그야말로 본격적으로 춤 솜씨를 자랑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애광원 원생들은 마치 이날을 위해 평소 연습이나 한 것처럼 모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음악에 맞춰 율동을 뽐냈고, 짝을 이룬 봉사자들도 손에 이끌려 모두 광란(?)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매점 사장님이 계속 웃으며 지켜보더니 아이스크림을 박스째로 찬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그동안 박물관에 여러 장애인학교나 단체에서 관람오면 봉사자들이 장애우에게 함부로 대해서 실망스러울때가 많았는데, 오늘 JTS 봉사자들의 헌신성을 보고 무척 감동했다고 합니다.
오전에 진주성에서도 레크리에이션을 지켜보던 중년 신사분이 너무 보기 좋다며 후원방법을 물어봐서 JTS 활동을 설명드리고 홈페이지를 가르줬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의 마음이 있는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아 무척 기분 좋았습니다.
흥겨운 여흥을 마무리하고 모두 들뜬 마음으로 다시 저녁식사를 위해 진주 남강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식사 전 애광원 김임순원장님께서 법륜스님께 감사의 표시로 원생들의 정성이 담긴 선물을 증정하였고, 스님께선 애광원 인솔교사분들에게 스님의 책을 선물하였습니다. 김임순원장님은 인사말에서 “애광원의 교사 1명이 원생 6명을 담당하는 구조여서 평소 원생들을 먹이고 씻기는 일만해도 일손이 부족해 이렇게 나들이하는 일은 엄두를 못냅니다. 매년 두 번씩이나 정토회에서 이렇게 순수한 사랑으로 하루종일 밝게 원생들의 손을 잡고 함께해주시니 무어라 감사의 표현을 하기에도 벅찹니다. 원생들에게는 너무나 좋은 경험이자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며 거듭 스님과 봉사자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해 듣는 우리들이 송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원생들의 건강 때문에 멀리 나들이하는 것을 어려워했는데 다음부터는 좀더 새롭고 의미있는 곳으로 가는 것도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즐거운 시간을 함께하여 우리도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며 늘 행복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뒤이어 오늘 행사 사진을 즉석에서 일부 편집해 동영상으로 감상하며 너무나 유쾌, 상쾌, 통쾌했던 시간을 돌아보았습니다. 저녁식사 후 원생들과 봉사자들은 석별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짧은 한나절의 추억에 불과하지만 함께 두손 꼭 잡고 걸었던 길과 나누었던 웃음들이 있기에 아쉬운 마음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몇번 애광원 나들이를 함께 한 사람도 이 시간이면 항상 느끼는 그 짠한 마음,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담아 다음 나들이를 기약하며 애광원 친구들을 빗속에 배웅하였습니다.
스님께선 창원 강연 때문에 바쁜 걸음을 옮기셔야 했고, 봉사자들은 많이 느끼고 배운 시간을 나누며 보람있고 행복했던 하루 일과를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강의하실 창원은 강연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태풍 노을의 영향으로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강연을 준비한 봉사자들 가운에 몇분은 비바람 때문에 대중들이 많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스님 강연을 들으려는 사람들은 이제 날씨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섯 시 즈음 되니 접수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스님 강의를 기다렸고, 질문자 접수도 금방 마감되었습니다. 오늘 강연은 청소년을 위한 문화공간인 늘푸른 전당에서 열렸습니다. 강당은 1,2층 합하여 648석이고 참가자 수는 723명이었습니다.
스님께선 강연 전에 장유분들이 주축이 되어 봉사하는 반야회와 다담을 가지셨고 반야회에서는 그동안 모은 돈을 스님께 좋은 일에 써 달라고 하셨는데, 스님께서는 이번 네팔지진피해지역 지원에 사용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무대에 오르신 스님께서는
“비가 오는데도 많이들 오셨네요. 전 비가 와서 많이 안올 줄 알았습니다.”로 인사말씀을 하시면서 반가움을 표하셨습니다. 오늘 낮에 거제도 애광원 식구들과 진주 촉성루와 사천 우주 박물관에 다녀오신 이야기를 잠깐 들려주셨고, 지적 장애인들이 거주하는 애광원에 대한 소개도 잠시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창원에 있는 봉림사지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한국 불교의 역사를 고구려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AD 372년을 기준으로 잡아 1,600년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인도의 한 왕국이었던 아유다국의 왕녀 허황옥과 왕족출신 장유화상이 지금의 마산인 합포에 도착하여 가야에 불교를 처음 접한 AD 48년을 기준으로 잡아서 불교역사는 2,000년이 됩니다. 지금도 인도에는 아요이다(아유다)라는 지명이 있고, 가야시대의 탑으로 알려진 파사이 탑은 우리 나라에서 나지 않는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허황옥은 김수로왕과 결혼하여 아들 열 명을 낳았는데, 한 명은 김해 김씨를, 또 두 명은 김해 허씨를 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명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는데, 칠불암의 유래가 거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봉림은 봉황이 알을 낳는 모양의 숲이라는 뜻인데, 가야시대 최초의 절인 ‘가야정사’가 있었고, 나중에 신라 말에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봉림사가 지어졌습니다. 골짜기가 작아 보이지만 한때는 그곳에서 500여명의 스님들이 수행하였습니다. 부산, 마산, 김해 지역의 불심이 높은 이유도 그런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김해시에는 지금도 장유면과 장유폭포가 있는데 장유화상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장유지역에 사는 분들이 주축이 되어 스님들을 후원하는 반야회라는 모임이 있는데, 오늘은 그분들이 지진이 난 네팔을 돕는데 써달라고 보시해주셨다는 말씀도 전해주셨습니다. 그분들의 보시에 관중들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받기에 앞서 즉문즉설은 성경이든 불경이든 경전의 진리를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내 이야기를 먼저 한 후,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깨달음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의심이나 자기 괴로움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 주변 사람들의 괴로움이나 책에 적혀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라고 안내해 주셨습니다.
질문은 결혼생활 27년중 20년간 늘 아프기만 한 남편을 둔 분, 수행에 관심이 있으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부산 청년,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살아서 고민인 결혼 9년차 주부, 9년간 한 우물을 파다가 이제 다른 우물을 팔려고 준비하고 있고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은 20대 청년, 칭찬만 듣고 싶은 아가씨, 스님은 사후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궁금한 청년, 나의 행복을 넘어 친구들의 행복까지 챙기고 싶은 30대 후반, 선택을 잘 하지 못하는 공무원 준비생인 2년차 젊은이 등 모두 여덟 분이 하셨습니다.
첫 번째 질문자의 내용입니다.
“스님 남편은 늘 아프다는 말을 합니다. 결혼 생활 27년인데 20년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1년에 너 댓 번, 한 달에 20일 정도 아프다고 합니다. 안 가본 병원이 없고, 천도제, 구병시식, 굿 등 안 해본 것이 없습니다. 병원에 가도 뚜렷한 병명이 없고, 자신은 열이 난다고 하는데 검사를 하면 정상으로 나와요. 아플 때마다 병원가면 똑같은 일이 벌어지니까 이제 병원에서도 오지 말라고 해요. 그리고 간호사들이 안와도 되는데 자꾸 온다면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것을 보면 제가 남편에게 화가 나요. 어떤 스님은 남편이 스님이 될 사주인데 스님이 안 되어서 아프다하여 스님이 되라고 해도 혼자서는 안 간다고 하고,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할지요?”
“남편이 아프기는 하지만, 일을 하면서 밥벌이, 용돈, 병원비를 자신이 번다면 별로 손해나는 일은 아니네요. 결혼을 했으면 남편 덕을 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 덕을 못 보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손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이들한테는 아빠가 있는 것이 좋고, 질문자에게도 남편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지요. 그리고 아프다고 하지만 죽지는 않았잖아요? 그리고 20여 년간 그렇게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그 증상 때문에 갑자기 죽거나 하지는 않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현대의학이 장기를 이식하고, 줄기세포를 이용하는 등 아주 발달된 부분도 있지만 아직 질병의 원인을 발견하지 못해 치료하지 못하는 것도 많아요. 입 돌아가는 것도 침 맞으면 바로 해결되지만 현대의학으로는 안되잖아요? 남편의 경우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아프니까 아프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노력한 것을 보면 현대의학으로는 밝혀지지도 않고, 완치도 안되는 질환 같으니 밝히려고도 또 완치하려고도 애쓰지 않는 것이 좋아요. 죽을 병도 아니고,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자기가 병원비를 벌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남편이 아프다고 말하면 남편이 병원가자고 하기 전에 먼저 질문자가 병원에 데리고 가서 링거 맞고 돌아오도록 하세요. 현대의학으로 밝혀지지 않아도 남편은 통증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억지로 일부러 20년간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예요. 남편이‘병원 안가겠다’‘가봤자 소용없잖아?’라고 말하더라도 ‘이번에 가면 병명이 나올 수 있잖아?’하면서 좀더 적극적으로 남편의 아픔을 받아주세요. 남편의 병이 질문자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남편이 아프다는 것을 핑계로 본인이 괴로워하는 거예요.
남편이 매일 술 먹어서 괴로운 게 나을까요? 아니면 1년에 대 여섯번씩 머리 아픈게 나을까요? 더 좋아지기를 바라지도 말고, 완치되기를 바라지도 말고 또 남편이 꾀병 부린다고 생각도 하지 마세요. 아픈 와중에도 살아갈 수 있게, 아프다고 하면 먼저 병원에 데려가세요. 이것이 성경을 빌어서 말하면‘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주라’‘겉옷을 달라면 속옷도 주어라’‘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도 대줘라’정신이 아닐까요? 불교에서 말하면 ‘수처작주’가 되겠지요. 처하는 곳마다 주인으로 사는 것이지요. 성경이든, 불경이든, 과학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여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세요. 남편이 아프다하면 바로 병원가고, 대신 이제는 안수기도나 굿은 하지 않도록 하세요.”
“네, 스님 고맙습니다. 그런 비용을 앞으로는 JTS에 기부하겠습니다”로 질문을 마무리하여 관중석에서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스님은 나머지 질문자들의 질문에 대해서도 정성스럽게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사후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고,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자세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칭찬받고 싶은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내 원하는 대로 다 될 수 없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도 다 해줄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고 힘이 미치지 못하면 미안하다고 이야기 하고 섭섭한 마음을 가진 상대로부터 욕 먹을 각오를 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열심히 해보고 그리 해도 안되면 다른 우물을 팔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한 우물만 판다는 것에 매일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후회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나와 인연된 모든 것들을 좋게 생각하면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질문인 “북한 동포돕기를 위한 단식을 하시다가 70일하고 그만두신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 그러신 것 아닌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내가 단식을 시작할 때 죽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 일을 하다가 죽음이 온다하더라도 이 일을 하겠다는 각오로 한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이 일을 그만두지는 않겠다는 각오였습니다. 그러니까‘죽어도 좋다’와‘죽겠다’는 다른 것입니다. 수행자는 단식해서 배가 고파도 괴롭지 않고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괴롭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 전후로 최대 98일 최소 91일을 단식하셨습니다. 나도 부처님 제자니까 90일이나 100일 정도는 단식할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지요. 49일간은 단식하면서 정부와 협상도 하면서 최선을 다했어요. 그 이후에는 문경에서 명상하면서 단식을 이어갔지요. 부처님 시절에 밥을 빌러갈 때는 일곱 집 이내에만 가야했어요. 일곱 집을 다가도 밥을 하나도 얻지 못하면 두 가지 경우예요. 수행자로서 부족한 것이 있어서 그들이 밥을 주지 않는 경우이거나, 아니면 그들도 먹을 것이 없는 경우예요. 첫 번째 경우는 수행자로서 부족함이 없는가 살펴야 해요. 저 같은 경우는 두 번째와 비슷했지요. 북한 동포에게 밥은 줄 수 없고 또 그들이 굶고 있으니 나도 같이 굶었던 거예요. 그들이 굶어 죽는데 내가 어떻게 밥을 먹겠나 해서 였지요. 제가 단식을 푼 결정적인 계기는 제 주변분 가운데 한 분이, ‘다른 사람들이 스님의 순수한 동기까지도 의심해서 스님이 단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몰래 무엇인가를 드신다고 오해할 수도 있으니 단식을 푸는 것이 어떻겠냐?’고 해서 풀게 되었어요. 북한 동포 돕기는 이미 힘든 상황이라 놓아버린 상태였으니까요.”
접수된 질문자외에도 스님께 질문하고 싶다고 손을 들었던 예비 질문자도 많이 있었습니다. 즉문즉설이 거의 9시 40분경에 끝나서 질문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많이 섭섭해 했습니다. 다음 기회를 또 기다려야겠습니다. 강연이 끝난 뒤 싸인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자원 봉사자들과 사진촬영을 마치고 스님께서 봄불대생 손들어 보라고 하시면서 봉사에 참여한 봄불대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셨습니다.
강연을 마친 다음에는 바람이 아주 강하게 불었습니다. 바람 때문에 배와 비행기가 움직일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내일 제주도 강연이 계획대로 잘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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