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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밤 10시 40분경 부산을 출발한 스님께서는 오늘 새벽 2시경 문경에 도착해서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이 새벽 4시 30분부터 새벽예불을 하고 발우공양을 함께 하셨습니다.
대중공사시간에 스님께서는 늘 문경정토수련원을 방문하는 송코 탈란딕 부족을 안내할 때 나이 드신 분들을 위해 올라갔다내려갔다 하지 않고 위에서부터 둘러서 보고 내려올 수 있도록 안내해 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문경대중들과 백일출가생들을 위해 계율에 대해서 다시 짚어주셨습니다.
“참회내용 중에 ‘때 아닌 때 먹었다’고 하는데 밖에 외출을 하거나 차타고 다니다보면 때 아닌 때 먹을 가능성이 높죠. 때 아닌 때 먹는다고 해서 잘못된 건 아니에요. 그러나 백일출가생등 정해진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한번 지켜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백일출가생들은 밖에 살 때보다 밥을 많이 먹게 되는데 일을 많이 해서 그럴까요? 그런 것도 있지만 우리가 밖에 살 때는 자기도 모르게 군것질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군것질했다는 기억도 안납니다. 과자를 하나먹든, 과일을 하나먹든, 커피를 한잔 마시든 뭘 자꾸 먹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밥을 조금 먹게 되고, 그러니까 또 군것질을 하게 되는 거죠. 행자로서는 정해진 세끼 외에 중간에 먹지 않기 때문에 첫째는 식사양이 늘어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심리적인 압박이 있습니다. 무의식 세계에서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고 생각되면 조금 먹어도 되는데 지금 안 먹으면 못먹는다고 생각하면 많이 먹게 됩니다. 많이 먹어도 정해진 시간에 딱 정해진 식사를 한다는 것은 건강에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 ‘때 아닌때 먹지 않는다’는 계율을 여러분들이 한번 지켜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누가 먹으라고 하든, 누구나 다 먹는 분위기이든, 그건 그 사람의 얘기고, ‘나는 나 나름대로 한번 지켜본다’ 이렇게 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라며 누가 뭐라고 하든지 정해진 계율을 스스로 지켜서 자기의 업식을 극복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또, 몸이 아파서 쉬었다는 얘기가 많은 것을 들으시고는 “우리가 기계를 사용할 때 너무 많이 쓰면 기계에 열이 납니다. 열이 나면서 기계가 파손이 됩니다. 또 기계를 안쓰고 가만히 놔두면 녹이 습니다. 그러니까 적당하게 쓰는 게 안쓰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갑니다. 그래서 기계도 이렇게 막 처음 구입해서 안쓰던 것을 쓰면 새것인데도 작동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질 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기계등은 어느 정도 써야 잘 작동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과하게 쓰면 파손이 되고 안쓰면 녹이 습니다. 적절하게 써줘야 그것이 더 잘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과로를 하거나 과식을 하게 되면 몸이 병들게 됩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몸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집착해서 몸이 가지고 있는 용량 이상으로 쓸 때 그것을 ‘과로’라고 말하는데, 여러분들이 여기서 청소 좀 한다고 과로가 절대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웃음).
여러분들은 태어나서 지금껏 일을 잘 안하고 누가 해주는 것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용량이 100인데 사용하는 것은 30밖에 안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무의식세계에서는 자기 용량이 30인 것처럼 착각하고 50만 써도 과로로 느껴집니다.
108배 절하는 것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몸이 백팔배 절도 못하게 되어 있겠어요? 절 안하다가 백팔배를 하게 되면 계단도 못내려가는데, 이게 과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동안에 너무 안써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쉬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써야 합니다. 일이 몸에 익는다 그러죠. 몸에 일이 익는다는 말은 피곤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꾸준히 해야 합니다. 일단 여기 처음 들어오면 반드시 자기 까르마(업식)를 극복해야 합니다. 극복하지 않고 겁을 내어 몸에 집착해서 일을 두려워하면 ‘아이고 자야 되는데, 아이고 먹어야 되는데, 아이고 저거하면 피곤할텐데’하는 마음이 드는데 이것이 수행에서는 마장입니다.
‘절도 많이 하면 다리 아플텐데, 혹시 무릎 고장 나는거 아니야?’ 자꾸 이렇게 우리 마음속에 늘 이런 속삼임이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마왕의 유혹이다 이렇게 표현했지만 자기업식대로 하려고 하는 그런 하나의 욕망의 속삭임입니다. 거기 넘어가면 안됩니다. ‘어, 까르마대로 살라고 속삭이는구나’라고 알아차리고 멈추진 말고 꾸준히 해야 합니다. 꾸준히 해서 여러분들이 그 고비를 넘기면 됩니다. 그 고비를 못 넘기면 늘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뒷방에 가서 누워있어도 불편하고 그래요. 다리가 성한데 다리가 아프다고 떼를 써서 절을 안하면 늘 미안하고 죄스럽고 그렇죠. 그런데 다리가 딱 부러져서 누워있으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미안하거나 참회 못했다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내가 돈이 하나도 없을 때 누가 돈빌려달라 그러면 고민이 하나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주머니에 돈이 있는데 빌려달라고 할 때 없다고 하면 속이 켕겨요. 할 수 있는데 안하면 켕기게 됩니다. 마음이 켕기면 자기를 살펴봐야 합니다. 내가 하려면 할수있는데 지금 도망가구나. 그래서 그 업식을 딱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 백일이든 몇 년을 살아도 늘 그것 때문에 전정긍긍하게 됩니다. 먹는 것 하나갖고 전전긍긍하고 눈치 보는 사람, 자는 것, 일 갖고 전전긍긍하면서 눈치 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 숙이는데, 이런 것을 딱 극복해 나가야합니다.
극복을 하는건 과로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량이상으로 갑자기 몸을 쓰지 않도록 해야 하고, 음식도 용량이상으로 먹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너무 많이 쓰는 것은 일에 집착해서 몸을 돌보지 않는것에 해당이 되고 반대로 자기업식에 사로잡혀서 일만 보면 두렵다거나 몸에 집착해서 몸을 사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렇게 하면 몸에 집착하는 것이고, 저렇게 하면 일에 집착하는 것이라는데, 어쩌란 말이냐’고 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상태를 점검해보면 금방 ‘아, 이게 일에 집착하구나, 이게 몸에 집착하구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몸이 안좋구나하면 쉬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마음을 살펴보아서 하기 싫어서 몸이 아픈 경우는 다시 일어나서 꾸준히 해야 합니다. 몸이 좀 불편하면 천천히 하면 됩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늘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수행생활이든, 일이든 자발성이 있어야합니다. 자기가 딱 알아차리고 자기일로 해야지 자꾸 눈치봐 가면서 하게되면 심리가 억압이 되기 때문에 행복하지가 못합니다. 그리고 이중생활 하지 말고 항상 자기 마음을 살펴서 자기 마음의 무거움을 가볍게 돌리고 다시 일어나서 꾸준히 절을 하든지, 꾸준히 일을 하든지 힘들면 속도를 조금 줄여서 천천히 움직이면서 하도록 합니다. 그렇게 유의하면서 해나가면 누구나 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각자의 인생을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붓다의 위대함은 누구나 다 부처님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인데, 이 말은 누구나 다 행복할 권리가 있다, 행복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여기 생활이 행복한 삶이 되도록 스스로 만들어 나가길 바랍니다.”라며 항상 자기의 마음을 살펴서 하기 싫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천천히 해 나가면서 극복해보라고 지도해주셨습니다.
문경공동체에서는 스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지 않은데, 지난 며칠동안 스님과 함께 발우공양을 하면서 우리가 놓치고 있거나 우리 업식대로 움직이는 것에 대해 점검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발우공양 후 스님께서는 어제 못다본 원고를 점검하시고 수련원 경내를 둘러보신 후 11시에는 송코 탈란딕 팀을 환영하는 자리에 함께 하시고 점심 공양을 함께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점심 공양을 함께 하면서 송코 탈란딕팀에게 “아무리 현대 교육을 받고 과학 교육을 받고 미국 가서 살아도 내가 탈란딕부족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명절이 되면 전통 옷을 입을 수 있고, 전통 노래를 부를 줄 알고, 전통춤을 출 줄도 알고, 그런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라며 자신들이 가진 전통문화를 자랑스러워 하며 잘 보존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덧붙여서 “내가 도시에 가서 교육을 받고 변호사가 되어 도시에 살면서 내 전통을 지킬 수 없겠다 생각되면 도시를 버리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전통을 지키고 사는 것이 도시에서 변호사를 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말이예요. 전통도 지키고 변호사도 하면 괜찮지만, 전통을 지키지 못한다면 변호사를 포기하고 전통을 지키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라며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스스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미키타이 추장님은 자신들이 전통을 지키고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도 올 수 있었고 여러곳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며 감사해 하셨습니다.
또, 스님께서는 지금 한국의 전통은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는 것처럼 보여주기 위해서 남아있지 생활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냥 구경거리만 되어 있다고 안타까워하시면서 “탈란딕 부족들은 관광객들에게 보여주는 전통문화가 되면 안되고 지금처럼 살아가는 삶의 문화가 되어야 된다”고 강조하시면서 “앞으로 남은 시간 한국의 전통문화를 더 둘러보면서 탈란딕 부족의 전통을 지키는데, 더 많은 아이디어를 얻기를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미키타이 추장님도 그동안 사찰등을 둘러보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통도 이 사찰처럼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그런 장소가 될 수 있겠다. 탈란틱 민족은 저런 사찰같은 건물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탈란딕 부족은 살아 숨쉬고 있는 그러한 사찰과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함께 오신 다른 분들도 탈란딕부족도 몰락과 위기를 겪었지만 이겨내어 왔고 이번 같은 한국방문이 전통을 지키는 더 좋은 계기가 되는 것 같다며 초청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전통을 지키는 것은 사실은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이 젊은이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하더라도 이런 노력을 해야 됩니다.”라며 스스로 전통을 지켜나가는 것이 비록 힘겨울지라도 그런 노력을 통해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점심공양 후 수련원 경내를 둘러본 후 법주사로 이동하였습니다. 스님께서도 함께 법주사로 가서 간단한 안내와 인사를 한 후 서울로 이동하셨습니다.
저녁 6시에는 스님께서 중국에서 활동활때 스님을 도와주셨던 분이 아들과 함께 스님을 방문하셔서 여러 가지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저녁 7시 30분부터 평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청년리더쉽아카데미 강의에 참여하셨습니다.
5번째 강의를 맞이하는 청년리더십아카데미는 오늘 법륜스님을 모시고 “즉문즉설로 풀어본 소통의 길”이란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였습니다. 우리 사회가 다원화되고 복잡해지면서 개인간의 소통과 사회내 집단간의 소통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이로 인한 갈등으로 사회 발전에 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풀리지 않는 갈등은 계속 쌓이고 서로간의 불신만 높아지고 있는 지금의 답답한 현실속에서 어떻게 하면 원활한 소통을 통해 이 난국을 잘 해결할 수 있을지를 스님과의 즉문즉설을 통해서 풀어보고자 하였습니다.
60여명의 청년들은 법륜스님이 등장하자 환호와 큰 박수로 맞이하였습니다. 쉽지 않은 강의 주제였지만 청년들은 스님의 열정적인 강의에 시종일관 집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청년들과 나눈 대화중 일부를 소개드립니다.
“살면서 극과 극인 상황이 많습니다. 충분히 합의할 수 있는데도 각자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사람들이 과연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고,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궁금합니다.”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이‘을’이 되면 저항하고,‘갑’이 되면‘갑’질을 합니다. 자기 생각만이 옳다는데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특정 종교를 보면 자기 신앙만 옳다고 해 종교적으로 탄압 받거나 아니면 종교적 탄압을 하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자기가 을일 때 갑에게 저항하니까 탄압을 받고, 자기가 갑이 되면 다른 종교를 탄압합니다. 갑과 을은 전혀 다른 입장인 것 같지만 사실 둘은 똑같습니다.
생물종은 다양하지 않습니까? 여러 생물종(種)이 있고, 같은 종이라도 그 안에 크고 작은 것이 있고 모양도 각각 다릅니다. 예를 들어 쥐도 큰 것은 고양이 만하고, 사람도 큰 사람, 작은 사람이 있습니다. 산에 핀 진달래도 같아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색이 많이 다릅니다. 이렇게 다양한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은 흑백논리로 작용합니다. 늘 신과 악마, 선과 악, 천당과 지옥, 옳음과 그름과 같이 둘로 나눕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렇게 둘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도 남자와 여자 이렇게 둘로 나누잖아요. 그런데 세상에 남자와 여자 둘만 있는게 아니라 실제로는 네 종류가 있습니다. 남자, 여자.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극소수입니다. 그러다보니 다수에 의해서 소수자들은 병신, 장애 또는 신의 저주로 규정받아요.
이 세상 사람들의 99%는 성적취향이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즉, 이성간에 성적호기심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동성 간에도 성적호기심이 일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건 그 사람 탓이 아니고, 체질적으로, 선천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부정하는데, 그러면 동성애가 나타난 것은 모든 것을 창조한 하느님 책임입니다. 하느님이 불량품을 만들었다는 말인거죠. 그렇다면 하느님의 무오류성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하느님은 완전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왜 불량품을 만듭니까? 이는 말이 안되는 겁니다. 기독교가 동성애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자기 신앙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다수의 논리에 늘 세뇌되어서 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경험으로, 다수의 생각으로 절대화 시켜버립니다. 그래서 동성적 취향을 갖는 사람은 사탄이고, 악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사람이 남을 때린 것도, 성추행한 것도 아니고, 다치게 한 것도 아닙니다. 다수와 다르다는 한 가지 때문에 죄악시 합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볼 때 한발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은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과, 동성애자들간의 결혼을 허용하는 것, 동성애자 부부에게 아기를 입양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하는 것은 모두 똑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동성애는 그 사람 체질이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까지도 인정할 수 있는가는 윤리적인 문제입니다. 사회적으로 동성애자들간의 결혼을 인정할 것인가, 말것인가 이것은 무조건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결혼은 사회적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동성애자 부부에게 입양권을 인정해 줄 것인가 역시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입양된 아이가 동성애자면 문제가 없는데 어린 아이라서 알 수가 없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데도, 아이에게는 선택권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아이가 성장하면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이 세 가지 모두 다른 것인데, 모두 허용하거나 모두 거부하는 것 역시 편견입니다.
그래서 옳은 주장속에서도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오류 속에서도 일부 진실이 있는 것을 보아야 사실에 근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의 행동 중에 10%가 나쁜 행동이고 90%가 좋은 행동이면 성인이라고 규정해 버리고, 어쩌다 10% 나쁜 점이 발견되면 성인이 하루 아침에 나쁜 놈이 되어버립니다. 존재라는 것은 흑백으로 나누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 존재 자체는 같은 것과 다른 것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같다, 다르다는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인식상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식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냐에 따라서 앞산이 되기도 하고, 뒷산이 되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스님께서는 소통이 안되는 이유가 인간이 자연의 존재로서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임을 지적하시며, 최근 우리사회 갈등의 문제 중 하나인 성소수자들의 문제를 예로 들어서 자세히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최근 우리사회에 심해지고 있는 극단주의를 어떻게 볼지에 대해서도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다양한 사회에서 극단주의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극단주의는 인간의 정신작용에 늘 있습니다. 우리 속에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물을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 스페트럼을 조사해보면 극단주의가 소수고, 합리주의가 다수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자연스러움에 속합니다.
사회는 중도 성향의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고, 극단주의가 양쪽에 소수로 있으면 안정이 됩니다. 그러나 사회가 미성숙하면 극단주의가 득세합니다.
가령, 극단적인 좌파가 집권해서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할 경우 중도 사람들은 그들의 비합리성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중도는 비판의식은 뛰어나지만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앉아서 입으로만 비판하는 것입니다. 반면 극단적인 좌파의 행동이 점점 커지면 우파 극단주의는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그러면 좌파 극단주의에 분노했던 국민들은 중도파가 행동을 하지 않으니 우파 극단주의로 쏠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파가 집권을 합니다. 그런데 해결은 되지 않고 이들이 다시 극단화됩니다. 이럴때도 중도는 비판만 하고 행동하지 않으니 국민들은 또다시 그 반대편에 대한 지지로 쏠리게 됩니다.
한국사회가 극단주의로 흐른다는 것은 한국사회가 독특하게 문제가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테러를 하지는 않습니다. 또 종교적 극단주의도 다른 나라에 비해 적은 편입니다. 우리 나라는 개신교 일부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종교적으로 갈등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좌파 극단주의자들이 한국사회를 흔들었는데, 지금은 일베라는 우파 극단주의자들이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가 점점 극단으로 갑니다. 진실이란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너머에 있는데, 흑백논리는 선명성이 있다 보니 짧은 시간내에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습니다.
사회가 성장할때는 숨통이 트여서 극단주의가 주도하지 못합니다. 최근 일본이 극단주의로 흐르는 것은 20년간 사회가 정체되어 팍팍해져서 어느쪽으로든 돌파구를 찾기를 바라는 내적인 요인때문입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미국의 대중국 견제에 따른 일본의 재무장 필요성이 대두되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성장이 정체되어 있기 때문에 앞으로 극단주의 비율이 점점 늘어날 것입니다. 유럽도 최근 정체되니 프랑스 등에서 점점 극우주의가 늘어납니다. 그러면 파시즘이 등장하고 이성이 마비되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세월호를 보면 한쪽에서 진상 규명을 안 하는 것이 문제지만, 지금은 규명이 안되는 것에 대한 현실적 해결책을 찾기보다 오히려 억울하고 분하니깐 극단적으로 대처하게 됩니다. 타결책을 찾기 보다 갈수록 간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세월호 문제는 처음부터 갈등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정부와 민, 여야, 진보와 보수 모두 합심해서 우리 사회가 이렇게 가서는 안되며, 통렬한 반성을 해야 한다는 공통점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면서 지금은 극단적 대결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되었을까요?
첫째는 역사적으로 보면 주자학, 즉 성리학의 영향 때문입니다. 성리학은 유교원리주의입니다. 그래서 불교, 무속신앙 등을 억압하고 사상적, 신앙적 탄압을 했습니다. 또한 부모가 돌아가시면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를 가지고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 이런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원래 우리 민족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가령 고구려는 다섯 개 부족의 군대가 있어서 전쟁이 나면 그 중에서 착출해서 중앙부대를 만들었습니다. 왕권도 여러 종족 중 일부이지 절대 왕정이 아니었습니다. 고려도 호족연합 정권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이후로 우리 사회가 전제주의로 변화되었습니다. 조선시대는 신흥사대부가 중심이 되어서 500년을 집권했습니다. 여성들이 철저하게 억압되어 사회 진출이 막히고, 무시된 것은 우리 민족의 전통이 아니라 조선시대 500년동안 그렇게 자리잡은 것입니다. 조선시대 이전의 역사에서는 여성이 왕이 될 수도 있을 만큼 사회적 지위가 높았습니다.
두 번째는 일제식민지와 군부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일체 타협을 하지 않았던 투쟁문화가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일제식민지 때 일본과 싸우면서 적절히 타협하는 것을 중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독립운동은 독립을 하든가, 안하든가이지 타협이란 없습니다. 그러니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군사독재 시절에 군부독재와 타협하는 것도 또한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남북간에 이념적 갈등으로 서로 철천지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만나서 타협하는 것은 배신자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완결성에 흠집이 생긴다고 여깁니다. 기업에서도 노조는 강성노조가 우세합니다. 이들이 아닌 합리적인 노조가 들어서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런 전통이 우리속에 내재되어 있어서 합의하고 타협하는 것에 대한 훈련도 되어 있지 않고 부정적인 이미지만 있습니다.
과거 역사는 이렇지만 현재 우리가 놓여진 사회에서는 경제와 민주주의가 이 정도로 발전해왔으니 절대적으로 누가 옮고, 나쁘다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주장이든 있을 수 있는 주장입니다. 다양한 주장을 적절하게 받아들여서 타협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는데 이게 훈련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민주화를 주장해서 목숨을 받친 사람들이 전혀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독재와 맞서 싸울 때 민주적으로 싸우지 않고 독선적으로 싸웠습니다. 그러니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이 안되어 있습니다.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는 것처럼 말입니다. 노조도 민주적인 것 같으면서 독선적이고, 이런 요소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타협을 하는게 문화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안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세대는 살아온 환경이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를 하지만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세대는 바꿔야겠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누군가 테이블에서 독선적인 주장을 하더라도 외면하지 말고 인내를 가지고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 한 사람이 합리적인 다수에 의해서 포용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독선적인 사람을 빼버리고 가면 안됩니다. 그런데 늘 독선적인 한 명이 판을 깨던지 주도를 잡게 됩니다.
반면 합리적인 사람들은 이들과 이야기 해보고 안되면 외면해 버리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합리적인 중도 우나 중도 좌가 서로 경쟁하면서 협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사람들을 용인하되 흔들리지 말고,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시대에는 좀 달라 질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아버지 세대와 다른 우리 세대에 사회가 어디로 가야할지, 이런 사회를 만들어갈 우리에게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살아갈 미래세대에는 모든 요소를 감안해서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도출해 통합을 해야 합니다. 부부문제를 시작해서 밀양 송전탑 문제 등까지도 각각의 입장과 요구를 들어보고 합리적인 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의견이 전적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심적으로는 이해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렇게만 가다보면 상호피해가 커집니다.
철학적으로도 정리를 하면, 서로의 주장이 부딪혀 싸워 둘의 요구가 정반대인 것 같아도 통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 화쟁사상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철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삶속에서 끊임없이 적용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민주화 사회는 투쟁해서 쟁취하는 리더십, 산업화 사회는 나를 따르라는 리더십이었다면 지금 여러분에게는 화쟁의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욕구를 통합해내는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남북간의 갈등, 우리사회의 다양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리더십입니다. 그러나 이 훈련이 아직 많이 안되어 있습니다. 철학적으로도 빈곤하고, 경험적으로도 빈곤하고 모델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갈등이 증폭됩니다.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갈등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듭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대중의 다양한 요구를 통합해 내는 것이 정치입니다. 이제 국민의 요구가 다양해져 이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도 다양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양당제에서 다당제로 변화해야 합니다. 그 다당제 속에서 합리적인 다수가 연정을 해서 정책연합을 하는 구조가 되면 국민이 나서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가령 강정마을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과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서로 대화를 하면 주민들이 나서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의 국회는 정치력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만들어가는 것이 국민통합입니다. 국민의 요구를 어떻게 평화적으로 관리할 것인가입니다. 합리적인 선택이 반드시 최선은 아니지만 최선이 안되면 차선, 차선이 안되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합니다. 최악을 막기 위해서라도 차악을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으로 인한 부작용은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사회는 시스템으로 가야 합니다. 중앙정부와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개헌을 해서 권력을 분산시켜야 하며 양당제가 아닌 다당제로 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세대는 이렇게 가야 합니다. 합리적인 타협을 찾아나가는 새로운 세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스님의 말씀속에서 우리 사회가 왜 소통이 안되고 있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진단과 함께 나아가 새로운 세대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 청년들의 역할이 중요해짐을 다시금 가슴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늘 갈등속에 있는 사회를 탓하고, 기성세대를 탓하고, 정치인을 탓해왔지만 이제는 청년들인 우리가 나서서 새로운 사회의 모델을 만들어가야 함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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