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4.23 해외정토회 지도자 수련 1일째


▲ 해외정토회 지도자 수련 

 

안녕하세요. 오늘은 해외에서 정토법당을 운영하고 계신 총무님들(이하 ‘해외 총무단’)을 위한 수련이 문경정토수련원에서 열렸습니다. 해외 총무단 일행은 어제밤 문경에 도착해 하룻밤을 잔 후 새벽 4시에 일어나 대웅전에서 새벽 예불과 함께 문경에서의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무변심 법사님으로부터 발우공양 작법에 대한 교육을 받고, 100여명의 대중이 함께하는 발우공양에도 참석해 불교 전통 식사법에 대해 체험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스님께서는 새벽에 두북을 출발해 아침7시 무렵 문경정토수련원에 도착하셨습니다. 해외 총무단은 간단히 생활안내를 받은 후 아침8시30분부터 스님께 입재 법문을 청해 들었습니다. 먼저 스님께서는 “문경의 봄날이 좋아요? 혹시 발우공양 하면서 체하지는 않으셨어요?” 라고 가볍게 인사를 하시면서 법문을 시작하셨습니다. 

 


▲ 입재 법문 

 

그리고 인간의 정신 작용과 부처님이 발견하신 ‘알아차림’의 수행법, 정토회가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근본 불교의 의미, 2차 만일결사를 위해 정토회를 세계화 하는 방안 등 해외 총무단이 알아야 할 핵심 내용들에 대해 개괄적으로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인간의 정신작용은 컴퓨터 프로그램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래서 짜여진 대로 작용을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프로그램은 누가 짰을까요? 어떤 특정한 존재가 짠 것이 아니고 수백만년 혹은 수천만년 동안 자연 속에서 진화해 오면서 조금씩 변화를 거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수없는 학습 작용을 통해서 현재 인간이 갖고 있는 정신 작용이 형성되었는데, 이렇게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프로그램대로 반응을 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자율권이 거의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다’, ‘이런 원리로 반응을 한다’는 것을 미리 알면 그렇게 반응을 안 할 수도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하게 되면 종속적으로 반응하는 데서 다르게 반응을 할 수도 있게 되어서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데 있어서도 ‘자기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이 치료의 절반이다’는 말도 나오고 있죠. 옛말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것처럼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기 상태만 딱 점검이 되면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을 경우 다른 방향으로 전환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상태가 점검이 안 되고 전환하려고 하는 것은 거의 작심삼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작용은 대부분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스스로 통제가 잘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실까지도 알아차려야 됩니다. 잘 안 된다는 사실마저도 알아차리면서 시도를 하면 안 된다고 좌절하지는 않아요. 안 되는 것을 보면서 또 해보고, 또 해보고 할 수 있거든요. 

 

첫 번째, 대부분은 무지한 상태에서 윤회하면서 살아가고요. 두 번째는 바꿔보려고 하지만 잘 안되니까 대부분 좌절하지요. 그 이유는 이것은 바꾸기가 굉장히 어려운 것인데 욕심으로 쉽게 생각하니까 안 된다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바꾸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알고 시작하면 안 되더라도 좌절은 하지 않습니다. ‘아, 이렇게 하니 안 되네. 저렇게 한번 해볼까?’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계속 해나가면 변화가 일어나거든요. 큰 변화가 일어나려면 한번 죽을 고비를 넘겨야 됩니다. 부처님도 6년 고행을 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겼고, 서암 큰스님도 결핵에 걸려 치료가 안되니까 이왕지 죽는 것 정진하다가 죽겠다고 하고 산속에 죽으러 들어갔다가 살으셨거든요. 이 때 죽었다고 하는 것은 몸은 안 죽었지만 자신의 원래 까르마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황야에서 40일 금식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각하는 그런 과정이 나오지 않습니까. 

 

용수 보살도 젊은 때 못된 짓 하고 돌아다니다가 잡혀서 죽을 뻔 했거든요. 그래서 쾌락을 즐긴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인 줄을 자각했기 때문에 거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니까 오히려 성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젊을 때부터 착실해서 성인이 된 것이 아니고 쾌락을 즐기고 못된 짓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착한 사람이 좋기는 하지만 착하기만 한 사람은 크게 깨닫기가 어려워요. 왜냐하면 착하다고 주위로부터 칭찬의 소리만 듣기 때문에 자기를 바꿀 생각이 거의 없어요. 반면에 너무 망나니로 산 사람은 거기에 물이 들어서 헤어 나오지를 못합니다. 뭐든지 뜻대로 안되어서 자포자기해버린 사람은 극복할 의지가 없고, 너무 자기 뜻대로 된 사람은 극복할 필요성을 못 느끼죠. 뜻대로 되기도 한 것이 있어서 도전할 의향이 생기고, 뜻대로 안되기도 해서 안주하지 않기도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천상이나 지옥이 아니라 인간 세상이 좋다고 하잖아요. 

 

이런 것을 보면 여러분들이 사는데 장애라는 것이 꼭 불행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결혼 생활 중에 갑자기 남편이 돌아가신다, 재산이 파산이 된다, 건강이 안 좋아진다, 이런 것들은 우리 인생에서 큰 불행이잖아요. 그러나 이 불행이 불행으로 끝나면 불행이지만, 그 앞에서 ‘내가 그동안 집착하고 살아온 것이 아무 것도 아니구나’ 이것을 한번 깨달으면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되어도 좋은 것이고요. 해탈은 못해도 중생으로서는 괜찮은 삶이니까요. 반대로 장애에 부딪히고 재앙이 쏟아지면 중생으로서는 좀 힘들지만 해탈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것 또한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이러면 이렇게 배울 것이 있고, 저러면 저렇게 배울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경계에 영향을 안 받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런데서 첫째 이 수행의 관점을 분명히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붓다의 위대한 자각인 근본 불교를 통해서 현대인이 갖는 고뇌를 해결해보자는 것이, 즉 근본불교를 다시 재현해보자는 것이 정토회의 설립취지입니다. 근본 불교가 현대사회에서 한번 꽃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지금 현대사회는 물질이 충분히 주어졌는데도 인간의 고뇌가 해결되지 않는 이 문제에 봉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인간을 진정한 자유와 행복의 길로 안내하느냐? 여기에 바로 붓다의 가르침이 이 문제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붓다는 2500년 전에 이미 현대사회가 경험한 수준을 스스로 경험했습니다. 왜냐하면 왕자였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고뇌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탐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경제적 풍요로 말하면 다수가 소비의 왕이 된 사회이거든요. 붓다의 문제의식의 출발이 그랬기 때문에 제가 생각할 때는 현대인의 고뇌에 어쩌면 유일한 해결책이 불교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자의 말씀, 서양 철학, 기독교에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좋은 점들이 많지만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꿰뚫은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우리 불교가 최고다’ 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통해서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불자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자신이 수행을 통해 조금이라도 이 맛을 봐야 하고요. 둘째는 세상 사람들의 고뇌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법을 널리 전해야 합니다. 앞의 것은 내가 해탈해야 한다는 소승의 수행 원칙이라면, 뒤의 것은 중생에게도 이 혜택을 줘야 한다는 대승의 원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말하면 상구보리 하화중생입니다.”

 

이렇게 큰 방향을 일러 주신 후 이어서 2차 만일결사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2차 만일결사의 목표는 1차 만일결사 때 한국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본 것을 다른 나라 사람들도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실험한 1차 만일결사의 성과를 기초로 해서 다음 만일에서는 세계화를 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1차 만일의 목표를 이루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여러분들은 외국에 살고 있는 교민들이기 때문에 2차 만일의 씨앗도 함께 준비해야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남편이 외국인이든, 자식이 외국인이든 그렇잖아요.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 교민 사회를 중심으로 해서 점차 주위로 확대해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럴려면 언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책을 영어로 번역하고, 즉문즉설도 모두 영어로 바꾸어야 합니다. 제가 영어를 배우면 되는데, 제 수준이 좀 안돼요. (웃음) 그래서 그에 합당한 통역사를 확보해야 합니다. 즉,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정토행자가 각각 있어야 합니다. 현재 교민들의 2세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나오면 이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겠죠. 

 

이제 다음에는 영어로 깨달음의장을 진행하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또 기도법도 다 영어로 바뀌어야 합니다. 현재 기도법에는 용어가 한국적인 것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또 종교적인 언어도 많이 베여 있습니다. 전통 불교와 비교해서는 많이 대중화, 생활화 되었다고 하지만, 요즘 대학생이나 외국인이 볼 때는 ‘이게 무슨 소리예요?’ 라고 묻는 부분이 많거든요. 2차 만일결사에서는 이런 것들을 모두 다 덜어내야 합니다. 종교적인 언어는 완전히 다 빼고 보편적인 생활 언어로 바꾸어야 하고, 한국적인 것들도 다 빼고 외국인도 자기나라 말로 번역을 하면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바꾸어야 합니다. 절할 때 ‘관세음보살’ 부르는 것도 다 바꾸어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의 정서에는 맞을지 몰라도 외국사람 입장에서는 한국식 발음을 해야 되거든요. 예불문도 세계 보편적인 빨리어로 바꾸든지 해야 할 겁니다. 

 

즉, 1차 만일 기간 동안에는 국내와 같이 한국 교민을 위해 그들도 부처님 법의 가피를 입을 수 있도록 각 지역에 법당을 열어나가는 것이 필요하고요. 동시에 여러분들은 2차 만일의 씨앗을 만들어가는 기초도 함께 마련해야 합니다. 2차 만일이 되면 한국은 세계 정토회의 하나의 지구로 편재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마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어요. ‘내가 왜 내 밥 먹고 뭣 때문에 이런 일을 하고 있나’ 하고요. 여러분들이 안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가족들은 ‘진짜 너 미쳤다’ 이럴 수도 있고요. (웃음)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도 종교 활동이라고 해서 이해가 되지만, 외국에 살고 있는 분들은 ‘국가도 나를 구제해주지 못하니 내가 내 몸 하나라도 살려고 이 먼 나라까지 와서 몸부림치며 사는데 왜 갑자기 지구를 구제하겠다고 난리냐?’ 그러겠지요. 

 

그런데 삶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자기가 원해서 하는 즐거움이 있고요. 다른 하나는 남에게 도움이 되는 보람이 있습니다. 즐거움은 내가 원하는 일을 할 때 그 순간에 생기는 것인데, 보람은 항상 지난 뒤에 생깁니다. 보람은 내가 남에게 유의미한 일을 했을 때 드는 행복감입니다. 보람 있는 일만 한다고 하면 현재가 힘들 수 있어요. 그러나 재미있는 일만 하면 나중에 보람이 없으니까 허전해져요. 그래서 행복은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아야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서 여러분들이 외국에 가서 잘 산다 하지만, 마치 부처님이 왕자였지만 고뇌가 해결되지 않았듯이 여러분들도 ‘내가 밥 먹고 살려고 이 고생 했나’ 하면서 허무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내가 외국에 와서 왜 이 고생하고 살았나?’ 했더니 알고보니 ‘아, 부처님 법을 전하라고 내가 여기 왔구나!’, ‘그동안 이것도 모르고 허둥대고 살았는데, 이런 사명을 갖고 씨앗이 되라고 여기 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여기 와서 산 의미가 밥 잘 먹는 성공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방향을 잡아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좀 힘들지만 이 정도의 고생은 할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조금 어렵더라도 서로 격려하면서 해나갑시다. 

    

지금 생각하면 2차 만일결사의 목표가 까마득한 것 같지만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시절 인연이 도래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거예요. 우리가 준비해놓고 있으면 세상에서 이것을 가져가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어느 순간 빠르게 확산이 되게 됩니다. 개인은 별 영향이 없을지 몰라도 이렇게 앞서나가서 함께 준비해 놓으면 나중에 모두 의미 있는 존재가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의 이 일은 사양 산업이 절대 아니고 미래 성장 산업이라는 것이예요. (웃음) 

 


 

정토회가 노력해서 성장하는 것도 있지만 이런 시대의 요구에 부합해 나가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더 확대되어 나갈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통일 운동도 지금은 굉장히 어렵죠. 하지만, 10년, 20년 지나놓고 보면 독립운동 했던 수준의 평가를 받습니다. 이번 수련 기간 동안 문경 공동체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현재 정토회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행정적으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배우고, 질문도 많이 해보시고, 자기 고민도 충분히 이야기해서 같이 해결해보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렇게 1시간 40분 가량 법문을 해주셨고, 해외 총무단은 시대의 요구를 내다보고 바른 길을 일러주신 스님께 큰 감사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더불어 2차 만일결사를 위한 씨앗을 지금부터 만들어나갈 것을 함께 다짐했습니다. 

 

잠깐 휴식을 가진 후 10시40분부터는 정토회 행정처 박종숙 국장님으로부터 ‘법당 운영 원칙’에 대해 실무 교육을 자세히 받았습니다. 

 


▲ 법당 운영 원칙에 대해 강의 중인 행정처 박종숙 국장 

 

해외 총무단은 ‘불상을 액자로 모신 법당이라 하더라도 불단이 클 경우, 화분이나 조화를 불단에 올려도 되는지?’, ‘법당을 타단체에 임대하지 못하도록 원칙이 정해져 있는데, 해외는 우리가 타단체 시설을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우리도 타단체의 사용을 허락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해외에서는 천일결사 입재식에 참여하기가 어려운데, 정토회의 정회원이 되려면 이 자격 요건을 어떻게 갖출 수 있는지?’ 등 궁금한 점들을 물었고, 행정처로부터 각각의 원칙에 대해 명확히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께서는 해외 총무단이 실무 교육을 받는 동안 명상원에 머무시며 새로 출간하는 ‘세계 100회 강연’ 책의 원고 교정과 그동안 밀린 업무들을 보셨습니다.

 


 

점심 식사 시간이 되어 모두들 명상원 마당으로 나오자, 스님께서도 마당으로 나오셔서 “복사꽃이 많이 피었네. 저기 봐바. 복사꽃 국경 좀 하세요.” 라며 점심 식사 후 한국의 봄날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할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모두들 곳곳에 핀 복사꽃을 보며 사진도 찍고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습니다. 

 


▲ 문경정토수련원의 복사꽃 

 

점심 식사 시간에는 하얀 접시와 그릇이 각각 제공되었고, 모두들 식사 후 김치조각으로 깨끗이 닦아먹어서 음식물 쓰레기가 하나도 남지가 않았습니다. 전세계에 살고 계신 분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가 쉽지 않기 때문에 식사를 하면서도 서로 이야기를 멈출 줄 몰랐습니다.  

 

  

▲ 2박3일 동안 식사 바라지를 맡으신 조선경, 최경숙, 김유정님. 조선경, 최경숙님은 전직 해외사무국 출신이여서 그런지 더욱더 애틋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새벽부터 일정이 진행되어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식사 후에는 어디서 또 힘이 나오는지 몇몇 분들은 “저기 쑥 봐라!” 하며 쑥을 캐러 나섭니다. 해외에서는 쑥을 볼 수가 없는데, 오랜만에 방문한 한국에서 쑥을 발견하자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또 한 번 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 

 


▲ 점심 시간을 이용해 쑥을 캐러 나온 수련생들 

 


 


▲ 점심 때 캔 쑥으로 만든 특별 요리

 

열심히 캔 쑥은 공양간으로 가져다주고, 오후1시30분부터는 정토수련원 원장이신 유수스님과 함께 수련원 곳곳을 둘러보며 설명을 들었습니다. 정토회의 초창기 역사적인 모임들이 많이 열렸던 제1수련장을 시작으로 깔끔하게 새로 지은 제2수련장, 제3수련장, 수련사무실, 나눔의장이 진행되는 제4수련장, 수련원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인 대웅전과 자비당, 원력당을 차례대로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대강당과 이곳에 가장 처음으로 세워진 건물인 백화암까지 둘러보았습니다.  

 


▲ 문경정토수련원 대웅전 

 

해외 총무단 일행은 10년, 15년 전에 이곳에 왔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때와 비교해 많은 건물들이 위용 있게 들어선 모습을 보며 모두들 자랑스러움을 느꼈습니다. 특히 해외는 비좁은 공간을 임대해서 법당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해외에서도 이런 수련장을 가지면 정말 좋겠다’ 는 바램과 함께 ‘우리 법당도 이렇게 짓자’ 며 모두들 설레여 했습니다. 

 

대웅전에 올라와서는 유수스님께 앞으로 이곳 수련원 불사를 어떻게 진행해나갈 것인지 이야기를 들은 후 대웅전 앞 금강 계단에서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렇게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정토수련원을 모두 둘러본 후 오후 3시부터는 정토회의 회계 원칙에 대해 강의를 들었습니다. 또 이어서 3시40분부터는 정토회의 통합정보시스템에 대해 설명을 듣고, 해외에서는 어떻게 활용 가능할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현재 국내는 작년부터 불교대학생, 천일결사자, 수련생 모두 통합정보시스템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데, 해외에서도 이 시스템을 활용하면 좋겠다고 하며 다들 좋아했습니다. 시스템부를 담당하고 있는 김도영님은 해외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조만간 해외를 위한 시스템도 마련하겠다고 해서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다만 회계 부분은 국내와 사정이 많이 달라 어떻게 적용할지 과제로 남았습니다. 

 


▲ 정토회 통합정보시스템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김도영 시스템부 부장

 

오후4시50분부터는 정토회 이기혜 대표님을 모시고 대의원제도에 대해 설명을 들었습니다. 대표님은 “정토회가 운영방식에 있어서도 모범이 되어보자는 취지로 대의원제도를 도입했다”고 하면서, “현재 정토회는 선출직 88명, 당연직(결사행자) 38명 등 총 126명의 대의원들이 회원들의 민의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해외는 아직 정회원이 30명 이상 되는 곳이 없어 대의원이 선출되지 못하고 있는데, 앞으로 정회원이 많아지면 우리들 손으로 뽑은 대의원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에 대의원 제도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마음이 급한 어떤 분은 “해외는 넓게 퍼져 있으니까 지구별로 대의원을 한명씩 선출하면 안 되는지?”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 대의원 제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기혜 정토회 대표

 

오늘의 모든 교육을 마치고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빈그룻 운동으로 깨끗이 접시를 닦아 먹은 후 7시부터는 스님도 함께 참석하셔서 다함께 저녁예불을 올렸습니다. 

 


▲ 빈그릇 운동

 

예불 후 곧바로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동안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힘들었던 점이나 의문이 들었던 점에 대해 마음껏 묻고 스님의 답변을 청해 들었습니다. 

 

먼저 스님께서 “다들 피곤하시죠?” 라고 묻자 모두들 “예”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저도 어제 엄나무 순을 자른다고 늦게 까지 일했더니 손이 펴지질 않네요”라고 하시면서 “낮에 쉬지 않았기 때문에 밤에는 잠을 푹 잘 수 있을 거에요. 그러면 내일부터는 시차 적응도 잘 될 겁니다. 때로는 하고 싶은 것에 구애받지 않는 경험들을 해야 삶이 자유로워집니다.” 라며 다들 기운을 내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 즉문즉설 강연 

 

그리고 즉문즉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원칙의 적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중도적 자세에 대해 강조를 해주셨습니다. 

 

“정토회 대중부에서는 ‘한국은 이렇게 한다’ 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해외에도 한국과 똑같이 해야 한다’고 말하면 해외의 실정이 덜 반영될 소지가 있습니다. 반면 해외에서 하자는 대로 따라가면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다 자기들 마음대로 될 소지가 있습니다. 출발 선상에서는 각도가 1도쯤 벌어지면 1~2미터 가봐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수백키로 수천키로를 간다고 하면 엄청나게 사이가 벌어집니다. 그런 것처럼 작은 차이가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이 달라지면서 점점 벌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예요. 그러나 우리가 최초의 원형을 잘 통일시켜 놓으면 벌어지는 시간을 좀 더 멀리까지 연장할 수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원칙대로 잘 살면 변질되는 시간을 좀 길게 잡을 수 있죠. 

 


 

그래서 정법이라는 것은 아주 심플해야 합니다. 아주 심플한 그것만 지키고, 나머지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원칙도 유지가 되고 현실 적용도 됩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다 정법이라고 정해버리면 현실에 적용이 안 되기 때문에 통째로 변질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 원칙을 너무 안 잡아 주면 말이 정토회이지 법사님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종파가 되고, 지역에 따라서 서로 완전히 다르게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서 원칙도 지키고 현실 적용도 유연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칙을 지킨다는 것을 너무 강조하게 되면, 굉장히 경직되고 대중의 요구를 무시하게 되고, 대중을 계속 고쳐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대중의 요구를 너무 받아들이다 보면 원칙이 없어져 버리고 혼란스러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원칙을 지키면서도 대중의 요구를 늘 유연하게 수용하는 이것이 ‘중도’입니다. 중도는 모든 부분에 적용이 됩니다. 

 

원칙을 잘 지킬수록 훨씬 유연하게 적용이 되고, 원칙이 안 잡힐수록 원칙을 너무 경직되게 강요하거나 원칙없이 혼란스럽게 진행이 됩니다. 정토회 대중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너무 강하게 적용해서 대중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분별심을 버리는 것이 수행인데, 원칙을 칼 같이 드리밀면서 분별심 덩어리가 되어 자꾸 부딪히는 것입니다. 중도란 이렇게 말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예요. 중도는 원칙에 대한 이해와 현실에서의 여러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조율되어 가는 것이여서 결국 시간이 요하고 연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100으로 벌어졌던 것이 한번 연수하면 70으로 좁혀지고, 또 현실에 적용하면 갈등을 일으키다가 다시한번 중심을 잡으면 이번에는 50, 30, 20으로 차이가 좁혀져 나가면서 중도에 근접해 나가게 됩니다. 

 


 

이쪽 저쪽 치우침의 원인은 자기의 욕망에 있습니다. 일이 수행이 되는 이유는 열심히 일하다 보면 자꾸 치우치게 되는데, 그 치우치는 것을 가지고 자기를 보면서 ‘아, 내가 지금 욕망을 갖고 대응을 하고 있구나’ 이것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거든요. 

 

가족이 협조하지 않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하다 보면 가족 중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이 있죠. 가족과 화합하려니 정토회를 그만둬야 하고, 정토회 활동을 하려고 하니 가족과 갈등이 생깁니다. 이럴 때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냐’ 하는데, 이것도 자기 속에 욕망을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 때 자기의 욕망이 작용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내려놓으면 가족이 그렇게 반대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남편 입장에서는 정토회 일하라고 결혼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남편이 하자고 하는 대로 살면 내 인생이 없어지잖아요. 그러나 치우치지 않으면 나는 내 인생을 살고도 가족들의 서운함도 받아들여서 ‘죄송합니다’ 하면서 부딪히지 않고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 길이 바르다고 생각한다면 또한 내 갈 길을 가는 중심도 분명히 있어야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수행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업무든 개인 얘기든 무엇이든지 자기 속에서 번뇌가 되거나 의문이 되는 것들을 편안하게 얘기해 보세요.”

 

이렇게 여는 말씀을 해주신 후 수련생들의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세계 100회 강연을 마치고 몸이 아프고 다시 활동을 못하게 될까봐 불안했는데 귀의하는 것과 의지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묻는 분, 몇 번 주의를 주었지만 사적으로 모임을 계속 여는 사람이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분, 재정 형편이 열악해서 법당 공간을 임대해줘서 수익을 취해도 괜찮은지 묻는 분, 법회에 나오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법당을 책임질 사람이 없어 고민인 분 등 총 4명이 스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 질문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세계 100회 강연을 하면서 보람도 컸지만 제 안에서 화가 폭발한 적이 몇 번 있었어요. 100회 강연 끝나고 나서 맨붕 상태가 오더라구요. 그래서 휴가를 내고 아버지가 위독해서 한국에 나와 있었는데요. 몸이 아플 때 첫 번째 드는 마음이 ‘이러다가 정토회 활동 못하게 되겠다’ 하는 불안함입니다. 정토회 활동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정토회 활동에 대한 집착인 것인지, 승가에 대해 귀의한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는데요. 어떻게 초발심으로 돌아가서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당장 돌아가서 명상수련 준비도 해야 하거든요.”

 


 

스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결혼 생활은 두 가지 경우가 있어요. 하나는 결혼을 했으니까 마지못해 사는 경우입니다. 애를 낳았으니까 살아야 되고, 시부모님과 남편 눈치보고 살아야 되는 경우입니다. 그렇게 행복하지 않지만 그냥 사는 경우가 많이 있죠. 이것은 주체적인 자기 인생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환경이 주어진 대로 바람에 부는 낙엽처럼 사는 것이지요. 

 

이런 부정적인 면이 있는 반면에 또 달리 살펴보면, 우리는 자기가 일어나는 생각대로 다 행동했으면 결혼생활을 끝까지 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예요. 오늘은 도저히 못 살겠다 했지만, 내일 갑자기 시어머니가 아파서 도와주다보면 한 고비를 넘어가고, 아이 키우다보니 또 한 고비를 넘어가고 그렇거든요. 우리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이렇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늘 일시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데, 주위에 주어진 조건들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환경에 영향을 받는 존재입니다.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면 정말 노예처럼 사는 것이 되지만, 우리는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내가 주인으로 산다는 것을 환경에 영향을 안 받고 내 마음대로 사는 것으로 오해하면 이것 역시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은 내 뜻대로 안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정해진 울타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과 자각을 하면 이 영향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봐야 합니다.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을 영향 안 받는 존재가 되는 것으로 자꾸 오해를 하는데, 영향을 받지만 그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영향을 받는 것이 주위와 종속적 관계라면 이것을 자각함으로 해서 주어진 환경을 자신이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각하든 안하든 남이 보면 똑같아요. 그러나 하나는 노예처럼 속박되어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능동적으로 수용해서 나가기 때문에 내면의 세계가 자유로운 상태에 있습니다. 

 


 

지금 질문자는 근본적으로는 이렇습니다. 정토회 문제도 아니고 결혼 생활 문제도 아니고 부모 문제도 아니고, 질문자는 지금 심리적 불안 증세가 있습니다. 감정 기복이 있어서 한번은 이렇게 갔다가 한번은 저렇게 갔다가 극단적으로 치우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아, 나는 다른 사람보다 감정 기복이 조금 심하다’ 이것을 자기가 자각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각하고 있지 못하면 감정기복이 늘 널뛰기를 하게 되는데, 이것은 누구의 문제도 아니고 나의 까르마의 문제라고 자각하고 있으면 감정에 놀아나지 않게 되고 이것을 지켜볼 수 있게 됩니다. ‘너 또 감정이 증폭되어서 일어나네’ 하면서 가만히 자신의 상태를 보고 있으면 조금씩 감정 기복이 낮아지면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는 이렇게 ‘알아차림’을 통해서 치료할 수 있고, 현대 의학에서는 약물 투여를 통해 증폭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증폭이 가라앉으면 지켜보는 것도 용이해지죠. 

 

그래서 이런 경우는 대부분 귀의가 안 되고 의지가 되기 쉽습니다. 정토회에 귀의가 되었다고 한다면, 내가 내 일처럼 최선을 다하되 내가 능력이 안 되어서 정토회에 아무런 기여를 못해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정토회에서는 자기가 할 수 있으면 하면 되고, 못하게 되면 안 해도 괜찮아요. 몸이 아프면 이곳에서 약 먹고 쉬어도 되고요. 몸이 더 아프면 그냥 이곳에서 요양만 해도 되고요. 이런 믿음이 아직 부족한 겁니다. 이것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자기 생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발심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도 그 초발심이 정말 깨달아서 생긴 것이냐, 아니면 자기가 그냥 좋아서 생긴 것이냐 하는 문제죠. 필이 딱 꽂혀서 좋아서 생긴 초발심은 시간이 흘러가면 약화되거나 반대로 뒤집어지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딱 자각을 해서 일어난 초발심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마음이 더욱더 단단해지는 쪽으로 갑니다. 

 

첫째는 자신의 심리 불안에 대한 치유를 명심하고 있는 것이 필요하고요. 이것 때문에 스님이 아무리 안심하라고 얘기해도 심리 불안이 일어나면 스님의 말이 온데 간데 없어져 버리거든요.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여기에 몸을 탁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아프면 ‘나를 보살펴 줄거냐’ 이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어요. 수행적 관점이 딱 잡히면 일이 많으면 내가 열심히 하고, 일이 적으면 여유 있게 놀고, 환경에 따라서 바쁘면 빨리 가고 여유가 있으면 천천히 가고 이렇게 형편에 따라서 물 흐르듯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욕망을 움켜쥐고 일을 하게 되면 정토회에서 엄청나게 일을 많이 하고 나중에 ‘나는 희생되었다’고 서운해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자기 공부만 딱 되어 있으면 정토회는 아주 살기 좋아요. 

 

모든 것을 다 그만두고 자기 공부만 한다, 이건 수행과는 아주 거리가 먼 얘기입니다. 다만 ‘내가 지금 심리 불안 상태가 심하니까 조금 휴식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건 괜찮습니다. 그만두려고 했는데 일이 있어서 한다는 것은 일에 대한 집착이고, 내 수행이 안 되었기 때문에 일을 그만두겠다 하는 것도 전혀 수행적 관점에 안 맞는 얘기가 됩니다. 질문자가 뉴욕에 있어서 명상수련도 준비하고 하면 좋은 일이예요. 그러나, 질문자가 없어도 우리는 명상 수련을 할 겁니다. 200명 진행할 것을 150명만 받아서 할 거고, 매끄럽게 진행할 것을 조금 불편하게 할 겁니다. 이런 차이 밖에 없고 지나놓고 보면 큰 차이가 없습니다. 있으면 되고 없으면 안 되고 이런 개념은 아닙니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괜찮습니다. 

 

제가 ‘너가 없어도 해는 뜬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질문자가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너무 일에 집착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또 여러분들 한명 한명이 힘을 보태주기 때문에 지금 일이 이뤄지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또한 매우 소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가 없어도 해는 뜬다 이런 얘기입니다. 

 


 

부처님이 안 돌아가셨으면 불교가 더 발전했을까요?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는 살아계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셨고, 그러나 부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더욱더 불법이 확산이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 안 돌아가셨으면 부처님이 한분 밖에 없었을 텐데, 부처님이 돌아가심으로 해서 오백 아라한이 오백 부처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전 세계를 다닐 수 없잖아요. 그러나 오백명은 다 역할분담을 할 수 있잖아요. 초기에 오백명을 만드는 것은 부처님이 아니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확산은 부처님이 계속 계셨다면 오히려 더 어려웠을 겁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머지가 다 모자이크 붓다처럼 협력이 되어서 인도 전역으로 확산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으면 좀 잘 되고, 없으면 좀 부족할 뿐이지, 광명이 거기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나 스님이 아무리 잘해도 여러분들이 없으면 해외의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지치거나 과대망상을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항상 여기서 나가는 빛을 받아서 여러분들이 일을 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열심히만 하면 돼요. 문제가 생기면 보고를 하면 돼요. 여기서 의논해서 지침을 알려줄테니 그대로 해보면 되지 너무 혼자서 머리 싸 메고 죽기 살기로 고민 안 해도 돼요. 갈등이 생기면 문의하면 돼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가 한다고 생각하고 자기 머리로 문제를 풀려고 생각하니까 쉽게 지치고 머리가 아픈 겁니다. 이것을 가볍게 받아들여야 해요. 엄격하게 말하면 부처님이 태양이라면 우리는 그냥 달이예요. 빛이 반사되어서 투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우리가 발광체는 아니거든요. 물론 여러분들은 스스로 발광체가 되기 위한 정진을 끊임없이 해야 되지만요. 이 말의 뜻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편안하게 해도 된다는 겁니다.   

  

질문자가 지금까지 기여한 것만 갖고도 공덕이 많으므로 정토회 오면 밥도 먹여주고 재워 줍니다. 여기가 그렇게 의리 없는 집단이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안 됩니다. 아무리 경력이 많아도 여기 와서 자기 성질대로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웃음) 

 


 

그래서 수행적 관점을 딱 지켜야 합니다. 수행적 관점은 법문을 많이 안 들어도 우리가 매일 아침마다 읽는 수행문에 있어요. 그런데 늘 읽는 것하고 실제로 자신이 그 관점을 딱 유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 같아요. 수행문을 딱 간직하고 있으면 불안한 심리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속적으로 의지처를 삼으면 나중에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수행적으로 의지를 하게 되면 이런 불안한 마음을 안 가져도 됩니다. 놀아도 노는 것을 편안하게 얘기하게 되고, ‘아이고 스님, 휴가 좀 주십시오’ 이렇게 가볍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행적 관점이 안 잡히면 휴가 받고 노는 것이 불안해집니다. 다른 사람은 다 일하는데 나만 논다고 생각하거든요. 쉬고 일하자, 밥먹고 일하자고 할 때는 쉬는 게 일이고, 밥 먹는 게 일인 것처럼 지금은 휴식하는 것이 일이고 수행입니다. 아픈 몸으로 계속 일하다 몸을 버려서 병이 나면 아무 것도 못하잖아요. 아직 20년, 30년 더 정토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데 1,2년 잘하려다가 병들어 버리면 비효율적이잖아요. 이런 관점을 가지고 편안하게 접근을 하면 좋겠습니다.”

 

스님께서 이렇게 편안하게 임할 것을 일러주시니 질문자도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수행적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질문자가 자리에 앉고 나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이 믿음의 불안정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더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전제 조건 하에 믿음이거든요. 어떻게 해주면 내가 너를 믿는다, 이런 전제 하에 있는 믿음이기 때문에 이런 믿음은 굉장히 불안정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복은 그 행복이 높으면 불행도 깊게 같이 나타납니다. ‘아이가 내 행복의 전부이다’ 라고 하는 사람은 아이에게 집착하기 때문에 아이가 죽으면 정신이 나가버리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이가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라고 말하면 ‘너 핵폭탄 가지고 있구나’ 이렇게 말하거든요. (웃음) 

 


 

그래서 스님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환상을 갖고 접근을 하면 제가 뒤집어 놓는 이유도 그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스님에 대한 소문은 어떻게 들리고 전해질지 모르잖아요. 누구든지 음해하려고 하면 무슨 일이든 생길 수도 있잖아요. 그럴 때 이것을 여여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공부이고, 이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는 것이 공부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획가닥 해버리잖아요. 

 

이 때 이 좋아함이라는 것은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 것에 놀아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한이 됩니다. 불안정성에서 좋아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에 안 맞으면 다시 원수가 되겠구나’ 미리 보고 있어야 합니다. 원수가 안 되면 다행이지만, 원수가 되더라도 나를 좋아해준 과보이니까 미워하는 과보를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자기를 보호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스님을 막 좋아하면 저는 제 나름대로 방어를 칩니다. 또한 그 사람들을 보호하기도 해야 합니다. 나에 대한 환상이 그 사람들을 불행에 빠트리는 것을 막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도 또 나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도 가을 바람이 불어서 낙엽이 공중에 올라가니까 잘 올라가는 줄 알다가 바람이 멈추면 개굴창에 떨어지듯이 그 거품에 놀아날 수가 있거든요. 누구도 나를 보호해 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기를 보호하는 것과 남을 보호하는 것이 사실 둘이 아니예요. 내가 희생해서 남을 보호해준다는 것도 아니고, 내 이익을 위해서 남을 희생시킨다는 것도 아니예요. 결국은 남을 배려하는 것이 나를 가장 잘 보호하는 방법입니다. 이런 공부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많이 걸립니다. 

 

세상에는 행복이 있고, 행복이 있으면 반드시 불행이 따르는데, 이 행복과 불행이 윤회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이 고(苦)와 락(樂)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고락(苦樂)의 널뛰기로부터 잔잔해지는 것이 열반이기 때문에 열반은 들뜨는 행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열반을 이 들뜨는 행복과 혼돈하기 때문에 늘 윤회에서 못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다소 어렵게 들릴 수도 있는 법문이었지만 스님의 쉽고 명쾌한 설명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스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혹시나 그 믿음이 불안정성에 기초하고 있을 경우 그들에게 닥쳐올 괴로움을 헤아리셔서 미리 방책을 쓰신다는 말씀에 스님의 대중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세명의 질문이 더 이어졌는데, 주로 정토회에서 회원들 사이에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모임을 자꾸 만들려고 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화가 오갔고, 스님께서는 이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일러주셨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두 마치니 밤10시가 넘었습니다. 2시간 30분이 넘게 진행되었지만 모두 스님의 말씀에 몰입이 된 분위기였습니다. 모두들 열강을 해주신 스님께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스님께서는 “너무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하신 후 “더 궁금한 내용은 내일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자”고 여지를 남겨 두시고 오늘 즉문즉설 강연을 마치셨습니다. 

 

내일은 계속해서 해외 총무단 수련 2일째 일정이 계속될 예정입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전체댓글 15

0/200

한형희

스님법문을 볼때마다 새로운것을 배우게됩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2017-08-13 06:26:45

베라

알아차림은 어디에서는 되더라도, 누구하고는 않됩니다..또 하고 또 하고..넘어지고 또 하고....스님께 귀한 가르침 감사드립니다..해외총무단께도 감사드립니다.

2015-04-29 22:48:41

이규원

스님의 귀한법문 감사합니다. 너가 없어도 해가 뜬다는 말씀 잘세겨 살겠습니다.

2015-04-27 18:26:55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