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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법륜스님께서 두북 어르신들을 모시고 봄나들이를 하시는 날입니다. 스님께서는 두북 수련원에서 법사님들과 함께 새벽기도를 한 후 경주남산 답사 때문에 두북수련원에 와 있는 신규법사님들의 만행 후 첫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는 19일에 있을 경주남산 순례에 대해 누가 어느 코스로 갈 것인지, 어떤 것을 답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았습니다.
오전 7시에는 두북 어르신들을 모시고 봄나들이에 나섰습니다. 올해는 경북 영주에 있는 부석사에 사찰순례를 하고, 부석사 인근에 있는 소수서원과 선비촌도 함께 둘러보기로 하였습니다.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에서 비가 올 것이라고 해서 행사준비를 담당한 해운대정토회 봉사자들의 걱정이 많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전날 밤부터 부산전역에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봉사자들이 정토수련원에 집결한 새벽 6시경까지도 그칠 줄을 모르고 추적주적 내렸습니다. 오늘의 나들이행사를 위하여 전날 두북에서 주무신 법륜스님께서도 비가 오는데 어르신들이 괜찮을지 염려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해 온대로 행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그저 최선을 다해 할 일을 할뿐,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모두들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바 소임을 묵묵히 수행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의 걱정과는 달리 마을 어르신들께서도 대부분 시간에 맞춰 나오셨고, ‘우리는 비를 예사로 맞는다’시면서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는 모습들을 보니 우리가 너무 소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오히려 부끄러워졌습니다.
스님께서는 네 대의 버스에 일일이 오르셔서 비가 오는데도 이른 새벽부터 나오시느라고 수고하셨다는 인사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편 “비 맞고 농사도 지었는데 비 맞고 노는게 뭐가 문제겠어요?” 하시며 기운찬 덕담도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르신 129명과 봉사자 21명, 법륜스님과 화광법사님까지 모두 152명의 인원이 질서 있게 두북을 출발하였습니다.
봉사자들은 차 안에서 어르신들께 수신기와 간식 등을 나누어드려서 간단한 아침식사 겸 요기를 하시도록 하고, 건천휴게소와 안동휴게소에서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시게 한 후 오전 10시 25분에 부석사 주차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남쪽에서 출발한 버스가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차창을 때리던 빗발은 점점 가늘어지더니 차에서 내릴 즈음엔 흐리고 쌀쌀할 뿐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남녘에서는 이미 지고 있는 벚꽃, 개나리, 목련과 진달래 들이 부석사를 향해 오르는 길목에서 한껏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매표소를 지나 일주문 앞에 다다르자 스님께서는 먼저 도착하신 어르신들을 잠시 대기시키시고 부석사에 대해서 그리고 일주문의 의미 등에 대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부석사는 신라시대에 가장 유명하신 스님인 원효, 의상, 자장 중에서 의상조사께서 지으신 절입니다. 676년에 지었으니 1,300년 이상 되었습니다. 의상조사께서 중국 유학을 다녀오신 후 화엄종 본찰로 삼아 지으셨습니다. 일주문이라는 의미는 사바세계와 부처의 세계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으로 불이문이라고도 합니다. 부석사 바로 뒤에 보이는 산은 봉황산이라고 합니다. 천천히 올라가시면서 봄꽃 구경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일주문을 지나 약간 오르막길을 오르시면서 스님께서는 영주시는 예전에 영풍군 또는 풍기군이라고 하여 영주와 풍기를 포함하는 이름이었고 풍기는 원래 인삼으로 유명했는데 요즘에는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사과가 더 유명해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왕문을 바라보며 오르는 왼편 길가에는 당간지주라고 하는 두 개의 기다란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기둥 사이에 큰 깃발을 꽂아 ‘여기가 화엄종찰이다’라는 표시를 하였다.” 설명해주셨습니다. 네 분의 사천왕들을 모신 천왕문에 들어 서시면서는 ‘사천왕은 동서남북의 하늘을 맡아 악귀로부터 지켜내는 천신들’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부석사 경내로 들어서자 가파른 계단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스님께서는 어르신들이 따라 오르시기에 힘이 들 것을 염려하시어 “빨리 오르지 마시고 천천히 오르세요. 이래서 부석사는 조금이라도 젊을 때 와야 합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부석사에 오면 저 축대들을 잘 봐 두어야 합니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들을 가지고 이처럼 안정적이고 아름답게 축대를 쌓았다는 것은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축대를 쌓으려는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연구해 가곤 합니다.”라고 하셔서 어르신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셨습니다.
흰색과 자색의 아름다운 목련이 부석사 경내의 곳곳에서 수줍게 우리를 맞아주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국보급 건축물들이 들어선 경관은 신라고찰로서의 중후한 풍모를 고스란히 보여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르신들과 함께 잠시 쉴 자리를 찾아보시다가 아담한 잔디밭에 모두 앉게 하신 후 부석사에 대한 여러 가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본격적으로 들려 주셨습니다.
“부석사라는 이름은 뜰 부(浮), 돌 석(石), 즉 돌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하다는 데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신라시대의 의상스님은 원효스님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을 가기 위해 길을 떠나셨다가 밤이 되어 비가 많이 내리자 비를 피해 잠을 청하려고 굴속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원효스님께서 한밤중에 목이 말라 주위를 더듬어보니 웬 바가지 안에 물이 있어서 그 물을 달게 마시고 주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날이 밝아 눈을 떠 보니 지난밤에 자신이 마신 물은 해골 속에 고여 있던 썩은 물이었던 겁니다. 순간 구역질이 올라와서 간밤에 마신 물을 모두 토해내셨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자 더럽고 깨끗한 게 모두 마음 가운데 있음을 깨달아 ‘일체유심조’의 원리를 증득하심으로써 유학을 가려던 발걸음을 돌리셨습니다.
그러나 의상스님은 유학의 뜻을 굽히지 않고 배를 타고 당나라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신도 집에 하룻밤 머물었는데 신도 딸인 선묘낭자라고 하는 여인이 의상스님의 기상에 반해서 연정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상스님께서는 여인을 잘 감화시키셨고, 선묘낭자는 의상스님의 평생 제자가 되기로 원을 세웠습니다. 의상스님은 화엄종의 3대 교조인 지엄화상아래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신라와 당나라가 힘을 합해 멸망시킨 고구려, 백제 땅을 모두 당나라가 다 차지하려고 하자, 신라와 당나라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당나라가 큰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의상스님께서 이를 급히 신라에 알리기 위해 당나라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황급히 떠나시는 스님을 배웅하지 못한 선묘낭자는 스님이 타신 배를 향해 바다로 뛰어들면서 스님께 드리려고 마련해두었던 법복 선물을 힘껏 던져서 선물만은 스님의 배에 가 닿았으나 몸은 바다에 빠져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 선묘낭자가 죽어서도 의상스님을 지켜드리기 위해 큰 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나당전쟁에서 승리하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문무대왕이 의상스님의 공적을 기려 큰 절을 지어드리고자 의상스님으로부터 직접 터를 잡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의상스님께서는 이곳 부석사의 터를 고르셨는데 문제는 이곳에 500명의 도적떼가 차지하고 있으면서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용이 된 선묘낭자가 커다란 돌을 공중에 뜨게 하니 도적들이 깜짝 놀라 모두 도망을 가는 바람에 비로소 이 절을 지을 수 있었고 절 이름이 부석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용의 머리 부분은 무량수전의 부처님 앉으신 자리 부분에, 꼬리부분은 무량수전 앞마당의 석등 부분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둘러앉으신 어르신들은 스님의 재미나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올라오는 동안 힘들었던 것도 잊으시는 듯 했습니다. 이어서 스님께서는 부석사에는 국보가 다섯 개나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나라에서 국보가 일곱 개 있는 불국사 다음으로 가장 많은 절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과 그 안의 소조아미타여래상, 무량수전 앞마당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등, 조사님들의 영정을 모신 조사당과 그 안의 벽화 등 다섯 가지가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또 부석사의 대웅전인 무량수전은 아미타부처님을 모시는 곳이므로 극락전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아미타는 인도말이고 한문으로 번역하면 ‘무량수’ 또는 ‘무량광’ 이라고 한다는 설명도 덧붙여주셨습니다.
또한 스님께서는 두북 정토수련원의 모든 살림살이를 살뜰히 돌보시면서 마을 어르신들과도 가족처럼 친근하신 법성행 보살님께서 최근에 법사수계를 받아 ‘화광법사’님이 되셨다면서 소개해주시자 어르신들께서는 따뜻한 박수로 축하해주셨습니다.
이어서 어르신들과 함께 ‘안양문’이라고 쓰인 문을 향해 오르시면서 안양문이란 ‘극락 가는 문’이라는 뜻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안양문을 통과하자 고색찬연한 무량수전과 석등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서 안양문을 보니 안양루 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들어올때는 극락으로 가는 문이었고, 극락에 들어와서 보면 노니는 누각이란 것 같습니다.
무량수전에는 고요히 선정에 드신듯한 웅장한 아미타부처님이 동쪽을 향해 앉아계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르신들이 참배를 올리시는 동안 무량수전 왼편 마당에 있는 ‘부석’을 보여주셨습니다. 과연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묘한 형상이었습니다.
무량수전 앞에서 단체 사진촬영을 한 후,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을 지나 조사당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오르시면서 예전에는 이 길이 좁다란 오솔길이어서 저 위에 보이는 조사당이 훨씬 더 크게 보였는데, 길이 넓어지니 조사당이 너무 작아 보인다며 아쉬워하셨습니다. 조사당에 오르니 건물 모양이 작고 심플해서 옛 선사들의 소박함이 물씬 풍기는 듯했습니다. 이 조사당 건물도 800년 전의 것으로 국보라고 다시 말씀해주셨습니다. 조사당 안에는 진품은 아니지만 국보로 지정된 벽화가 있습니다. 또 조사당 앞에는 의상조사가 심었다는 ‘선비화’라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내려오시는 길에 일반 관광객들의 이런저런 질문에도 정성껏 답해주시는 스님의 모습이 참 따뜻했습니다. 법륜스님임을 알아보고 반가워하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절에서 내려오신 스님께서는 미리 음식을 준비해 둔 식당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하셨습니다. 추적추적 내리던 봄비에도 불구하고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 참석하시느라, 또 가파른 부석사 순례 길을 따라오시느라 힘드셨을 어르신들도 된장찌개와 생선구이 등으로 차려진 점심을 맛있게 드셨습니다. 모든 분들이 식사를 마치자 스님께서는 모처럼의 나들이 길에 오르신 어르신들의 여흥을 돋우어 주시기 위해 노래자랑을 하셨습니다. 어르신들께서는 신이 나서 흥겨운 노래잔치를 벌이셨습니다. 주름진 얼굴들이 모두 시름을 잠시 잊고 어깨춤을 들썩여가며 초롱초롱 빛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어르신들께서는 매해 이렇게 잊지 않고 나들이 행사를 마련해주시는 법륜스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제 다시 버스에 올라 소수서원을 향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창밖 풍경을 보시며 밭에 심어진 거뭇거뭇한 것들은 거의 다 인삼이고 벌판과 언덕에 심어진 과수원의 나무들은 거의가 다 사과나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요즘에는 풍기인삼보다 금산인삼이 더 유명하지만 아직 풍기에도 인삼밭이 많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가니 나란히 이어진 선비촌과 소수서원 주차장에 당도했습니다. 소수서원은 원래는 절터였는데 조선시대에 불교가 탄압되면서 풍기군수로 오게 된 주세붕이 절을 허물고 서원 즉, 사립학교를 건립했다고 합니다. 소수서원의 소는 이을 소(紹), 수는 닦을 수(修)로 ‘옛 선현의 바른 가르침을 이어서 닦자’는 뜻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원래는 안향이라는 유학자를 기리는 백운동서원이었는데, 이황이 군수로 오면서 국왕으로부터 인정받는 사액서원이 되었고 명칭도 소수서원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소수서원의 입구로 들어서자 오른편 길가에 부석사의 일주문 지나서 보았던 당간지주와 똑같이 생긴 돌기둥 두 개가 있어서 깜짝 놀랐는데 이것이 바로 이곳이 절터였음을 말해주는 증표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불교탄압의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는 듯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소수서원의 오른쪽 담장을 따라서는 아름다운 풍광의 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주변은 아담하게 잘 가꾸어진 모습이었습니다. 학교 건물인 본관은 수리 중이어서 천막이 둘러져있었고 뒤쪽에 기숙사와 장서각, 영정각, 사료관 등이 있었습니다.
소수서원의 후문을 나오니 주변이 잘 조성된 공원이었고 여기서 조금 걸으니 바로 선비촌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연결되었습니다. 이곳은 옛날 고택들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일종의 민속촌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해우당 고택, 두암 고택 등으로 이름 붙여진 기와집들을 둘러보시며 정말 큰 부자들이 살던 집이라고 하시며, 보통의 시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큰 규모라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런 집들의 문간채 정도밖에 안 되는 집에서 사셨다고 하니 어르신들께서 여기저기서 공감을 표합니다.
고택들 안에는 여러 가지 옛날 살림살이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스님을 따라다니시는 어르신들과 함께 베틀이니 기름틀이니 도리깨니 하는 옛 살림살이에 쓰시던 물건들에 대해 함께 회상하시며 공감을 나누시는 모습이 참 친근하고 훈훈했습니다.
선비촌의 관람을 마치고 이제 스님과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르신들께 마지막 인사를 하시면서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르신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이제 농사일은 놀이삼아 하세요. 죽기 살기로 하지 마시고 재미삼아 하시면서 무엇보다 건강을 잘 돌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들 딸 손자 위한다고 땅문서 집문서 내어주지 마세요. 논도 나누어주시더라도 먹고 살 만큼은 꼭 남겨두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스스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셔야 합니다. 안녕히들 돌아가세요.”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서시면서 스님께서는 우리 봉사자들에게도 한 말씀 하십니다. “차 안에서 꼭 음악 틀어드리세요.” 네, 스님... 어르신들을 극진히 생각하시는 스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스님과 함께 어르신 봄나들이를 잘 마치게 되어서 너무도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석사를 떠나 올해 첫 희망강연이 있는 대구로 향했습니다. 강연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대구법당에 들러서 원고교정등 업무를 보신 후 강연인 대구 수성대학으로 향했습니다.
대강당 입구에 들어서니 봉사자들의 따뜻한 웃음이 시샘 많은 봄추위를 다 녹일 듯합니다 저녁 여섯시부터 하나둘 메워지던 자리는 어느덧 강연시간인 7시가 되자 700여명으로 꽉 찼습니다. 계단에도 사람들이 자리를 빼곡하게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스님께서 무대로 나오시자 봇물 터지듯 박수와 환호성으로 대강당이 떠나갈 듯합니다. 스님께서는 먼저 비가 오는데도 많이 참석해주셨다고 하시면서 오늘 노인분들 모시고 부석사 다녀온 이야기, 다니면서 꽃구경 한 이야기등 하시면서 무리하게 놀고 있다고 하니 참가하신 대중분들이 모두 크게 웃으시며 긴장을 푼 것 같습니다.
올해 첫 희망강연이라 그런지 스님께서는 질문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시 설명해주시면서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오늘은 늦은 시간까지 아홉분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명쾌한 길을 제시하시며 우선 질문자들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시고 듣는 이들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넌지시 일러주십니다. 질문자의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리며 대화를 듣다보면 어느 순간 질문자와 청중이 함께 “네 알겠습니다” 하며 환하게 웃을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 10년정도 살다가 외국인 남편을 만나 한국에 들어와 사는데 친정 엄마와 남편의 사이가 좋지 않아 전전긍긍하는 아내,
육남매의 맏이로서 부모님 모시고 동생들 거두며 살았는데 자꾸만 행패를 부리는 둘째 동생을 보며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내려놓고 싶다는 환갑이 넘은 남자분,
다친 오빠를 간호하고 있는데 자꾸만 오빠가 짜증을 내서 참고 참다가 화를 내고 후회한다는 여린 마음의 39살 여동생,
그리고 39살 된 아들이 건강이 좋지 않아 수술까지 했는데도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빌린 돈을 갚지 못해 괴로워하는 걸 보고 갚아주면 다시 또 술을 마시고 돈을 빌리는 악순환이 계속되어 답답하다는 어머니,
정신분열증과 우울증으로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는데 어떻게 하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 방법을 알고 싶고, 노모한테서도 독립하고 싶다는 부산에서 온 45세 남자분,
우울증으로 아파트 6층에서 투신해 자살을 시도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새 삶을 얻어 티벳불교를 접하였다가 힐링캠프에 나온 스님을 뵈러 한국에 왔는데 직업이 횟집 주방장이어서 살생을 하는 것 같다며 어찌해야 하는 지를 묻는 중국 교포,
폭언과 폭행을 일삼던 남편이 사업이 망해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모습을 보며 안스러워 남편과 아들과 함께 잘 살고 싶은데, 고등학교를 자퇴한 아이 때문에 괴로워 하는 48세의 엄마,
어린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묻는 젊은 아빠,
그리고 청송에 내려와서 함께 농사를 짓겠다는 29살의 아들이 미덥지 못한 엄마의 유쾌한 질문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으로 질문한 분과 스님과의 대화를 옮겨봅니다.
“저는 청송에서 사과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29살된 아들이 직장을 1년 정도 다니다가 사과농사를 같이 짓고 싶다고 합니다. 같이 살면 많이 부딪힐 것 같은데 제가 어떻게 아들을 봐야할지, 수익이 생기면 어떻게 배분해야 할지, 좀 있으면 결혼을 할 것 같은데 같이 살아야 할지, 아니면 제가 따로 나가서 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물었습니다.
“농사일이 할 만 합니까?” 라며 스님께서는 질문을 듣고 몇가지를 다시 물었습니다.
“딸 둘은 각각 외국과 서울에서 잘 살고 있고 남편은 작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현재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아들이 농사에 대해서 잘 알아요?”
“제가 농사를 30년 지었는데 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이 말합니다. 친구나 지인들한테서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아들을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엄마는 사장이고, 너는 종업원이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시키고 네가 3년 간 종업원으로서 성실히 하면 진급도 시켜주고, 대우도 해주겠다. 계산은 종업원으로 월급으로 주겠다. 3년간 너를 지켜본 뒤에 어떻게 할지 결정하겠다고 하시면 됩니다. 한번 종업원으로 채용해 보고, 괜찮으면 계속 같이 하고 아니면 내보내면 됩니다.”
“아들은 자신이 가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아들 생각이지요.(대중들 웃음)”
“제게 가게가 하나 있는데 이것도 해 보고 싶어 하는데 아들에게 줄까요?” 라고 다시 질문합니다.
(스님께서도 웃으시며) “계약서를 쓰세요. 그래도 약간 아는 사람이니까 조금 싸게 해서 계약서를 쓰고 임대해 주세요. 20살이 넘었기 때문에 엄마, 자식이라는 관계로 넘겨주게 되면 원수가 됩니다. 사장-종업원간에 계약서를 쓰면 사장-종업원끼리는 원수가 되어도 이해관계이므로 감정이 상하지 않는데, 그게 정에 끌려서 잘 안 될 것 같으면 아예 남에게 과수원을 맡기거나 파는 게 낫습니다. 이렇게 하면 절대 부모-자식 간에 원수관계가 안 됩니다. 엄격하게 해야 합니다. 이 회사를 넘보지 말고, 이 회사 내에서는 엄마-자식이 아닌 임대를 하는 관계로 해야 합니다. 나는 너를 키워준 것으로 내 할 일은 다 했다고 하시면 됩니다.”라고 하시며 스님께서는 오늘 강연을 전체적으로 정리해주셨습니다.
“자식을 보살피는 것도 부모고, 자식을 망치는 것도 부모입니다.
자신을 안온하게 하는 것도 집이고, 자신을 속박하는 것도 집입니다.
자식을 보살피는 것은 3살 때까지는 100%, 초등학교 때는 70%, 중학교는 50%, 고등학교는 30%, 대학을 들어가면 완벽하게 독립을 시켜야 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다 이렇게 해요.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을 보살펴야 할 때 보살피지 않고, 자립시켜야 할 때 그렇게 하지 않아 자식을 망칩니다.
자식이 부모를 괴롭히는 것이 남편에게서 괴로움 받는 것보다 10배는 더 힘듭니다. 전생의 원수가 부모·자식이 된다는 헛된 말을 믿지 말고, 자식은 부모를 고맙게 생각하고 부모는 자식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낚시를 할 때 맛있는 것을 미끼로 하지요. 쥐약도 쥐가 좋아하는 음식에 놓지요. 그러므로 좋아 보이는 게 사실은 굉장히 위험해요. 쥐가 접시에 맛있는 것이 딱 놓여있으면 ‘이것이 내 것이 아닌데’ 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덥석 물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라, 비굴하지 말고 당당해라’ 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부처이기 때문에 천하 누구에게도 비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어서 당당하라 그러면 교만하고, 겸손하라 그러면 비굴해집니다. 겸손하되 당당해야 합니다. 무엇이든 알이 차야 고개를 숙이고 고개를 숙인 벼는 알이 찬 법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나만 정신 차리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다른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하게 사십시오.”
스님께서는 한분한분 질문하신 분들이 놓치고 있는 점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행복해야 함을 다시 한번 새기게 됩니다.
강연이 끝난 후 스님의 책에 사인을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며 많은 이들이 스님의 가르침에 목말라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인회를 마치고 스님께서는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으시고는 다시 두북으로 이동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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