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4.7. 제1기 통일학교 경주역사기행

 

 

오늘 새벽 230분경 경주에 도착하신 스님께서는 휴식을 취하시다가 오전 9시부터 경주 역사기행 일정에 합류하셨습니다. 오늘은 제1기 통일학교 역사기행이 있는 날입니다. 오늘 기행에는 제1기 통일학교 수강생들과 간부 활동가 등 총 220여 명이 함께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제일 먼저 법흥왕릉에서 입재 법문을 하셨습니다. 법흥왕은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여기 벚꽃길이 좋으니 걸어 다니면서 역사기행을 해야 하는데, 참가자들이 늙어서 버스 타고 다니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셔서 참가자들이 한바탕 웃었습니다.

 

 

오늘 경주 역사기행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첫째, 우리 민족사의 활동무대 가운데 한반도의 동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인 신라가 어떻게 민족사의 주류로 등장할 수 있었는가? 둘째,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국력이 작은 신라가 어떻게 통일의 중심을 형성할 수 있었는가? 셋째,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하지 않은 신라가 통일을 함으로써 민족사 전체로 볼 때 어떤 손실이 있었는가? 우리가 앞으로 통일을 해나갈 때 신라처럼 비약적 발전을 하며 주변 환경의 주역이 될 수 있는지, 이럴 때 역사의식의 부재가 나중에 민족사에 큰 손실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역사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함을 알아보려합니다.

 

신라는 17대 내물왕 때 비로소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신라 천년의 역사 중 절반은 작은 부족국가였습니다. 이때 낙동강 유역에서 6개의 가야는 부족국가 연맹체였으며, 신라보다 국력이 컸습니다. 신라는 기원후 514년 법흥왕 때부터 비약적 발전을 이뤘고, 개혁개방 정책을 폈습니다. 그 당시 신라는 폐쇄적으로 외래문물을 금지하고 불교를 철저히 탄압하고 있었습니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여 내부의 개혁을 통해 신라의 국력을 강화시키고 쇠락해진 가야와의 통일을 논의했습니다. 지난 시간 가야의 침공을 받았지만 무력으로 되갚지 않고, 신라는 가야를 포용하려 했고, 가야 또한 자존심을 끝까지 내세우지 않고 통합에 합류를 했습니다. 신라의 포용 정책의 첫 번째는 가야의 국교인 불교를 수용하고 공인한 것입니다. 이것은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두 번째,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왕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유신 장군같이 뛰어난 인재들을 발굴할 수 있었습니다. 신라가 삼국통일 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들 중에는 가야인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신라는 이처럼 가야와 합의 통합으로, 영토의 확대, 문명의 발전, 인재의 육성으로 비약적인 상승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런 통합은 1+1=2가 아니라 1+1=510이 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동독과 서독의 통일 과정에서 보더라도 서독은 통일 이전에 공산당 활동 등을 인정해 주었고, 연방제가 이미 되어 있었기에 동독은 각 주별로 합류만 하면 되었습니다. 정치적 탄압도 없었고, 당시 동독 화폐 마르크는 서독 마르크의 절반의 가치였지만 동일한 금액으로 교환 해주었습니다. 이로써 동독인들은 두 배의 이익을 보게 되었습니다. 동독은 통일을 통해서 손해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 이후 저항세력이 없었습니다.

 

신라도 율령반포라는 개혁정책과 불교공인이라는 개방정책을 통해 가야와 통합을 함으로써 해서 순식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라가 한반도의 변방에서 주류로 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법흥왕릉은 경주의 외진 곳에 있어 오기가 쉽지 않지만, 통일역사기행을 한층 더 의미 있게 시작하고자 이곳에서부터 출발지를 잡았다는 스님의 말씀을 새기며 통합이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오는지 다시 한 번 가슴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진흥왕릉으로 이동했습니다. 무열왕릉에 주차를 한 후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니 신라왕들의 무덤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초기 왕들의 무덤들이라서 그런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참가자들이 오는 대로 진흥왕릉이 잘 보이는 곳에 둘러앉도록 한 후에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법흥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다음 왕위 계승자는 어머니계로 따지면 법흥왕의 외손자이고, 아버지계로 따지면 법흥왕의 조카입니다.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것이 당시 신라의 최고 순수혈통이었습니다. 형제간에는 결혼을 안 하기 때문에 형제를 제외하고 가까울수록 순수혈통인 성골이고, 멀수록 진골입니다. 성골이 되려면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왕의 자식이라야 합니다. 조선시대 유교방식대로 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신라의 독특한 혈통을 통한 질서유지 방법입니다. 진흥왕의 치세 중 3분의1은 실제로는 어머니인 법흥왕의 딸의 치세입니다. 보통 부모의 유업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은 아들보다는 딸이 더 잘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라는 진흥왕 시절,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나라의 국력이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삼국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황룡사도 이때 지어졌습니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통일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다음왕인 진평왕은 이때 확대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바다 건너 수나라와 외교를 긴밀히 해서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을 막아내었습니다. 땅을 뺏기고 찾고 하는 전쟁을 끊임없이 했습니다.”

 

진흥왕릉을 떠나 태종무열왕릉으로 걸어갔습니다. 진흥왕릉의 규모보다는 더 크고 정비된 왕릉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진평왕이 죽은 뒤 왕위 계승권에 문제가 생기자 내부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김춘추는 무리하게 왕위에 오르려고 하지 않고, 이모를 왕위에 옹립합니다. 그분이 선덕여왕입니다. 이 시절 김춘추가 한 일은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역할을 많이 하였습니다. 특히 선덕여왕 때는 백제 의자왕 초기였는데, 매우 강성할 때였습니다. 신라로서는 백제와 끊임없는 무력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러다 의자왕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내치에 소홀해지면서 백제 내부의 혼란이 가중되던 차에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김춘추는 54세쯤 왕위에 오르고, 재위 시절에 삼국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8년간 재위하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에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태종이라는 칭호는 나라를 굳건히 한 사람에게 부여 합니다. 태종무열왕의 둘째아들 김인문은 당나라와의 외교에 긴밀하게 협조하여 사후에 태대각간이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태종무열왕릉의 비석 받침대인 거북이는 용맹하게 머리를 쳐들고 섬세한 조각으로 몸통이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살아서 움직이듯이 조각됐는데,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있습니다.”

 

 

통일의 기초를 확실히 다진 태종무열왕릉에 삼배를 올리고, 친한 친구이자 처남이며 통일 전쟁의 최고의 조력자인 김유신 장군묘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김유신 장군묘를 가는 길은 경주에서도 소문난 벚꽃명소입니다. 벚꽃이 많이 떨어졌지만, 아직도 화사한 풍경을 선사하여 보는 참가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기나긴 벚꽃터널을 지나 김유신 장군묘에 도착했습니다.

 

김유신 장군묘는 마치 왕릉처럼 울타리까지 둘러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김유신 장군의 묘가 아니라 왕릉이 아니냐는 오해가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신라 말기에 김유신 장군이 흥무대왕이라는 추대를 받았던 점을 감안하면, 왕릉의 규모로 재정비했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가야의 마지막 왕의 증손자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신으로 추앙받는 사람은 김유신이 유일합니다. 김유신은 담이 크고 두려움이 없었다고 합니다. 몰락 왕족의 후예로 신분상의 한계 때문에 김유신의 어머니는 아들의 출세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김유신은 젊은 나이에 화랑으로써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당나라는 고구려에 9개의 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에 1개의 도독부를 설치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한미연합군이 북한을 제패해서 통일이 될 줄 알았는데, 미군이 한국군은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미군정을 실시하면서 북한 사람을 관리로 등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의 옛땅에 주둔한 당나라 군사에 공격을 감행합니다. 그 뒤 나당전쟁이 8년 동안 이어집니다.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였지만,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676,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서 삼국통일을 이룩합니다.”

 

신라의 자주성을 지키는 데 김유신 장군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었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유신 장군이 흥무대왕이라는 칭호에 이어 신()으로 숭상받기에 이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유신 장군 묘를 내려오는 동안에도 여전히 날씨는 쌀쌀하고 추웠습니다. 어느덧 점심식사 시간이었기에 각자 준비해온 도시락을 옹기종기 모여앉아 맛있게 먹었습니다. 각 지역별로 스님과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즐거운 식사를 마친 뒤 사천왕사지와 선덕왕릉, 능지탑으로 이동했습니다. 스님께서는 호국사찰에 얽힌 신라의 자주성과 신라 백성들의 염원을 재미난 전설로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선덕여왕릉에서는 주변국의 조롱도 많이 받고, 내부의 반란도 많았지만 지혜로운 리더십으로 극복해나갔던 선덕여왕을 본받아, 우리 통일의병들도 주위의 비난에 굴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고 하셨습니다.

 

 

능지탑을 지나서 마지막 일정인 황룡사지와 분황사를 향해 이동했습니다. 경주의 곳곳은 만개한 벚꽃의 아름다움이 화사하게 펼쳐졌습니다. 분황사를 바라보며 통일역사기행 회향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작은 신라가 갑자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가야와 합의통일을 하면서였습니다. 신라는 내부적으로 개혁을 하고, 가야의 것을 수용해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법흥왕의 유지를 진흥왕의 어머니인 딸이 잘 계승했고, 손자인 진흥왕이 잘 계승했습니다. 진흥왕의 치적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비견할만합니다. 당시 세계패권국가인 당과 손을 잡아 신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현상을 보면, 현재 남한이 미국과 손잡고 유리한 국면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중국이 부상하면서 불리해 질 수도 있습니다. 남한이 북한을 포용해서 통일을 하면 민족에 번영이 오고, 동아시아의 번영을 가져옵니다.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통일운동은 통일 의지를 가진 좋은 지도자를 만들어야 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정부를 선택해서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의병의 역할입니다. 선택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사람이 잘하고 있는지 감사를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요행을 바라는 방식은 안 됩니다. 통일을 추진할 정부를 구성해서 미·중을 잘 아우르는 외교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변국에 다 이익이 되는 외교 정책이어야 합니다.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을 실현해 가야합니다.

불교는 자기를 행복하게 가꾸는 수행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정토로 가꾸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사는 이곳에 통일국가를 만드는 것이 민족중흥이고, 전 세계인을 위한 보살행을 해 나가는 것이 불교중흥입니다. 우리 후손은 넓은 시야로 넓은 세상에서 활동하도록 우리가 계획하고 기초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경주역사기행을 통해서 우리가 통일을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통일운동에 앞장서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경주역사기행을 마치고 정토회 간부 활동가들 약 200여명은 다시 두북수련원으로 돌아와서 저녁 730분부터는 간부 활동가 수련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자연 속에 살면 꽃이 피는 시기와 어떻게 피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주역사기행을 했지만, 꽃놀이도 겸했습니다. 기분이 좋으셨습니까?”라고 인사를 건네시며 법문을 시작하셨습니다.

 

 

인도 운전수들은 희한하게 푯말이 없는데도, 또 안개가 자욱한데도 길을 잘 압니다. 인간 네비게이션처럼 방향과 남은 거리를 얘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인도는 카스트 사회다보니 운전수도 계급이 있어 어릴 때부터 아버지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한 10년쯤 지켜보다가 운전수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운전을 하려면 차 정비를 먼저 배우고 익힌 뒤에 운전대를 잡게 되니, 본능적으로 운전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릴 때 어떻게 자라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이 빨래나 청소, 일하는 걸 보면 다 큰 대학생인데도 70살 넘은 노인보다 못합니다. 어릴 때 손빨래를 안 해 보니까 백일행자들도 잘 못해요. 사람들의 기본 기능은 잘 쓰면 발달하고, 안 쓰면 둔해집니다. 아이들을 보호한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자립할 수 없게 만든 결과가 된 겁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형성됐느냐에 따라 감정이 일어나고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지, 어떤 선악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과 마음은 어릴 때부터 형성된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것이 업식이고, 까르마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의 노예입니다.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 인생이 이미 정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형성된 것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전생이 있어서 운명이 고정됐다고 봤어요. 그런데 불교는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한 것으로 봤습니다. 제행무상이기 때문에 까르마도 변할 수 있는 것이고, 해탈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진리는 현재 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습니다.

 


 

현재 내가 움직이는 뿌리가 까르마라면,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운 대로, 습관대로 삽니다. 이 사실을 알면 손실이 예측되는 것은 하지 않게 되죠. 또 하기 싫어도 이익이 있는 거면 능히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에 속박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존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형성된 것에 의한 정신작용 또는 마음작용의 문제이므로, 수행문을 늘 정성들여 읽도록 합니다.

 

둘째, 수행자라면 관점이 정확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법을 나에게 적용하면 보약이지만, 남에게 적용하면 비수가 됩니다. 잘 관찰해보면, 정토회원들이 일반인보다 훨씬 포용력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 다른 일반 신도들보다 분별심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정토회는 다른 절에 비하면 천주교나 교회처럼 잘 조직되고 훈련이 되어있어 장점이 있지만 그 잣대로 남에게 적용하기 때문에 분별심이 많을 수 있어요. 그래서 자원활동가들 사이에 다툼이 많습니다. 자기 틀이 강한 사람들은 보통 사회생활에서 만족이 안 되니까, 다른 곳보다 정토회가 맞을 것 같아 활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잣대를 내려놓고 다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늘 분별이 많습니다.

 

변화의 잣대는 나에게만 적용해야 합니다. 내가 어제의 나보다 나아졌는가? 이것이 내 질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들이 까다로운 사람인지 알고 있어요?(웃음) 정토회 활동가들을 보면, 똑똑하지만 분별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어요. 남이 보면 사회활동하면서 봉사도 하고, 주체적이다이렇게 보는 장점이 있지만, 여러분들의 분별심 때문에 일반인들이 정토회에 적응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특히 활동 초심자는 정토회 원칙에 대해 경직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정토회 전체가 경직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모순입니다. 늘 법문에서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수행의 관점을 놓치지 말고, 수행을 기초로 환경 봉사나 통일 운동, 복지 운동을 하는 것이다. 내 마음에 불편함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활동도 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자기 마음에 불편함이 있으면 지치게 됩니다. 그러니 먼저 자기를 봐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정해진 원칙으로 하되, 남에게 강요하지는 말라는 얘기입니다. 마음이 불편해져서 하는 얘기는 내 분별심일 뿐입니다. 우리 활동가들은 일사분란하게 일하고, 원칙을 잘 지켜야 하지만, 법당은 유연하고 부드럽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올해의 과제로 삼고 해보면 좋겠습니다.”

 

스님께서는 간부활동가들에게 수행이 무엇인지, 수행자로서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길고도 상세하게 다시 일러주셨습니다. 수행의 원칙은 철저히 나에게 적용하되, 일반인들은 포용하면서, 정토회를 찾는 모든 분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바른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하라는 스님의 당부 말씀을 깊이 새겼습니다.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활동가들의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올해부터 불대수업 중에 30분 정도 봉사를 해보는 방식을 시행 중인데, 저녁 반은 시간이 길어져서 어려움이 있다는 질문, 가을불대 등은 중간에 봉사 30분을 하는 것으로 바꿔서 불만이 있다는 질문, 정초 순회 법회 때 사회자 멘트를 급하게 수정하거나 또 밴드 방을 갑자기 폐쇄해서 불만을 제기받았다는 질문, 사시예불을 하는데 다른 행사가 옆에서 열리는 바람에 예불에 방해를 받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는 질문, 출가열반재일 기도 때 300배 정진을 다 못하시는 분들에게 어떻게 안내를 해줘야 하는지 궁금하다는 질문 등 실무 차원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들을 허심탄회하게 쏟아내고, 말씀을 듣는 자리였습니다.

 

 

법당에서 중요한 소임을 맡아 그만큼 열심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느꼈던 답답함과 고충들이 여실히 느껴졌습니다. 질의응답시간은 예상보다 뜨거운 열기 속에 두북 수련원의 밤이 깊도록 끝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내일 수련 일정을 진행해야 하므로, 아쉬움을 접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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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우리 후손은 넓은 시야로 넓은 세상에서 활동하도록 우리가 계획하고 기초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gt;&gt;<br />&lt;인도에서는 전생이 있어서 운명이 고정됐다고 봤어요. 그런데 불교는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한 것으로 봤습니다. 제행무상이기 때문에 까르마도 변할 수 있는 것이고, 해탈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진리는 현재 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습니다.&gt;

2015-04-12 18:55:45

이규원

스님의 역사기행은 살아있는 생생한 현실로 느껴지게 만들고 반성하고 지혜를 주십니다. 더좋은대안들을 논리적으로 제시해주시니 밝은 미래와 책임감을 가지고 주체적으
로 잘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2015-04-10 15:23:27

주디

스님 감사합니다.

2015-04-09 13:2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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