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4.4.청년경주역사기행


 

 

새벽 기도를 마치자 어느새 동이 튼 두북수련원의 아침은 만개한 벚꽃들로 절로 탄성이 터집니다. 스님께서는 답사를 다녀오겠다시며 이른 아침부터 길을 나섰습니다. 어젯밤 늦게 도착한 서울 공동체 대중들을 위해 개나리, 진달래, 벚꽃구경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를 알아보려고 바쁜 시간 또 짬을 내시는 겁니다. 내일 울력 할 탑곡수련원에도 들르시고, 어디에 볼거리가 있을지 여기저기 둘러보셨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신 스님은 서울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오늘 있을 청년정토회 역사기행 장소로 이동하셨습니다. 두북수련원에서 경주 태종무열왕릉 쪽으로 가는 동안, 스님께서 타신 차량이 선두에 섰습니다. 평소라면 짧은 직선거리를 택했겠지만, 오늘은 왠지 돌아가는 길로 들어섰는데 온 길가에 벚꽃나무들이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어있습니다. 스님께서는 벚꽃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택하신 겁니다. 대중들은 끝도 없이 물결처럼 장관을 이루는 벚꽃나무에 정신없이 기뻐하며, 여기저기서 웃고 박수치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습니다.

봄만 되면 가요순위 1위에 오르는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을 따라 부르다가 올라가는 음이 너무 어려워 삑사리가 나자 다시 또 한바탕 웃습니다. 소풍 나온 어린아이들의 심정이 되었습니다. 한 도반이 우리 스님께 감사함을 표하자며 스님께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대중들의 환호성과 함께 스님 감사해요”, “스님, 정말 벚꽃이 멋져요너도나도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시끄러워서 잘못 걸려온 전화인줄 알고 끊어버리는 바람에, 나중에 음성녹음을 해서 보내드렸습니다. 공동체 대중들의 환호성을 들으신 스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태종무열왕릉에 도착하자 청년정토회 스탭들과 청년대학생 참가자들이 벌써 와 있습니다. 역시 봄날 벚꽃에 어울리는 밝고 화사한 청춘들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모여 있습니다. 역시나 청년 대학생들도 들떠있는 분위기입니다.

태종무열왕릉 앞에서 스님과 서울, 인천, 부천, 분당 수원, 청주, 대전, 광주, 대구, 포항, 부산, 울산, 진주, 창원 등 총14개 지역에서 온 청년 316명이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법륜스님께서는 행사에 앞서 "원래는 대학생을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었는데, 점점 연령대가 올라가고 있어요. 여기 대학교 신입생 손 들어봐요. 몇 명 안 되잖아. 그러면 대학생 손들어 봐요. 뭐라고? 불교대학생이라고? (웃음) 그러면 불교대학생들 손 들어봐요. 와 많네. 그런데 35살까지는 어떻게 청년이라고 봐주겠는데, 서른다섯 살이 넘는 사람? (웃음) 네 모두들 멀리서 오시느라 수고 하셨어요. 오면서 꽃을 정말 많이 봤는데 오늘은 봄 꽃 나들이 반, 역사기행 반이라고 생각하고 기행합시다라고 말하시며 일정을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일정은 무열왕릉-진흥왕릉-김유신장군묘-사천왕사지-선덕여왕릉-능지탑-황룡사지-분황사로 예정돼 있습니다.

 

 

무열왕릉과 진흥왕릉에서는 작은 부족 국가였던 신라가 어떻게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는지, 특히 신라와 가야의 통일 과정에서 오늘날 우리가 남북통일에 참조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에 설명해주셨습니다. 진흥왕릉은 작년까지 가보지 못했지만 올해 새로 단장해서 가보았는데, 처음에는 진지왕릉이 진흥왕릉인줄 알았습니다. 통상적으로 선대의 무덤이 위에 위치한다는 스님 말씀에 이제부터는 무덤의 위치도 눈 여겨 봐야겠다 싶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신라가 금관가야와 통합을 하게 되면서 한 단계 도약하게 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법흥왕은 금관가야와 통합하면서 가야의 종교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가야의 왕족 또한 신라의 귀족으로 차별 없이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차 부족국가에서 영토 확장은 물론 수준 높은 철기문명을 이뤘던 가야문명으로부터 직수입한 문화로 한 층 도약하는 계기를 이루게 됩니다. 또 훌륭한 인재들이 보다 많아져 삼국통일의 기반을 이루게 됩니다. 1+1=2가 아니라 5가 되고 10이 되는 선례를 남긴 자랑스러운 통합의 역사입니다. 굳이 우리가 동서독 통일만 공부할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도 배울 점이 뚜렷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배웠습니다.

이후 스님과 청년들은 흥무공원까지 40분 정도 벚꽃이 만발한 벚꽃터널길을 걸었습니다. 김유신 장군묘에 도착해서 삼배를 드린 뒤, 옹기종기 모여앉아 또 스님의 재미난 옛날 얘기를 들었습니다.

 

 

세상 어머니들에게 만약 아들을 낳는다면 김유신 같은 아들을 낳으라고 할만큼, 그 어머니에게는 정말 엄청난 효자였습니다. 그런데 애인 입장에서는 어떨까? 천관이라는 애인과의 얘기 알아요?”

기생 천관녀와의 일화는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만큼 아주 유명하지요. 그렇지만 스님께 다시 들어도 재미납니다. 한때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내던 젊은 유신에게 어머니가 엄하게 훈계를 하셨다죠. 유신은 어머니 말씀에 각성하고 술도 끊고 갑자기 여자의 집에 발길도 끊었다고 합니다.

“(애인한테) 사정이 이러이러하게 됐다 이렇게 미리 말을 해주면 좋을 텐데, 김유신 장군은 어떻게 했어요? 어느 날 발을 딱 끊어버린 거야. 그러다 어느 날 술 먹고 취해서 말을 탔는데 그 말이 자연히 여자 집으로 간 거야. 여자는 아주 반가운 마음에, 어때요? 신발도 안 신고, 요즘 말로 하면 버선발로 뛰쳐나가 그리운 사람이니까 안으로 들였겠지. 나중에 유신이 술에서 깨고 보니, 그 여자네 집인 거야. 갑자기 칼을 빼 들어서 말의 목을 탁 내리쳐버린 거야. 아무 말도 안 해. 그 길로 뒤돌아가서는 다시는 안 나타게 된 거지. 여자 입장에서 보면 좋은 남자여, 나쁜 남자여? (나쁜 남자요.) 그래, 어머니한테는 세상 둘도 없는 좋은 아들인데, 여자한테는 아주 못 된 남자인 거야. 김유신이 말의 목을 단칼에 베 버릴 정도로 그런 단단한 성정이 있었던가 봐요.”

 

 

 

나중에 천관녀가 좌절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자, 김유신 장군이 천관녀의 원혼을 달래주려고 절을 지었는데, 바로 천관사라고 합니다. 전해 내려온 이야기가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김유신 장군의 단호한 성격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천관녀와의 설화보다, 후세에 신하로서는 처음으로 흥무대왕이라는 칭호까지 받을 만큼 통일신라를 건설하는 데 김춘추 태종무열왕과 함께 혁혁한 공을 세웠던 김유신 장군이 사실은 가야 출신이라는 점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신라는 피를 흘리지 않고 금관가야와 통합하면서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장군을 얻은 것입니다. 끝까지 신라에 항전했던 대가야는 무력으로 짓밟히면서 역사의 흔적도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과 대조적이죠.

 

 

또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와 8년 동안 전쟁을 할 때도 김유신 장군의 결단력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당시 김유신 장군의 대 당나라 전쟁에 대해 지금으로 치면, 한미연합군이 북한을 무력으로 제압했는데 미국이 물러나는 게 아니라 미군정을 실시하려고 한 것과 같아요. 그럼 과연 남한에서 미국과 싸워서라도 북한을 찾아야 한다고 나설 장군이 있을까?”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모두들 아니오라고 대답했습니다. 당나라에 항전했던 김유신 장군의 결단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민족사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역사의식이 없었으므로 삼국통일이 신라에게는 성공이지만 민족사 전체로 볼때는 우리 민족사를 한반도 내로 축소시켜 버린, 그래서 대륙의 변방으로 전락한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또 고구려의 을지문덕장군, 백제의 계백장군, 신라의 김유신 장군은 어쩌면 당시에는 상대국에 철천지원수였겠지만, 지금 우리 후손들에게는 각각 훌륭한 장군들이고 다 우리의 조상인 것처럼, 남북한에서 기리는 군인들도 지금은 서로 원수지만 나중에 통일이 되면 다 존경받는 군인들이 되지 않겠느냐고 비유해주셨습니다. 통일이 되면 정말 우리의 인식 체계가 확 바뀌겠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재미나게 스님 말씀을 듣다보니 어느덧 점심식사 시간이 지났습니다. 청년 대학생들은 김유신 장군묘 아래에 있는 흥무공원에 돗자리를 펴고 점심식사를 하고, 각 모둠별로 모여 스님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약간 날이 쌀쌀해지면서 슬슬 몸이 떨려오기는 했지만 즐거운 점심식사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천왕사로 향했는데 전국 관광객들이 경주로 모여들었는지, 도로에 차량들이 거북이걸음으로 가면서 주차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예정 시각보다 많이 늦게 사천왕사에 도착했습니다.

사천왕사는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이 깨지면서 당나라로부터 신라를 지키기 위해 건립된 호국사찰입니다. 이곳은 명랑법사와 12명의 유가승들이 신과 부처님의 힘을 빌어 기적을 만드는 문두루 비법을 행했다고 전해집니다. 명랑법사와 12명의 유가승이 행한 문두루 비법의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신라를 침략하려던 당나라군 20만 명은 신라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서해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수장됐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신라가 당나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했지만, 민족의 자주적 입장에서 당나라와 협력한 최소한 우리의 이익을 지켜내는 신라의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통일을 하게 되면 다른 외세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자주성을 지켜내면 좋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사천왕사지에서 낭산 중턱으로 이어진 산길을 걸어 올라가니 선덕여왕릉이 나왔습니다. 선덕여왕은 왕위에 오른 후 국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덕여왕만의 리더십으로 인재를 육성하고, 황룡사 9층탑과 첨성대와 같이 후대에 길이 남을 훌륭한 건축물을 남겼습니다. 선덕여왕에 대한 지혜로운 이야기 세 가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선덕여왕릉을 지나 언덕을 내려오니 능지탑이 나왔습니다. 능지탑은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문무대왕의 유언에 따라 화장 후 유골은 동해바다 대왕암에 묻고 재를 모아 이곳에 탑을 쌓았습니다. 능과 같은 탑이라 하여 능지탑이라 이름 지어진 곳입니다. 이런 능지탑은 발해 외에 신라에는 이곳밖에 없다고 합니다.

부쩍 차가워진 날씨에 하루 종일 강의를 듣다보니 청년들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며 스님께서는 황룡사지까지 걷지 말고 버스를 타고 가자고 하셨습니다. 스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청년들이 환호하며 버스로 향했습니다. 황룡사지에 도착하자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황룡사지에 허허벌판뿐이었지만, 스님 말씀을 듣다보니 신라의 9층 석탑을 보는 것처럼 생생히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곧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마치 한여름 집중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황급히 분황사지로 이동했지만 더 이상 강의를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굵은 비가 세차게 쏟아져서 분황사는 아쉽게도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비소식이 예고된 터라 다들 우산과 비옷을 꺼내들긴 했지만, 워낙 세찬 비라 다들 바지와 신발이 젖어 추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서둘러 버스에 올라탄 청년 대학생들은 저녁식사와 마지막 일정을 하기 위해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다들 하루 종일 걸었던 터라 배가 고팠던지, 거의 남김없이 밥을 쓱싹쓱싹 다 비우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녁 730분부터는 강당에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법륜스님과 함께 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몹시 노곤했을 법도 한데, 청년들은 기대되는 얼굴로 스님의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이날 질문에는 조선소에서 일하는데 사람들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된다는 분, 욱하는 성질을 고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분, 엄마의 집착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려는데 망설이고 있는 분, 역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에 대해 궁금한 분, 출가하면 세속과 다른지 묻는 분, 사회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결 하면 좋을지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중 역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소개해드립니다.

역사 문제가 나오면 늘 하는 말인데 일제시대 때 태어난 학생이 소학교에 들어가 수석을 해요. 이 아이 꿈이 인생을 성공시켜보는 건데, 시골에서 자라 도시 중학교까지 가서 1등을 해요. 대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서도 1등을 해요. 서울 경성대학교를 가서도 1등을 하고, 학교 다닐 동안 고시를 거쳐 졸업하자마자 지방의 검사나 군수가 되면 옛날에 영감이라 불렀는데 더 열심히 해서 서른도 안 돼 지검장이 되요. 그러면 시골에선 완전 출세한 사람이지.

근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나라가 해방이 됐어. 어제 저녁까지 성공한 인생이 오늘 아침에 실패한 인생이 돼버렸어요. 친일매국노가 돼버린 거지. 일제치하의 지검장 정도면 일제 앞장이 중 핵심인물이잖아요. 근데 이 사람이 남을 때린 것도 아니고 죽이거나 욕한 것도 아니고 술 먹고 행패부린 적도 없어요. 개인적으로는 아무 잘 못을 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근데 왜 어제 저녁까지 대성공을 거둔 사람이 오늘부터 비난받는 인생이 되느냐? 옛날식으로 얘기하면 사주에 그렇게 되었다. 전생에 과보를 받았다그리 생각할 수 있잖아요. 달리 설명이 어렵잖아요.

하지만 이게 설명이 되는 게 역사의식이에요. 일제시대에도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 인생의 과제가 있었어요. 농부, 학생, 장사하는 사람 등 각 개인은 나름대로 삶의 과제가 있었지만 3천만 민중의 공통된 과제는 나라의 독립이었습니다. 내가 밭을 일구는 농부라도, 장사를 떠난 장돌뱅이라도, 기생이라도 그 누구라도 나라의 독립이 되어야 한다 했지요. 일본의 지배에 이익을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전체에겐 손해였지요.

 

우리 모두 해결해야할 과제를 이 시대의 시대적 과제라 하는데 공동체의 일원인 나는 두 가지 존재인거에요. 내 개인의 인생도 있지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내 삶도 있는 거예요. 나라가 잘 되면 나도 덕을 보는 거죠. 이게 왜 이럴까? 개인 윤리로는 설명이 안 돼요. 구성원으로서 나의 존재 방식이니까 그래서 내가 사는 방식이 전체가 나아가는 방향과 같은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시대의 과제를 환경문제라 보면 내가 많이 벌고 많이 쓰는 게 역방향이 될 수도 있는 것과 같아요. 만약에 앞에 말한 사람이 일반 범죄는 법대로 벌을 주는 등 자기역할을 하지만, 독립운동과 관계되면 형을 감해주거나 자기 나름대로 풀어주는 방법을 찾아볼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잘못하면 배신자로 찍혀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렇게 할때 독립이라는 방향에 동참할 수도 있어요. 역사의식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근데 역사의식 없으면 눈앞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게 됩니다. 자기가 예측할 수 없는 불행을 자초하게 되죠. 남이 보면 그 불행이 당연한데. 본인은 억울할 수가 있지요. 그렇다고 당장 그만두라는 아닙니다. 그만 두고 안 두고는 개인의 선택문제죠.

 

그래서 첫 번째 자기 인생의 목표를 두고 성취해야합니다. 두 번째 공동의 과제를 두고 거기에 기여하는 길에 동참해야 합니다. 빈곤할 땐 경제건설을 하고 억압받을 땐 민주화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공동의 과제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지금은 뭐냐. 남북한의 평화로운 통일에 기여하는 일이 바로 공동의 과제입니다. 직장 그만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웃음). 직장에서 개인의 삶과 동시에 역사의식만 있으면 자기분야에서 열심히 하면서 통일에 동참하면 전체 공동체에서 순기능으로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꽃놀이 간다고 해놓고 비 맞아가면서 공부 너무 많이 해서 속은 기분이에요?(아니요) 혹시 추웠다, 속았다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면 좋은 일입니다.”

 

질문자들의 진솔한 자기 얘기와 스님의 재기 넘치면서도 지혜로운 말씀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덧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바깥에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 도반의 언니네 가족이 부산에서 달려와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울공동체 식구들을 위해 먹거리를 준비해오셨는데, 마침 스님께 인사를 여쭙고 가려고 늦은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서울 공동체 대중들에게 즉문즉설을 듣다가 저녁이 깊어지면 보문단지에 가서 아름다운 벚꽃 야경을 구경하라고 하셨는데, 비가 많이 내려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스님의 즉문즉설을 늘 영상으로만 보다가 현장에서 재미나게 들을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봄날 벚꽃의 향연을 만끽한 하루를 보내서인지 다들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이렇게 스님의 일정은 일찍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전체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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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남

이렇게 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시대정신. 각성하게 됩니다.

2015-05-11 11:23:24

^^^^

옷자락을 날리시는 법륜스님 너무 멋있네요^^벚꽃구경 하나에도 들뜨고 너무도 감사해하시는 정토회대중분들 모습이 웬지 짠~합니다 ㅠㅠ그곳에서 고생하시는 분들께 좋은 새옷도 신발도 사드리고 싶은 마음이네요ㅎ <br />&lt;....공동체의 일원인 나는 두 가지 존재인거에요. 내 개인의 인생도 있지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내 삶도 있는 거예요.&gt;

2015-04-12 01:12:24

무심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부쩍 의식이넓어져감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2015-04-06 11: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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