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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카시아 석가족 수련 1일째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께서는 가야에서 이따와로 이동하셔서 상카시아 석가족들을 위해 수련을 해주셨습니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1박2일 동안 상카시아 인도 절에서는 석가족들 100여명이 모여 스님과 함께 수련을 하는데 오늘은 그 첫 번째 날입니다.
▲ 가야에서 상카시아로 가는 기차
새벽1시30분에 이따와 역에서 도착 예정이였던 기차는 예상했던 대로 밤새 서행을 하더니 5시간이 연착되어 아침6시30분에 이따와 역에 도착했습니다. 스님께서는 기차 안에서 휴식을 취하시다가 새벽4시30분에 일어나셔서 명상을 하셨습니다.
▲ 기차 안에서 명상 중이신 스님
이따와 역에 도착하니 석가족 청년회(YBS) 회장인 수바스지가 아들과 함께 마중을 나와 반겨주었습니다.
▲ 기차역에 마중을 나온 석가족 청년회 회장 수바스지
차량을 타고 수바스지의 집으로 가서 짜파티와 사부지, 달로 아침식사를 한 후 8시30분에 출발하여 오늘 개원법회 및 불상 점안식이 있는 메인뿌리의 산띠뿌르 마을까지 1시간20분 동안 차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산띠뿌르 마을에 새로 개원한 법당에 스님께서 도착하자 인근 지역의 스님들 30여분과 마을 주민들은 스님께 합장을 하거나 스님의 발에 손을 대는 방식으로 공경의 예를 표하며 스님을 정성껏 맞이해 주었습니다.
▲ 법당 입구에서 긴 줄로 나란히 서서 환영해주는 스님들과 마을 주민들
먼저 스님께서 한국식으로 간략하게 점안식을 하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며 예불을 하시고 난 후 이곳 산띠뿌르 법당과 마을 주민들을 위해 축원을 해주셨습니다.
▲ 산띠뿌르 마을 개원법당 점안식
이어서 인도 스님들이 인도 방식으로 예불을 올렸습니다. 점안식을 마치고 난 후에는 스님께서 참석자들이 잡고 있는 오색 실을 가위로 끊어주셨고, 참석자들은 끊어진 오색 실을 서로에게 묶어주면서 서로의 행복을 기원하는 예를 표했습니다.
▲ 오색 실을 잘라주는 스님
법당 밖으로 나와서는 스님께서 마을 주민들을 위해 법당 개원 기념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쁘리앙카님의 통역 덕분에 마을 주민들은 스님의 법문을 듣고 모두들 기뻐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새해 잘 보냈습니까? 지난 한해의 근심걱정은 다 잊어버리시고 올해 새해에는 좋은 일만 있으시길 바랍니다.
▲ 석가족 산띠뿌르 마을 법당 개원법회
오늘 이곳 산띠뿌르 마을에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담마로꼬 쁘라까스 실 보드 비하르’ 라는 새로운 절이 생겼습니다. 부처님도 새로 모셨습니다. ‘로터스 수투라’라고 하는 경전에 보면 어린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모래로 부처님 얼굴을 그리고 탑을 쌓아도 큰 공덕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금방 없어질 모래로 만든 것도 아니고 이렇게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신 것은 그것보다 수천배 더 공덕이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절을 지을 수 있도록 많은 도네이션을 해주신 분이 실소만 스님이십니다. 그리고 담마실 스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분들께 박수 부탁드립니다. 이 절을 책임 맡으신 분은 보드 길라얀 스님이십니다. 박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점안식을 위해 30여분의 스님들도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환영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부처님이 계실 때는 우리는 부처님께 경배를 했습니다.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는 우리가 경배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대신에 보리수 나무를 경배하기도 하고, 부처님의 발바닥 무늬를 경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부처님의 모습을 그리거나 조각한 불상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저 불상은 돌로 만든 조각입니다. 조각이 부처님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같이 생긴 조각을 부처님으로 여기는 의식인 ‘점안식’을 하는 것입니다. 점안식을 하기 전에는 조각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 점안식을 하고 나면 비록 돌로 만든 조각이지만 부처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점안식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불법승 삼보를 먼저 청합니다. 그래서 이 불상 속에 부처님의 기운이 들어가도록 요청합니다. 그럴 때 다른 잡귀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붉은 팥을 뿌려서 다 쫓아냅니다. 그리고 덮어쓴 천을 벗깁니다. 부처님의 미간에 부처님의 지혜의 광명이 깃들도록 점안을 합니다. 눈을 뜨게 한다 이런 의식입니다. 점안을 하면 비록 돌로 만들어진 불상이지만 오늘부터는 부처님처럼 그 앞에서 경배를 해야 합니다. 이제 자주 자주 찾아오셔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겠어요? (네)
그리고 오색실을 쥐고 있으셨는데 오색실은 불교기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으로부터 여러분을 모두 연결해서 부처님의 기운을 받도록 한 것입니다. 그 오색실을 손목에 묶고 있으면 올 한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는 종교 의식입니다.
부처님은 2600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셔서 45년 동안 이 나라 저 나라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시며 교화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부처님의 종족은 육체적으로는 대를 이어서 지금의 여러분들에게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부처님의 육체는 받았는데 부처님의 마음은 잃어버렸습니다. 붓다 담마는 없고 힌두의 믿음만 마음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 담마는 석가족이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계속 퍼져나갔습니다. 한국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2천년 전에 들어왔습니다. 그 때 인도에서 담마를 전하는 스님이 한국까지 와서 전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몸은 석가족이 아니지만 붓다 담마는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이 몸둥이가 석가족인 것이 진짜 석가족이예요? 붓다 담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진짜 석가족이예요?"
"붓다 담마를 가진 사람이요"
"그럼 여러분은 석가족이 아니예요?"
"석가족 맞아요"
"이 몸둥이가 중요해요? 사람 마음이 중요해요?"
"사람 마음이 중요해요"
"그러니 몸둥이만 석가족이라고 해서 석가족이라고 하면 안돼요. 반쪽 밖에 안돼요. 마음 속에 붓다 담마를 가져야 진짜 석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사무지가 헤? (웃음)
▲ 스님의 법문을 듣고 기뻐하는 석가족 산띠뿌르 마을 주민들
그러니 여러분들이 진짜 석가족이 되려면 붓다 담마를 공부해야 돼요. 붓다 담마를 공부 안 한 사람은 “너 성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석가족이다” 라고 대답하면 안돼요. (웃음)
오늘 절도 새로 생겼고 스님들도 이렇게 계시니까 이제 붓다 담마를 공부하셔야 해요. 알았지요? 절에 가서 붓다 담마는 공부 안하고 기도만 하면 힌두와 다른 차이가 없어요. 여기 절을 지은 이유는 붓다 담마를 공부하라고 지은 것입니다. 붓다 담마를 공부하겠다고 약속 하시겠어요? (네)
오늘 절을 개원하는 것을 기념해서 제가 이곳에 온 것은 개원식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여러분께 붓다 담마를 꼭 공부하라고 이야기해주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진짜 석가족이 되려면 몸만 석가족이 아니라 붓다 담마를 가슴에 안아야 합니다.”
이렇게 스님께서는 석가족 마을 주민들에게 여러차례 반복해서 강조하며 붓다 담마를 공부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4대 성지와 8대 성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면서 인도에 살면서 부처님의 성지를 순례히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스님의 감로의 법문을 듣고 마을 주민들은 모두들 큰 박수를 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법문 후 스님께서는 석가족 마을 주민들에게 생활 형편이 어떤지 파악하기 위해 몇가지 질문들을 하셨습니다.
▲ 주민들의 생활에 대해 물어보시는 스님
“농사를 얼마나 지어요?”
“5비가 지어요”
“농사 그만큼 지어서 생활이 괜찮아요?”
“생활이 어려워요 감자, 마늘, 쌀, 밀 농사를 지어도 값이 낮아서 남는 것이 없어요”
“소를 빌려서 키우기도 해요?”
“네”
“소를 나중에 어떻게 해요?”
“팔아서 생긴 이익을 주인과 반반 나누어요”
“돈을 빌리면 이자를 얼마 갚아야 해요?
“월 5%입니다.”
“비싸지 않아요?”
“비싸요”
“그러면 열집이나 스무집이 힘을 합쳐서 수확한 농산물을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값이 오를 때 판매한다든지, 비료를 스무집이 한꺼번에 구입한다든지 하면 좀 싸게 구입할 수 있잖아요. 공동 판매하면 조금 더 비싸게 팔 수도 있고요”
“그러면 좋은데 단합이 잘 안돼요”
이곳 상카시아 석가족 마을에서도 스님께서는 둥게스와리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협동조합을 통한 주민생활의 개선에 많은 고민을 하고 계셨습니다. 둥게스와리에서 모델이 빨리 만들어지게 되면 이곳 상카시아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 짜파티를 만들고 있는 부녀자들
▲ 뿌리를 만드는 남자들
그리고 부녀자들은 집집마다 나무판과 막대기를 가져와서 법문을 들으면서 짜파티를 만들었고, 또 한쪽 편에는 남자들이 짜파티를 기름에 튀기며 뿌리를 만드는 등 정성껏 요리를 해서 스님 일행에게 점심 식사를 대접해 주었습니다. 유미죽도 아주 달콤하고 맛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참석한 스님들 한분 한분에게 거마비를 드리고 마을 주민들과도 인사를 한 후 산띠뿌르 법당을 나왔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스님께서 차를 타고 떠나실 때까지 정성껏 배웅을 해주었습니다.
차를 타고 곧바로 오늘 석가족들을 위한 수련을 진행할 상카시아 인도 절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2시쯤 절에 도착하자 이곳 주지인 담마빨 스님을 비롯한 미리 도착한 석가족들이 스님 일행을 반겨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잠시 인사만 하고 오늘 숙소로 잡은 근처의 미얀마 절에 짐을 내린 후 오후 3시에 다시 인도 절로 와서 석가족들과 함께 수련을 하셨습니다.
석가족들은 스님을 뵙자 스님의 발에 손을 대고 엎드려 절을 하며 스님께 공경의 예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가야에 있는 석가족 청년들도 김정준님과 함께 15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이곳까지 와서 “수련에 참가하러 왔다”고 하면서 스님께 삼배를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법문을 시작하시면서 먼저 다들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보셨습니다. 메인뿌리, 이따와, 까노즈, 에따, 가야 등 곳곳에서 많은 석가족들이 참석했습니다. 특히 가야에서 온 석가족들은 스님께서 멀리서 왔다고 특별히 소개를 시켜 주셔서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들 직업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셨는데, 대부분 농사 짓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사업하시는 분, 학교 선생님, 공무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 스님을 법문을 듣고 있는 석가족들
스님께서는 1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하시면서 첫 번째 법문에서는 불교가 어떤 면에서 다른 종교와 다른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무한한 힘을 가진 신이 있고 미약한 인간이 있는데, 미약한 인간이 무한한 신의 도움으로 구원을 얻는다. 대부분의 종교는 이런 시스템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신의 도움을 얻는 의식이 ‘푸자’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이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불교와 힌두교만 다르고, 불교와 크리스천만 다른 것이 아니고, 불교는 모든 종교와 근본적으로 그 입장이 다릅니다.
부처님은 브라만교의 가르침에 대해 의문이 생겼어요. 정말 이 세상 만물을 신이 만들었을까 이런 의문이 생겼어요. 신이 만들었다고 하면 그럴 듯 안해요? 현대 사회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아요. 과학을 배우고 우주를 공부하고 인공위성이 날아다니는 이런 시대에도 아직도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부처님은 2600년 전에 이미 ‘이건 아닌 것 같다’ 고 생각하셨어요. 그 당시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겠어요?
두 번째는 사람이 진짜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이렇게 종자가 다른 것일까, 이것에 대해서도 부처님은 의문이 들었어요. 그 당시에는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하다고 여겼는데 부처님은 남자와 여자가 왜 차이가 있을까 이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셨어요.
세 번째는 사람이 죄를 지어놓고 제사 지낸다고 그 죄가 없어질까 이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셨어요. 강가강에 가서 목욕을 하면 죄가 없어진다고 하는데 목욕한다고 죄가 없어지는가 이런 생각이 든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행복해지고 불행해지는 것은 운명을 좌우하는 신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든 것입니다.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문제아 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왜 그런가?’ 계속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브라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그만두고 집을 나와서 출가 사문들의 무리 속으로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극심한 고행을 했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았습니다. 출가하기 전에는 욕망을 늘 따라갔고, 출가한 후에는 욕망을 무조건 억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욕망을 따라가는 것과 억압하는 것이 정반대인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욕망에 대한 대응이라는 측면에서는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욕망에 일체 반응을 하지 않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새로운 길을 발견합니다. 붓다가 발견한 길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로 쾌락과 고행을 떠난 제3의 길 ‘중도’입니다. 그것은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욕구를 다만 알아차릴 뿐입니다. 참는 것과 알아차리는 것은 다릅니다. 참는 것은 저항을 하는 것이고, 알아차림은 모든 긴장을 내려놓고 ‘그런 욕구가 있구나’ 하고 다만 알아차릴 뿐인 것입니다. 즉 욕구를 따라가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고 다만 알아차릴 뿐입니다.
즉 ‘담배를 피우고 싶구나’ 하고 알아치리고 있다는 것은 담배를 피운다는 얘기예요? 안 피운다는 얘기예요? (안 피운다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구나’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은 참고 있는 거예요? 안 참고 있는 거예요? 알아차림이 있어야지 참으면 안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고 싶은 대로 하든지 참든지 두 길 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니르바나로 가는 길은 이 두 길을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알아차림입니다.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모든 의문이 다 풀렸어요. 이 세상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서로 연관되어 존재할 뿐입니다. 즉, 이 세상을 신이 창조했다는 것을 부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가 서로 다른 종자라는 것도 부정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똑같은 사람이예요. 어떻게 사고의 습관을 들였느냐, 즉 왕자로 훈련시켰느냐, 브라만으로 훈련시켰느냐, 노예로 훈련시켰느냐, 하는 의식의 차이에 의해 나눈 것이지 모두 똑같다는 것이죠. 남자다 여자다 하는 것도 서로 다를 뿐이지 높고 낮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계급제도를 부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괴로운 것은 신의 벌이 아니고, 인간이 행복한 것도 신의 축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을 누군가가 조정하는 아무런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괴로움은 우리의 무지에 의해서 형성된 까르마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지 누군가가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수행을 통해서 이 무지를 깨뜨려야 니르바나를 증득하는 것이지 푸자를 지낸다고 니르바나를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과 인간 사이에서 제사를 지내주는 사제 계급도 필요없어 지는 것입니다. 붓다 담마 안에는 브라만도 없고 크샤트리아도 없고 바이샤도 없고 수드라도 없고, 그냥 수행자 딱 한가지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것도 위대한 것이지만, 그 당시의 브라만 사회에서 부처님의 법을 전파해서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것도 위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그 가르침을 따랐다는 것도 정말 위대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교에 귀의한다고 할 때는 나무 붓다, 나무 담마, 나무 상가, 이렇게 삼보에 반드시 귀의해야 해요. 한번 따라해 보세요.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네.’
중요한 것은 붓다 담마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운명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돈이 있어도 행복하고, 없어도 행복해야 합니다. 가족이 죽어도 행복하고 살아도 행복해야 합니다. 결혼해도 행복하고 혼자 살아도 행복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행복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무려 3시간 동안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모두들 스님께서 들려주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귀기울여 들으며 불교가 어떻게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차” 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습니다.
이어서 저녁식사 및 휴식 시간을 가진 후 저녁7시30분부터 다시 수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녁에는 방금 전 낮에 스님 강의를 들으면서 또는 평소에 붓다 담마에 대해 궁금하던 것들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스님께서는 석가족들이 편안하게 질문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열어주셨습니다.
“제가 작년 8월부터 세계 115회 도시 강연을 했습니다. 매일 한 도시씩 바꿔가면서 115일 동안 강연을 했어요. 세계는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옛날 생각만 하고 살면 안돼요. 유럽이나 아메리카는 부처님 당시와 비교하면 모두 왕족처럼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그들은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먹는 것도 충분하고 집도 좋고 차도 좋고 옷도 좋고 사회 시스템도 좋고, 옛날과 비교하면 이상세계라고 할 만큼 아주 좋아졌어요. 그러나 인간의 괴로움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기독교만 가지고는 그 사람들의 정신적인 고뇌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붓다 담마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왕자로써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는데도 고뇌가 있었고 그런 조건에서 이 고뇌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찾았기 때문에 지금 현대인들의 고뇌와 문제의식이 같습니다. 이 고뇌는 대부분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이 정신적인 고뇌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가장 깊은 연구가 된 것이 붓다 담마입니다.
아마 인도에서도 앞으로 경제적으로 잘 사는 사람들에게 붓다 담마가 새롭게 요구될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붓다 담마를 공부하면 첫째 자기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고, 둘째는 앞으로 여러분들이 해외에 나가 다른 나라 사람들과 교류를 하게 되면 ‘인도에서 왔다’ 하면 다 불교에 대해 질문할지도 몰라요.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물질적으로는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잘 살아도 정신적으로는 여러분들이 지도를 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부처님이 태어나신 인도에는 붓다 담마가 없단 말이예요. 그래서 여러분 석가족들이 이 붓다 담마를 공부해서 인도 뿐만 아니라 전세계로 전파하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얘기하기 전에 우선 나부터 붓다 담마를 알아야 돼요. 그래서 오늘 작은 의문이라도 의문이 있는 것은 다 물어보세요.”
그러면서 석가족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많은 질문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한가지 질문을 소개합니다. 한 분이 죽고 태어나는 전생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어요. 강도 한명이 총 맞아 죽었는데 우리 가족이 한명 태어났어요. 그 아이에게 흉터가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이 아이의 전생에 강도가 총맞아서 죽었고 그 강도가 이 아이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가 맞았어요. 이건 뭐예요? 강도가 죽은 것이예요? 아이가 새로 태어난 것이예요?”
“이런 얘기는 모든 종교마다 엄청나게 많아요.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 기도해서 대학 시험에 걸렸다, 이런 얘기는 모든 종교마다 다 있어요.
얼음 알아요? 얼음으로 만든 구슬 세 개를 어린 아이에게 주었다고 합시다. 어린아이는 그 구슬을 그릇에 담아 놓고 밖에 나가서 한참 동안 놀다가 돌아왔어요. 그러니까 얼음이 없어지고 물만 생겼어요. 그러면 어린 아이는 ”엄마, 얼음이 없어졌어“ 그럴 것 아니예요? ”물이 생겼다“ 이럴 것 아니예요? 왜 어린 아이는 이렇게 얘기할까요? 그것은 얼음과 물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없어졌다, 생겼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는 과정을 아는 어른은 ”없어졌다, 생겼다“ 이렇게 말하지 않겠죠. ”모양이 변했다“ 이렇게 말하지요. 변화 과정을 아는 사람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변했을 뿐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물은 변화할 뿐이지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생겼다 사라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제한된 인식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실제의 세계는 변화할 뿐이예요. 태양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변화합니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지요. 이것을 진리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이것은 진리가 아니예요.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평면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는 평면이 아니예요. 지구 표면은 휘어져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성립하는 것이예요.
여기 앞에 앉은 사람과 저 사이에 최단 거리의 선은 몇 개 그을 수 있어요? (하나요) 그런데 서로 뒤로 물러서서 이 사람은 북극점에 가서 서고, 저는 남극점에 가서 선다고 합시다. 그럼 선을 몇 개 그을 수 있어요? 무한히 그을 수 있어요. 왜 그럴까요? 지구가 둥그니까요. 하나 밖에 그을 수 없다는 것은 평면이라는 전제 위에서만 그렇습니다. 곡면이 되면 전혀 다른 문제가 돼요.
우리가 갖는 상식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과 진리는 다릅니다. 붓다 담마는 상식을 뛰어 넘어 있습니다. 인도에서 태어난 사람은 그 문화 속에서 생각하는데 붓다 담마는 그 문화를 뛰어넘어 있는 것입니다. 붓다는 2600년 전 사람이니까 2600년 전의 생각을 해야하는데, 지금 봐도 합당한 그런 생각을 하신 거예요. 그래서 붓다 담마를 진리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붓다 담마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어렵고 자신이 아는 범위 속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붓다 담마의 근본 가르침을 이해해야지 다음 시대로 가면 또 안 맞아 버립니다. 인도 역사 속에서 있는 불교를 배우면 진리라고 하면서도 붓다 담마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계급차별이 없다고 하신 이야기는 당시 인도 사람들이 이해하기 굉장히 어려웠어요. 남녀 차별이 없다는 이야기도 알아듣기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래서 중간에 세상의 상식으로 그것을 없애버린 것이예요.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계급차별이 없고 남녀차별이 없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예요. 중간에 인도에 맞도록 붓다 담마를 해석한 것은 지금 와서 안 맞는 거예요. 오히려 부처님이 가르쳤던 그것이 지금 시대에 맞는 거예요.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불교가 맞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거예요.
저는 붓다 담마가 얼마나 위대하냐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세상이 이렇게 점점 변해가면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이렇게 말했어요. “이 과학의 시대, 우주의 시대에 맞는 종교는 불교 밖에 없다.” 그 불교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종교가 아니라 붓다 담마를 말하는 것입니다.
붓다 담마는 진리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검증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것과 조금 다릅니다. 믿음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갖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것은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있는 것처럼 작용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의식 속에서 그것이 없습니다. 믿음은 그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사실이냐 아니냐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도에서는 모든 것을 다 전생에 한 것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여기 두명이 싸우게 되면 전생에 원수였기 때문에 싸우게 된다, 이렇게 하면 설명은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문화라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이런 것들을 믿는 사람은 그것이 진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붓다 담마가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에 속합니다. 이것은 문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라고 말하면 안되고 ‘아, 저 사람들은 저런 문화를 가지고 있구나’, ‘저런 믿음을 가지고 있구나’ 이렇게 봐야 합니다.
옛날에는 이런 문화를 갖고 있었는데 이것을 지금 시대에는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남자가 되었고, 전생에 복을 적게 지어서 여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것은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문제인데도 믿음으로써 이 시스템을 그대로 인정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전생에 죄를 지어서 장애인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이 장애인이다 할 때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냥 다쳤거나, 유전인자적인 문제가 있거나 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장애가 있다고 하더라도 장애가 없는 사람과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몇 년 전에 미얀마에서 싸이클론 피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5천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어떤 기독교 목사는 ‘하나님을 안 믿어서 벌 받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담마는 무엇이냐? 미얀마에서 싸이클론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많은 재산이 파괴가 되었다면, 비록 내 가족도 아니고 내 나라 사람들도 아니지만 그들이 이렇게 불행을 겪었을 때는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담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있거나 알고 있는 것과 담마는 다르다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불교에도 담마가 아닌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불교가 인도에 있었기 때문에 인도의 힌두 문화를 받아들여서 섞였기 때문입니다. 또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중국 문화와 섞이면서 중국 불교는 인도 불교와 또 다릅니다. 담마는 인도 문화와 중국 문화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부처님도 인도의 전통문화 속에서 굉장히 저항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세계화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문화와 믿음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인도 문화와 담마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담마라는 것은 사실 그대로입니다. 불교인이 봐도 기독교인이 봐도 한국인이 봐도 인도인이 봐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질문한 것이 해결되었어요?”
“네”
이 외에도 다양한 질문이 계속 이어져 나왔습니다. 스님께서는 다양한 비유를 들어가며 자상하게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통역을 맡은 쁘리앙카님도 마치 스님의 입이 된 것처럼 통역을 잘해주어서 석가족들은 스님의 법문을 듣고 다들 기뻐했습니다. 스님께서 “너무 어렵지 않았어요?” 라고 묻자 “좋았어요. 사회와 연결되어서 생각할 수 있어 더 좋았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일은 이런 불교를 어떻게 전파할 것인지를 의논해 봅시다”라고 하시면서 오늘 수련을 모두 마치셨습니다.
수련을 마치고 절을 나오니 밤10시가 넘었습니다. 스님 일행은 오늘 숙소인 미얀마 절로 왔고, 석가족들은 수련이 열렸던 인도 절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내일은 새벽5시30분부터 명상을 하며 수련을 다시 시작할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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