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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해운대의 아침은 지난주와 같이 간밤에 내린 비로 시원한 아침공기를 만끽하게 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스님의 해운대 특강 마지막 날입니다. 법당 입구에는 세월호 진상조사 규명을 위한 천만인 서명운동이 한창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나온 봉사자들은 법당에 들어서는 한분 한분께 서명 동참을 권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서명에 임해 주시는 분들의 모습속에선 조속하고 투명한 진상규명과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전해지는 듯 했습니다. 이 여파를 이어 단시간에 천만인 서명이 완료되어 사고로 상처받은 남은 이들과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드렸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하반기엔 스님의 해외강연 일정상 올해의 스님 직강은 마지막이었기에, 강연이 시작되자 법당을 가득 메운 240여명의 대중들은 평소보다 더 귀를 쫑긋 세우고 스님의 한말씀 한말씀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강의에 열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최초의 절인 죽림정사는 건물이 아닌 대나무 숲이었고, 금강경이 설해졌다는 기원정사 또한 숲이었습니다.”라고 하시며 “서암 큰스님께서 제가 젊은 시절 우리 불교를 막 비판했더니 다 들으시고는 ‘여보게, 어떤 사람이 말이야, 논두렁 밑에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고 그곳이 절이야, 이것이 불교라네.’라고 말씀하셨고, 그래서 정토회가 이렇게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즘 초가집도 아닌 기와집, 기와집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라야 절 같다고 말하곤 합니다.”라며 요즘 세태를 얘기하셨습니다.
“처음 사찰은 숲이었다가 다음에는 비를 피하기 위한 초막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이 생기고, 다음에 스님들이 생활하는 요사가 생겨났습니다. 인도에서 부처님 사리를 모시는 탑을 쌓던 문화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오면서 건물을 지어 부처님을 모시고 탑의 크기도 줄어들어 탑은 상징적으로 남고 대웅전 중심으로 되었습니다. 인도와 중국은 벽돌 탑, 우리나라는 석탑, 일본은 목탑이 많습니다. 인도, 중국, 한국, 일본은 모두 불교문화가 다릅니다.
우리나라 사찰 중 표준형은 황룡사입니다. 표준형은 문이 동서남북으로 있으며, 그 형태는 정사각형입니다. 그 중 남문이 정문, 여기서 정문은 일주문이예요. 정문을 들어가면, 중문, 중문을 지나면 그곳에 탑이 나옵니다. 탑이 사찰의 중심에 있는 거지요. 탑 뒤에는 금당이 있습니다. 금당 뒤에 강당이 있습니다. 즉 이곳에서 모든 법회를 합니다. 이런 순서로 일직선 상에 있습니다. 황룡사지에 가보면 이런 배치로 되어 있습니다.
일본 오사카의 천왕사도 이런 배치로 되어있어요. 그리고 금당도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앙의 중금당, 동쪽의 동금당, 서쪽의 서금당 이렇게 금당도 셋으로 배치가 되기도 합니다.
통일신라 이전은 탑이 하나인 외탑이지만, 통일신라 이후는 쌍탑가람 입니다. 불국사가 대표적입니다. 그 가운데는 불을 밝히는 석등이 있습니다. 이런 기본형 위에 약간씩 변경해서 배치가 되는겁니다.
절에 갈 때 젤 먼저 만나는 일주문 뒤에는 사천왕문이 나오죠. 여기에는 동서남북, 네 분의 신을 모시는 겁니다. 이는 인도의 문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인도의 우주관은 우주 중심에 수미산이 있고 수미산 중턱에 있는 첫번째 신들의 세계가 사왕천, 즉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사천왕이 있는 겁니다.
신중탱화에는 여러 신들이 그려져 있는 겁니다. 그 중심엔 마왕 즉 자재천왕을 중심에 세운 그림도 있고, 인드라신을 중심에 세운 것도 있고, 범천(브라만)을 중심에 세우고 수많은 신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신중은 신의 무리로써 중(衆)을 써서 많은 신이 있는데 이는 인도문화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신은 산신과 칠성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사람들이 믿는 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부처님의 큰 자비속에 포함시켜, 부처님과 보살이 있는 곳은 ‘전’, 신들이 있는 곳은 ‘각’이라 하는 겁니다. 대웅전 뒤에 산신각, 칠성각이 있지요. 스스로 깨달은 독성을 포함 산신, 칠성 독성 세 분을 모신 곳을 삼성각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스님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겉옷은 인도의 옷인 가사, 다음은 중국의 도사 옷인 도복, 불교에선 장삼이라고 부르고, 그 안엔 조선 옷인 승복, 그 안에 서양식 티셔츠까지, 옷만 봐도 인도, 중국, 한국, 서양옷 모두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입니다.
불상이나 절도 불법의 본질이 아니라 불교문화입니다. 즉 담마는 똑같지만 그것을 담는 그릇인 문화는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화를 불교라고 생각하니까 불교가 서로 다르다고 보는 겁니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탑이 있고 그 뒤에 대웅전이 나오는데, 대웅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밖의 백만의 적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가 자기를 이기는 자가 더 큰 영웅이라는 말이 있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기의 모든 업식으로부터 해탈하신 분이기에 영웅중의 영웅이다. 그래서 대웅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부처님을 모시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법당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면 좌우에 문수, 보현보살을 모시거나 관음, 지장보살을 모십니다. 보통 기도도량은 관음, 지장보살을 수행도량은 문수, 보현보살을 많이 모십니다.
아미타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는 경우는 대웅전 대신 미타전, 극락전 또는 무량수전, 무량광전이라 합니다. 약병을 들고 계시는 약사불, 또는 약사 유리광불을 모신 곳은 약사전이라 합니다. 화엄경의 주불은 비로자나불입니다. 이 비로자나불은 원래 모양과 형상이 없는 법신불입니다. 비로자나불이 계시는 건물의 이름은 대적광전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양쪽에 화신인 석가모니불과 보신인 노사나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미륵불은 주로 노천의 돌에 많이 새겨져 있습니다. 미륵불은 미래불상으로 현재는 보관을 쓴 미륵보살상으로 그려지고 또 부처님상으로 그려집니다. 그래서 미륵사지라 불리는 곳에 가면 미륵불을 볼 수 있습니다. 미륵불을 모시고 있는 곳을 미륵전 또는 용화전이라 불립니다.
보살만 독립적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관세음보살만 모신 곳은 관음전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뒤에 탱화가 손을 천개, 각각의 손에 눈을 천개 그려 넣은 걸 볼 수 있습니다.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모신 곳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즉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들을 아라한이라 하는데 이를 줄여서 나한, 이분들을 모신 곳을 나한전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이름으론 응진전이라 합니다. 500나한을 모신 곳을 500나한전이라 합니다.
지장전은 위패를 모시거나 영가천도 등을 주로 하는 곳입니다. 대웅전 뒤로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이 있거나 아예 세 분을 모신 삼성각이 있는 겁니다. 다음은 그 절의 개산조(開山祖)나 국사가 되신 분들, 즉 큰스님들을 모시는 곳을 조사전이라 합니다.
법당안에 들어가면 부처님 오른쪽에 신들을 모신 신중단, 왼쪽은 위패를 모신 영단이 있습니다. 부처님을 모신 곳은 상단, 신중단은 중단, 영단은 하단이라 합니다. 신전을 중심에 두고 수행자들이 사는 곳을 요사체라고 합니다.”라며 사찰내에 부처님이나 보살님을 모신 ‘전’이나 각 건물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면서 “내가 미국에서 절을 지으면 예수님을 모시는 전을 하나 세워야 되지 않겠어요?”라는 스님의 말씀에 대중들은 동감을 뜻하는 큰 웃음을 보였고, 스님의 말씀속에 전통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는 불교의 포용력과 무엇을 믿는가보다 진리를 깨닫는 가르침의 추구에 다시 한 번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우리나라 불교는 선종, 교종, 율종, 화엄종, 천태종등 종파불교를 초월한 통합불교입니다. 경을 공부하는 건물을 강원이라 하고 책임자를 강주라고 합니다. 계율을 공부하는 곳은 율원, 그곳의 책임자는 율주, 혹은 율원장이라 합니다. 참선을 하는 스님들이 있는 곳은 선원, 그곳의 책임자는 선원장이라 합니다. 이 세 개가 다 있으면 총림이라 하고 총림의 최고스승을 방장이라 합니다. 선원만 있을 때 가장 큰 스승을 조실이라 합니다.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수덕사, 범어사, 백양사, 동화사는 총림입니다.
절에서 눈여겨 볼만한 게 사물인데, 아침예불을 할 때 두드리는 네가지를 말합니다. 종은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북은 육지중생인 포유류를 구제하기 위해, 운판은 새, 목어는 물고기 등 물에 있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칩니다.
대웅전을 들어갈 때는 정문계단으로 들어가면 안됩니다. 부처님 앞(어간)에선 절을 하지 않고 어간을 지날 때는 반배를 하고 지나갑니다. 원래 절은 깨끗하고 질서가 정연하고 조용한 곳입니다. 우리 정토회원은 이런 좋은 점들을 생활에 적용했으면 합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사찰의 전통문화에 대한 법문을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많은 사찰을 무던히도 가 봤지만 스님 강연을 듣다보니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동안 명색이 불자인데 불교문화에 대해 너무 몰랐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가르침이 더욱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오전 법회를 마치고 점심 공양을 하신 후 1시 30분부터는 해운대법당 활동가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고, 오후 3시에는 부산울산지부 소속 총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저녁 6시 30분에는 부산울산지부 저녁반 팀장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모임에서는 봉사하면서 궁금하거나 필요한 것, 각 법당의 현황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주로는 오늘부터 시작된 세월호 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운동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현장의 분위기가 어떤지, 서명을 받으면서 뭐가 어려운지, 그 외에 의문드는 내용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는 25일 백중기도 입재 때에 스님께서는 몽골 일정이 있으셔서 오늘 봉사자들과의 모임 사이, 오후 4시에 미리 입재법문을 촬영하셨습니다.
저녁 특별 법회 시간, 활동가들의 분주한 준비와 안내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속속 가정에서 일터에서 스님의 법문을 듣기위해 185명의 대중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늘로 전국 봄강좌 24회 마지막 강연에 대한 소감을 ‘시원 섭섭하다’고 피력하시고 그간 불교의 세계관에 대해 설하신 서울 강좌, 사회관에 대해 설하신 대전 강좌, 그리고 삶의 가치관에 대해 설하신 대구강좌를 축약해서 정리해주셨습니다.
아울러 스님의 1년 일정에 대해 잠시 말씀해주셨는데 1년 중 열흘 남짓 비는 초인적인 강행군을 하시는 스님의 불가사의한 행보에 함께한 대중들의 입에서는 저절로 경이롭다는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바삐 나투시는 스님의 보살행에 대해 찬탄의 마음으로 법당 안은 숙연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우리의 삶은 내면에서의 자유와 밖으로 부터의 자유가 필요하다 전제하시고 내면 즉 자기로 부터의 자유는 수행을 통해, 밖으로 부터의 자유는 정토세상 만들기, 상구보리 하화중생 보살의 길을 통해 얻는다고 하시며 정토회에 오면 수행과 사회 실천적 활동 두가지를 다 해야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어 오늘의 주제 사찰문화, 사찰예절에 대해 강의를 하시면서 스님께서는 인도에서의 절의 발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인도의 수행자들이 처마 밑이나 동굴 등에서 비를 피하다가 사람들이 많아지자 비를 피할 수 있는 초막(구띠)을 지었고 100~200년 지난 후 건물로 바뀌었으며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부처님의 사리, 유골을 모시고 가서 8개의 진신사리 탑을 쌓았습니다. 열반 후 200년이 지나자 아쇼카왕이 출현하여 인도대륙을 통일하고 불교에 귀의한 후 불법에 감화를 받아 부처님의 일대기를 따라서 성지를 순례하고 진신사리를 넣어 기념탑을 세우고 석주(큰 돌기둥)를 많이 세웠습니다. 그 후 집을 지어 스님을 살게 하였습니다. 인도의 절의 발달을 보면 수행자들이 사는 숲, 그다음엔 초막, 그다음엔 기념탑이 생겼고 기념탑을 중심으로 스님들이 사는 요사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사리탑 속에 돔을 만들고 불상을 만들었습니다. 인도에는 지금도 이런 구조입니다. 대웅전이라는 개념이 없으며 항상 중심이 탑(스투파)이며 그 안에 돔을 만들고 불상을 모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께서는 “문화와 진리(담마)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문화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각각의 특색이 있어서 존중해야하며 전통문화는 유지, 전승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건 아닙니다. 문화를 함부로 바꾸거나 없애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내가 기독교를 존중한다는 것은 그 문화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의 측면에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문화입니다. 문화의 요소일 때는 존중하되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구분이 안되니 종교 간에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진리는 토론할 수 있으나 문화는 토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의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법문을 마치시고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진상규명을 요청하는 천만인 서명운동에 적극 참여해주실 것을 당부하시고 오늘 특별법회에 참석한 대중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서울로 떠나시기 전 해운대 법당 저녁반 활동가들과 잠시 나눈 간담회 시간에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안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높일 것을 주문하시고 활동가들 각자의 직장과 법당을 오가는 시간과 거리를 일일이 질문하시며 격려하시고 끝으로 활동하는데 어려운 점은 없는지 물으시고 앞으로도 더욱 활발히 활동해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내일은 국민통합회의 1주년 심포지움과 평화재단 연구원 심포지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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