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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을경전 졸업수련은 학생 170명과 스텝 14명이 함께 했습니다. 아침 8시부터는 그동안 공부하면서 들었던 의문을 스님께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첫 인사와 함께 문경수련원에 처음 온 사람은 없는지, 아직 깨달음의 장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없는지등을 챙기는 것으로 법문을 시작하셨습니다.
“정토행자의 서원 중에 ‘무아, 무소유, 무아집을 수행의 지표로 삼는다. 정토세계를 이룩하기 위하여 오직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보살이 된다.’고 하였는데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라는 첫 번째 질문자의 질문에 대해 스님께서는 수행자의 관점이 어떠해야 하는지 예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무 할일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누가 그 사람보고 밭 매러 가자고 하면, ‘네’ 하고 따라가는 사람과 나는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안가겠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간다고 했을 때, 가다가 ‘그냥 돌아가세요’ 하면 ‘아니 왜 일하려 왔다가 그냥 가’라고 하기도 합니다.
수행자는 이럴 때 ‘예’하고 합니다. ‘따라가자’ 할 때도 ‘예’하고, 그냥 돌아가라 할 때도 ‘예’합니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상대의 필요에 따라 쓰여야 합니다.
그러니 할 일이 없다 그 말의 뜻은 ‘할 일이 없으니 아무것도 안한다’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안한다는 것을 고집하게 됩니다. 할 일이 없으면 일하러 가자면 그냥 가는 것이고, 그만 하라고 하면 그만 합니다. 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잘 써주세요.’ 하면 그 사람이 알아서 쓰도록 그 사람의 요구에 나투어야 합니다. 쓰지 않아도 신경을 안써야 잘 쓰이는 것입니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진리에 눈떠 있으면 버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라 할 것도 없기 때문에 깨달은 상태에서는 버릴 것도 없지만 어리석은 상태에서는 버릴 것이 있습니다. 중생의 요구에 수순한다는 것은 필요에 따라 쓰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스님이니까 법문만 해야 한다.’ 이것은 필요에 따라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데로 쓰여야 합니다.
도의 차원에서는 필요한 데로 쓰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윤리, 도덕적 관점에서는 좀 다릅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누군가가 자기 이득을 취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근본도리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데로 쓰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마음의 걸림이 없어야 합니다. 이런 수준에 이르게 되면 수행에서의 최고의 도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경지를 보살의 열가지 수행의 단계 중에 가장 높은 단계인 화작이라고 합니다. 화작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요구에 그대로 몸을 나투는 것입니다. 청소부가 필요하면 청소부가 되고, 농사꾼이 필요하면 농사꾼의 몸으로 나툽니다. 중생의 요구가 천백억가지로 한량없기에 부처도 한량없는 몸을 나툽니다. 이것을 ‘중생의 요구에 수순한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탁 내려놓고 인연을 따라 나투어야 합니다. 마치 물이 본래 모양이 없기 때문에 컵에 담으면 컵의 모양, 네모에 담으면 네모 모양이 되듯이 인연을 따라 나툽니다. 이것을 자연스러움이라 합니다. 나무는 불상도 되고, 젓가락도 되고... 이처럼 사람의 요구에 수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고집합니다. 그러니 부모자식 간에도 갈등이 생기고 부부간에도 갈등이 생깁니다. 보살은 이 번뇌 많은 일체중생과 살아도 아무런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각자 깡통을 덮어 쓰고 있다면 부딪혀서 ‘쾅’ 하고 큰 소리가 납니다. 그러나 내가 깡통을 벗으면 부딪히지 않습니다. 내가 눈을 뜨면 상대가 눈을 뜨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는 눈을 안 뜨고 상대에게 눈을 뜨라고 합니다. ‘예’하고 하는 것이 주체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돈에 집착하지 않으면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돈에 집착하면 돈의 노예가 됩니다. 내가 고집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반응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주체가 됩니다. 억지로 하면 노예가 됩니다.
가난한 생활을 억지로 하면 극빈이라고 합니다. 모든 게 있는데 스스로 가난하게 살면 청빈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고개를 숙이면 겸손, 억지로 고개를 숙이면 비굴이 됩니다. 비굴하게 살면 노예가 됩니다. ‘예’하고 한다고 해도 잘 안됩니다. 안되는 자기를 보고 내려놓는 것을 자꾸 하다보면 됩니다.
이거 하라 했다가 저거 하라 하면 시비하게 됩니다. 이런 것을 관성이라고 합니다. 일하다 보면 관성이 있어 저항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우리가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100%다 되기는 어렵지만 절반만 해도 그만큼 내 삶이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집니다. ‘예’가 안되는 것이 중생입니다.
부처님은 침묵으로 승낙하시고, 아닐 때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침묵으로 승낙 한다는 것은 대부분 수용한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께서 별 말씀 없으면 승낙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열반 하실 때 상한 음식을 드려도 그냥 드셨습니다. 일체 걸림이 없었습니다. 대중의 요구에 수순할 수 있다면 완전한 자유, 어디에도 걸림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정토행자가 지표로 삼는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보살’의 모습입니다.”
깨장을 다녀온 이후 새벽기도를 하면서 지난 하루를 참회와 감사함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수행정진 할수록 더 많은 망상이 만들어져 집중이 어렵다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명상수련을 권하는 것으로 질문에 대한 설법을 시작하셨습니다. “명상 수련을 실제 해보면, 평소 생활할 때보다 망상이 더 많아집니다. 아무 상관없는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려보는 망상이 일어났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부모, 형제등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오릅니다. 이것이 모순처럼 생각되지만 그렇게 되는 게 정상입니다. 평상시에는 먼지가 보이지 않던 방안에 햇살이 들어오면 먼지가 있는 게 보입니다. 먼지가 나니까 빗자루로 쓸면 먼지가 더 납니다.
명상을 할 때 망상이 많은 것은 생각이 복잡한 줄을 아는 것이지, 더 복잡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맑아졌기 때문에 망상을 보게 됩니다. ‘안해야지’ 하면 망상이 하나 더 늘어납니다. ‘먼지가 많구나’, ‘망상이 많구나’ 하고 놔둬야 합니다. 놔두면 조금씩 조금씩 가라앉습니다. 가라앉는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3~5분 호흡이 관찰이 되고 조금 있으면 망상이 피어납니다. 온갖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걸 가만히 놔둬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 생각을 따라갑니다. 엄마 생각이 났다면 그냥 놔두고 호흡을 관찰하면 되는데, 그 생각을 따라가 한 삼십분 엄마랑 놀다가 와서 또 아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시간은 잘 지나 갑니다. 떠오르는 것은 상관없는데 끌려가거나 눌러서는 안됩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 이런 생각이 드는 구나 하고 그냥 두고 화두를 참구하거나 호흡을 관찰하면 됩니다. 명상할 때는 호흡에 집중하기로 했으면 생각이나 바깥의 소리가 나도 놔두고 호흡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또오르는 생각에 끌려간다면 화두를 들어도, 주력을 해도, 수행을 잘 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화를 낼 때 ‘나를 고집했구나’, ‘내가 집착했구나’하고 알아차리고 놓으면 됩니다. 지나간 일을 하나하나 억지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절을 하다가 스트레스가 떠오르면 참회하면서 절을 하면 됩니다. 일부러 집중하려 하면 망상을 피우는 것에 해당됩니다.”
법성게 중 ‘티끌 속에 우주가 있고, 우주 속에 티끌이 있다’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티끌 속에 우주가 모두 포함되어 있고, 티끌이 모여 우주를 이루며 이 모두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속속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드라의 그물이라고 해서 비유를 들어 설명을 했습니다. 하늘나라 인드라천에 인드라 신이 살고 있는 곳은 꿰어진 구슬로 덮여 있습니다. 하나의 구슬에 나머지 구슬이 다 비칩니다. 하나의 구슬 속에 모든 구슬이 다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일미진중 함시방’의 의미입니다. 철학적인 용어, 과학적인 의미로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가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 몸은 수백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많은 세포들이 우리 몸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몸의 낡은 세포는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것이 생겨나면 동일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티끌 하나에 우주가 들어 있듯이 세포 하나 속에 우리 몸의 모든 정보가 다 들어 있습니다. 세포속의 핵에 DNA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를 가지고 복제를 하면 똑같은 것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윤리적으로 안 해서 그렇지 이미 다른 동물은 하고 있습니다. 애완용 동물을 똑같이 복제하는 데 줄기세포 사업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포가 모여서 우리 몸을 구성하지만 세포 하나 속에도 모든 정보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주에서 설명하면 우주라는 게 어마어마하게 큰 데, 우주는 지금 팽창하고 있습니다.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간다면 수축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되돌리면 출발점인 한 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한 점으로 돌아가면 물질과 물질 사이의 거리가 제로(0)입니다. 물질과 물질 사이의 거리가 제로가 되면 상대성 이론으로는 설명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한 점이라는 것은 미시세계입니다. 원자 내부로 들어가면 핵이 있고, 핵 내부의 안으로 들어가면 이런 법칙은 달라집니다. 핵 속에서 작용하는 힘은 핵력이라고 합니다. 강력과 약력이 있습니다. 이런 미시세계에서 성립하는 법칙이 양자역학입니다.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느냐를 설명하려면 거시세계 이론인 상대성 이론뿐만 아니라 미시세계 이론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미시세계 이론과 거시세계 이론이 하나로 합해져서 우주 생성이론을 밝힐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무한한 우주가 한 점으로 돌아갑니다. ‘한 점 속에 이 무한한 우주가 있다’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주를 알고 말씀하셨다기 보다는 진리를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 이론체계가 과학과 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소가 된다거나 말이 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될 수도, 틀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 이전에 인도사회에서 있었던 하나의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파니샤드 철학에는 우주에는 범신이 있고 나에게는 아트만이라고 하는 자아가 있다는 것입니다. ‘범아일여’ 즉, 그들이 하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철학에서 규정하는 아트만을 부정하셨습니다. 물질에 항상하는 존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무상, 고정된 나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무아입니다.
크다 작다 하는 것도 우리가 작은 것이 큰 것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큰 게 작은 것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해가 안되지만 실제의 우주는 그러합니다. 단순히 공상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중생은 작은 것은 큰 것에 들어가지만 큰 것은 작은 것에 들어가지 않느다는 편견에 있지만 실제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서울 가는 방향이 어디냐 할 때 인천 사람에게는 동쪽입니다. 춘천 사람은 서쪽, 수원사람은 북쪽입니다. 그러면 ‘서울 가는 쪽이 어느 쪽이라고 정할 수가 없다’ 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무유정법’이라고 합니다. 정할 수 없다는 것은 길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없는 것도 아니고 아무 방향이나 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조건이 정해져야 그때 정하는 방향이 나옵니다. 위치가 정해지지 않으면 방향도 정해지지 않습니다. 정해지지 않은 법, ‘공’으로부터 이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냥 동쪽으로 가면 서울간다 하면 이미 그건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인천이라는 위치 없이 서울 가는 길이 동쪽이다 라고 하면 상을 짓는 것입니다. 서울 가는 길은 정해진 바가 없다 하는 것은 무수히 많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간다는 것과는 다른 말입니다.
이치로는 이해가 되더라도 실제로는 잘 안됩니다. 무수히 연습하다 보면 체득이 되어 갑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그래서 뗏목이 흘러가려면 왼쪽 언덕에도, 오른쪽 언덕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가야 합니다. 거문고 줄도 알맞게 조여야 합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 꾸준히 해야 합니다. 법문을 들으면서 한발한발 해나갑니다. 절망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정진을 해나가야 합니다.“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생선냄새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는 향냄새가 난다’는 경전의 구절과 ‘상을 내지 말라’는 말씀은 인과 연의 중요성이 상충하는 것 같다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도 나만 관점을 바꾸면 행복할 수가 있지만 거기에만 머무르는 것은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우선 나부터 변화를 일으키고 우리 사회 전체의 변화를 가져오는 사회운동을 해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야심경의 핵심인 ‘조견오온개공’이 실생활에서 적용하기 힘들고, 억지로 내려놓으려고 하니 마음 속으로 분한 마음도 생긴다는 질문에 대해 스님께서는 ‘자연스러움’에 대해 설하셨습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수컷이 여러 암컷하고 교미를 했다 하여 바람기가 많은 것이라 볼 수 없고, 종족보존의 본능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자연 현상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잣대로 잘되었다 잘못되었다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연이라는 것은 선악을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 새끼를 낳아 돌보지 않으면 자연현상에 어긋납니다. 그런데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것은 자연계에는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부모를 돌보는 것은 선한 행위지만 안한다고 악한 것은 아니고 자식을 돌보지 않는 것은 악에 속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 살 때까지는 이혼을 하면 안되고, 초등학교 때는 되도록 안해야 합니다. 사춘기때는 이혼에 대해서 자식들과 의논해야하고, 스무살이 넘으면 내 마음대로 해도 됩니다. 그런데 거꾸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의 질서에 거꾸로 살기 때문에 의도한 바와 달리 결과가 나옵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할 때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십만원 주면 고맙다 하다가 옆 사람에게 백만원 주면 차별한다고 미워하고 원수가 됩니다. 사실은 미워하는 것에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이 미워하는 나를 참회해야 합니다. 안되는 것은 중생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이 현실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불법이라는 것은 2500년 전에 말씀하신 것이지만 지금 살펴도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지혜로운 분입니다. 여기 특별한 종교와 철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인도에서 생겨나다 보니 인도의 문화와 언어로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님이 아무리 진리만 얘기해도 한국문화와 언어로 포장이 되어 있습니다. 외국인이 보면 한국 냄새가 납니다. 담마를 언어라는 그릇에 담다 보니까 지역적인 한계와 역사적인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역적이고 시대적인 것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문화사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문화사적으로 어떤 의미로 이렇게 표현이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태어나자 마자 진짜 일곱발자국을 걷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했을까 의심하기보다 그것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전통을 계승하지만 담마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보편타당한 것을 말합니다. 진리를 중요시 하고 부지런히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스님께서는 경전반 학생들에게 진리를 탐구하고 배워 나가도록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스님의 즉문즉설 특강 후 모두 대웅전 앞으로 모여서 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한 낮의 내리쬐는 햇볕속에서도 마음만은 가볍고 즐거운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는 점심 공양을 한 후 두북으로 이동하셨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스님의 고향 초등학교 친구분들과 함께 저녁 식사 일정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스님께 모두 반갑다고 인사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일은 영주, 충주 강연과, 오후 3시에는 통일대담이 평화재단에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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