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4.5.14. 우리의 삶(수행관)-대구법당

스님께서는 오늘 새벽 1시경에 중국에서 인천공항에 도착하셔서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하니 새벽 2시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늘도 꼬박 밤을 새우며 용성조사 탄생 150주년 기념식, 세월호 추모회 관련한 업무를 보시고 새벽 515분경에 잠시 회의를 하신 후 대구법당으로 출발하셨습니다. 대구법당으로 오는 길에 간단히 국수로 아침공양을 한후 9시경에 대구법당에 도착하셨습니다.

     

오늘 대구는 여름을 느끼게 하는 더운 날이었지만 더운 햇살아래서도 환하게 맞아주시며 주차안내를 하시는 봉사자, 현관 입구에서  단정하게 법복차림으로 밝은 미소와 인사하시는 보살님이 계셔서 법당이 환하고 가볍게 느껴집니다.

     

오늘부터 3주간에 걸쳐 대구 법당에서 스님의 특별 법회가 수요일마다 있습니다. 더욱 가까이서 스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 감사한 마음에 3주간의 법회가 즐겁게 기다려집니다. 오늘 제1강의 주제는 욕망에 관한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먼저 세월호 참사로 돌아가신 희생자들의 위한 묵념과 한 뒤 법회는 시작되었습니다.

     

대구 법당에서 있을 6회에 걸친 법회에서는 불교가치관에 대한 말씀을 드릴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력이 뭘까? 어떤 힘으로 살아갈까? 그렇게 생각해 보면 욕구가 뭘 하고자 하는 삶의 기본적인 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맥이 빠지면 삶의 의욕이 없다.’ 이런 말을 하는데 뭔가 하고자 하는 욕구·욕망이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 욕망을 버려라라고 이야기를 하니 여러분들은 헷갈려 합니다. 그 욕망을 버려버리면 의욕이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닌가? 마치 나무토막처럼, 돌멩이처럼 무감각한 존재가 되는게 아닌가하는 그런 혼란이 옵니다. ‘욕구나 욕망이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버리라고 그러면 무슨 힘으로 사나?’ 싶은 의문이 들어 물어보고 싶어도 못 물어보죠? (대중들 웃음)

     

그냥 속으로는 그런 의문이 들어도 묻지 못하고 겉으로는 수긍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신심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의문이 있으면  물어보고 해소를 해서 마음에 한 점의 의문이 없어야 소위 믿음이 깊어지는데 속으로는 의심이 들면서 겉으로는 하면서 하니 수행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속의 의문을 탁 털고 해소하고 나아가야 하는데 움켜쥐고 억지로 하기 때문에 넘어지고 또 엎어집니다.

     

우선 현실적으로 보면 삶의 동력이 욕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욕계라고 하고 우리를 욕계중생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생물학적으로 두 가지 욕구가 있는데, 첫 번째로 내가 살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개체 보존의 본능, 즉 자기를 유지하려는 본능을 생존본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개체를 보존하기 위해 물질 대사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종족 보존의 본능, 즉 생물학적으로 복제를 말합니다. 그런데 먼저 개체보존을 위해 물질대사를 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합니다. 이를 식욕이라 하지요. 그 외에도 물을 마시고 숨을 쉬고 잠을 자고 이런 욕구가 있어야 존재됩니다. 그러나 개체 보존이나 종족유지와는 상관없는 욕구도 있는데 이런 것들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습니다. 때로는 인간은 생존에 불리해지는 욕구도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것은 욕구를 충족해야 하고 어떤 것은 버려야 하는데 이렇게 하니 여러분은 혼돈이 옵니다. 현실을 잘 살펴보고  상황에 따라 규칙을 정해야 하는데 이것은 나를 행복하고 건강하고 자유롭게 하는데 기준을 정해야 합니다. 그 길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얻고 장애가 되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욕계에서 사는 중생은 욕구가 충족되면 기분 좋음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즐거움이 기쁨이다 즉 행복하다라고 합니다. 욕구가 충족이 안 되면 기분이 나쁘다 이것은 괴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불행하다라고 합니다. 욕구가 충족이 되면 기분이 좋은 이 되고 충족이 안 되면 기분이 나쁜 가 됩니다. ‘苦樂은 되풀이 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바로苦樂을 되풀이 한다는 것입니다.

     

苦樂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입니다. ‘이 곧 임을 알기에 일체가 라는 것이지요. 진정 자유로우려면 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일체가 임을 깨닫지 못하면 에 미련을 놓지 못합니다. ‘이 괴로움인 줄 알면 저절로 놓아집니다. ‘방하착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냥 놓았다는 것은 놓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뜨거운 줄을 안다는 것입니다.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이치를 탁 알아야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임을 확연히 아는 것이지요. 그것이  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입니다.

     

욕구를 쫓는 쾌락주의나  욕구를 용납하지 않고 무조건 억누르는 고행주의는 해탈의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中道를 말씀하셨습니다. 욕구를 따르는 것만 욕구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고 욕구를 무조건 누르는 것도 욕구에 반응하는 것으로 욕구를 다만 욕구로 알아차릴 뿐이어야 합니다.

     

과도한 욕구인 탐욕은 버려야 하고 상대적 욕구인 욕망은 절제해야 하고 기본적 욕구는 충족되어야 합니다. 즉 인간의 기본권리는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회안전망구축입니다.” 라고 하시며 욕망, 중도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고는 다시 욕구’, ‘욕망’, ‘탐욕을 대중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협력해서 사냥한 생산물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예로 들어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아마 이보다 더 쉽게 설명해 주실 분은 안 계실 듯 합니다.

 

또한 수행자에게는 기본적인 권리마저도 타인을 위해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므로 수행자는보시하는 길로 가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왜 탐욕을, 욕망을 내려놓는 것을 수행자들의 가장 기본으로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욕망을 내려놓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 속박이 아니라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기초입니다. 그래서 계율을 알고 참회를 하고 그렇게 공부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라며 욕망을 내려놓기 위해 계율이 있다고 설명하시면서 마무리 하셨습니다.

     

다음 계율에 대해서는 또 어떤 말씀이 있으실지 더욱 궁금해지는 아쉬움을 남기고 제1강 법회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마침  스승의 날이라 오늘 법회에 참석하신 대중들은 우리 모두의 스승님이신 법륜스님께 꽃다발과 스승의 노래를 합창했습니다. 늘 우리를 일깨워주시는 스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다해 함께 노래했습니다.

     

이렇게 오전 법회를 마치고 스님께서는 세월호 추도회를 연기하면서 관련된 업무를 보시고, 잠시 휴식하시면서 어제 한숨도 자지 못한 피로를 풀었습니다.

     

오전강의가 끝난 후 대구에는 여우비가 내렸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우리네 삶이 가끔은 저 비를 닮아 오락가락하지만 해탈과 열반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고, 그 길로 가는 길을 명쾌하게 알려주시는 스님의 가르침을 가까이에서 듣는다고 생각하니 온종일 마음에는 가뭄 끝 단비가 내리는 듯 합니다.

     

저녁 730, 강의가 열리는 3층 법당에 마련된 정갈하고 가지런한 방석이 어느 덧 꽉 매워져 320여명이 촘촘히 들어찬 법당은 오월이 아니라 시간이 훌쩍 흐른 여름날 같습니다. 자리가 모자라 법당문을 활짝 열어 마루에서도 강의를 들었습니다. 법회가 시작되기 전 세월호 침몰로 희생된 분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묵념을 올렸습니다. 유가족들의 상처와 고통이 시간이 흘러 조금씩 아물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합장한 두 손에 모아봅니다. 왼쪽 옷깃에 노란 리본을 다신 스님과 함께 산란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려 죽비소리에 맞춰 잠시 명상에 든 후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6년 동안 해오신 즉문즉설이 개인적 문제에 많이 집중되어 있어 세상에 대해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있었던 것을 보완하기 위해 4가지 주제로 4회에 걸쳐 봄강좌를 여시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지난 첫 번째 강의인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 이어진 두 번째 우리가 사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의 큰 줄기들을 짚어 주신 후 오전 강의의 핵심까지 쉼 없이 말씀하십니다. 2만여개의 자동차 부속품을 한 바구니에 담아 놓은 것이 개별 존재의 집합이라면, 이를 잘 조립한 자동차가 연기법이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그러고보니 스님의 이번 강좌 역시 잘 조립된 자동차 같습니다. 오늘 처음 강의를 듣는 사람이라도 지난 강연의 내용들을 오늘 강의와 연결하여 짜임새 있게 들려주십니다.

     

인류문명의 발전에서 계승되고 전파되는 문명의 성질은 효율성과 공익성입니다. 예를 들어 살짝 훔치는 것은 개인으로 봐서는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전파된다면 사회에 손해가 되므로 전파력이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집단에서 훔치는 것은 이익이 됩니다. 그러면 훔치는 것이 전파되고 두 집단간에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전쟁을 치루고 평등하게 통합되면 문제가 없지만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하부계급으로 통합되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생기게 되고 한 공동체 안에서 차별과 폐쇄, 배타적인 장막이 존재하게 됩니다. 성적 차별, 인종차별, 종족차별이 생기고 윤리와 가치관도 따로 적용됩니다.

 

현대사회는 크기는 커졌지만 열린사회입니다. 정보가 통제되지 않고 윤리도 따로 적용이 안됩니다. 그래서 공익성이 중요합니다. 공익성이 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나 타인의 이익을 해칠 권리는 없습니다. 이 범위 안에서 경쟁이 이루어지면 경쟁이 활력이 되어 전체 이익으로 이어지는데, 선을 넘어서면 공동체를 파괴하게 됩니다. 이것이 존재의 본질입니다. 인간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사이에도 적용됩니다. 인간 윤리에 더해 환경 윤리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현대사회의 3가지 큰 위험은 자아상실, 인류공동체 붕괴, 자연환경 파괴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문명의 진화를 말하려면 효율성만 가지고서는 안되고 반드시 공익성이 더해져야 합니다.

 

불교를 우습게 알던 백거이(백낙천이라고도 불립니다)가 큰스님(호림선사)께 가서 불교의 대의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큰스님께서 모든 악을 멈추고 모든 선은 행하라. 그 마음을 청정히 하라라는 부처님 말씀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그러자 백거이가 그 이야기는 세 살 먹은 아이도 알겠다고 말합니다. 큰스님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알기 쉽지만, 팔십 먹은 노인도 행하기는 하기 어렵다.’.

 

우리는 첫째, 이치를 배워야 하고 둘째, 계율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해 없는 실천은 맹목이고 억지입니다. 올바르게 이해하면 남이 보든 안보든 내게 불이익이면 행하지 않고 내게 이익이 되면 행해야 합니다.”

     

스님의 말씀은 재미있고 유익하다는 것을 재확인하며 말씀을 따라 생각의 노를 젓다보니 어느새 실천덕목인 계율의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첫째, 불살생. 인간윤리와 생태윤리가 더해진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살려고 합니다. 모든 존재의 생존권은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생명이 가장 중요합니다. 가장 작은 행위를 하고 가장 큰 과보를 받는 것이 살생입니다. 죽이지도 말고 때리지도 말라는 이 계율은 평화의 바탕이기도 합니다

     

둘째, 뺏거나 훔치지 마라. 생존의 기초는 재화입니다. 나의 재물도 중요하지만 다른 이의 재물도 중요합니다. 생존권과 관계되어 분배의 문제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셋째, 삿된 음행을 하지 마라. 이 계율은 행복권과 관계된 계율입니다. 인간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행복을 추구합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을 나누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내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남의 행복을 파괴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싫다는데 접근하는 것은 성추행이고 더 심하면 성폭행이 됩니다. 오히려 폭력보다 더 상대방에게 수치심과 괴로움을 줍니다. 이러한 인식도 연기에 기초한 세계관이 분명해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내 쾌락을 얻는 수단으로 쓰지 말고 한 사람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첫째, 둘째, 세 번째 계율은 몸과 관련된 계율입니다.

     

넷째, 말로 남을 해치지 말라. 말로 남을 속이고(사기), 말로 괴롭히며(성희롱), 욕설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월호 유가족들 기사에 올라오는 댓글들을 보면 전혀 윤리의식이 없습니다. 말로 타인의 행복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계율을 어기면 사바라이, 네 가지 중죄를 짓게 되어 초기 교단에서는 승려자격이 박탈되었다고 합니다. 깜깜한 밤에 인적이 없는 외진 곳에 낯설은 사람과 있다 하더라도 이 네가지 계율을 지키는 사람과 같이 있다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겠냐는 스님 말씀에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상상만으로도 편안해집니다. 스님께서 계속 말씀해주셨습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동시에 나에게도 이익입니다. 남을 죽이거나 욕설할 때는 내 마음이 흥분된 상황에서 하지, 평화롭고 고요한 상태에서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정을 닦을 때 첫째 조건은 고요함, 평정심, 둘째가 깨어있음입니다. 그러니 선정을 닦으려면 우선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다섯째, 불음주입니다. 술도 음식 수준으로 먹으면 음식입니다. 그런데 취하기 쉬우므로 아예 먹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취하면 육체와 마음이 흥분되어 위의 4가지 계율을 어길 위험이 높습니다. 술 마신다는 자체보다 결과가 나빠지기 때문에 술을 먹고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술을 마시면 선정에 방해가 됩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이 성장논리에 갇혀 지구환경을 파괴하고 욕망중심의 신자유주의 아래 인간성과 인류공동체성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 흐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올바른 가치관에 입각한 삶의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환경을 보존하고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로 만들어야 삶의 질이 높아집니다. 개인은 수행정진을 하고, 공동체는 사회적 관심과 책임을 져야합니다. 변화를 가져오려면 개인의 책임을 다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선거를 할 때도 연고가 아닌 그 사람의 정책이나 됨됨이를 보고 뽑아야 합니다.

   

맹목적 선택과 맹목적 믿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보편성의 가치를 중심에 놓고 누구를 만나든 대화가 가능해야 합니다. 불교는 모두에게 열려있고 실천을 담보하는 가르침입니다. 현실속에는 과거의 까르마로 인해 어긋날 수 있으니 늘 수행을 해야 합니다. 계율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처벌이 아닌 뉘우침과 반성을 해야 합니다.”

     

스님께서 쉽게 가르쳐주셔서 더 쏙쏙 머리에 들어왔습니다. 이해는 확실히 했으니 실천할 의지를 다져봅니다. 강의가 끝난 후 대구 정토회에서 준비한 소박한 꽃다발과 스승의 은혜를 다 같이 부르며 깊이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스승의 노래는 부를 때마다 왜 콧등이 시큰거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과 자유를 맛보게 해주신 부처님과 스승님께 감사한 마음이 숨을 쉬는 코로 전해지나 봅니다. 오늘 우리들은 스님과 함께 행복과 자유로 가는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들이 드린 꽃다발을 스님께서는 부처님전에 드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처님의 제자임을 스님께서는 이렇게 알게 해 주십니다.

     

스님께서는 내일 조찬 회의가 있으셔서 법회를 마치자 바로 서울로 이동하셨습니다.

전체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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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선

욕망을 내려놓기 위해 계율이 있다...지혜로운 가르침에 두 손 모아 고마움을 전합니다..._()_...

2014-05-16 16:12:12

원승

스승님의 은혜 값는길은 열심히 수행정진하며 까르마를 알아차리고 끌려가지않고 잘쓰일 수있는 사람이라 여겨십니다 ?스님! 건강잘챙기시어 감로법을 내리소서 ?감사합장올립니다 ?

2014-05-16 15:33:29

주디

스님, 항상 감사합니다.

2014-05-16 12: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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