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4.4.26. 세월호 사고 추모연등행렬, 청년학교 경주 순례

스님께서는 새벽 220분경에 경주에 도착해서 잠시 쉬셨다가 730분부터 청년학교 학생들과 경주 불국사 순례길에 나섰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기 위해 청년들이 스님 주변으로 모이자, 스님께서는 신라가 시작되는 시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신라는 2000년 전인 기원전 57년에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고대왕국이라기 보다 6개의 촌락이 합쳐진 작은 부족국가였습니다. 처음에는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부족장을 뜻하는 거서간이라는 칭호를 쓰다가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칭호를 썼습니다. 내물왕때인 기원후 400년 경에는 가야·왜 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위기에 처하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겨우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대신 신라는 고구려로 왕자를 인질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기원후 500년 경 22대 지증왕 때 비로소 소로 농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우산국을 정복하고, 영토확장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왕의 호칭을 쓰게 되었습니다.”라며 신라 전반기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법흥왕 시절 국내적으로는 율령을 반포하고, 대외적으로는 불교를 공인하여 개혁과 개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야는 오래 전 불교국가였지만 신라는 불교를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가야와 통합하면서 불교를 수용하게 됩니다. 신라가 가야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합의통합을 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통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신라는 백제와 연맹을 맺은 뒤 고구려가 차지한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신라는 이 기세로 함경남도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이 시기가 진흥왕 시기이고 그렇게 하여 새겨진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입니다.

 

진흥왕 때 신라는 영토를 거의 3배로 확장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삼국시대로 도래하게 됩니다. 그 전까지의 신라는 작은 국가에 불과했지만 진흥왕 이후 삼국시대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신라는 태종무열왕과 문무대왕을 거치면서 통일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고구려에 군사를 요청하여 백제의 침공을 막으려고 했지만 고구려는 이를 거절하면서 김춘추를 감금합니다. 김춘추는 그들을 잘 구슬려서 고구려를 탈출하고 당나라로 가서 당과 연맹을 맺게 됩니다. 그러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당나라는 신라에게 순순히 두 나라의 땅을 주려고 하지 않고 본인이 가져가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당전쟁이 일어나는데 8년 동안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결국 신라는 당나라를 물리치지만 우리나라의 위쪽을 많이 내주게 됩니다.

 

 

비록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지만 후에는 당나라를 치고 통일을 하였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을 통해서 진정한 통일을 이뤘지만 역사의 정통성을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주의 고조선을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후에 고구려의 후예가 발해를 세우면서 민족사적으로는 남북국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라며 신라 중기까지의 역사를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신라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본격적으로 불국사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스님을 따라 불국사안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불국사 대웅전으로 오르기 전 마당에서 스님께서는

 

불국사는 부처의 나라, 부처의 땅이라는 말이라고 하며 김대성이라는 재상이 지은 절이라며 스님께서는 불국사를 짓게 된 사연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청년이 어떤 집안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주인이 시주를 얻으러 온 스님에게 비단 10필을 보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보고 생각하기를 주인은 현생에 복을 지어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고, 지금 또, 복을 지으니 내생에도 잘 살겠구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집에 스님이 시주를 하러 왔을 때 어머니에게 시주를 하자고 했습니다. 줄 것이 없다는 어머니의 말에 그럼 강가의 뙤기밭을 주자고 했고 결국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스님에게 시주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청년은 갑자기 죽게 되었고 사람들은 괜한 짓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재상집 아들로 태어나고 그 어머니는 김대성의 유모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김대성은 전생의 부모와 현생의 부모를 다 모시는 사람이 되었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지었다고 삼국유사에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라며 불국사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불국사 앞 마당에서 대웅전 앞으로 올라 가니 다보탑과 현재는 해체 수리중인 석가탑이 보였습니다.

 

불국사에는 두 개의 탑이 있습니다. 석가탑과 다보탑입니다. 백제 출신의 기술자인 아사달이 석가탑을 만들었는데, 그 기간을 삼년이라고 했는데 3년이 지나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서 부인은 남편을 찾으러 절로 갑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부인을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아서 부인은 탑그림자가 비친다는 연못으로 갑니다. 그러나 그 연못에도 석가탑은 비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인은 상심하여 연못에 빠져 죽게 됩니다. 아사달이 탑을 다 완성하고 아내를 찾으러 연못으로 왔다가 죽은 아내를 발견합니다. 그는 그 연못에서 부인을 그리워하며 조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석가탑을 무영탑이라고 부르고 그림자가 보이는 다보탑을 유영탑이라고 부릅니다.

 

삼국시대에는 외탑을 쌓았는데 통일이후가 되면서 쌍탑을 쌓았습니다. 불국사도 통일 이후에 만들어진 절이기 때문에 쌍탑을 쌓았습니다. 부처님의 자리에서 오른쪽이 석가탑이고 왼쪽이 다보탑입니다. 현재는 석가탑이 완전 해체되어서 복원 중입니다.”라며 다보탑과 석가탑에 얽힌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이어서 대웅전에 대한 설명도 해주셨습니다. “불국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의병이 불국사에 무기를 숨기고 본거지로 삼습니다. 그래서 왜군은 불국사를 불태우게 됩니다. 임진왜란 후에 대웅전, 극락전, 자하문 범영주만 다시 복원하게 됩니다.”

 

 

  불국사에는 33개의 계단이 있습니다.  아랫 땅은 중생들의 세계를 뜻하고, 계단 위는 부처의 세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가장 밑에 있는 돌은 자연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있는 가운데 기둥 옆의 돌들은 한 면만 평평한 자연석을 골랐습니다. 이는 모든 중생이 부처의 모습을 단 하나라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불국사를 찬찬히 둘러보았습니다. 평소에 왔더라면 그냥 지나치거나 설명문에 적혀진 글만을 대충보고 지나쳤을 그곳들을 스님의 역사적인 이야기에 덧붙여서 설명을 들으니 귀에 쏙쏙 들어오고 건물들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불국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많이 소실이 되었지만 박정희 정부때 어느 정도 복원을 했다는 점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님과 불국사 순례가 끝나고 강당으로 돌아와서 즉문즉설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의 책들을 통해서 느낀 점들이나 살아가면서 의문점이 가거나 힘들었던 점들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다양한 질문과 다양한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원래라면 스님께서는 하루 동안 청년학교 참가자들과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세월호 사건으로 추모행사에 참석하게 되어서 즉문즉설 시간을 끝으로 오전 시간만 청년들과 함께 했습니다.

  

스님의 책에서 아들이 심장마비로 죽어서 슬퍼하는 어머니에게 죽은 아들과 어머니를 위해 이미 일어난 일은 잘 된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많은 국민들이 분통함과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또, 무력감에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까 합니다. 이것도 지나간 일은 좋은 거라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신나는 일이 생겨도 가슴 한 켠이 먹먹하니 기분도 안나고 뉴스만 보면 우울해지고, 좋은 일 생겼다고 나만 웃고 떠들면 욕먹을 것 같고... 스님, 현 시점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진정한 추모의 자세와 의미는 무엇인가요?”, “떠나간 어머니에 대해서 용서를 해야 할까요?”,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은데 20년간 다니면 연금이 나오기 때문에 그만두기가 힘듭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거절을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번에 세월호 사건이 터지면서 이와 관련된 질문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스님께서는 사회적인 문제와 개인적인 문제는 구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적인 문제일때는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사고로 죽었든, 살인을 당했든, 자살을 했든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식을 계속 잡고 있으면 내가 불행해집니다. 세월호의 참사를 보고 내가 지금 가슴이 아플 때 내 마음을 다스릴 때는 이것을 이미 지나간 일이고,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가 진짜 더 이상 물질 중심으로 사물을 보지 않고 사람, 생명, 안전을 중심으로 사물을 보도록 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앞으로는 이런 참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대응해야 하는 일입니다.”

 

정말 이번 사건이 요행주의를 바라는 이 세상에 일침을 주어 안전을 제일선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낳고 곧 집을 떠나간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가지고 있는 질문자에게는 자신을 낳아줬다고 해서 엄마가  아니라 키워준 분이 엄마입니다.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그 어머니에게는 거기까지가 다이며, 키워준 할머니가 진짜 엄마입니다.”라고 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연금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분을 위해서는 고작 3년 일해놓고 20년 뒤의 연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요?”하니 참가자들도 모두 함께 웃습니다. 그러자 질문자는 일이 재미없어서 그렇다기보다는 매번 하는 일을 해서 지루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고 다시 말하니 스님께서는 직장일은 지금처럼 하고 일찍 끝나고 정토회에 와서 사람들 만나면서 일을 하세요.”라고 제안을 하셨습니다. 정말 현명한 답변이셨습니다.

 

거절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거절하고서 사람들에게 욕먹지 않으려는 건 욕심입니다. 거절에 대한 상처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거절을 하게 되면 더 큰 상처를 주니 차라리 일찍 거절하는 게 좋습니다.” 라고 하시며 스님 조차도 이런 저런 이유로 욕을 먹는다고 하시면서 우리가 욕먹지 않으려고 한다는 건 욕심이라고 말씀 해 주셨습니다.

 

남은 질문들이 몇개 더 있었지만 스님께서 다시 서울로 가셔야 해서 아쉽지만 즉문즉설을 마무리 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스님을 따라다니면서 신라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불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먼저, 내가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누구도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든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두 번째 자기가 가진 재능을 세상을 위해 써야 합니다. 유용한 곳에 쓸 때 보람이 있습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내가 참 잘했다.’라는 보람이 행복이 됩니다.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라며 청년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세상의 행복을 위해 살도록 조언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끝으로 스님의 청년학교포럼과의 일정이 끝났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스님의 많은 조언으로 도움을 얻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청년들과 함께 점심 공양을 드신 후 세월호 사고 추모 행렬을 위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저녁7시부터 동대문 두산타워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연등행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여 연등행렬이 열려야 하는 날이지만, 최근 많은 국민들을 가슴 아프게 한 세월호 침몰 사고로 인해 추모 행렬로 행사가 급하게 변경되었습니다. 스님께서도 세월호의 아픔에 함께 하고자 다른 일정들을 모두 조정하시고 오늘 추모 연등행렬에 동참하셨습니다.

 

 

 

저녁7시부터 두산타워 앞에는 서울 정토회 회원들이 일찍 자리를 잡고, 오전부터 법당에서 봉사자들이 직접 만들어 준 백색 등과 촛불, 추모리본을 참석자들에게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특히 카카오스토리와 희망편지 앱을 통해 스님의 추모 행렬 참석 소식이 알려지면서, 평소 희망편지를 접해오시던 많은 분들이 함께 자리해 주셨습니다. 정토회 회원들과 희망편지 회원들을 합쳐 총 2천여명이 행렬에 참석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추모 행렬의 맨 마지막 꼬리부분에 섰습니다. 스님 뒤로 2천여명의 정토행자들이 노란 리본과 백색 등으로 기나긴 행렬을 이루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동대문에서 종각사거리까지 오직 묵언으로 걷고 또 걸으셨습니다. 출발할 때는 다소 마음이 산란했지만 1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걷고 또 걷는 행렬이 계속되자 산만했던 마음은 차츰 가라앉고 점점 우리들의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2천여명의 대중들이 묵묵히 묵언하며 함께 걷는 모습은 그 자체로 크나큰 애도의 마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런 딸이었고, 늠름한 아들이었을 고인들을 생각하니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가벼웠던 발걸음은 점점 참회의 걸음이 되어 갑니다. 너무나 그 충격이 크다 보니 너무 남 탓만 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나도 반성하고 되돌아볼 일은 없는가, 시선은 자꾸만 나에게로 향해 갑니다. 사고에 연루된 몇몇 분들만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임을 조금씩 알아가는 행렬이 되어 갑니다. 행렬을 이어가며 몇몇 분들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기도 합니다. 이런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지혜를 모으자고 다짐도 해 봅니다.

 

 

어느덧 행렬은 조계사에 다다라 끝이 났습니다. 스님께서는 오직 묵언으로 함께 걸으며 세월호의 아픔에 함께 하셨습니다.

 

추모 행렬 모습을 영상에 담아 봤습니다. 현장에 못오신 분들도 추모하는 마음으로 함께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추모 행렬을 모두 마치고 스님께서는 곧바로 문경으로 향하셨습니다. 내일은 오전8시부터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불교대학 특강수련에서 강의 하실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

0/200

배경문

잘 보았습니다!<br />두번째사진 밑에 &quot;역사의 전통성&amp;#8226;&amp;#8226;&amp;#8226;&quot;이 나오는데 전통성이 아니고 정통성이 맞기에 지적합니다~

2014-04-29 00:14:38

주디

오늘은 질문의 답변을 여러개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4-04-28 15:43:04

박순애

소리없는 외침!!!
그 외침을 외면하지 않기를...()
( ㅠ.ㅠ)

2014-04-28 14:24:46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