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4월 23일 수요일, 대전법당에서 스님의 봄 특강이 있었습니다. 서초법당에서 열린 세계관 6강을 이어서 대전법당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주제로 사회관 6강이 오늘부터 3주간 매주 수요일 오전, 오후로 열립니다.
오늘은 1강 환경-지속가능한 문명. 2강 인류-절대빈곤퇴치, 인도주의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셨습니다. 220여명의 대중들은 세월호 침몰로 희생된 분들과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학생과 승객, 선원들이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발원문을 낭독하고 스님을 맞았습니다.
스님께서는 강의 시작하기 전에 세월호 사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그 가족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우리가 나눠 가지는 위로하는 마음을 내기 위해서 해탈주 한 편을 함께 독송하고 시작했습니다.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이쪽 나뭇잎과 저쪽 나뭇잎은 별개로 보이지만 나무줄기와 연관되어 있고, 나무는 땅과 연관되어 있고, 나무에 비닐봉지를 씌워 묶어 놓으면 죽습니다. 나무는 뿌리로만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뭇잎으로 인하여 공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공기는 기체라서 눈에 보이지 않아서 서로 연관된 것처럼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이처럼 만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런 속에 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이 변하면 내 삶이 영향을 받습니다. 생명과 물질세계를 총칭해서 자연환경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발전한다 하지만 엄청난 위기가 생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해가 없으면 환경파괴를 가져오고 우리 미래에 큰 위험요소가 됩니다.
지구에 70억의 사람이 살고 있는데 우리처럼 먹고 사는 사람들이 상위 20%, 또 소위 극빈상태인 하위 20% 가까이 됩니다. 우리 돈 1000원 정도면 생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우리 사는 데만 급급해서 이 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과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1년만에 죽는 어린아이가 500만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난리가 납니다. 우리나라 사람 아니라고, 내 종교인 아니라고, 인종이 다르다고, 국가가 다르다고 그들은 굶어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이런 것을 외면하면서 어떤 정의와 선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이런 고통을 외면하는 삶을 착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기종교, 자기의 사상에 어떤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는 신체적 장애, 성별, 신앙, 믿음, 종교, 민족이 다름으로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북한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왜 내가 도와 줘야 하느냐’ 이렇게 말할 때 생명으로서 태어난 존재로서 생존의 권리를 무시하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이 잘 살고 있다고 해도 앞으로 닥칠 위기가 중국의 부상에 따른 미국의 견제로 인하여 결국 남북관계 갈등이 증폭되고, 동북아시아에 민족주의적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전쟁상태의 일시적 멈춤인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정착되어 전쟁을 종식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민주주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아직은 반쪽 민주주의입니다. 우리는 지도자를 뽑는 권리만 있습니다. 시민의 권리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행사될 수 있게 되려면 통일,외교 안보만 빼고 중앙권력이 지방으로 분산되어지는 분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성숙된 민주주의를 만든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는 훨씬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신자유주의 속에 살아오면서 빈부격차가 아주 심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상대적 빈곤을 완화시켜줘야 행복도가 높아집니다. 경쟁을 하는데 기회는 균등하게 주어져야하고, 과정에 룰이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경쟁의 결과에 따른 분배가 공평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정사회입니다.
또한 경쟁에 참가하지 못한 어린이, 노인, 장애인 ,사고, 재난을 당한 사람, 실업자들에 대한 보호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사회안전망구축이라 합니다. 이러한 사회안전망이 잘 구축된 사회를 선진복지국가라 하는 것입니다.
스님이 불교하고 아무 상관없는 저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하지만 이게 불교입니다. 세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되고,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된다.’ ‘네가 살아야 나도 살고,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연기적 관점이 불법을 제대로 이해하는데도 필요하고 세계시민으로 기본교양을 갖는데도 이런 정도의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인식 위에서 마음공부를 해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불교의 공부가 중도잖아요. 이렇게만 해도 세상이 좋아집니다. 궁극적으로는 자기인생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겠지만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이니 우리가 이렇게 함께 만들어간다면 좀 더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본인식의 오류는 세상이 개별 존재의 집합으로 되어 있다는 그 아견, 이것이 철학적으로 제일 큰 문제입니다. 인간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금강경에서는 인상이라 합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있어서, 자연 속에서 살면서, 자연이 삶의 토대임에도 불구하고 파괴합니다. 그동안은 자연이 갖는 복원력으로 크게 문제가 안되었지만 지금에 이르러 파괴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크다보니까 필연적으로 자원이 고갈되고 환경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자원이 고갈되면 원자재 가격이 올라가고,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재화를 쓸 수가 없습니다.
모두 수치로 잘사는 기준이 나오니 대량소비를 불러오고 이것이 다시 대량생산을 불러오고 그러면 원자재가 고갈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대량소비로 인한 대량폐기물입니다. 이로 인하여 환경오염, 기온상승, 기후변화가 생겨서 환경 위기가 닥쳐오고 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잘 살려고 노력한 것이 공멸하는 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자연환경이 복원 가능한 범위 안에서 소비하고 개발해야 이 문명이 지속가능합니다.
정말 우리가 무엇을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인가? 삶이 건강하게 지속되는 환경을 물려주어 우리아이와 다른 생명도 우리처럼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고 유산입니다. 나의 삶의 방식을 조금만 바꾸어 1회용품 안 쓰고, 쓰레기를 줄이고, 음식물 쓰레기 없도록 하고, 휴지 안 쓰는등 생활상의 노력을 한다면 우리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를 아끼고 우리를 아끼는 것입니다.
나부터 작은 실천을 하는 것이 후손들을 잘 살게 하는 것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지나친 성장과 ,개발논리에 현혹되지 말고, 지구 전체를 생각하면서 진리를 생각하고 전 세계를 생각하면서 미래세대와 함께 살 수 있는 세계를 꿈꾸는 인간이 되어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인식의 폭을 넓혀서 작은 실천이라도 행한다면 후손에게 물려주는 소중한 유산이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공부를 해나가야 합니다. 감사합니다.”라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려면 각자가 환경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노력하자고 하시면서 강의를 마치셨습니다.
이렇게 2시간 30분 간의 강의를 마치고 중간 시간에는 원고교정등 업무를 보셨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우리가 사는 세상’ 2강 ‘인류-절대빈곤퇴치, 인도주의’에 관한 주제로 강의를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대중들께 “저녁은 드셨어요?” 하시며 인사를 하신 후 오전과 마찬가지로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복을 빌고, 실종자들이 빨리 생사가 확인이 되어서 가족들이 분노와 좌절과 절망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되찾도록 대중들과 함께 합장을 하고 해탈주 1편을 독송하신 후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다면 나를 온전하게 하거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가꾸는데 훨씬 도움이 됩니다.” 하시며 서울에서 강의하신 ‘세계를 보는 눈’과 오전에 있었던 ‘환경-지속 가능한 문명’에 관해서 개괄적으로 설명을 하셨습니다.
“요즘은 인간의 의식이 변화하여 고양이가 버려져도, 개가 버려져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여 보호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밖의 ‘아이들’이 버려져도 외면된다면 이것은 우리가 사람이기를 포기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자연사랑, 동물사랑이 어떤 정당성을 가질 수가 있겠는지 의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동물을 사랑하지 말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고 동물도 사랑하자’ 라는 것입니다.
환경문제가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을, 물질까지도 삶의 토대로 보고 함부로 해치지 않고 아끼는 관점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면 그 가운데 모든 인간을 내 나라 사람으로, 내 가족으로 보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을 ‘인류애’ ‘인도주의’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전쟁에서도 자기를 죽이려 했던 적군이 무장 해제되어 공격력이 없어지면 죽이지 말고 살려서 돌려보낸다는 것이 ‘인도주의’입니다. 그러니 적국의 사람이라도 굶어 죽으면 양식을 주고, 병이 나면 치료를 해주자는 것입니다. 안보라는 것이 국방만을 갖고 안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문제들도 안보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즉 인간 안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는 의식 수준이 세계시민으로서 갖는 수준에 못 미칩니다. 즉 유엔인권헌장, 유엔의 인도주의적 원칙에 전혀 못 미치고 아직도 예전 야만적인 수준인 ‘적군은 다 죽여야 된다.’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태도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는다 하면 어떤 민족이든, 어떤 인종이든, 어떤 종교를 믿든, 정치체제가 어떻든 관계없이 인도적 지원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유엔의 인도주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현실의 세계는 그렇지 못합니다. 소위 세계 최고의 인권을 자랑하는 미국도 국익에 어긋나면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그것보다 더 합니다. 남북관계가 안 좋을 때 길거리에서 모금을 하면 대부분 ‘빨갱이’, ‘종북주의’ 운운하며 그놈들을 왜 도와주느냐며 북한으로 가라 합니다. 여러분 또한 분위기 안 좋을 때는 이런 소리 들을까봐 겁내서 모금을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부터 인도주의적 원칙이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아무런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물매를 맞아도 떳떳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가야 할 길이고 특정한 종교 문제가 아니라 세계 모든 국가가 모여서 합의한 최소한의 원칙이며 인간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의 양심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도주의입니다.
그래서 인도적 지원을 할 때는 첫째 지금 상황이 인도적 위기 상황인지 봐야 합니다. 둘째 인도적 지원을 했을 경우 조금이라도 인도적 위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고려해야 합니다. 인도적 지원의 핵심은 정치체제니 종교니 이런 것들이 핵심이 아닙니다.
또한 필요한 식량이 100만 톤인데 10만 톤을 지원하고선 ‘도와줘도 아무런 해결이 안 되더라’ 하는 것은 도와주는 사람들의 교만입니다. 그러니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좋지만 능력이 되지 않을 때는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뿐입니다.
‘북한에서 굶어죽는다’ 해서 모금을 하다가 ‘핵실험을 했다’거나 ‘미사일을 쐈다’하면 굶어 죽는 어린아이가 핵실험을, 미사일을 쏜 것도 아닌데 지원을 딱 끊어 버리는데, 그 과보는 어린 아이한테 갑니다. 이것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잘 구분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부유한 사람들이 자기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부가 한 쪽으로 쏠리도록 되어있는 제도적 혜택을 본 것이므로 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을 해줘야 합니다. 또한 이것은 그 사람의 부가 오래도록 지속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12대 300년 동안 부를 유지했던 경주 만석꾼 최부자의 비결은 첫째가, 아무리 재산을 모아도 만석 이상은 못 늘리게 하여 부를 제한하였습니다. 둘째는, 흉년이 들때는 논 값이 아무리 떨어져도 사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셋째는,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는 것은 모두 내 책임이다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넷째는, 며느리가 들어오면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게 살도록 3년 동안은 무명옷을 입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와 권력이 합쳐져서 생기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막기 위해 과거에 합격해도 진사 이상의 관리를 못하도록 가훈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니깐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이면 최소한의 생존 권리를 함께 나누자는 것입니다. 내 아들 네 아들, 내 나라 사람, 네 나라 사람, 내 종교, 네 종교 따지지 말고 함께 나누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도주의입니다. 그래서 OECD 가입국은 국민총생산의 0.7%를 극빈국가의 개발을 위해 지원하도록 UN에서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0.7%는 고사하고 0.1%도 안 쓰고 있습니다.
유엔이라는 곳은 세속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곳입니다. 세속사람의 수준이 이만큼 와 있는데 세속을 뛰어 넘는다는 수행자가 불교든 기독교든 지금 세속 수준에도 못 미칩니다. 그러니까 우리 수행자들은 주변조건이 어떻든 수행정진 하여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지고 동시에 우리가 사는 사회를 좀 더 개선시켜 나가는 이런 노력을 해야 합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이 둘을 함께 하자는 것이 정토회의 설립취지입니다. 그래서 JTS가 모금을 할 때 절대 빈곤에 있는 버려진 아이들, 이 아이들은 ‘모두 우리 아이들’이라는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불자라면 인도주의적 원칙을 견지하고 북한, 이라크, 아프리카, 일본 등 그 어떤 나라도 예외가 될 수가 없고 ‘모든 인간으로 똑같이 사람으로서의 기본 권리를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JTS의 설립이념이 ‘배가 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때 배워야 합니다’입니다. 이렇게 ‘기아’ ‘질병’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기구입니다.
이런 문구는 또한 경전에도 있습니다.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께 ‘우리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서 공덕을 지었는데 부처님이 안 계시면 우리는 누구에게 공양을 올려야 이런 큰 공덕을 지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여 염려마라. 여래가 없는 세상에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똑같은 것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둘째는 아픈 사람에게 치료약을 주는 것, 세 번째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 하고, 네 번째 청렴하게 수행하는 자를 외호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JTS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의 수단이고 자비를 실천하는 행입니다. 여러분들도 JTS 하는 일에 동참을 해서 내 삶의 복을 더 열악한 사람과 나누어 가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세계시민이 되는 자격 조건입니다. 감사합니다.” 하시며 저녁 강의를 마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강의를 마치고 바로 서울로 이동하셨습니다.
내일은 조찬회의부터 사무실에서 몇 번의 미팅이 있고, 저녁에는 평화리더십 아카데미 강의가 있습니다.
전체댓글 7
전체 댓글 보기스님의하루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