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4.4.19. 경전반 특강수련 법회

오늘은 장수 죽림정사에서 불심도문 큰스님의 팔순 기념법회가 있었습니다. 법륜스님께서는 새벽 4시에 정토회관을 나서 장수 죽림정사로 향했습니다.

     

법륜스님께서는 불심도문 큰스님의 팔순 잔치를 해 드리려 했으나 불심도문 큰스님께서 마다하셔서 그동안 용성조사유훈 실현을 위해 수고하셨거나 도움을 많이 주신들을을 초청해서 감사하는 자리로 하자는 법륜스님의 말씀에 큰 스님께서도 동의를 하셔서 아주 조촐히 기념법회를 겸한 인사의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동안 용성조사유훈 실현을 위해 도움을 주신 서울, 부산지역의 불자님들, 큰스님의 상좌들, 정토회 활동가들 약 150여명이 함께 해서 스님의 법문도 듣고 함께 공양을 들었습니다.

 

공양이 끝난 후 큰스님께서는 각각 참석한 단위별로 기념촬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법륜스님께서는 경전반 특강수련생에게 법문을 하기 위해서 문경으로 향하셨습니다.

     

전국의 경전반 학생 401명과 스텝 41, 도합 443명이 상반기 특강수련에 참석하였습니다.    

먼저 스님께서는 경전반 학생들에게 금강경 공부하니까 재밌어요? 내가 20대 때 금강경을 읽었을 때는 몇 번을 읽어도 별 내용이 없는 것 같았어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 그것도 아니라니, 이거 뭔가? 말장난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가 70년대, 유신독재 말기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많이 잡혀가고, 죽고, 또 우리 사회가 산업화해 가는 과정 속에서 도시빈민이 양산이 되고, 전태일 열사가 노동3권 보장하라며 분신하고, 농촌이 붕괴되어가는 등 사회적인 혼란이 가중되는 시기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제가 금강경을 읽었는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 그것도 아니다는 논리가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 아니냐 싶어서, 불교에는 좋은 점도 많은데, 현실의 삶을 떠나있는 것은 아니냐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후 고문도 당하는 등 고통도 겪으면서 글자의 이면, 글자 너머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조금 생기면서 금강경에 쓰인 글자, 그 이면의 뜻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금강경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습니다.”라고 스님의 경험을 이야기 해주시면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셨습니다.

 

     

지은 상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지만 또다시 다른 상을 짓게 되는데, 어떻게 지은상을 알아차려야 하는지, 불교대학 교과 과정중에서 근본불교 강의에서 제512처와 18계 중 제8식 아뢰야식을 설명을 하시면서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아뢰야식이 다르다고 했는데, 아뢰야식엔 전생습이 포함되어있는지, 또 스님께서 티벳불교 린포체 신앙에 대해서 또 하나의 계급주의에 빠진 지나친 신앙이라고 하셨는데, 아뢰야식의 전생습을 부정하는 것인지 궁금한 분, 부처님은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했는데, 불교에서는 내 본성을 찾아라, 참마음을 보라라고 하는데 무슨 뜻인지, 29강에서 시타림에서 시체들의 옷을 처음에는 그냥 입다가 의사 지바카가 옷을 세탁해서 말려 입으면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니까 부처님이 그것이 좋겠구나해서 빨아입게 되었다고 했다는데, 부처님이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대답하신 것 같은데 병에 걸리든 걸리지 않든 상관없는 것 아닌지, 수업을 들으면 너무 좋은 데 일상생활로 돌아가면 평정심을 잃게 되고 몸에 대한 집착이나 무시받는다는 마음이 크게 일어나는데 어떻게 하면 일어나는 마음에 싹 끌려가지 않게 되는지, 세월호 참사 후 배를 버리고 탈출한 선장에 대한 분노가 큰데, 그분 또한 그 가족들에겐 살아 돌아와 다행스런 가장일 터인데, 누구에게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이해를 해야 하는지, 신라 가야에 살던 사람들은 부여계통으로부터 이동해 온 민족인지? 토착세력인지? 고구려신라가야의 민족의 기원이 같은지? 경전반 법문 중 우울증으로 자살한 분이 있는 집안이 살인자가 나온 집안의 여파보다 크다고 하셨는데, 왜 그런 것인지, 깨닫고 난 이후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질문지를 통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중 세월호 사고와 관련하여 선장이 먼저 탈출한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 사람도 사고 난 순간 가족도 생각나고,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살고 싶은 욕구는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개체든 자신을 보존하려고 하는 욕구가 있으니까 생물학적으로는 그 사람의 그런 욕구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될 때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하잖습니까? 변호사, 스님, 정치인도 모두 직업적 윤리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정의로우려면 직업적 윤리의식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없으면 동물들이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의사가 돈 안 내면 치료를 안 해 주겠다.’고 하면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것처럼, 배에 대해서 잘 모르는 여객들을 먼저 대피시키고, 잘 아는 선장이 마지막에 탈출해야 한다는 훈련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선장에게는 직업적 윤리의식이 부족했던 것인데, 생물학적인 자기 생존의 본능을 따랐을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선장입장에서는 지금 안 나가면 자기도 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했던 것일텐데, 그게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거기서 한명이라도 더 구하면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데 죽는 게 낫느냐, 아니면 하는 데까지 하고 여기서 나가야 되겠다했는지는 좀 더 상황을 살펴봐야 될 것입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2시간 가까이 배가 기울어져 가고 있었는데 눈앞에서 뻔히 보이는 것을 못 구하고, 지금도 배안에 못 들어가고 있다는 걸 보면 참 답답합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음모론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서해는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바닥이 뻘이다 보니까 물이 밀려오고 밀려나갈 때 물이 탁해져서 시야가 확보가 안 된다고 합니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이렇게 마음이 답답하고 안타까운데, 가족들 입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그러니 가족들이 악을 쓰고 물병을 던지고 뺨을 때리면 맞아야 됩니다. 총리과 장관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분노를 표현할 데가 없으니까 자식이 죽어서 정신이 없으니까 그런 것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덩달아서 무조건 남을 비난하는 것은 자제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문제도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보통 일본 배가 가라앉았다면 일본이 못되게 구니까 벌받아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일본에서 원자로 사고 났을 때, 미얀마에 태풍이 일어났을 때 서울의 어느 대형 교회 목사님이 하나님 안 믿어서 벌 받아서 그렇다고 했는데, 그래서는 안됩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런 일을 당한 것 아닌가한다면, 그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책상을 밀었을 때 밀리는 건 착한사람이 미니까 밀리고 나쁜 사람이 미니까 안 밀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현상은 다 원인이 있어 일어났는데, 배가 뒤집히는 건 윤리적인 원인에 의해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사고입니다. 사고의 원인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이 방향을 급선회하니까 짐을 확실히 동여매지 않아서 컨테이너가 한쪽으로 쏠려서 그 무게에 의해서 기울어졌고, 기울어지면 더 확 쏠리니까 침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 데 그럼 왜 급커브를 했느냐가 밝혀져야 될 일입니다. 그러니까 세월호에 대해서 윤리적으로 접근하지 않아야 합니다.” 라며 우리가 사건이 생겼을 때 결과만 보고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것에 대해 조심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또 다른 질문은 부처님은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했는데, 불교에서는 내 본성을 찾아라, 참마음을 보라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인지 알듯 말 듯 합니다.”

     

“‘라고 할 때 가 내 육신이나 가족을 지칭할 때가 있습니다. , 경상도와 전라도가 싸울 때는 서로 다른 인데, 일본하고 싸울 때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다 같은 입니다. 그냥 우리가 라는 용어를 쓰지만 이게 참 묘합니다. 그래서 라고 할 때 계속 의미하는 바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탐구는, 이런 는 다 거짓이고 진짜 는 따로 있다는 걸 지칭하는 게 아니라, 나라고 하는 이것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깊이 관찰해 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라고 하는 것이 깊이 관찰해 보면 어떤 때는 이걸, 어떤 때는 저걸 지칭하면서 수도 없이 옮겨 다닌다면 특정하게 지칭해서 이게 나라고 할 게 없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끊임없이 라고 하는 의식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서 그것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게, 그것의 작용을 꿰뚫어보는 게 곧 부처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상을 지어서 보기 때문에 집착을 하게 되고 집착을 하니까 괴로움이 생기는 데, 그게 텅빈 줄 알면 집착할 바가 없어집니다.

 

현실은 집착을 놓으면 되는 데 놓으려는 데 안 놓아진다는 것은 내가 옳다는 게 있기 때문에, 나라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직 본질을 탁 꿰뚫지 못했기 때문에 상황에 부딪치면 라는 게 작용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은 우선 생각이 바뀌어져야 의식이 바뀌고, 무의식도 바뀔 여지가 있는 데 의식이 바뀐다고 꼭 무의식이 금방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다만 바라보기만 하라’, ‘깨어 있어라’, ‘찰나에 깨어 있으라’, ‘알아차림을 유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음이 물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면 물질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중학생 정도 되면 이렇게 물질이 바뀌었다고 아는데, 물질의 상태가 바뀐 것이지 물질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본질은 물분자라고 알게 됩니다. 얼음으로 있을 때나 물이나 수증기로 있을 때 물분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해야 설명이 됩니다.

     

고등학생들은 그 물분자라고 하는 것이 상태변화에서는 변화가 안 일어나지만, 화학변화에 있어서는 분자도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이 수소와 산소로 바뀌어 버립니다. 그것은 물이 물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 물 아닌 것이 결합하여 물이 되기도 합니다. 화학식으로 설명하면 원자는 바뀌지 않는 걸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돌턴의 원자설은 원자가 더 이상 변하지도 않고 쪼개지지도 않는 물질의 근본 알갱이로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설명이 되는데 나중에 고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면 그 원자도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을 가르칠 때도 물리변화, 화학변화, 핵변화등으로 차원을 달리해서 가르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화를 낼 때, 그건 네 본성이 아니니까 네 본성을 찾아라고 얘기를 한 후에 공부가 많이 되면 또 다른 얘기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픈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이 너무 체력이 떨어져 있으면 약부터 먹이기 보다는 우선 몸을 좀 보한 후에 약을 먹이게 되는 것처럼 단계를 따라 가르치게 됩니다.”

 

스님께서는 3시간을 꽉 채워서 밤 10시가 되어서야 법문을 마치고내일 수도권 저녁반 경주 남산순례가 있기 때문에 두북으로 이동하셨습니다.

 

 

전체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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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선영

머리가아프고눈도아프고...그래도아프다하면안될것같은....정말지독한시간들....유가족들이빨리이지옥에서벗어날수있기를간절히바랍니다.

2014-04-21 14:05:17

무량상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자꾸 납니다. 그냥 매스컴으로 지켜보는 사람도 이러한데..자식을 잃은 엄마의 마음은 어떨지...너무 슬픕니다. 부처님시대에 자식을 잃은 엄마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죽은자식을 살려달라고 할때....부처님 말씀을 듣고 희망을 찾았듯......억장이 무너지고, 지옥에 잃을 유가족들이 빨리 희망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2014-04-21 13:27:14

무진장

불심당임도문 영감 그렇고 그렇지. 무당에다 무당마저 안되는 자.<br />성질이 개지랄 같다는것.

2014-04-21 12:5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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