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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경전반 특강수련을 위해 새벽 5시에 두북에서 문경으로 출발했습니다.
8시부터 전국 경전반 학생 약 310여명을 대상으로 즉문즉설을 하였습니다. 경전반 특강 참가자들은 공부하면서 궁금했던 점들을 미리 적어서 스님께 드렸고 스님께서는 그것을 보면서 답을 해주셨습니다.
미리 적어낸 질문은 모두 27개였는데, 오늘 배정된 3시간내에 소화해야 했기에 스님께서는 서두없이 바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였습니다. 10개정도의 질문에 답을 하고 나니 예정된 3시간이 넘어섰습니다. 질문한 사람들중에 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쉽기도 하겠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했습니다.
오늘 나온 질문중 2가지 정도만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정보등에 의해 개인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집단이나 사회 전체에서 개인으로 내려오는 것인지, 개인들의 노력으로 위로 올라가야 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통일 복지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개인의 힘으로는 역부족인 듯하고 시간도 많이 걸려 답답합니다.”라며 사회적 변화에 대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여러분들이 배를 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배를 타고 갈 때 배가 잘못되면 배안에 탄 사람들이 다 위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배가 멀쩡해도 두 사람이 싸우면 둘만 죽게 되죠. 이럴때 개인이 잘해야 되느냐, 전체가 잘해야 되느냐하는데, 개인도 잘해야 되고 전체도 잘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배와 같은 것이 사회, 국가인데, 사회나 국가가 잘못되면 그 속에 있는 개인이 착해도 화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지구환경이 잘못되면 지구안에 살고 있는 사람도 죽고, 동물도 죽습니다. 죄는 사람이 지었는데 죽기는 작은 벌레들이 먼저 죽어요. 그러니까 지구안에 살면서 환경파괴를 많이 한 사람은 미국사람, 유럽사람, 일본사람인데 가뭄으로 먼저 죽는 건 아프리카 사람입니다.
우리의 업중에 개인 업이 있고 공업이 있습니다. 개인이 잘못한 것이 개인에게 돌아오는 경우가 개인 업이고 개인이 잘못한 것과 관계없이 모두 다 공업중생으로 같이 받는 것을 공업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부도나면 아이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건 아버지와 아들이 공업중생이기 때문입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즉 성불과 정토가 불교의 두가지 이상입니다. 법장비구가 정진해서 정토가 이루어진 게 극락세계이고, 본인이 성불한 것이 아미타부처님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개인만 잘하면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선종은 이 둘을 균형 잡고 있지 않고 개인의 문제에 치우쳐 있습니다. 조선시대 오백년을 내려오면서 불교가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개인수행에만 치우쳐서 왜곡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근본불교나 대승불교는 두 부분이 공히 균형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 있는 한국불교는 한쪽에 치우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토회는 바른불교를 실현하고자 성불과 정토를 균형있게 잡고 나가려는 것입니다. 전통을 계승한다기 보다는 정통을 회복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 개인은 우선 행복해야 합니다. 실천의 관점에서 본다면 개인으로부터 출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떤 조건 하에서도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야 됩니다. 그게 수행입니다.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조금 더 평화로워지고 좋은 제도가 갖추어지게 되면 나도 좋아질 뿐만 아니라 특별히 수행 안하는 다른 사람까지도 더불어 좋아지게 됩니다. 내 문제를 해결하면 나도 좋고 다른 사람이 도와달라 하는것도 도와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무거운 짐을 먼저 내려놓고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 짐도 조금씩 들어주자는 것입니다.
지구 환경이 중요하고, 지구 저편에, 북한에 굶어죽는 애들이 있는데 살려야 합니다. 한반도에 전쟁이 나면 우리 다 죽게 됩니다. 통일이 되면 남한도 북한도, 너도 나도 다 좋아집니다. 자신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때 내 고통에 빠져서 다른 사람은 돌아볼 여유가 없는데 내가 짐을 좀 덜고 나니까 저 사람 짐이 무겁구나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 짐이 무겁더라도 내 짐이 무거우면 못 들어주게 됩니다. 정토회에서는 우선 네 무거운 짐을 완전히 못 내려놓더라도 좀 내려놓으면 눈이 조금 떠지고 귀가 조금 열리니까 그때 우리 모두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귀가 열리고 눈이 트여서 행동에 참여할 수가 있게 됩니다. 자기가 어느 정도 정화가 되면서 세상에 대해서 조금 참여하는 것은 건설적 에너지가 되는데, 자기가 화가 나서 세상을 바꿔야 되겠다고 할때는 그 에너지가 파괴적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분노가 혁명의 시작이 되지만 늘 역사속에서 보면 혁명은 열에 하나도 성공하기 어렵고 아홉개는 실패해서 엄청난 희생을 치루게 됩니다. 때로는 혁명적인 상황도 필요하지만 크게 본다면 인간 세상이라는 건 자기정화를 해가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해 가는 것이 더 긴 역사에서 볼때는 더 건설적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불교의 정토건설은 수행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해서 즉 불쌍히 여겨가면서 가자는 것입니다. 화나서 싸우게 되면 두 번 세번 실패하면 나가떨어지게 되지만, 불쌍히 여기면 오래할 수 있고 상대를 미워하지 않으니까 내가 괴로워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우리 중생은 화가 나면 에너지가 생기는데 화가 안나면 에너지가 별로 안 생긴다는게 문제입니다. 통일 지향적인 정부가 들어설 때 가장 효과적으로 통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정치가 잘되면 국민이 살기가 좋습니다. 그런데 좋은 정부가 들어서서 정치하는 것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일인데 여러분은 그걸 자꾸 나쁘게 생각합니다.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면 안된다는 말은 권력과 결탁해서 절을 크게 짓고 인사권에 개입하고 그러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올바른 정치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한부분입니다. 여러분들이 올바른 정치에 대한 시민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대통령이 법질서를 확립하려는 것은 대통령의 책임과 권리에 속하고 대통령이 법질서를 훼손하는 것은 대통령의 잘못에 속하는 것입니다. 국가 기관이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법에 하지 말라고 되어있으니 범법행위에 속합니다. 범법행위자는 조사를 해서 찾아내어 처벌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국가기관을 대표해서 누군가가 국민에게 사과를 해야 합니다. 대통령이자신이 잘못해서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를 대표해서 사과하는 것입니다.”라고 답을 해주셨습니다.
또 다른 질문은 본래 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고 하는데 선함과 악함은 구분하지 못하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선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누구나 다 주관적이니까 옳고 그름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우리나라에서는 애국자지만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라고 말하잖아요. 선악은 주관적인데 불교 선악이 다르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는 선악이 다르고, 유교 선악이 다릅니다. 그런데 좀더 객관에 근접해서 선악을 말하자면 인간의 행위중에 생물에 기준을 두고 생물이 하는 행동처럼 한다. 토끼가 하는 행동처럼 여우가 하는 행동처럼 한다고 할 때는 선악이 아닌 생태적인 기본행동이라고 하고, 그런데 늑대나 돼지도도 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면 악이라고 합니다. 불교적 가치는 굉장히 객관적으로 접근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닭도 돼지도 새끼를 낳게 되면 새끼를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 목숨을 버려서 보호하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애를 낳아놓고 팽개치고 자기 살길 찾아 가는 것은 동물도 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나쁜 행동에 속하고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동물은 그 동물이 어느 정도 커서 독립을 하면 그 어미가 안 따라 다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다 큰 자식을 보호하고 걱정합니다. 이건 동물도 안하는 짓이에요. 그런데 이건 좋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요 결과가 좋으면 좋고, 나쁘면 나쁘다 할 수 있어요 이것도 정신적인 것이지요. 집착입니다. 동물들이 부모가 늙어죽는다고 해서 와서 돌보나요? 어떤동물도 안그래요 그런데 사람은 부모를 돌보지요. 사람이 부모를 돌본다는 것은 동물이 안하는 걸 하는 것입니다. 이건 동물보다 나은 행위입니다.
선에 들어가지요. 자식을 돌보지 않는 것은 나쁜 일에 들어가고 돌보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요. 그러나 부모를 돌보는 것은 좋은 행동이고 돌보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닙니다. 부모를 돌보지마라는 소리가 아니라 돌보면 좋아요. 그러나 이것은 선택지이지 의무사항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돌보는 것은 의무사항입니다. 그러면 동물에서 새끼는 암컷이 돌봅니다. 남자가 애를 돌보지 않는 것은 나쁜 짓은 아니에요. 남자가 애를 돌보면 좋은 짓입니다. 남편이 돈을 벌어주든, 애기를 봐주든 아내를 도와주면 아내는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남편이 돌보지 않는다고 내가 성질을 내니까 애들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편이 나빠도 없는것과 비교했을 때 도움이 되면 감사해야 합니다. 애기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마음이 그래야 합니다. 애기 없을 때 남녀는 평등해야 하지만 애기가 있을때는 애기 엄마로서의 역할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모성이라는 것은 자기 권리를 버리고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옳고 그름이나 선악은 주관에 속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걸 잘 살펴서 다시 보고, 다시 보고 해야지 절대악 절대선으로 분류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상대적 선악, 상대적 옳고 그름은 늘 있습니다. 서울 가는 길이 절대적인 것은 없지만 상대적인 것은 있습니다. 주어진 조건에 따라서 그 상황에서 옳고 그름과 선악이 있는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가르침이 없다 이렇게 이해하면 안됩니다. 주어진 조건 속에서 상대적인 선악은 있지만,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불법이라는 것은 이런 원리이기 때문에 참 좋습니다. 내가 불교신자라서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가 이치에 많고 합리적입니다. 그렇다고 이치만을 고집하지도 않고 그래서 해볼 만한 공부입니다. 다만 말씀드리는 것은 너무 지식적으로만 접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치에 맞다 하면 이치에 맞게 공부하되 가능한 실천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변화가 오려면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책만 본다고, 이치만 안다고 변화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을 하고 봉사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혼자서 이렇다 저렇다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해봐야 팜플렛 가지고 길거리에서 돌리는데 사람들이 받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지는데 그럴 때 자기를 봐야 합니다. 자기 돈 가지고 아이스크림 사먹고, 불우이웃돕기에 돈 내지 않는데 내가 왜 기분이 나쁠까? 이런 것을 검증해야 합니다. 집에서도, 부부사이에서도 늘 수행을 점검 하는 자세. 즉 이치를 알아도 현실에서는 까르마 때문에 안되니까 까르마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알아보고, 또 알아보는 이것을 보림이라고 합니다.
뒤로 돌아보면 좀 변화가 있었고, 앞을 보면 아직 멀었을 때, 앞만 보면 좌절, 절망하고 뒤만 보면 안주하기 쉽습니다. 뒤를 돌아보고 많이 왔다고 자신감을 가지는 동시에 그래도 가야할 길이 멀구나 하면서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다 함께 수행하여 나가 봅시다.”라며 우리가 이치를 깨치면서도 함께 실천해가는 수행자의 자세에 대해 정리해주셨습니다.
문경에서 경전반 특강 법문을 마치고 서울로 이동하셨습니다.
*내일은 사무실에서 회의가 있고 평화교육원에서 시니어 아카데미 강의가 있을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