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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시부터 평화리더십아카데미(평리아)와 여성리더십아카데미(여리아)가 함께하는 경주 워크숍이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오전에는 집 주변의 나무와 화초들을 정비하면서 겨울을 준비했습니다.
스님과 평리아, 여리아 수강생들은 오후 1시부터 법흥왕릉에서 경주역사기행을 시작하려했으나 서울에서 오는 길이 많이 막혀 20분 정도 늦게 시작했습니다.
법흥왕릉 앞에서 아카데미 회원들을 만난 스님께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까지의 역사적 상황과 통일의 사상적, 신앙적인 힘을 살펴보겠다고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동쪽에 치우친 작은 부족국가 신라가 어떻게 역사의 주류로 등장하고 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는지와 통일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신라가 내적, 외적으로 어떤 노력을 했는지등에 대한 설명을 해주셧습니다.
BC57년에 건국된 신라는 전반기 500년은 국가라고 할 수 없는 작은 부족 국가의 모습이었으며 박혁거세부터 신라의 역사를 알기 쉽게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법흥왕은 신라 23대 왕으로 514년에 즉위하였고 지증왕의 아들로 신라의 비약적 발전을 이룬 왕입니다. 법흥왕은 내적으로 병부를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하여 법치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이차돈 순교로 불교를 공인하여 외적으로는 개방 정책을 폈습니다. 가야와의 통합도 법흥왕의 치적 중 하나인데, 개혁정책과 개방정책을 했기 때문에 가야와의 통합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야는 원래 불교국가였기 때문에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여 가야의 신앙을 포용함으로써 통합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시며 신라가 가야와의 합의 통일을 어떻게 이뤄 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멋진 소나무 숲 안쪽에 자리한 법흥왕릉을 떠나 태종무열왕릉과 김유신장군묘로 향했습니다. 태종무열왕은 성골이 아닌 진골이기 때문에 바로 왕이 되지 못하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거쳐 오십 살의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때 신라는 국운이 피어오르는 시기라 통일이 올 수 있었습니다. 깨끗하게 조성된 태종무열왕릉을 돌아다니며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과의 사랑 이야기와 선덕여왕과의 일화를 들려주셨고 누구의 릉인지 아직 확인되지 않은 4개의 큰 릉 앞에서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태종무열왕릉을 나와 김유신장군 묘로 향했습니다. 춘추공과 힘을 합쳐 신라의 국력을 신장시켜 통일을 이끈 김유신 장군의 위대함이 많지만 그 중 하나는 당나라와의 전쟁을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신라는 당나라와 나당 연합군을 만들어 당나라 군사들에게 군량미를 대면서 고구려와 백제와 전쟁을 하였고,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고 난 뒤 당나라는 처음의 약속과는 다르게 백제와 고구려에 웅진 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자국의 관할 하에 두려고 하면서 신라와 충돌하기 시작하자 신라까지 넘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김유신 장군은 강경하게 당나라와의 전쟁을 주장하였고 문무대왕 역시 김유신을 지지하여 약 8여년 동안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였고, 그 전쟁에서 승리하여 당나라 군대를 대동강이 북으로 철수시키고 당나라와 화친한 676년이 삼국 통일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신라에서는 각간이 최고의 직책이지만 김유신 장군은 그것으로는 모자랐는지 대자를 붙여 대각간, 사후에는 그것도 부족하여 태대각간이라 추존하였고, 신라말기에는 흥무대왕이라는 왕의 칭호도 주어졌습니다. 왕의 아버지에게 왕의 칭호를 준 일은 있어도 우리 역사에서 신하에게 왕의 칭호를 내린 건 오직 김유신밖에 없습니다.”라고 설명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꾸물꾸물하던 하늘에서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은 우산을 펴고 우비를 입으며 흔들림 없이 스님의 이야기에 귀기울였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사천왕사지였습니다. 신성한 영지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절을 지은 것으로 호국사상에 의해 지어진 절로 절터만 남아 있어 형체를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모두 마음속으로 사천왕사를 떠올리며 신의 힘을 빌려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덕여왕릉을 찾아가는 길은 아름다운 산책로였습니다.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렸지만 그 모습 또한 운치있게 느껴지는 길이었습니다. 선덕여왕은 김춘추, 김유신 등의 인재양성과 대당 외교를 통해 통일의 기반을 구축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실린 선덕여왕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며 선덕여왕릉에 삼배를 한 뒤 소나무가 울창한 숲 속 좁은 길을 걸어 문무대왕의 화장터인 능지탑을 거쳐 황룡사지로 향했습니다.
논두렁을 따라 걷다 도착한 황룡사지에서 스님께서는 “동서남북에 문이 다 하나씩 있고, 남문을 지나면 중문이 있으며 탑, 법당, 강당등이 일렬로 늘어선 형태로 전통적인 절의 정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인사나 통도사는 큰 절이긴 하지만 산에 지어져 있기 때문에 지형적인 이유로 정형적인 절의 형태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황룡사터는 왕궁으로 만들려고 터를 닦았다가 누런 용이 나타나는 바람에 왕궁보다는 용을 다스릴수 있는 절이 좋겠다하여 국가가 관장하여 지은 절이기 때문에 규모가 매우 큽니다.”라며 황룡사가 지어진 유래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터에 여기가 정문이라고 먼 벌판을 가리키는 스님의 손짓을 따라 마음속으로 1천여년 전의 황룡사를 상상하며 넓은 절터를 돌아다녔습니다.
우리나라의 안녕을 위해 지어진 황룡사터를 마지막으로 경주 역사 기행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스님의 강연이 이어졌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본 통일코리아의 전망’이라는 주제로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우리나라의 성장 동력은 이미 거의 소진 되었지만, 한번 더 성장을 할려면 통일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우리나라가 지금 성장의 한계에 부딪혀 있는데, 이것을 한단계 더 넘어가기 위해서는 통일밖에 없습니다. 통일을 통해서 북한개발이라는 특수를 이용하여 한번 더 성장을 이끌 수 있고,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으며 대륙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이제까지 선진국을 모방하여 지금에 이르렀지만, 이제 기술력의 한계에 이르렀기에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모든 분야에서 창조성을 개발해야 합니다.” 통일로 성장을 위한 밑거름을 삼고 창조성을 키워서 각 분야에서 문명을 주도해야 한다며 우리나라의 새로운 백년을 그려주셨습니다.
통일의 중요성을 역설하시는 스님의 말씀에 강연장의 분위기는 사뭇 진지하였고, 강연을 듣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통일에 대한 기대와 책임감 있는 표정,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삼국의 통일을 돌아보며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남북통일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룰 것인지를 살펴보면서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내일은 영남권 가을 불교대 특강수련이 문경 정토 수련원에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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