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3.10.3. 용성조사 오도일 기념법회

오늘은 3.1 독립선언 33인중 불교계 대표이신 백용성조사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오도일 기념행사가 장수 죽림정사에서 있었습니다. 새벽 4시 40분에 정토회관을 나서 죽림정사로 향했습니다. 불심도문 큰스님과 함께 아침 발우공양에 참가하기 위해 일찍부터 길을 나섰으나 도로에 안개가 많이 끼어 결국은 발우공양시간에 늦었습니다. 아침 공양이 끝난 후 도문 큰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오늘 행사에 대해 의논을 하였습니다.

 

아침 8시30분, 용성 교육관에서 용성진종조사 뿐만 아니라 7여래불, 69조사, 7대사등 역대전등제대조사 천하종사 제대선지식들께 다례제를 지냈습니다. 2부에서는 용성조사 오도일 기념법호와 용성조사 저서 ‘귀원정종’의 번역서 출판기념 법회를 가졌습니다. 도문 큰 스님께서는 출판기념 법회에서 행사가 길어지자 법문을 간단히 노래가락으로 하셔서 대중들을 흥겹게 해주셨습니다.

 

1부, 2부 행사를 마치고 나서 제3부에서는 정토가을 불교대생을 대상으로 법륜스님의 법문이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법문을 시작하기 전에 전국에서 온 정토 불교대생들을 지역별로 소개를 하고 난 후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전국에서 모인 불교대생 약 460여명을 대상으로 용성조사님과 탄생지인 죽림정사에 대한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용성조사님께서는 1864년에 태어나셨으니 내년이면 탄생 150주년이 됩니다. 용성조사님의 행적은 크게 불교활동과 사회활동,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불교쪽 행적은 조선조 500년 동안 탄압받아서 허물어진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 근세 불교의 중흥조이십니다. 용성조사의 공적을 세분화 시키면, 첫째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인 정법을 다시 확립하신 불교의 지성화입니다. 

 

법륜스님의 스승은 불심도문스님입니다. 불심도문스님의 스승은 누구인가 동헌완규조사입니다. 동헌완규조사의 스승은 누구인가 용성진종조사입니다. 이렇게 쭉 올라가면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성교육관 안쪽 벽면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일곱 부처님의 탱화가 있고 그 다음에 69분 조사님들의 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인도의 28분, 중국의 28분, 그리고 13분의 한국 조사님들의 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불교의 정통 법맥을 복원하였습니다. 

이곳 교육관에는 용성조사가 있기까지 모든 불교의 역사가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건물이기는 하지만 역사책이고 박물관인 것입니다. 이 건물의 건너편은 용성조사님의 기념관으로 개인행적, 즉 불교운동과 독립운동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용성조사님의 일대기는 교육관 건물 바깥쪽에 모든 행적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앞면 빼고 삼면에 그려져 있습니다.

 

용성조사님께서는 지리산 칠불암에서 조실스님으로 계실 때 다른 종교의 불교비판에 대한 부당함을 올바르게 해명한 ‘귀원정종’을 지으셨습니다. 두 번째, 불교의 대중화입니다. 조선시대에 불교를 탄압하다보니 여성분들과 일반민중들만 불교를 믿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경전을 읽을 수가 없어서 그냥 불교를 믿고 복을 비는 사람으로 남았기 때문에 대중들도 불법을 알아야한다고 하시면서 삼장역회를 조직하시어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셨습니다.  

서울 시내에는 고찰이 없는데, 그 이유는 조선조 500년 동안 4대문 안에 스님을 못 들어오게 했습니다. 도시나 마을에 있던 절을 다 없애버리거나 북한산 같은 서울근교에 있는 절은 유생들의 유원지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깊은 산속,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절만남게 되었습니다. 스님들이 속세를 버린다는 것은 세상의 속된 것을 버린다는 뜻이지 세상과 등져서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라시대, 고려시대 절은 모두 도시에 있었습니다. 수도원만 산속에 있었지요. 절은 산속에 있다는 인식은 조선시대 불교 탄압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당시 스님들은 탁발로 겨우 생존을 유지했습니다.

이에 용성조사님께서는 불교도 생산을 해야 한다고 해서 만주의 용정에 가서 농사짓고 수행하는 선농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백운산 밑에 화과원이라는 과수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런것들이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1894년에 갑오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났지만, 갑오경장때 노비문서를 철폐하면서 스님들도 천민신분에서 벗어나게 되고, 또 승려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면서 용성스님이 서울로 오신 것입니다. 처음 우면산 대성사에서 초막을 짓고 사시면서 3.1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종로구 봉익동 2번지에 민간인 집을 사서 대각교당이라는 절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우리가 지금 정토법당 만들듯이 대중법당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불교의 지성화, 대중화, 생활화를 주창하시고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스님들이 계율을 제대로 안 지키는 것을 보고 불교의 계율을 다시 정비하였기 때문에 조선불교 중흥률 제 6조이십니다. 재가 신자가 되는 의식인 삼귀의 오계를 만든 사람이 용성조사스님이고, 일제 강점기에 일본불교를 닮아갈 때 승려의 결혼제도는 부처님법에 어긋난다하여 정화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또, 사회쪽 행적으로는 천도교와 기독교와 협력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세수 50대 중반이후 3.1운동부터 시작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독립운동에 주로 참여하시고 기여하였습니다. 윤봉길의사는 용성조사님께 삼귀의 오계를 받고, 상해임시정부 김구선생님에게 파견되어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정토회에 오면 불교만이 아니라 사회문제의식도 가르칩니다. 그건 스승으로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할아버지 스님이 독립운동을 했으니 그 후손인 우리는 통일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정토회에 와서 이것이 맘에 안들면 자기에게 맞는 다른곳으로 가면 됩니다. 복을 빌거나, 명상을 하거나, 참선만을 하기를 원하면 그런 곳을 찾아가면 됩니다. 여기 정토회는 처음부터 부처님의 정법을 계승한다는 것과 우리의 공동체를 위한 일, 즉, 나라를 위한 독립운동, 가난할 때는 잘살기 운동, 독재시대에는 민주화운동, 환경이 파괴되면 환경운동, 인권이 침해되면 인권운동, 분단시대에는 통일운동, 전쟁위기에는 평화운동을 하고자 하는 곳입니다.  

정토 불교대생은 이곳에 한번은 와서 불교가 독립운동에 기여한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정토회에서는 이곳 죽림정사를 일년에 4차례 용성조사 탄생일, 오도일, 열반일, 그리고 삼일절에 옵니다.”

스님께서는 이렇게 용성조사와 용성조사의 탄생지인 죽림정사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고 나서 불대생들을 대상으로 즉문즉설을 하였습니다. 

한 불대생은 공부하다 생긴 질문보다는 개인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일년 전에 스님께 남편이 병이 있어 힘들었을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 질문했는데, 그때 스님께서 헤어질 생각하지 말고 자식들 생각해서 잘 간호하라고 했답니다. 그 후 깨장 다녀오고 남편은 지난달에 하늘나라로 보냈는데, 지금 초등학교 딸이 셋이 있는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나한테 묻는 것을 보니 혼자 살기 힘들다는 거죠? 남자가 필요하다는 말 아닌가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직장 다니면서 아이 키우면 되는데, 나한테 물을 때는 그런 뜻이 아닌가요?” 하니 대중들이 크게 웃습니다.

“첫째, 남자 생각을 당분간 접어라. 사람은 상대적입니다. 완전히 극복하진 못하지만 스님들은 결혼한번 안하고도 잘 사는데 난 한번 해봤는데 못살게 뭐가 있냐고 생각하면서 둘이 사는 사람 쳐다보고 부러워하지 말고 혼자 사는 사람을 쳐다보고 사세요.

둘째, 저 스님은 혼자인데 난 애가 셋이나 있으니 외롭지는 않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가족이랑 떨어져 혼자 살면 외로워요. 서울 정토회나 문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보다 더 공동체를 이루며 잘 살고 있습니다.  

질문자는 세 명 아이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부모를 모시고 사는 공동체는 갈수록 부모님이 늙으니까 힘이 들지만, 아이들과 같이 사는 공동체는 아이가 커 가니까 점점 더 쉬워집니다. 엄마라고 생각하지 말고 여자 4명이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방청소, 설거지, 밥 하는 것등 업무를 나누어서 해나가면 됩니다. 아이 셋을 다 건사하겠다고 생각하면 힘이 듭니다.  

아이들에게도 너희는 젊었고 난 늙었으니 젊은 너희들도 일해라고 하면서 아이들을 훈련시키면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좋아집니다. 공동체이기 때문에 회의를 해서 함께 일을 나누고, 아이들에게 공부할래, 청소할래하고 물어서 공부하겠다고하면 공부를 하게 하고, 돈 버는 건 내가 하고 이렇게 업무를 나누면 한 5년만 지나면 나아 질 것입니다. 인생은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다 책임지고 건사하겠다고 생각하면 갈수록 힘이 들고 짜증이 많아지지만, 처음부터 회의를 해서 평등하게 업무를 나누어서 해 나가면 점점 좋아집니다. 

항상 권리와 책임은 같이 갑니다. 아이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고 이렇게 역할을 나누고 책임을 지는 것이 리더십 훈련입니다. 민주주의란 모든 것이 투명해야 합니다. 이런식으로 재밌게 살면 됩니다. 언제까지? 막내가 18살때까지. 그 다음에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은 끝내야 합니다. 누구든지 18살이 되면 끊어야 합니다. 대학을 보내는 계획도 세우지 말고,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고등학생때까지다라고 못 박아야 합니다. 

남편이 있으면 평등하게 잘 안됩니다. 남편은 권위적이며 자기가 돈을 벌기 때문에 책임도 지고 있고, 아이들은 권리가 없는 만큼 부모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이제 질문자 가족은 평등하게 민주주의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동체적인 생활을 하게 되면 아빠 없는 것에 대한 열등의식도 없습니다. 만약 질문자가 전에 남편이 병들어 있는데 힘들어서 이혼을 하고 남편이 죽었다면 자기가 죄의식을 가지게 되고, 아이들은 엄마가 아빠를 버렸다는 것에 대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별이든, 이혼이든 나에게 주어진 삶은 내가 책임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남의 애도 데려다 키우는데 내 애를 키우는 것은 쉽잖아요. 모든 문제는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인데, 아이들이 내 인생의 짐이 아니고 혼자 살면 외로울 수 있는데 애가 셋이나 있으니 축복이다라고 생각하면 쉬워집니다.” 라고 하시면서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고 불교공부도 열심히 해서 진리를 찾기를 당부하셨습니다.



오늘 용성조사 오도일 기념식을 모두 마치고 점심 공양을 한 후에 스님께서는 내년도 용성조사 탄생 150주년 기념일에 행사를 어디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점검하기 위해 책임자급 간부들과 함께 죽림정사 주변 물공원을 다니면서 장소도 답사하고 의견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서 다시 유럽강연을 위해 짐을 꾸렸습니다. 오늘 밤(4일 새벽 1시 15분) 비행기로 독일로 출발하였습니다.

전체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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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배

스승님
스고하셨습니다 _()_
157주년 용성조사 탄신일
장수 죽림정사 용성 기념관

2021-06-19 07:31:04

보덕화

용성조사 오도일 참석해보스님들께서나라를위해애쓰신덕분에우리가편안하게수행할수있다는것을느꼈다
스님들께감사드립니다

2013-10-04 20:21:44

섬돌

가을불대생으로 어제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전국에서 모인 법우들을 뵈니 불법을 배우고자 모인 한분한분이 모두 고맙고 귀했습니다.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온 가르침이 수많은 조사님들을 통하여 우리의 가슴에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부디 소중히 가꾸어 가시기를 축원해 봅니다. 성불하세요 ()()()

2013-10-04 16: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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