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8월 10일 법륜스님의 하루(청산리 전투, 일송정, 봉오동 전투)

여섯째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330분 기상해서, 4시에 오늘의 첫 탐방지인 청산리 전투터로 출발을 했습니다.
오늘은 청산리 전투터
, 대종교 3인묘, 일송정, 대성학교, 봉오동 전투터 등
독립운동 유적지를 탐방하는 날입니다
.

청산리 전투터는 12km를 걸어야 한다는 스님 말씀에 사람들은 운동화로 갈아 신고,
마음을 단단히 하여 스님을 뒤따랐습니다.
숙소에서 버스로 30분 정도의 거리에 청산리 전투를 기념하는 비석이 높이 솟아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부터 걷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보통 걸음으로 걷는다고 하시지만, 걸음이 빨라 사람들이 따라가기가 힘들었습니다. 밥 먹는 우리들보다 아직도 물종류만 드시는 스님이
 더 빠른 것을 두고
, 모두들 웃으면서 한 마디씩 합니다.
그러면 스님은 죽도 안 먹는 사람이 이 정도로 걷는데,
밥 먹는 사람은 더 빨리 걸어야 하는 것 아니예요?해서 또 다같이 웃었습니다.

아침의 상쾌한 기분으로 청산리전투터로 향했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중국의 공안들이 찾아 옵니다. 우리들이 무엇을 하는지 감시를 합니다.
우리 땅이 아닌, 남의 나라에 우리의 유적지가 있어
마음껏 순례하기도 어려운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 백운평까지 걸었을 때,
지금도 움막이 하나 있는 넓은 터를 가리키며 이 곳에 살던 조선족 주민들을
일본군들이 모두 다 죽여버렸다는 말에 가슴아팠습니다
.

청산리 전투터로 가는 길에 작은 냇가를 건넜습니다. 물이 뼛속까지 차갑습니다.

지금 이 여름에도 이렇게 물이 찬데, 초봄이나 늦가을, 겨울에는 얼마나 물이 차겠어요?
그래서 북한사람들이 중국으로 넘어오다가 압록강, 두만강 차가운 물에 다리에 쥐가 나서
물에 휩쓸려 죽는 거예요
.” 97년 혹독하게 추웠던 봄에 저희들에게 학교 다니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 두만강을 건너며 죽어가는 난민으 구하는 것이 더 급하다며
가슴아파하시던 스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

작은 내를 건너 2.5km 정도를 더 올라가니 냇가에서 폭포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이곳이 청산리전투가 있었던 직소택입니다.

백운평 마을로부터 2.5km 들어간 직소택까지 추격해간 일본군 보병 200여명은
일렬종대로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 이 때 김좌진 장군 지휘 아래 독립군의 집중 사격이 쏟아졌고,
일본군 선발대는 거의 전멸 당했습니다.
반면 독립군 피해자는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쳐 23명에 불과했습니다.”

청산리전투에 대해 어젯밤 설명에 이어, 오늘도 현장에서 간단하게 설명을 하고,
직소택 앞에서 스님과 참가자 전원은 간절하게 발원을 했습니다.
백운평에서 독립군을 도왔다며 일본군에게 무고하게 죽어간 주민들,
직소택에서 죽어간 일본군사들과 독립군 모두의 왕생극락을 빌었습니다.
100
여년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들과 싸우다 장열히 산화해 갔습니다
.
또한 일본 군인들도 군국주의가 강제로 동원해 이 곳 오지에 와서 희생된 사람들입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부당한 전쟁으로 희생된 젊은 영령들의 혼을 달래며,
숨져간 목숨들이 헛되지 않도록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며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만들어 가겠다는 스님의 발원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

 

독립군들이 걸었던 길을 다시 걸어 내려왔습니다.

화룡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땡볕아래 대종교 3인묘를 찾았습니다.
일본 신도(神道)에 맞서 단군을 국조로 받들며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대종교
(大倧敎)를 만들었던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
, 2대 교주인 김교헌,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묘가 단정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지고 간 낫으로 벌초를 했습니다. 벌초후 깨끗해진 묘소를 보니까 기분이 좋았습니다.

 

벌초를 마치고, 가져간 과일과 술을 올리고 간단하게 예를 올렸습니다.
옛날에는 아무도 벌초도 하지 않고 정리가 안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한국의 대종교에서 주변 울타리도 치고 정리를 해 두어서 보기가 좋았습니다.
옛 선조들의 정신을 잘 이어가는 것이 현재 우리들이 해야 할 역할이지 않나 싶었습니다.

 

다음은 일송정으로 올랐습니다. 일송정에 올라 다같이 선구자를 불러 보았습니다.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멀리 해란강이 굽어 흐르고, 그 옛날 용주사의 종소리 바람에 실려 오는 듯 했습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노래를 3절까지 부르자 모두 숙연해집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멀리 만주벌판까지 와서 온 몸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컸을까? 눈을 감고 100년전 일송정에 앉아
조국을 그리던 선구자들의 모습을 그려 봅니다
.

 

일송정에서 내려와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대성학교에 잠시 들렀습니다.
윤동주의 생애와 민족교육의 선구자들, 연변의 항일운동 전반에 대해 정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대성학교까지 돌아본 후, 용정냉면점에서 커다란 그릇에 담긴 냉면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점심을 먹고는 봉오동 전투터로 가서 지금은 댐이 만들어져 현장은 수몰이 되고
그 댐 아래 세워진 봉오동전투터 기념비 앞에서 순국선열을 위해 묵념을 했습니다
.

 

오늘 저녁 발해에 대해 강의해 주기로 하신 방학봉 교수님이
봉오동전투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해 주셔서 지금은 단지 기념비밖에 없는 곳이지만
,
이 곳이 독립운동가들의 치열한 전장이었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봉오동전투 기념비 참배 후 한반도 최북단까지 올라갔다가
도문해관앞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
북한으로 이어진 다리 중간까지 사람들이 20원을 내고 들어가 사진을 찍습니다.
다리도 놓여있고, 사람도 살고 있는데 자유롭게 오가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더군다나 도문해관 주변에는 많은 음식점에 음식이 넘쳐 나는데,
바로 다리로 뛰어가면 1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들은
밥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다는 현실이 가슴 아팠습니다
.

북한은 우리의 사진 배경만 될 뿐 더 이상 가까이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도문회관에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한 후,
올해 83세의 노교수이신 방학봉 교수님으로부터 저녁 강의를 들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정혜공주 묘를 한 달동안 발굴하면서부터 발해와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인연이 지금까지 지속되리라고는 당시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실증적인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발해의 역사를 연구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발해 연구를 하면서 신라와 백제, 고려의 탑과 문화는 어떤가 많이 궁금했어요.
법륜스님을 만나서 제가 남한의 탑과 유적지를 보고 싶다고 했더니,
저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어서 한 달동안 전체 탑과 유적지를 거의 다 봤습니다.
그것이 연구에 크나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법륜스님께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변대학교에 재직 중이실 때부터 정토회에서
방학봉 교수님의 발해사 관련한 책을 일년에 한 권꼴로 발행을 해 드렸습니다
.
평생을 발해사 연구에 바친 교수님의 발해에 대한 애정이 강의하는 내내 느껴집니다.

내일은 오늘 교수님께 들었던 발해를 생각하며 발해 유적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전체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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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

저는 지난 스님 부모님 묘를 벌초할 때도 그 바쁜 와중에도 저렇게 자식의 도리를 하시는구나 하는 감동이 있었는데, 대종교 3인의 묘를 벌초하시는 걸 보며 정성에 다시한번 감동입니다. 눈물이 나고,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행복합니다.

2012-08-24 22:38:07

열음

들국화님. 청년들과 함께한 역사기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피곤함이 가시지 않았을 법도 한데, 이렇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역사기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감사함을 전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자리를 빌어 감사함을 전해요.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아름다웠습니다.

2012-08-20 10:05:09

있는 그대로

(북한은 우리의 사진 배경만 될 뿐...) 쭈우욱~~읽어 내려오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말문이... 아니? 뇌리가 콱- 막혀 오는듯...아!!!......

2012-08-20 07: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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