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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도 양산에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 열렸습니다. 무조건 1등으로 줄을 서야 질문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1등으로 줄 서서 질문했습니다. “시어머님이 당신 아들을 손에 넣고 애지중지 귀하게 키웠고, 아들에게 기대가 많아 저한테 요구하는 것도 많습니다. 아들과 저에게 하는 행위가 너무 다릅니다. 너무 힘들어서 못 살겠습니다.”
스님은 “남편은 엄마한테 가도록 놔두고, 본인이 자기 발로 찾아올 때 그때 받아주라”라는 내용으로 답변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어머니에게 가도 좋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남편은 야간 근무를 해도 잠도 자지 않고 어머니를 쫓아다녔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이 “엄마는 아프지 마세요. 저는 아버지처럼 잘할 자신 없어요.”라고 했습니다. 아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부모에게 효도하는 모습을 남편이 몸소 보여준 셈입니다. 그때 ‘아! 스님 법문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남편은 한 달 보름 정도 어머니를 쫓아다니고 할 만큼 했는지, "너무 힘들다. 이제는 안 간다."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고 9일 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남편이 자기 발로 찾아올 때 뒷일은 자동으로 해결된다’는 스님의 답변이 생각났습니다.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그 후 갈등했던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을 보고 ‘스님은 이렇게 미래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구나! 나는 이 정토회 줄을 놓지 않고 가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2018년 남편이 먼저 불교대학에 입학하고, 저는 2022년 온라인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아버지는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개가했습니다. 아버지는 장손으로 엄마가 데려가지 못하고 두고 갔습니다. 아버지는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었고, 남의 눈치를 보고, 공부도 못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서당을 하는 학자였습니다. 6.25 사변 때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마을의 유지들과 당나무에 묶여 총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혼이 나갔습니다. 작은외삼촌마저 학도병으로, 북한으로 끌려갔습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큰이모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중매했습니다. 아버지가 언변이 좋고 논도 있고 뭐도 있다는 등 잘 사는 듯 얘기해서, 대단한 집으로 시집가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해 보니 빈털터리였다고 합니다. 엄마는 "결혼한 후, 사람들이 거짓말하고 욕하는 것을 처음 봤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 결혼생활을 했으니, 매일매일 싸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마음에는 ‘감히 너 같은 게 나한테 장가를 와? 니가 나를 속였어.’라는 울분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엄마는 항상 입을 닫고 있었고, 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보고 성질을 내며 매일 폭력을 썼습니다. 저희 남매는 그런 두 사람의 눈치만 보고 살았습니다.
17살부터 직장에 다니며 돈을 벌었습니다. 당시는 '엄마가 아버지를 무시한다.'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엄마가 대답을 빨리 안 해서 두들겨 맞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결혼하면 무조건 빨리 반응하고 빨리 예, 예 해야지.'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맞지 않기를 바라며, 월급을 아버지에게 모두 줬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만 원을 줬습니다. 저는 그 만 원으로도 씩씩하게 잘 살았습니다.
결혼할 때까지 월급을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모두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엄마 때리지 마세요.’였습니다. 엄마를 때리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아버지를 웃게 하려고, 아버지 화나지 않게 하려고 아버지에게 이쁜 짓만 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내 안에 꾹꾹 쌓여 갔습니다. 어느 날 밖에서 많이 웃은 날, 엄마가 맞았으면 다음 날은 밖에서 웃지 않았고, 어느 찡그린 날 엄마가 맞았으면 다음 날은 웃었습니다. 항상 엄마에게 초점이 맞혀졌습니다. 엄마만 맞지 않는다면 내 돈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놀러 가는 것도 절제하며, 나름의 규정을 만들고 '거기서 벗어나는 행위를 하면 안 된다.'라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았습니다.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라는 어떤 허상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은 공부하고 싶었지만,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형도 결혼 후 가정을 꾸려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여동생도 공부시켜야 했습니다. 공부할 수 없었던 울분이 술을 마시면 폭발했습니다. 저는 당시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싸우고 두들겨 패는 아버지 밑에서 살았는데, 내게 또 그렇게 살라고 하면 억울해 죽을 것 같았습니다.
결혼 전에는 '신랑이 어떤 행동을 해도 받아들이겠다.'라는 결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술을 마시고 폭발하는 모습을 보면서 점차 힘들었습니다. 평소 온순하고 자상한 남편이 술을 마시면 감정이 폭발했습니다. 내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감정들이 올라와 폭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술 마신 후에는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길에서 잠들거나, 4차선 도로에 무작정 뛰어드는 등 위험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남들에게 남편을 비난하기보다 칭찬을 많이 했습니다.
화가 많이 났습니다. 일어나는 화와 짜증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당을 못했습니다. 화날 일도 아닌데 화가 나고, 짜증 날 일도 아닌데 짜증을 부리며 이 화와 짜증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니 너무 답답했습니다. 이것만 없으면 살 것 같았습니다. 마음을 닦아 화와 짜증을 없애고자 수없이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성격은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라는 법문을 듣고 정신을 번쩍 차렸습니다. ‘아버지가 화와 짜증을 그렇게 냈는데, 내가 거기서 배웠구나.’라는 생각이 딱 떠올랐습니다.
2022년 3월, 불교대학 입학을 앞두고, 행복학교1에 등록하고 동시에 2022년 1월 1일부터 혼자 108배를 했습니다. 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종교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108배를 직접 해보니 혼자서도 할 힘이 생겼습니다. 유튜브를 찾아서 보고 배우며 했습니다. 행복학교 마음 편 심화 편까지 졸업하니 불교대학과 잘 연결되었습니다. 한 치 의심도 하지 않고 기도를 했습니다. 108배를 100일 동안 하면 자기 꼬락서니가 보인다고 하니 ‘진짜 100일 동안 한 번 해보자.’ 하고 죽을 둥 살 둥 했습니다. 기도하면서 '아버지가 화와 짜증을 그렇게 부렸는데, 내가 거기서 배웠구나!' 비로소 확연히 알았습니다. 내 안에 있던 것들이 올라오는지, 혼자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아버지를 그때 이해했습니다.
'그동안 기도한 것이 아까우니 계속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경전대학에 가고 전법활동가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기도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계속했습니다. <깨달음의 장2>과 <나눔의 장3>을 다녀오고 봉사하는 과정에서 제 아픔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불쌍했습니다. 어린 9살 남자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엄마라도 아버지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아버지가 저렇게 됐을까?’라는 생각도 들었고, '아버지도 불쌍하고 엄마도 불쌍하다'는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어릴 때 부모가 총살당하는 모습을 보고 엄마가 느꼈을 그 말 못 할 억울함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버리지 않아서 참 감사하다.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방편 역할을 한 건 엄마였구나. 아버지의 매를 견디며, 우리를 지켜줘 감사하다.’ 그렇게 이해되었습니다.
시어머니도 "8살쯤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친척 오빠 손에 컸다."라고 들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혼자 살아내야 했던 것들로 인해 자기 가족밖에 몰랐겠구나!’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한테 억눌려 있던 감정들을 살피며 아버지 사는 쪽을 향해 절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그렇게 독하게 했기 때문에 시어머니를 이겨낼 힘이 생겼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보기 싫어 도망치듯 시집왔는데, 아버지 사는 쪽을 향해 이렇게 절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화가 일어나는 원인을 찾았으니, 이렇게 정진하면 화가 소멸하겠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또한 조금씩 화가 사라지는 경험을 통해 '화와 짜증만 없앨 수 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도전해 보겠다.'라는 마음이 있었기에 오늘까지 온 것 같습니다.
천만다행은 남편 신경 쓰느라 아이를 돌볼 여지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밥도 잘 먹지 않아 밥을 비벼서 쫓아다닐 정도였습니다. 남편의 억눌린 감정이 올라오면 폭발할까? 두려워 남편만 살피며 살았습니다. 아이는 자기 혼자 컸습니다. 그냥 자유롭게 키웠습니다. 참 감사하게도 아이가 평화주의자입니다. 남편에게 너무 감사합니다.
남편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 아이가 너무 온순해 '안에 억눌려 있는 감정이 있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나 잘못될까, 대화를 많이 했습니다. 생각보다 아이가 잘 자라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유산이라고 줄 수 있다면, 불교대학을 주고 싶다. 이것보다 더 좋은 유산은 없을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불교대학 청년 반을 다니고 졸업했습니다. '엄마가 화내고 짜증 내는 것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바뀌는 것을 보고 가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불교대학을 다니고 “엄마, 잘 키워줘 고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이를 돌볼 상황이 못 되어, 그냥 뒀는데, 진짜 잘 자랐습니다. 아이는 나의 업식을 물려받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만 해도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은 화와 짜증이 없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습니다. 화와 짜증에서 이렇게 자유로워진 제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좋습니다.
어릴 때 먹을 것 제대로 먹지 못해 음식을 쟁여 놓고 먹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찬 등 음식 만드는 일을 목숨 걸고 했습니다. 잠을 자지 않고 만들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바빠 "반찬 만들 시간도 없다."라고 했더니, 아들이 “엄마, 예전에 엄마가 만든 음식 그거 먹어내느라 힘들었어요.” 합니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제가 바빠진 후로 음식을 만들지 않으니, 반찬이 많지 않아 좋답니다. 제가 좋다고 한 것이지 상대도 좋았던 건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나쁜 환경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그것들이 다 나를 키우는 힘이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아버지도 감사하고, 어머니도 감사하고, 시어머니도 감사하고, 남편에게도 감사하고, 잘 자라준 아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는 지금 여기 이대로 만족합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중, 잊히지 않는 시어머니에 대한 상처가 남았는지 질문하자, “예전에는 시어머니 이야기가 저절로 나왔지만, 지금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합니다. 김영희 님의 화와 짜증, 미움과 원망이 사라진 가벼운 마음을 느끼며, 저 또한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변화가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스스로 빛을 발하며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킨 김영희 님의 앞으로의 여정이 더욱 밝고 행복하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글_황유 희망리포터(부산울산지부 중울산지회)
편집_이주현(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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