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
나하고 싶은 대로 살았구나!

2025년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월간정토> 과월호에서 뽑은 감동적인 글의 소개는 이어집니다.

김송주 님은 유학 생활을 하던 중 정토회를 만났고, 불법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갈수록 커져 백일출가에 입재했습니다. 그러면서 있는 줄도 몰랐던 트라우마를 발견했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감사함을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재입재를 거쳐 지금은 행자대학원생으로 문경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송주 님, 사랑하는 남편과 부모님을 등지고 이 길을 걷고 있지만, 내가 선택한 삶을 오롯이 책임지고 나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어 감사하다고 합니다.

출가할 결심

2020년 11월 온라인 명상수련에 참여하면서 정토회를 만났다. 호주 멜버른에 살고 있었는데, 10년간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박사 논문을 마침내 끝낸 시점이었다. 그리고 멜버른 대학교에서 한국어 강의를 맡게 되어, ‘이제 아픈 몸만 해결하면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던 때였다. 논문을 쓰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뼈와 근육이 격하게 뒤틀리는 증상이 생겨서 살아있는 자체가 고통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더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힘겹게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간절했다. 멜버른 법당 총무를 담당했던 최영희 보살님이 명상수련 참가자 명단을 보고는 불교대학을 소개해주셨고 그 인연이 백일출가로 이어졌다.

공양간에서(김송주 님)
▲ 공양간에서(김송주 님)

나는 부처님 법을 매우 좋아한다. 2007년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는 출가를 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결혼 후에는 남편과 백년해로할 줄 알았는데, 정토회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불법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갈수록 커졌다. 여러 스님의 법문을 듣고 명상수련에도 종종 참가하던 중 2022년 여름, 출가가 다시 내 인생에 들어왔다.

우리 부부는 서로 지극히 사랑했다. 캐나다 사람인 남편은 백일출가가 뭔지 몰랐지만, 가정을 버리고 자신을 떠난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에게 백일출가는 그런 의미이기도 했다.

백일출가 입재

생전 처음으로 만 배를 해봤다. 만 배를 어떻게 하나 걱정이 앞섰지만, 백일출가 면접 때 “만 배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묘수 법사님의 한 말씀이 큰 힘이 되었다. 한 배 한 배 정성으로 절을 하는데 몸은 갈수록 무거워졌다. 만 배를 시작한 지 이틀이 되던 날, 아주 연로해 보이는 스님 한 분이 만 배장에 들어오셨다. 스님은 우리 45기 16명을 한번 쭉 둘러보시더니, “만 배 가지고 되겠어요? 그동안 자기 마음대로 살았는데?”라며 알 수 없는 말씀을 던지셨다. 스님은 노구를 이끌고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면서 목탁을 치며 응원을 해주셨는데, 그런 스님을 보니 나도 절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려갔다가 올라오고 내려갔다가 올라오는데, 오른쪽에 놓인 정수기가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다리가 너무 아팠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싶었다. 그때 문득 ‘내가 정말 내 마음대로 살았구나’ 돌이켜졌다. 쉬고 싶은 욕망을 놓지 못하는 자신을 보는 순간이었다.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백일출가에서 마음공부를 하는 방식은 기존에 내가 공부해오던 방식과는 달랐다. 유튜브를 통해 여러 스님의 법문 동영상을 보거나 시간 내어 명상하는 일상은 불가능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이미 그러한 습관이 깊이 배어 있어서 당연한 것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던 증세는 명상하면 나아지는 측면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그래서 틈틈이 시간이 날 때면 1분, 2분이라도 명상했다. 절을 할 때도 이전에는 기도문을 되뇌면서 했는데, 법사님은 절을 하기 전에 한번 읽어보고 절을 하라고 하셨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했다. 소소한 모든 것들이 이전의 생활 습관과 부딪혔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내가 이전의 습관을 고집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비로소 내 방식을 내려놓고 백일출가에 입문할 수 있었다.

문경수련원 솔숲 길에서
▲ 문경수련원 솔숲 길에서

트라우마의 발견

엄마를 사랑하는 줄만 알았다. 엄마에 대한 상처를 안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하는데 안 좋은 기억들만 몇몇 떠올랐다. 머릿속을 아무리 헤집어봐도 나의 뇌리에는 무섭게 화내는 싸늘한 엄마의 얼굴만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엄마는 걱정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밖에서 누가 내게 같이 가자고 하면 길거리 아무나 붙잡고 엄마라고 불러라, 아니면 아무 가게라도 들어가 버리라고 신신당부하던 엄마의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나를 기다렸다. 어릴 때 내가 납치당할 뻔하고 성폭행당할 뻔해서 그랬던 것일까. 엄마는 저녁이 되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했고, 나와 연락이 닿지 않으면 오빠와 친구들에게 수소문해서 나를 찾아다녔다. 내가 어딜 가도 따라다녔다. 스무 살이 넘어서 처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러 갔을 때는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를 걸어 내가 잘 지내는지 살폈다. 그리고 엄마의 이러한 걱정은 나에게 종종 화풀이로 전이되었다.

백일출가 도반들에게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눈물이 났다. 엄마가 나를 가둬서 키우는 바람에 자유로울 수 없었고, 엄마가 걱정과 화가 많아서 나는 몸이 아파도 말할 수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내가 엄마를 원망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성이 난 얼굴과 화난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어쩌면 나만 그렇게 보고 그렇게 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상처가 되지 않는 말을 되뇌며 괴로워했다. 화가 난듯한 도반의 얼굴을 볼 때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되었다. 나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백일출가는 내가 가진 트라우마를 발견하며 나를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

공양간에서 도반들과(맨 오른쪽이 김송주 님)
▲ 공양간에서 도반들과(맨 오른쪽이 김송주 님)

원망에서 감사함으로

백일출가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꺼내고 난 후 엄마는 매일 같이 우셨다. 엄마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 안 된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백일출가를 마쳤을 뿐만 아니라 6개월 뒤에는 다시 입재했다.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하는데, 내 기억 속 장면들이 전혀 다르게 구현되었다. 엄마가 나를 구속하고 야단쳤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들이 엄마가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친구들과 단독으로 행동하는 것을 매우 걱정하고 싫어하셨지만, 결국엔 엄마가 내 뒤를 따라다니며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에서 밥 짓고 농사지으며 부모님에게 그저 감사할 뿐이라는 말씀에 공감되었다. 이제는 엄마가 화난 투로 이야기할 때면 엄마의 상처와 아픔이 함께 보인다. 여전히 나는 화난 얼굴이나 말투에 끌려다니지만,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저 사람이 지금 예민하구나’, ‘저 사람에게 상처가 있구나’ 하고 안다.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한 도반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는데 알고 보니 그냥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었다. 추측으로 화난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분명히 알았다. 눈꺼풀이 한 겹 벗겨진 것 같았다.

내가 별거 아니구나

나는 완벽주의적 성향도 있고 도덕적이어서 시비분별심이 많다. 마치 자신은 전혀 실수하지 않는 사람처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서툴다. 수련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번은 공동체 안에서 외부 손님을 초대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소통이 안 되어 손님의 점심 준비를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일을 두고 ‘어떻게 손님을 초대해놓고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작은 속삭임으로 시작되어 점점 커져서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공양간에 들어가서 일사불란하게 점심 준비를 재빠르게 하고 있었다. 그때 내 마음은 더더욱 불편해졌다. ‘왜 불편하지? 왜 불편할까?’ 점심을 먹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어 즐거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던 반면에, 나는 그 문제를 탓하기에 바빴다. 나는 그러한 나 자신이 너무 싫어서 몹시 불편했다. 그때 알았다. ‘아, 내가 별 대단한 사람이 아니구나!’ 주변에서 착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으며 살았는데, 사실상 나는 그렇지 않았다. 실수하고 이기적이고 화도 내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실수나 잘못할 때 그러면 안 된다고 자책했을 뿐이다. 그런 자책이 어쩌면 대단한 사람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JTS 거리 홍보 중
▲ JTS 거리 홍보 중

작은 것에 감사하며

현재 나는 재입재 후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도반들과 함께 밥, 국, 반찬 외에 다른 음식이나 다과를 먹을 때마다 만 원씩 기부하기로 약속하고 1주일간 실천해보기로 했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는 보시로 우유가 들어올 때면 요거트가 후식으로 나온다. 약속을 이행하기로 한 첫날 점심때, 후식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꾸덕꾸덕한 요거트가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크게 한 국자 퍼서 밥 삼아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거트를 안 먹었는데 이상하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이렇게 풍성한 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것이 감사했다.

저녁을 먹을 때는 더 이상했다. 저녁에는 찬이 아주 간소하게 나왔는데, 나는 매운 것을 먹지 못해서 밥과 열무김치, 그리고 평소에 안 먹던 달래를 먹어봤다. 밥그릇에 든 것이 매우 소박했는데 되레 참으로 감사했다. 이렇게라도 먹을 수 있는 게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었다. 가진 것이 적을수록 감사함이 크다.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받기만 해서 아직 감사할 줄을 잘 모른다. 받기만 했다는 것도 머리로만 알지, 내가 많은 사람의 노고와 대자연의 도움 속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홀로서기

지금 나는 행자대학원생으로 문경에서 생활하고 있다. 가끔 어쩌다 내가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서 여기까지 왔을까 하고 탄식이 나올 때도 있다. 순식간에 바뀐 나의 삶을 책임지려 하지 않고 인연을 탓할 때도 있다. 사랑하는 남편과 부모님을 등지고 이 길을 왔듯이, 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왔다는 것을, 나의 선택으로 이 길을 온 것임을 이제야 조금 알겠다. 앞으로 내가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백일출가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내 삶을 책임지고 오롯이 나아가는 것을 배워간다. 감사한 일이다.

지리산 수련원에서(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송주 님)
▲ 지리산 수련원에서(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송주 님)


이 글은 월간정토 2024년 7월호에 수록된 백일출가 수행담입니다.

<월간정토>에는 법륜 스님의 법문과 즉문즉설, 서암 큰스님 법문, 자기를 살펴 마음을 맑히는 사람들의 수행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1년 회원 구독료는 2만 원으로, 수익금은 <월간정토>를 법보시하는 데 사용합니다. 더 많은 분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월간정토>를 구독해주세요. 구독 문의는 전화 02-587-8992로 해주세요.

글_김송주(백일출가 45기)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투고 및 후기 작성하러 가기
▲ 투고 및 후기 작성하러 가기

법보시 및 정기구독하러 가기
▲ 법보시 및 정기구독하러 가기


2025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20

0/200

양계홍

다시 읽으니 더 다가오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같이 중국어봉사하는 도반 송주님이 계셔서 행운입니다. 고맙습니다

2025-01-15 23:07:11

정토

나도 참 내 마음대로 하고 살고 있구나.
그래서 괴로움이 이리도 많구나 하교 돌이킬수 있었습니다.

2025-01-13 22:41:26

서나윤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5-01-10 13:56:43

전체 댓글 보기

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의 다른 게시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