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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문화와 종교,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는 싱가포르! 이곳에서 정토회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시절 인연으로 때마다 도와주는 이들이 있어 싱가포르 모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라고 말하는 최양희 님을 소개합니다.
싱가포르에서 북미지역 불교대학을 진행하는 최양희 님은 "정토회의 인연이 CD 한 장으로 시작되었다"라고 합니다. 2006년 싱가포르 한국 절의 아는 신도가 제게 CD 한 장을 주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매우 인기 있는 스님 법문이니 꼭 들어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복을 빌며 한국 절에 잘 다니고 있었고, 다른 불교 단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법문 CD는 그대로 서랍 속에 넣어두었습니다.
2008년 딸 대학 입학식 참석 차 시애틀에서 며칠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우연히 법륜스님 포스터를 봤습니다. 예전에 받았던 CD의 그 스님이었습니다. 여기저기 물어 시애틀 법당에 찾아갔습니다. 마침, 제가 간 날이 개원 법회였습니다. 시애틀 법당 분위기는 제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부부가 함께 법문을 듣고 '마음 나누기'라는 것을 하는데, 참 보기 좋았습니다. 마치 꽁꽁 얼어붙었던 제 마음이 저절로 녹아내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시절 싱가포르의 한국 절은 스님 없이 신도들끼리 초하루, 보름에 모여 복을 빌고 친목을 위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저 나름대로 구심점을 찾고자 노력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오랜 해외 생활로 외롭고 힘든 마음을 터 놓고 이야기할 곳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애틀 법당에서 하는 '마음 나누기'는 마음을 편안하게 했습니다.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많은 감정이 쏟아져 나오며 환희심이 올라왔습니다. '싱가포르 사람들에게도 '마음 나누기'가 필요하고, 소개하고 싶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싱가포르에 돌아와 호기심에 <깨달음의 장>에 다녀왔습니다. 또한 싱가포르에서 캘커타로 합류하여 인도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깨달음의 장>에서 뭔가 깨우치기보다는 고향에 온 듯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4박 5일 차려주는 정성스러운 음식을 보며 ‘내가 받을 자격이 있나?’라며 감동했습니다. '나도 언젠가 이 감사한 마음을 꼭 보답해야겠다'라고 다짐했습니다.
빚 갚는 마음으로 한국에 가면 문경에서 바라지 봉사를 몇 번 했습니다. 예전에는 한국을 방문하면 친구들 만나 먹고 놀고 정신없이 보냈는데, <깨달음의 장>을 다녀온 후 달라졌습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문경으로 갔습니다. 문경 수련원에서 4박 5일 바라지 봉사를 한 후, 서울로 와 개인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마다 늘 뿌듯하고 보람찼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큰외삼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외할머니가 그 충격으로 몸져누웠습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포함한 친정 식구들과 아이 셋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저와 형제들은 직장 다니는 어머니 대신 외할머니와 이모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습니다. 엄마의 역할을 외할머니와 이모가 했습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외할머니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매일 새벽 목욕재계하고 하얀 한복에 미사보를 쓰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던 외할머니의 모습은 저의 성장 과정에 큰 정신적 교훈이 되었습니다.
나이 차가 있는 오빠, 여동생과 저는 큰 다툼도 없고, 크게 혼난 적도 없이 평범하고 자유롭게 자랐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공부는 뒷전, 동네 아이들과 늦도록 뒷동산에서 뛰어놀았습니다. 어떤 날은 친구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어둑어둑해져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야단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식구가 많고 각자 서울 생활에 적응하느라 저에게까지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속에는 쓸쓸함과 허전함이 있었지만, 천성적으로 밝고 부지런하여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하는데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 성격이 독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2011년 1월 인도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남편이 "인제 그만 돌아다니고 막내까지 대학 갔으니 새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어떻냐?"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사이버 방송통신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면서 정토회 활동도 점점 멀어졌습니다.
2014년 방송통신 대학을 졸업할 무렵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법륜스님이 제게 연락을 요청한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 '지난 4년 동안 배움에 빠져 정토회를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연히 사이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정토회와의 인연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해외 담당의 봉사자가 제게 CD, 책자, 정토회 홍보물을 주면 저는 싱가포르 한국 절의 신도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렇게 정토회를 알리고자 애썼습니다. 몇몇 신도들과 정토회 백일기도에 입재하고, 모은 결사금은 정토회에 전달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혼자 기도를 이어 나갔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소속도 없이 입재식에 참가했습니다.
남북한의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에 서초 법당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24시간 평화를 발원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저도 함께 하고 싶어 평화 발원 기도에 동참했습니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이런 일에 동참할 수 있어 보람을 느꼈습니다. 저와 가족의 복을 빌며 살던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자긍심과 애국심이 싹트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2016년 삼일절 행사가 있어 죽림정사에 갔습니다. 행사 후 서울에서 온 도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 여동생도 싱가포르에 사는데, 불교대학을 하고 싶어한다"라고 했습니다. 해외는 3명이면 불교대학을 할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로 돌아와 오랜 지인에게 권유하여 3명이 우리 집에서 불교대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열린 법회도 열고 2기 불교대학까지, 싱가포르에 정토회가 자리 잡기 위해 회원들 모두 한마음으로 힘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법회를 열 편안한 장소를 구하느라 항상 애를 먹었습니다.
2019년 드디어 간절히 바라던 싱가포르 법당이 개원했습니다. 마침, 법당을 계약한 날이 제 환갑이어서 다시 태어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제는 법당에서 수행, 보시, 봉사할 수 있어 그저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법당이 생겨 거의 매일 법당에 출근해 수요법회, 싱가포르 3기 주간, 저녁 불교대학을 진행했습니다. 그동안 법당이 없어 미뤄두었던 경전대학 수업도 들으며 힘든지 모르고 꿈만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임대 기간을 2년으로 재계약했습니다.
그런데 재계약을 하자마자 팬데믹이 터졌고 소수 인원만 법당에 출근해 온오프로 법회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러다 결국 '법당을 폐쇄해야 한다'라는 연락을 받았고 한동안 마음고생을 했습니다. '어렵게 얻어 소중하게 가꾼 법당을 일 년 만에 닫아야 한다'라는 사실도 믿기 힘들었지만, 도반들과 다 같이 사용하지 못하는데 기한까지 비싼 임대료는 계속 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법문 듣고 수행을 꾸준히 한 덕분에 집착과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소중히 여긴 법당을 미련 없이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내 집이 법당입니다. 개인 법당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새벽 공동 정진 대문을 열어 도반들과 함께 수행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법문 듣고 나눌 수 있습니다. 멀리 미국에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불교대학 수업도 진행 할 수 있습니다.
이전 저의 종교관은 기복신앙이었습니다. '남편 사업 잘 되게 해달라, 아이들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해달라'라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절도 많이 하고 기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기대만큼 되진 않을 때는 용하다는 점집도 드나들면서 굿도 하고 하라는 대로 했지만, 그때뿐 내 마음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2015년 천일결사에 입재했습니다. 처음에는 기도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늦은 시간에 했습니다. 백일마다 회향식과 입재식을 하면서 3년, 다시 3년이 지나고 또 3년이 되어가는 지금은 가랑비에 옷 젖듯 제 업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천일결사에 입재하여 기도한 후로 불안하거나 초조하면 찾던 점집과는 인연을 끊었고, 아이들과의 관계도 좋아졌습니다. 정토회 봉사로 바쁘게 생활하니 아이들에게 쏟던 관심이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전처럼 관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두 자기 갈 길 가고 있다'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내가 오지랖이 넓어 그동안 시간 낭비, 감정 낭비, 돈 낭비하면서 살았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앞으로도 소임을 맡으면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도반들과의 화합을 위해 '항상 겸손한 수행자가 되겠다'라고 되뇝니다.
남편과 부딪칠 때면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이제는 '그렇구나!'라고 다름을 인정하는 연습을 하니 어느 순간 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문득 '40년 넘게 외국에 살면서 남한테 손 벌리지 않고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준 남편이 부처님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좋은 길을 함께 하면 참 좋겠다'라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이제는 제 활동을 반대하지만 않아도 남편에게 감사합니다. 오히려 '그동안 나는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면서 살았는데, 남편은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라는 생각도 합니다. 미안한 마음에 '남편한테 잘해야지'라고 마음먹지만, 생각처럼 행동은 잘되지 않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인연으로 순풍에 돛 단 듯 잘 살아왔습니다. 제가 받은 만큼 사회에 돌려주는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 언제 싱가포르를 떠날지 모르지만 이루고 싶은 한 가지 꿈이 있습니다. 싱가포르에 뿌리내린 '정토 보리수나무'에 매일 물을 주고, 도반들과 함께 보살피고 가꾸는 것입니다.
제 마음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온 세상이 편안합니다. 아침 기도는 매일 마시는 보약 같은 감로수입니다. 법문은 삶의 지혜입니다. 도반들과 봉사하는 지금 고맙고 행복합니다. 말없이 도와준 남편에게 빚 갚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남편은 부처님입니다. 우리는 모자이크 붓다입니다.
최양희 님을 취재하면서 다시 한번 감사했습니다. 최양희 님의 가정 법회 덕분에 저도 불교대학에서 마음공부 할 수 있었습니다. 최양희 님이 심어 놓은 싱가포르 보리수나무, 저도 함께 가꾸어 가겠습니다.
글_윤은주 희망리포터(해외지부 아시아지회)
편집_김윤희 (강원경기동부지부 용인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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