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9.16. 미얀마 답사 1일째, 넌너리 학교 방문
“잘 살고 있는데도, 행복할 자격이 있는지 불안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이틀간 스님은 미얀마의 지진 피해 지역을 답사합니다. 오늘은 여성 출가자들을 위한 학교 두 곳을 방문했습니다.

스님은 어제 오후 4시 30분에 이스탄불 공항을 출발해 9시간을 이동하여 현지 시각으로 새벽 5시 30분,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방콕 공항에는 정토회 회원 황소연 님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한국에서 출발한 JTS 대표 박지나 님과 여지원 님도 도착해 이번 동남아 답사 일정을 점검하고, 짐도 간단히 정리했습니다. 미얀마로 향하기 위해 터미널을 이동할 때는 김선영 님이 운전해 주었고, 스님은 감사의 뜻으로 김선영 님에게 책 『혁명가 붓다』를 선물했습니다.

방콕 공항에서 INEB(국제참여불교 네트워크) 활동가 안챌리 님을 만나 오전 11시 30분에 함께 비행기를 타고 미얀마 만달레이로 향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안챌리 님이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습니다.

오후 12시 50분이 되어 만달레이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키티사라 스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키티사라 스님은 지난 6월 INEB를 통해 정토회를 방문한 분입니다.

차를 타고 곧바로 쉬 샤 짜 넌너리(Shwe Sat Kyar Nunnery)로 출발했습니다. 넌너리는 여성 출가 수행자(넌)들이 함께 생활하며 수행하는 공간을 말합니다.

차로 40분을 이동해 오후 2시에 쉬 샤 짜 넌너리에 도착해 주지 스님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이곳에는 스물여섯 명의 넌이 생활하고 있으며, 다른 넌너리에 거주하면서 이곳 학교에 다니는 학생 넌도 백여 명에 달했습니다. 학교는 1학년부터 5학년까지 수업이 운영되고, 이후에는 학생들을 다른 중등학교로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주지 스님은 낡은 학교 건물을 새로 짓고 싶다고 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함께 학교를 둘러보았습니다. 스님이 교실을 방문하자 학생들이 합장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교실, 옥상, 기숙사, 식당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

주지 스님의 말대로 건물 곳곳이 낡아 보수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주지 스님은 JTS에서 자재만 지원해 준다면, 노동력은 절에서 보시를 받아 조달할 수 있고, 공사 관리도 신도들이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스님은 구체적인 신축 및 보수 계획과 견적을 보내 주면 JTS에서 검토하겠다고 약속하고 넌너리를 나왔습니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담마 군 이 민트 민트 킨 넌너리(Dhamma Gun Yee Myint Myint Khin Nunnery)입니다. 이곳은 지진 피해로 학교 건물이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습니다. 전체 학생 수는 6백여 명인데, 이 중 80%가 난민 출신이었습니다. 그중 백여 명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여성 출가자(넌)이고, 나머지 5백여 명은 외부에서 통학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주지 스님은 인근 사미 학교까지 함께 관리하고 있었는데, 남자 사미들만 따로 공부하는 학교에도 140명의 학생이 있다고 했습니다. 현재는 낡은 건물에서 겨우 수업을 이어 가고 있었지만, 안전 문제와 공간 부족이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학교를 둘러보고 주지 스님, 교장 선생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곳 주지 스님은 80세의 나이에 어린 사미들과 넌들을 모두 돌보고 있었습니다.

주지 스님은 현재 학생들이 공부할 공간이 부족하다며 3층 건물이 더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1층과 2층에는 교실이 각각 6개씩, 3층에는 강당이 필요하며, 모든 층마다 교사 회의실과 화장실이 필수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정부가 정한 기준으로, 학생 수에 따라 일정 수의 교실이 반드시 확보되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스님은 구체적인 도면과 예산이 담긴 계획서를 보내 주면 적극 검토해 보겠다고 하고 넌너리를 나왔습니다.

넌너리 방문을 마치고 오후 5시에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짐을 풀고, 간단히 씻은 후 저녁 7시 30분에는 킨 마 간 사찰(Khin Ma Gan)로 가서 난민 회복 지원 모임 회장인 산 산 마오(San San Maw)님과 코비다 스님(Ven.Kovida)을 만났습니다.

산 산 마오 님이 사가잉 난민 캠프의 운영 성과와 어려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가잉 난민 캠프는 지진과 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여덟 개 마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부분 여성과 아이들이었습니다.

캠프에서는 지금까지 총 1,695 가구, 4,471명에게 식량과 위생용품을 제공해 왔습니다. 운영은 중견 스님들과 회복 지원 모임이 중심이 되어 이끌고 있었고, 사전 조사를 통해 각 가정의 필요를 파악한 뒤 그에 맞춘 지원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 단순 물품 배분을 넘어서서 변소를 설치하고, 손 씻기, 위생 교육도 함께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이 지역은 정부군과 반군의 경계 지역에 있어 지뢰 사고 위험이 컸습니다. 캠프에서는 이에 대비해 지뢰 안전 교육도 진행 중이었고, 일부 주민은 실제 지뢰 사고를 겪은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존재했습니다. 정부 규제로 인해 물품 전달이 지연되는 경우가 있었고, 도로 사정이 나빠 캠프로 들어가다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기도 했습니다. 통신 사정도 열악해 연락이 제대로 닿지 않아 행정 업무와 기부자 보고가 종종 지연되었습니다. 지역 내 물품 공급이 충분하지 않아 먼 지역에서 물자를 들여와야 했고, 쌀 값이 계속 오르고 있어 생계는 점점 더 팍팍해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생리대가 제때 도착하지 않아, 일부 여성들이 생리를 멈추는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건강에 좋지 않은 약이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코비다 스님이 앞으로 이 캠프에 무엇이 더 필요한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기본적인 위생 환경이 여전히 부족한 탓에 손 씻는 시설을 더 설치할 필요가 있었고, 현재 제공되고 있는 식량과 위생용품, 현금 지원은 매달 지속적으로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생계를 자립할 수 있도록 재봉틀과 같은 소득 창출 도구, 기초 진료를 위한 약품, 건강 교육이나 정신 상담을 맡을 수 있는 전문 자원봉사자도 절실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단순한 생존을 넘어 스스로 살아갈 힘을 갖출 수 있는 기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설명을 다 듣고 나니 밤 9시가 다 되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준 스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숙소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수행법회 생방송을 한 후 사가잉 난민 캠프를 둘러봅니다. 오후에는 쉐 얀 린 민 캬웅 사원을 방문하고, 난민 130가구에 구호 물품을 전달한 후, 저녁에는 파웅 다우 우 사원과 키티사라 스님이 운영하는 사원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12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즉문즉설 강연에서 스님과 질문자가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잘 살고 있는데도, 행복할 자격이 있는지 불안합니다.

“저는 독일에 와서 직장도 잘 다니고, 돈도 잘 벌고, 미래를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행복이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불안감이 큽니다. 내가 행복할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고, 어머니께 쿨하게 용돈을 보내 드리면서도 내가 이렇게 능력이 좋아도 되는지 자기 검열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불안한 상태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는 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다잡고 행복을 지켜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지금 질문자는 지금의 행복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지금 남자친구와 헤어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고 현재 직장도 혹시 잃어 버릴까 봐 불안한 것입니다. 스스로 행복할 자격이 있는지 자꾸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지금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지속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세상은 제행무상입니다. 어떤 것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없습니다.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실 수도 있고, 남자 친구가 그만 만나자고 할 수도 있고, 직장에서 나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꼭 그렇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삶에는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던진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과 같은 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공이 오른쪽으로 튈지 왼쪽으로 튈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공이 튈 것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불확실성 속에서도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또 확실성 속에도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겉에서 보면 대부분 필연적이지만 아주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모두 불확실한 것입니다. 그런 이치를 알게 되면, 현재에 만족하면서도 미래에 대응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질문자는 현재의 좋은 상황이 미래에도 지속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기 때문에 현재 주어진 행복마저도 만끽을 못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만 즐기고 살라는 말이 아니라, 모든 일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가변성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 남자친구가 한눈을 판다면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럴 경우 ‘네가 어떻게 나를 배신할 수 있느냐?’라고 생각하면 좋았던 과거의 행복까지 부정하는 게 되어서 결국 자기 삶을 낭비한 셈이 됩니다. 반면 ‘너와 함께 지낸 시간이 행복했다.’ 이렇게 정리를 하면 지난 과거는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직장을 갑자기 그만두게 되더라도 그동안 회사를 잘 다녔다고 생각한다면 온전한 내 삶이 됩니다.

한국에서 독일로 와서 적응해 살 듯이, 이 사람 만나다가 저 사람 만나든, 이 직장을 다니다가 저 직장으로 옮기든, 큰 틀에서는 다 같습니다. 때로는 이전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고, 때로는 더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살아 봐야 아는 일입니다. 현재는 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나를 등지고 가면 낙심이 되겠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서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시리아에서 살다가 난민이 되어 정말 어렵게 지냈는데, 독일에 와서 적응해 보니 훨씬 좋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됐다고 생각한 것이 결과적으로 나쁜 일이 되기도 하고, 잘못됐다고 생각한 것이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화위복이라는 말도 있고,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원래 과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스승님의 설득 끝에 스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는 과학자의 꿈을 버리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55년을 스님으로 지내 보니 이것도 괜찮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지 않는 길을 갔는데도 만족하는데, 여러분은 원하는 일을 해 놓고도 괴롭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가 그 순간에는 중요한 것 같지만, 길게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두 사람이 너무 좋아서 결혼까지 했다가 결국 헤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조선 시대에는 얼굴도 못 보고 결혼했어도 잘 사는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몽골에서는 남자가 다른 부족에 가서 여자를 납치해 와서 결혼합니다. 납치해서 돌아오는 길에 여자 부족에 잡히면 죽지만, 자기 부족까지 무사히 도착하면 결혼하는 것입니다. 여자 또한 납치 과정에서는 끝까지 저항하지만, 끝내 남자의 부족까지 오게 되면 결혼을 승낙합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좋은 것만 생각하지 말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놓고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한 직장에 정규직으로 오래 다니는 것을 선호하는데, 사람이 무엇 때문에 태어나서 한 직장에만 다녀야 할까요? 한 직장만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행복을 영원히 지속하고 싶다는 헛된 생각을 하면 지금의 행복마저도 제대로 못 누리게 됩니다. 미래의 가능성을 조금 열어 놓고 살면 현재에도 만족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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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빛

생리대가 없어서 생리멈추는 약을 복용하고있다는 이야기는 경악스러웠고, 단순한 생존마저 어려운 난민촌의 실태가 정말 안타깝습니다. 지구촌 어려운 이웃들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작은 마음이라도 보태야겠습니다.

2025-09-19 07:50:13

정 명

도음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참 많군요
꾸준히 자선사업 하시는 스님, 고맙습니다 🙏

2025-09-19 07:44:40

육윤희

현재의 좋은 상황이 미래에도 지속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기 때문에 현재 주어진 행복마저도 만끽을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 와닿습니다
요즘 내가 불안하구나 걱정하고 있구나라는 게 돌아봐 지면서... 현재로 돌아올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2025-09-19 07: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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