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26일째 날이고, 부처님이 열반하신 날을 기념하는 열반재일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열반재일 기념 특별법회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사시예불을 정성껏 한 후 오전 10시 15분에 부처님 열반재일 기념 특별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정토사회문화회관 3층 설법전에는 150여 명의 대중들이 자리한 가운데 삼귀의와 반야심경 봉독을 한 후 스님에게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의 마지막 모습이 어떠했는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이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날입니다. 열반절이라는 것은 세속적 의미로 돌아가신 날을 뜻합니다. 부처님께서 육신을 버린 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교화하신 발걸음은 45년 동안 쉼 없이 이어졌습니다. 세상 나이로 80세, 출가 후 51년, 성도 후 45년이 지나 부처님께서는 쿠시나가르의 사라 나무숲 속에서 조용히 열반에 드셨습니다. 불기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날을 기원으로 합니다. 올해가 불기 2569년이니까 오늘부터 불기 2569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부처님께서는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마음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가 저녁에 잠들고 아침에 깰 때 마음에 큰 변화가 없는 것과 같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정신 질환이 있는 분들은 눈만 감으면 악몽을 꾸어서 저녁이면 덜덜 떨기도 하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있어서 죽을 때가 되면 비슷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냥 일상처럼 대화하시다가 잠잘 시간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사람처럼 그렇게 열반에 드셨습니다. 평소와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무엇일까요? 다른 말로 하면 유훈이라고 할 수 있겠죠. 유언이라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뭔가 후대에 당부 말씀을 남겼다고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아무런 고뇌가 없으신 분이었는데 미래를 걱정하시진 않았겠죠. 그래서 부처님은 사후에 어떻게 하라는 말씀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만 하셨을 뿐이에요. 대표적으로 아난다 존자가 걱정스럽게 한 질문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면 누가 교단의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까?’ 하고 묻자 부처님은 ‘그런 것은 필요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전에 데바닷타가 자신이 후계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필요 없다고 하셨어요. 승단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수행자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대신할 누군가는 필요 없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래서 승가에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주인이므로 만장일치로 의결을 하는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다른 종교를 보면 2대 교주니 3대 교주니 하는 게 있죠. 그러나 불교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부처님은 항상 ‘내 손안에 쥔 비밀 같은 것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걸 다 투명하게 드러내셨어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조용히 무슨 밀지 같은 걸 주었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왕위를 계승할 때도 ‘누가 책봉됐느냐?’ 하는 말이 도는 것처럼, 종교에는 항상 스승이 후계자에게 몰래 밀지를 남기고, 그것을 징표로 해서 후계자가 다음 대를 잇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경우에는 ‘내 손안에 움켜쥔 비밀 같은 것은 없다’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경전에 여러 번 나옵니다. 출가하고 수행해서 어느 정도 자기완성이 된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승가를 구성하기 때문에 불교에는 누군가가 통제하거나 관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1대 교주, 2대 교주, 3대 교주 이런 개념이 없습니다. 다만 선불교에서는 역대 조사로부터 정법을 계승해 왔다는 개념이 있긴 합니다.
계속해서 아난다가 질문을 합니다. ‘수행자들은 늘 부처님을 생각하는데, 부처님이 안 계시면 누구를 생각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사성지를 생각하라’ 하고 대답하십니다. ‘부처님이 안 계시면 무엇에 의지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는 ‘나의 가르침과 계율에 의지하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런 아난다의 질문을 보면 확실히 아난다가 깨달음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아난다가 아라한이 못 되었다가 나중에 경전 결집을 하기 전에 일주일 동안 용맹정진을 해서 합류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런 질문들을 보면 그런 얘기들이 나올 법하죠. 그러나 우리는 아난다의 질문 덕분에 좋은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난다가 ‘부처님이 안 계신 세상에서 누구에게 공양을 올려야 큰 공덕을 지을 수 있습니까?’하고 묻자 이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염려 마라. 배고픈 자에게 밥을 주고, 병든 자에게 약을 주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고, 청정하게 수행하는 자를 외호하는 것은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같다.’
이렇게 아난다가 몇 가지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대답을 하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부처님의 최후 유훈이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물을 것이 있으면 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아있을 때 물어야지 열반에 든 뒤에 후회해서는 안 된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세 번이나 ‘물을 게 있으면 지금 물어라’ 하고 말씀하셨어요. 사람들이 혹시 부담스러워할 수 있으니 ‘친구가 친구에게 묻듯이 편안하게 물어라’ 하는 말씀도 덧붙이십니다. 그래도 아무 말이 없자 아난다 존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부처님께서는 저희가 의문을 가질 만한 것에 대해 모든 법을 다 설하셨습니다. 저희는 아무런 의문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행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뭔가 더 배울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아직 다 행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십니다.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덧없다’라는 말은 허무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상’을 번역한 말입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것이 없으니 붙잡고 있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통 우리는 무상이라는 말을 자꾸 허무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허무하다는 것은 부정적인 마음이에요. 그것은 괴로움입니다. 세상은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고 세상은 무상한 것이니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의 모습입니다.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새로운 운동들
어떤 것이든 역사가 흐르면 시작할 때의 취지가 점점 흐려집니다. 그런 현실을 감안해서 우리는 붓다의 원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유추해 나가야 합니다. 불교는 본래 수행을 가르친 것이지 복을 비는 종교 행위를 한 흔적은 없습니다. 출발할 때는 수행을 가르쳤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종교 행위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발전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변질됐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불교 발전사’보다 조금 더 중립적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 ‘불교 변천사’입니다.
불교 역사 속에서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500년이 지나서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새로운 불교 운동을 부처님께서 미리 예정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 후 500년이 지나면 불법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불교가 일어날 것에 대비해서 비밀로 설한 경전을 숨겨 두셨다. 그것이 이 경전이다.’
이렇게 대승 경전을 어딘 가에서 꺼내 와서 새로운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기존 질서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 그랬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숨겨진 비밀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이때부터 숨겨진 비밀이 있게 된 거예요. (웃음) 어쨌든 대승불교 운동은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인 수행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면서부터는 불사와 학문이 중심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절도 크게 짓고, 경전 번역도 많이 하게 되었는데, 그에 따라 스님들도 많이 양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형상에 치중하게 되면 보시가 많이 필요해지고, 결국 복을 비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을 안 빌어주는데 돈을 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쩌면 복을 안 비는데 돈을 내는 곳은 정토회가 유일할 겁니다. (웃음)
이후 또다시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중국에서 일어난 선불교입니다.
‘부처가 저기 하늘에 있거나 불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 내 마음이 어리석으면 중생이요. 내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선불교 운동이 일어나자 초기에는 엄청나게 사이비 취급을 받았습니다. 탄압도 많이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되면서 또다시 절을 크게 짓고, 서로 종파 경쟁을 하는 식으로 흘러갔습니다. 이렇게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는 것이 역사이고 인간 세상입니다. 원래의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오히려 50년 갈 걸 100년 가도록 하고, 100년 갈 것을 200년 가도록 하기 위해서 초기에 새로운 운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철저하게 수행의 원칙을 지켜나가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려면
부처님 열반 이후 교단의 분열이 일어나는 데까지 200년이 걸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린 공간에서 대중과 똑같이 먹고 똑같이 살았기 때문에 모든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삶을 그대로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수행자들 사이에 큰 의견 차이가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모습을 제자들이 보고 그대로 따라 배웠고, 후대에도 얼마 동안은 그대로 전수가 되었기 때문에 바른 법이 비교적 오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도 당대에 바로 분열되고 맙니다. 대중화가 되는 것은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습니다. 대중화가 되려면 대중의 요구에 맞춰야 하는데, 그러면 수행의 원칙이 조금씩 흐려집니다. 반대로 수행의 원칙을 너무 고집하면 사람들이 아무도 절에 안 옵니다. 이미 한국의 사찰에서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원칙대로 하면 아무도 선방에 안 오니까 어느 정도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개인 방을 달라고 하면 줘야 하고, 초심자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을 모셔야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절에서 대중 생활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불을 할 때 법복을 안 입겠다고 하면 ‘옷은 아무렇게나 입어라’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안 그러면 다 나가버리니까요.
이런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부처님이 살았던 당시의 모습을 생각하며 가능한 청정하게 살아야 됩니다. 가끔 어쩔 수 없이 예외를 둘 때가 있지만, 다음 세대로 내려가면 그게 전례가 되어서 ‘예전에도 그랬다’ 하면서 계율과 원칙이 조금씩 흐려질 수 있습니다. 원칙을 너무 강조하면 현실에 적용하기가 어려울 수 있으니 약간의 숨통을 틔우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유연함이 곧 다음 단계에서는 무질서가 될 수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원칙만 강조하면 너무 숨이 막히고, 유연하게 조금 열면 한없이 욕구가 점점 커져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중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100년 만에 수행자가 소금을 보관해도 되는지에 대해 논쟁이 생깁니다. 저도 어릴 때 불교 역사를 공부하면서 ‘수행자들이 소금 하나 가지고 그렇게 논쟁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사실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소금을 보관해도 되는지에 대한 논쟁은 곧 돈을 받아도 되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열 가지 논쟁 중에 첫 번째가 소금 논쟁이면 열 번째가 돈의 논쟁이었습니다. 그러니 간단한 문제가 아니죠.
오늘 열반재일을 맞아 대승불교와 선불교가 일어날 당시의 문제의식을 떠올리면서 우리가 수행적 관점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는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을 완전하게 복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을 지향해 나가야 합니다. 부족한 건 부족한 대로 인정을 하더라도 해탈과 열반에 지향점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현실이 원래 그런 거야’ 하면서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근본을 지키는 가운데 어느 정도의 변화된 현실을 포용해야 됩니다. 근본을 지키지 않고 변화를 수용하기만 하면 금방 현실 사회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런 면에서 부처님께서 미래의 수행자들을 위해서 늘 염려하셨다고 하는 금강경의 표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면서 오늘 열반일을 맞이하고 정진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지난 8일 동안의 정진을 돌아보고 올 한 해에도 부지런히 수행정진할 것을 다짐하며 한 배 한 배 절을 했습니다.
300배 정진을 한 후 조별로 마음 나누기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열반재일 기념 특별법회를 마치면서 우리를 있게 해 준 조상 영가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천도재를 함께 지냈습니다.
스님은 3층 설법전을 나와 지하 1층 공양간에서 대중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지하 대강당에서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즉문즉설을 듣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찾았습니다. 시민들은 현장 접수를 하거나 질문 신청을 한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 대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유튜브에서는 4,300여 명이 접속하고, 현장에서는 80여 명이 자리한 가운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삼귀의와 수행문을 낭독하고 나서 스님이 무대 위에 자리했습니다.
스님은 즉문즉설의 취지에 대해 짧게 소개한 후 곧바로 청중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 여섯 명이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님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많은데, 왜 부모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며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왜 부모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죠?
“저는 31살입니다. 집을 나온 지 5년 정도 되었고, 그동안 부모님과 연락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집을 나온 이후로도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고, 일상생활에서도 뭔가 답답하고 마음속에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님을 강하게 원망했지만, 최근에는 '그래도 낳아 주셔서 감사하다'라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진심으로 감사한 감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께 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저를 낳아주신 것 자체는 감사하지만, 성장 과정에서 힘든 기억이 많았고, 부모님이 저를 낳은 것도 결국 자식이 있길 바라는 그들의 욕심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요. 그래서 이제 성인이 된 저는 부모님을 미워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고,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왜 억지로 감사한 마음을 내야 하나요?"
"감사한 마음을 안 가져도 됩니다. 중요한 건 미워하지 않는 거예요.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미워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사실을 따져 보면, 우리가 길 가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듯이 부모님도 미워할 이유가 없어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냉정하게 계산해 보면, 자식이 부모에게 받은 것이 더 많습니다. 부모가 늙어서 자식에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대부분 부모가 자식에게 더 많은 것을 주지요.
부모님이 야단을 쳤다고 해도 그것은 부모님의 성격 때문일 수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이혼을 한 것도 자식이 개입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이런 일들이 깊은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어른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아이에게는 그때 받은 상처가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를 키울 때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일부러 나를 힘들게 하려고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부모님도 그저 본인의 수준에서 최선을 다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상처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성인이 된 지금은 ‘그럴 수도 있었겠다’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렸기 때문에 더 크게 상처를 받았던 것입니다. 성인이 된 지금이라면 같은 상황에서 그렇게 큰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미워하는 감정을 없애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억지로 감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미움을 없애는 가장 적극적이고 빠른 방법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 주고 키워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면 미워하는 마음은 사라져 버립니다. 물론 ‘부모님이 나를 원해서 낳았고, 자신이 좋아서 키운 것이지, 나를 위해 키워준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 내가 미워하는 감정을 없애려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 감사하는 마음을 내는 거예요.
논리적으로 따져 봐도 자식이 부모에게 받은 것이 더 많습니다. 만약 제가 길을 떠돌며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처마 밑에서 잠을 자야 하는 상황이라고 합시다. 누군가가 저를 재워주고 밥을 주지만, 매일 야단을 치고 가끔 한 대 때리기도 합니다. 이럴 때 어떤 것이 더 나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저라면 한 대 맞고 밥을 얻어먹는 게 낫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것처럼 부모에게 받은 혜택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부모니까 나에게 마땅히 잘해줘야 한다’라는 생각만 하니까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부모가 해주지 못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길 가는 사람과 비교했을 때 부모님은 그래도 나에게 혜택을 준 사람이에요. 그래서 미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미워하는 감정을 가장 빨리 없애는 방법이 바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에요. 감사하는 마음을 내면 미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미움이 남아있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에요. 감사하지 않아도 되지만, 미워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앞으로 부모님께 연락하지 않고 이대로 관계를 끊고 살아도 괜찮겠죠?"
"네. 아무 문제없어요. 자연계에서도 새가 둥지를 떠나면 부모와 따로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연락하고 싶으면 하면 되고, 연락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보고 싶어 괴로워한다면, 그것은 부모님의 문제이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지만 내가 부모님께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연락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부모님을 위해 연락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연락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냥 모르는 사람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연락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그때 한 번쯤 연락해 볼 걸’ 하고 후회할 것 같다면, 그 후회를 막기 위해 지금 연락하는 거예요. 결국 무엇이 나에게 이로운지, 본인 스스로 살펴보고 결정하면 됩니다.
나중에 후회하는 것을 피하려면 연락하는 것에 대해 열어두는 것도 방법이에요. 부모님께 잘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연락하는 것을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나중에 후회를 덜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연락하는 것을 열어두면 불필요한 스트레스나 갈등이 생길 것 같다면, 굳이 열어둘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부모님을 미워해서 연락을 안 하는 것이라면 그 미움이 내 상처 때문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봐야 해요. 그 상처가 내 문제라면, 결국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상처가 치유되면 연락하는 것을 열어놓고 살 수도 있는 거예요.
저도 가족들과 연락하는 것을 늘 열어두고 있지만, 가족들과 거의 만날 일이 없어요. 너무 바쁘니까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지는 겁니다. 친구나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부러 관계를 끊거나 연락을 차단할 필요는 없어요. 스토커처럼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차단할 이유는 없습니다. 연락을 차단한 결과 나중에 본인이 후회를 하게 될지에 대해 스스로 점검해 보면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있어요.
가족 관계는 무의식에 남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모가 나에게 상처를 줬다고 해도 내 안에는 부모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어릴 때 부모가 나를 혼냈던 것은 상처로 남았을지 모르지만, 부모가 젖을 먹이고 밥을 주고 키운 기억도 무의식에는 남아있어요. 그래서 부모를 보면 상처받았던 기억부터 먼저 떠오르지만, 막상 멀어지면 그리운 감정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많은 후회를 하게 돼요.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에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꼴 보기 싫었는데, 막상 돌아가시고 나면 후회가 밀려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부모님과 연락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18살 이전에 부모가 나에게 해 준 것은 빚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면 당연히 키워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은 도움은 빚이 아니에요. 그 이후에 도움을 받았다면, 그것은 빌린 것과 비슷한 개념이 됩니다. 그러나 부모가 18살 이전에 자식을 키운 것은 빚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길에서 부모 없이 떠돌던 7살짜리 아이를 데려와 키운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아이가 도움을 받은 것은 맞지만, 그것이 빚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처럼 어린 시절 부모가 나를 키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에 대해 빚을 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후회 없이 살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스스로 점검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1990년대 중반에 북한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고마워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빚이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도움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은행에서 1억 원을 빌렸다가 사업에 실패해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돈을 갚지 못한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채는 문제가 됩니다. 은행 대출은 법적으로 절차가 정해져 있어서 돈이 없으면 갚지 못해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사채는 다릅니다. 사채업자는 돈이 있든 없든 무조건 갚으라고 요구해요. 그래서 사업을 할 때는 사채를 조심해야 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돈을 갚지 않을 의도가 아니었고 단순히 돈이 없어서 갚지 못한다면 그것은 죄가 안 됩니다.”
"저는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부모님과 계속 연락하게 되면, 결국 새로운 갈등이나 상처가 다시 생길 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그렇다면 연락을 하지 않으면 돼요. 선택은 본인의 몫입니다. 수행이란 결국 내 감정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부모님이 연락을 하든, 화를 내든, 그것은 부모님의 문제예요. 내가 그걸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수행입니다. 연락을 아예 차단할 수도 있고, 열어두되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조절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연락이 오면 '알았어, 다음에 보자'라고 대답한 후 실제로는 만나지 않으면 됩니다. 직접 찾아온다고 하면 '바빠서 시간이 안 돼'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연락을 차단하는 방법도 있고, 열어두되 내가 원하는 대로 조절하는 방법도 있어요.
결국 선택은 본인의 몫입니다. 면역력이 약하면 무균실에서 살아야 하지만, 면역력이 강하면 다양한 환경에서도 살 수 있는 것처럼, 가족 관계도 내 상태에 맞게 조절하면 됩니다. 운전을 배울 때 처음에는 한적한 도로에서 연습하지만, 실력이 늘면 복잡한 도로에서도 운전할 수 있죠. 가족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으면 유지하고, 그렇지 않다면 거리 두기를 하면 됩니다. 20살이 넘으면 가족도 사회적 관계가 됩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연락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연락을 끊어야 하는 것도 아니에요. 나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라면 유지하고, 나에게 해가 되는 관계라면 정리하면 됩니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어요.”
“알겠습니다. 제가 좀 더 단련을 해서 조금씩 연습해 보는 걸로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스님의 건강이 걱정됩니다. 연세도 있으신데 조금 더 건강을 챙기시면 좋겠다 싶습니다.
영혼이 자발적 신경계와 교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합니다. 영혼이 몸을 조정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충격을 받으면 소화가 안 되는 현상이 왜 일어날까요?
예전에 스님의 스승님께서 천년을 내다보고 살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어떤 의미인가요?
2년 전까지만 해도 죽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괴로웠는데 정토불교대학과 깨달음의 장을 다녀와서 지금은 매일 감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좋아진 원인이 무엇일까요?
지금 32살인데 부모님 하고 같이 살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부모님 밑에서 살아도 괜찮나요?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넘었습니다. 봉사자들의 안내에 따라 대강당에 모인 청중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스님은 수고한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정토회관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27일째 날입니다. 내일부터 이틀 동안은 출장을 다녀올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15
김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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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7 09:14:12
문미경
무균실에 서 나오려고 합니다. 다양한 환경에서 살고자 합니다. 어제는 유튜브를 끄고 잠을 잤습니다.
오늘은 불을 끄고 잠을 자야겠습니다.
2025-03-17 08:28:26
범의수호자
일상의가르침감사합니다.
스스로의삶에서
노력하고 다시 저의
삶을 돌아보겠습니다.
건강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