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3.10. 백일법문 22일째, 경전 강의 1강, 불교사회대학 1강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가 수행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22일째 날입니다. 오늘부터 백일법문의 본강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전에는 경전 강의 1강을 하였고, 저녁에는 불교사회대학 1강을 하였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백일법문을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서는 사시예불을 마치고 자리 정돈을 하고 있었습니다. 10시 15분이 되자 삼귀의와 반야심경 봉독을 하며 경전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190여 명이 참석하고, 온라인 생방송반에서는 550여 명이 참석하고, 해운대법당에서도 17명이 참석하여 총 75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법상 위에 올랐습니다.

앞으로 12주 동안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에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에 관한 ‘경전 강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오늘은 경전 강의 첫 번째 시간입니다. 스님은 대승 경전의 출현과 대승 경전 안에서 금강경의 위상 등 금강경에 대해 소개한 후 금강경 제1분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불자는 불법승(佛法僧) 삼보에 귀의하고,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닦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것은, 불법승 삼보 중에서도 법(法), 즉 법보에 해당합니다. 법에는 경장, 율장, 논장, 이렇게 삼장이 있는데 그중에서 경장에 속합니다. 경에는 소승 경전, 대승 경전, 밀교 경전, 이렇게 세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가 경전 강의에서 배우는 경전은 대승 경전에 해당합니다. 대승 경전을 전통적으로 분류하면 반야부 계통, 방등부 계통, 법화열반부 계통, 화엄부 계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오늘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반야부 경전에 해당합니다. 반야부 경전은 총 600권이 있는데 그 가운데 577번째 수록되어 있는 경전이 바로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의 시작,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이러한 경전들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배경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으는 과정을 ‘결집’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그 해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인정받은 오백 명의 아라한이 왕사성 밖의 칠엽굴에 모였습니다. 마하가섭이 주관하고, 아난다와 우팔리가 먼저 암송하면 모두 따라서 합송하는 형식으로 결집을 완성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기억해 내고 서로 수정 보완한 이 과정을 ‘제1차 결집’이라고 합니다. 경(經)에 대해서는 부처님을 시봉한 다문제일(多聞第一) 아난다 존자가 초안을 내고, 율(律)에 대해서는 부처님의 말씀대로 계율을 지켰던 지계제일(持戒第一) 우팔리 존자가 초안을 냈습니다.

아난다 존자가 초안을 낼 때 항상 ‘여시아문(如是我聞)’ 이렇게 시작합니다.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과 내가 들은 내용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단지 내가 그렇게 들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하고 아난다 존자가 초안을 내면 대중들이 들어보고 그대로 확정을 지을 때도 있고, 일부 수정하거나 보완해서 확정을 지었습니다.

대승 경전 중에서도 아주 초기에 나온 경전

금강경 최초 원본을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법으로 추적해 봤더니 가장 오래된 것은 1세기경에 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산스크리트어 원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강경이 출현한 시기는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전후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금강경은 대승 경전 중에서도 아주 초기에 나온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이 초기에 나온 경전이라는 근거는 그 내용에도 있습니다. 금강경의 내용을 보면 ‘공 사상’을 말하고 있지만 아직 ‘공(空)’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보살에 대해 말하지만, 문수 보살이라든지 보현 보살이라든지 보살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대승 경전에서는 보살이 질문을 하지만, 금강경에서는 부처님의 십 대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수보리가 질문합니다. 또 많은 경전에서 부처님이 설법한 장소가 도리천이나 도솔천인데 금강경에서는 실제 역사적 장소인 기원정사로 되어있습니다. 또 대부분의 경전은 장광설로 부처님이 혼자서 설법하는 식이라면 금강경은 문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대승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삼매에 들었을 때를 표현하거나 선정에 들었다가 깨어서 설법하는 모습이라면 금강경에서는 그런 것이 일절 없이 일상생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 내용도 초기 경전과 거의 유사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대승 경전 중에서 비교적 초기에 출현한 경전이라고 보고 있는 겁니다.

제일 법회인유분(第一 法會因由分)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

천이백오십인구 이시 세존 식시 착의지발 입사위대성

千二百五十人俱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걸식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반사흘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

乞食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이와 같음을 내가 들었사오니, 한때에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비구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때 세존께서는 공양 때가 되어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사위대성(舍衛大城)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성 안에서 차례로 걸식을 마치고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 공양을 드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

금강경 제1분은 금강경이 설해지게 된 배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어떤 인연으로 법회가 열리게 되었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대승 경전에는 ‘부처님이 삼매에 드시자, 미간 백호에서 광명이 나오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며 천지가 진동한다.’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공양을 드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밥 먹고 양치질하고 둘러앉아서 차 한 잔 마시니까 누가 질문을 했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죠. 그만큼 일상을 소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의 모든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제1분

금강경의 모든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부분이 여기입니다. 그런 후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에 지혜 제일(智慧第一) 수보리가 부처님께 질문을 하면서 경전이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런데 역대 스승들은 대부분 제1분을 가장 중요시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나오는 것은 제2분부터이지만 말 없는 가운데 부처님의 일상을 묘사하고 있는 제1분을 가장 중요시했어요. 왜냐하면 부처님의 일상 속에 앞으로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내용이 이미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부처님이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걸식을 마치고 돌아와 밥을 먹고, 발우를 씻어 두고 발을 씻고...... 앉고 먹는 매 순간,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 항상 깨어 있습니다. 알아차림이 늘 유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걸식할 때 발우에 적당한 양을 담아 오는 데서 이미 검소한 생활이 유지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부처님만 특별히 다르게 생활하지 않고 늘 대중과 함께 머물고 계셨습니다. 밥 먹을 때에도 같이 먹고, 일상생활도 같이 하고, 같은 숲 속의 열린 공간에서 대중과 더불어 생활하셨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일상을 보면서 늘 같이 생활해 오던 수보리가 마침 오늘 감동을 받은 거예요. ‘부처님이 말 없는 가운데 수행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이미 가르쳐 주고 계셨구나.’ 하는 사실을 느끼고 너무 감동을 한 겁니다. 수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자기가 갖고 있는 의문을 질문합니다. 이것을 옛 선사들은 ‘고요한 바다에서 수보리가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일상을 묘사하고 있는 제1분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배경에 불과하지만, 이 배경이 앞으로 설해질 금강경의 모든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1분은 말 없는 가운데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전하는 말씀에 해당합니다. 그런 후 제2분부터 말 있는 가운데 중생의 번뇌를 해소하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금강경을 읽는 방법, 나는 이런 말씀에 어떤 의문이 드는가

전체 경문은 부처님과 수보리와의 문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보리가 직접 묻고 부처님이 대답하시거나, 부처님이 수보리를 불러서 묻기도 하고, 거기에 수보리가 대답하면 다시 부처님이 보충해서 말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수보리가 입 밖으로 질문하기 전에 부처님이 이미 수보리의 마음을 알고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도 부처님 말씀을 듣고 나서 속으로는 의심이 들기도 하잖아요. 이렇게 문답의 방식이 한 가지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때는 약간 비약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왜 이 얘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저 얘기로 넘어갈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는데, 그 이유는 그사이에 수보리가 부처님 말씀에 뭔가 의문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수보리가 의문을 얘기하고 부처님이 답을 하시면 매끄러울 텐데, 수보리가 의문을 말하기 전에 부처님이 곧바로 답으로 건너가 버리니까 어떤 때에는 똑같은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내용이 갑자기 비약이 된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경전을 읽으면서 항상 ‘나는 이런 말씀에 어떤 의문이 드는가?’ 하고 직접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다음 문장이 이해가 될 겁니다. 가령 ‘보시했는데 보시했다는 생각도 내지 말라’라고 했을 때, ‘보시했다는 생각을 안 내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러면 왜 보시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바라는 마음 없이 행하는 보시의 공덕이 더 크다’. 하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어째서 더 큰 공덕을 갖게 되나요?’ 하고 스스로 돌이켜보면 그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그 답을 얻게 되는 겁니다. 금강경은 이러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금강경 제2분에 대해 설명을 이어나가기로 하고 강의를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강의 첫날이라 서로 자기소개 시간도 가지고, 정토사회문화회관을 둘러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스님은 지하 1층 식당에서 대중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불교사회대학은 정토회에서 처음으로 개설한 과정입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분석하고, 이를 실천 불교의 지혜로 풀어가는 과정을 배우는 강좌입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불교적 관점에서 현대 문명이 직면한 위기와 본질을 이해하고, 불교사회대학의 학습 취지에 대해 배우는 시간입니다. 지하 대강당에는 불교사회대학 입학생 210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반에는 19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입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전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았는데요. 그 결과를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현대 문명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 61퍼센트가 기후 위기와 환경오염이라고 답하고, 21퍼센트가 전쟁과 폭력이라고 답했습니다. 이어서 미중 대립과 세계 패권을 둘러싼 경쟁의 격화, 과학 기술과 인공지능의 부작용, 차별로 인한 불평등, 경제적 불평등 심화, 선진국의 저출생과 고령화 등 다양한 응답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삼귀의 반야심경 봉독을 한 후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지금 많은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 나라, 인종을 떠나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고 연구해서 대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불교는 자기 수행에 치중하라는 가르침이 중심이다 보니 이러한 사회 문제에 대해서 불교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좀 부족합니다. 그래서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한 불교적인 대책이 거의 없습니다. 불교 책에서도, 스님들 법문에서도 사회 문제를 다루는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또 불교 신자들끼리 사회적인 문제를 가지고 활동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세상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정작 세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얘기를 하면 ‘불교인이 왜 그러냐?’, ‘수행자가 왜 그런 것에 관심을 갖냐?’ 하며 오히려 순수 불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한 불교적 해법을 알기 위해서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 이유는 역사 속에서 불교가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본래 불교의 가르침에서 다소 왜곡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우리가 접하는 불교는 대부분 종교적인 불교입니다. 종교로써의 불교는 내가 원하는 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가 중요하지, 이 세상 문제가 어떤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둘째, 우리는 대부분 철학적 불교를 접하고 있습니다. 철학적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아 사상이나 공 사상이 핵심이라는 식의 사상적인 내용을 주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철학적인 불교를 공부해도 불교의 사회사상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얘기가 없습니다.

그럼 불교가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 걸까요? 그 해답은 우리가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해야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만 여겼지, 부처님도 우리처럼 밥 먹고 잠자고 비난받고 칭찬받으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과 같이 살았던 사람 중에는 걸식하러 갔다가 비난받고 밥을 못 얻어 오거나, 심지어는 두들겨 맞아서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천여 명이나 되는 대중과 같이 살면서 매일 마을에 나가서 걸식하러 돌아다녔으니 온갖 세상의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세상의 일을 외면하셨겠어요?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의 일생을 통해서 부처님이 사회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어떤 활동을 하시고 어떻게 관여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날 현실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비추어 보고 우리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사회대학의 핵심 내용은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세상의 여러 혼란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느냐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 오늘 이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 오신 분 중에 논문 써서 박사 학위를 따고 싶다거나 남한테 가르치기 위해서 온 사람은 없을 겁니다. 첫 번째 목표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이고, 두 번째 목표는 이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두 가지의 이유로 오늘 이 강의가 마련되었습니다.

중생 구제를 하는 길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

불교에서는 이 우주에 수많은 세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 세계마다 환경이 좋은 데도 있고, 나쁜 데도 있겠지만, 사람이 다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 가운데에서 제일 살기 좋은 세상, 즉 자연환경이든 사회 환경이든 모든 것이 가장 잘 갖추어진 세상을 극락정토라고 합니다. 극락정토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에 법장 비구라고 하는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너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파서 당시의 부처님에게 ‘중생이 고통 없이 사는 세상은 없습니까? 그런 세상을 좀 만들어주십시오.’ 하고 말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원한다면 네가 만들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요청을 하면 안 돼요. 말하는 사람이 책임지라고 하잖아요. (웃음)

우리 같았으면 ‘아이고, 제가 어떻게 해요?’ 이런 반응이 대부분이었겠죠. 그런데 법장 비구는 부처님께서 자기한테 만들라고 말한 것은 곧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기꺼이 해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뭘 알아야 어떻게 만들지 계획을 세울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부처님께 ‘모델을 좀 보여주십시오.’ 이랬더니 부처님이 미간 백호에서 광명을 비추며 온 우주를 보여 주었습니다. 경전에는 십만억 개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고 나옵니다. 보여준 사람도 대단하지만 본 사람도 대단하죠. 저 같으면 열 개만 보고 '아, 그만 됐습니다.' 하고 대충 봤겠지만, 법장 비구는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십만억 세계를 다 본 거예요. 그리고 원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나쁜 것은 없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좋은 것이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운 원이 48가지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비유하면 ‘기후 위기가 없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성차별이 없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원을 세운 겁니다. 이렇게 해서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원을 이루기 위해 정진해서 그 세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세계를 이름하여 극락세계라고 합니다. 그러자 법장 비구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됐는데 그 이름이 ‘아미타불’입니다. 이미 부처가 되어서 극락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고, 극락세계를 만드는 과정이 바로 부처가 되는 과정이었던 겁니다. 수행 따로 중생 구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 구제를 하는 길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가 수행

화엄경에 ‘보살에게 있어서 불국토란 이미 완성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라 보살이 완성을 향해서 활동하는 국토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보살이란 스스로 깨달아서 부처의 길로 가고, 또한 중생을 구제해서 정토를 만드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보살에게 있어서 정토란 보살이 활동하는 국토라는 겁니다. 즉 정토를 만들기 위해서 원을 세우고 활동하는 순간 그곳이 곧 보살에게 있어서는 정토가 되는 겁니다. 정토는 완성되어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완성을 향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 그 세계가 곧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정토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진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에 성패가 있지 않습니다. 만약 세상에 꼭 필요한 게 있고, 필요에 의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이미 그에게는 완성된 상태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지만, 그에게는 그 과정이 곧 완성된 세계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가 수행입니다.

그래서 대승 불교 수행자들은 자기 수행만 한다든지, 수행 먼저 해 놓고 중생을 구제한다든지, 정토부터 이루고 수행한다든지,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수행하는 과정이 곧 이상 세계를 이루는 것이고 이상 세계를 이루기 위한 활동이 곧 개인에게는 부처로 가는 길입니다. 이 둘은 구분도 안 되고, 선후 관계도 아니고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토회에서는 ‘일과 수행의 통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일’이라는 것은 정토를 이루고자 원력을 가지고 활동하는 일련의 행위를 말합니다. 자기를 완성하고자 하는 것이 수행이라면, 수행과 일은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스님은 현대 사회의 대표적 문제들을 언급하며 개괄적으로 소개를 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위험 요인으로 기후 위기와 환경오염을 이야기한 후 이어서 경제적 불평등 심화, 인공지능, 로봇 등 첨단 기술의 발달과 윤리의 붕괴, 미중 패권 경쟁과 국제 사회의 분열을 차례대로 이야기하고 이런 문제들이 가져올 피해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해법으로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법’과 ‘중도’에 대해 강조를 했습니다.

오늘은 불교적 관점에서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지 총괄적으로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내일부터는 연기법을 비롯하여 구체적인 사회 문제 속에서 불교가 어떤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지 강의를 해 나가기로 하고 밤 9시가 훌쩍 넘어서 1강 수업을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자기소개 시간과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입학한 분도 있었지만, 법륜스님을 통해 사회 문제를 알게 되었다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마음 나누기 속에서 오늘 배운 내용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23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주간반 정토불교대학 1강 수업을 하고, 점심에는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과 미팅을 하고, 저녁에는 저녁반 정토불교대학 1강 수업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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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고맙습니다. 스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_()_

2025-03-13 10:52:49

KSY

매일 감사드립니다.🙏

2025-03-13 10:41:37

유진화(자재왕)

정토는 완성되어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완성을 향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 그 세계가 곧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정토입니다.
지금 이 나라가 정토입니다. 화내고 짜증내고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수행입니다.
낙숫물 정진.
고맙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도반님들

2025-03-13 10:3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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