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2.24. 백일법문 8일째, 열린법회 4강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옵니다, 왜 그럴까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8일째 날입니다. 이번 주는 본 강좌가 시작되기 전에 여는 강좌가 열리는 주간입니다. 오전에는 ‘천일결사 수행법’을 주제로 열린법회가 열리고, 저녁에는 ‘소심경’을 주제로 열린법회가 열립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서는 오전 9시에 사시예불을 정성껏 올린 후 열린법회를 하기 위해 자리 정돈을 하고 있었습니다. 10시 15분이 되자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하며 열린법회를 시작했습니다.

150여 명 대중들이 자리한 가운데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오늘부터는 정토회 회원들이 매일 아침마다 1시간씩 수행하는 방법인 ‘천일결사 수행법’을 주제로 열린법회가 열립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천일결사 수행을 할 때 가장 먼저 ‘삼귀의’를 하는 의미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수행이란 언제나 지금 여기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것도 반복하다 보면 깨어있다는 것이 습관화되어서 사실은 깨어있지 못하게 됩니다. 깨어있는 것과 '깨어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깨어있어야 한다’ 하고 생각하는 것은 의지 작용이지 알아차림이 아닙니다. 명상을 할 때도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과 ‘호흡을 알아차려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일을 하다 보면 이렇게 착각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수행하는 게 익숙해지고 습관화가 되면 편안한 마음으로 임한다는 측면에서는 좋은 점이 있지만, 수행의 원래 목표인 ‘깨어있음’에는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항상 처음 하듯이 해야 됩니다.

처음 할 때는 약간 긴장이 된다는 게 문제일 뿐 깨어있음이 아주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반복이 되면 익숙한 측면은 있지만 깨어있음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예부터 성인들은 처음 마음을 낸 때의 초발심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초발심을 낸 그때의 마음을 지속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을 이룬 것과 같다’ 이렇게 말할 정도로 처음 마음을 낸 때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정토회에서 하고 있는 ‘천일결사 수행법’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새겨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모르는 것을 강의하는 게 아니고, 여러분이 다 아는 내용을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정진을 할 때 그 의미에 깨어있으라는 뜻으로 강의를 하는 겁니다.

수행자가 가장 먼저 다짐해야 하는 세 가지

수행자는 무엇을 하든 항상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을 가장 먼저 하고 다음에 다른 것을 해야 합니다. 첫째, 부처님께 귀의해야 합니다.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합니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내용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시고 거룩하신 분이니까 마땅히 찬탄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핵심 내용은 나도 부처님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 있어서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의미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여 나도 부처님이 되기를 발원합니다’ 이런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법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옴을 알아 부지런히 정진하겠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내용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모든 것이 그 가르침 속에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 내용은 내가 인연을 짓고 내가 그 과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원리가 인연 과보의 원리라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고 ‘무지하다’라고 말할 때는 그가 인연 과보의 원리를 모를 때 그렇게 말합니다. 반대로 인연 과보의 원리에 밝은 것을 ‘지혜롭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옵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옴을 안다는 것은 인연과보를 안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그 원인을 모를 뿐 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습니다. 그냥 간단히 ‘원인’이라고 말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인’과 주변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연’이 결합된 것입니다. 밭에 씨앗을 심어야 싹이 난다고 할 때, 씨앗만 원인인 것 같지만 씨앗뿐만 아니라 씨앗이 싹틀 수 있는 땅이 있어야 됩니다. 적당한 습도와 온도가 있어야 되고, 또한 거름도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싹이 터서 자랄 수가 있습니다. 이때 씨앗을 ‘인’이라 말하고, 그 밭의 상태를 ‘연’이라고 말합니다. 싹이 터서 자라는 것을 ‘과’라고 말하고, 그로 인해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것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연과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여기서 즐거움과 괴로움이라는 ‘보’를 빼고 과학적으로만 설명하면 ‘인연과’라고 표현하고, 더 줄이면 ‘인과’라고 표현합니다.

부지런히 정진한다는 것은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런 의미도 담겨 있고, ‘신구의 삼업을 짓는 일을 삼간다’ 이런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삼간다는 말은 계를 청정히 지킨다는 뜻입니다. 성질이 확 나서 주먹으로 때리고 싶어도 삼가야 합니다. 화가 나서 욕을 하고 싶을 때도 삼가야 합니다. 물건을 훔치고 싶을 때도 삼가야 합니다. 성적인 욕망이 일어날 때도 삼가야 합니다. 삼가지 않으면 그 뒤의 결과가 열 배 스무 배 손실로 다가옵니다.

조금만 살펴보면 인연과보는 과학적 진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뉴턴의 법칙과 똑같습니다. 어떤 물체가 움직이려면 반드시 힘을 가해야 됩니다. 가한 힘에 비례해서 물체가 움직이는데, 거기에는 가한 힘 외에도 어떤 조건이 있어야 됩니다. 즉 물체에 작용하는 마찰력이 얼마인지, 물체가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물체가 움직인다는 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에 힘이 가해졌다는 뜻이고, 내가 물체를 움직이려고 할 때도 힘을 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연과보는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힘을 가했는데도 안 움직일 때는 그 물체가 받는 마찰력 때문에 가한 힘만으로는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알게 되면, 나에게 손해가 날 짓은 멈추고, 이미 저질러 버린 것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조금 힘들어도 이익될 만한 일은 기꺼이 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지런히 정진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제자 됨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땅의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들에게 귀의한다는 내용입니다. 나도 승단의 일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 일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열반을 증득한 뒤에 그냥 편안하게 가만히 있기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편안한 것만이 목적이라면 가만히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겠죠.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평생 전법의 길을 떠나셨습니다. 자기 생각에 똘똘 뭉친 어리석은 중생을 깨우치려고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나도 부처님처럼 전법의 길을 기꺼이 떠나야 합니다. 이 법을 널리 전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법을 깨우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불’에 귀의한다는 것은 내가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을 뜻합니다. ‘법’에 귀의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내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뜻합니다. ‘승’에 귀의한다는 것은 이 좋은 법을 만나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이 좋은 법을 널리 전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먼저 삼보에 대한 귀의를 한 후 마지막에 전법의 원을 세우는 것이 ‘삼귀의’입니다.”

법문을 마치고 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오자 대중들은 모둠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사홍서원을 한 후 11시 30분이 되어 열린법회를 마쳤습니다.

스님은 지하 1층 공양간에서 대중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한 후 서둘러 평화재단 회의실로 이동했습니다. 12시부터는 평화재단 회의실에서 LA정토회 이사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2024년 사업보고와 결산, 2025년 사업계획과 예산에 대해 심의하고 의결한 후 이사회를 마쳤습니다. 오후에는 실내에서 여러 가지 업무를 보았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저녁반 회원들을 위한 열린법회를 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직장을 퇴근하고 달려온 90여 명의 대중들이 자리했습니다. 저녁 열린법회에서는 출가하여 정토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대중들이 매일 아침마다 하는 발우공양 게송인 ‘소심경’을 주제로 법문을 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발우공양의 의미와 그 안에 담긴 수행 정신을 설명했습니다. 스님은 발우공양을 할 때 읊는 게송인 소심경을 설명하기에 앞서 발우공양이 단순히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가 아니라 수행자의 태도와 삶의 방식과 직결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발우공양을 통해 탐욕을 줄이고 검소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수행자의 길이며, 이는 단순한 식사 의례가 아니라 삶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실천적 수행법이라는 점을 이야기한 후 소심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의 의미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발우공양에 담긴 정신은 한마디로 검소하게 살아라, 소비 수준을 최소화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출가 수행자들은 음식은 얻어먹고, 옷은 주워 입고, 잠은 나무 밑에서 잤습니다. 후대에 불교가 종교화되어서 도시에 절을 짓게 되면서 그 모습이 바뀐 것이지 초기에 숲 속에 사는 수행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았어요. 특히 인도에서는 걸식하는 문화가 불교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출가수행이라는 것도 원래 인도 전통사회에서 존재해 왔던 것을 부처님이 그대로 따라서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와 비슷한 남방 문화권에 속한 태국이나 열대 지방에서는 수행자들이 이런 삶을 유지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았어요.

발우공양이 생긴 역사적 배경

그런데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수행자들이 사는 기후 조건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중국은 날씨가 매우 춥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남에게 얻어먹는 걸 굉장히 나쁘게 생각하는 그런 문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수행자들이 걸식을 했는데,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걸식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교가 종교화되면서 국왕이나 부자로부터 보시를 받아서 큰 절을 짓기도 했지만, 이런 것에 반대해서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6세기경 중국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게 바로 선불교예요. 수행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니까 밥 하는 사람이 따로 없었습니다. 공양 짓는 사람에게 월급을 주는 것도 없었고, 집 짓는 사람도 따로 없었습니다. 불상을 만드는 사람도 따로 없었고, 쌀을 갖다 주는 사람도 따로 없었습니다. 그러니 절에 사는 스님들이 농사도 지어야 하고, 목수도 해야 했습니다. 스님들 중에 목수를 잘하는 사람, 탱화를 잘 그리는 사람, 조각을 잘하는 사람, 농사를 잘 짓는 사람, 밥을 잘하는 사람, 이렇게 업무를 나눠서 수행하면서 살게 된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는 걸식을 하듯이 검소하게 살겠다는 마음가짐을 담아 게송을 읊으면서 가슴에 새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심경입니다. 수행자가 밥을 하고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다 보면 자칫 세속적인 생활로 흘러갈 위험이 있기 때문에 굉장히 경계한 것입니다. 절에서 밥을 해 먹더라도 걸식하는 것과 같은 형식을 취한 거예요. 이런 생활을 선불교가 처음 시작했느냐? 그건 아니에요. 선불교 이전에 율종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하는 이런 발우공양은 대부분 선불교에서 어느 정도 정형화된 것입니다.

발우공양을 할 때는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가?

발우공양을 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를 글로 써놓은 것이 소심경입니다. 그런데 ‘경'자를 붙이니까 마치 부처님이 직접 말씀을 하신 내용 같지만 그런 것은 아니에요. 물론 그 구절 안에는 부처님의 말씀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밥을 먹으면서 마음에 새겨야 할 글귀를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수행자는 음식을 먹을 때 최소로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음식에는 많은 사람의 노고가 깃들어 있기 때문에 그냥 먹기만 하면 다 빚지는 게 됩니다. 그러니 내가 오늘 이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점검을 해야 합니다. 만약 내가 이 음식을 먹을 자격이 부족하다면 정진을 더 열심히 하든, 일을 열심히 하든,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늘 자기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 소심경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 음식이 내 앞에 이르기까지 수고한 많은 이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내가 이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음식을 먹은 다음에는 ‘수행 정진해서 깨달음을 얻어 중생들에게 회향하겠다’ 하는 입장을 아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배불리 먹지만 배고픈 사람을 생각하면서 조금이라도 내가 먹는 음식을 덜어서 배고픈 사람과 같이 나눠 먹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습니다.

발우공양(鉢盂供養)이라고 할 때 ‘발’은 ‘발다나’라는 인도말에서 왔습니다. ‘적당한 양’이라는 뜻이에요. 즉, ‘발(鉢)’은 번역하면 응량(應量), 적당한 양이라는 뜻이에요. ‘우’는 중국말로 밥그릇을 뜻하는 우(盂) 자입니다. 두 글자를 합해서 발우란 ‘적당한 양을 담는 그릇’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발우’라고 부르기도 하고, ‘응량기(應量器)’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충분한 양’이라고 하지 않고 왜 ‘적당한 양’이라고 했을까요? 적당한 양의 기준은 내가 생존하는 데 필요로 하는 최소의 양입니다. 그게 수행자에게 적당한 양이요. 남아서 버려도 안 되지만 많이 먹어 살쪄도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음식을 너무 적게 먹으면 병이 나거나 삐쩍 마르거나 해서 수행을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을 하려면 몸이 있어야 하잖아요. 이 몸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음식이 적당한 양입니다. 그 적당한 양을 담는 그릇이 발우입니다.

발우를 집고 펼 때 가슴에 새겨야 할 내용

발우공양을 할 때 가장 먼저 외우는 게송이 하발게(下鉢偈)입니다. 선반에 있는 발우를 두 손에 잡고 내리면서 하는 게송입니다.

집지응기 당원중생 성취법기 수천인공

執持應器當願衆生 成就法器 受天人供

내가 발우를 집어 가지면서 중생이 법기(法器)를 성취하여 사람과 신들의 공양을 받기를 발원한다는 뜻입니다. 중생이 법기를 성취한다는 것은 중생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과 신들이 마땅히 공양을 올리고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응공’이라고 했죠. 그런 자가 바로 아라한입니다. 내가 이 발우를 딱 집으면서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도록 하겠다고 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생이라는 것은 나를 말하기도 하고, 모든 중생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내가 수행 정진해서 깨달음을 얻어 사람과 신들의 공양을 받는 아라한이 되겠다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밥을 먹는 이유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는 거예요.

이제 발우를 들고 와서 자기 자리에 앉습니다. 대중이 모두 자리에 앉으면 죽비를 세 번 치고, 다시 죽비를 한 번 치면 회발게(回鉢偈)를 합니다. ‘회발’은 발우공양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회상한다는 뜻입니다.

불생가비라 성도마갈다 설법바라나 입멸구시라

佛生迦毘羅成道摩竭陀 說法波羅奈 入滅俱尸羅

발우공양은 부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는 거예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아난다 존자가 ‘우리는 늘 부처님을 생각했는데 부처님이 안 계시면 누구를 생각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사성지를 생각해라’ 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래서 발우공양을 할 때도 가장 먼저 사성지를 생각합니다. 사성지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곳,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하신 곳,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발우를 폅니다. 발우를 펼 때 외우는 게송이 전발게(展鉢偈)입니다.

여래응량기 아금득부전 원공일체중 등삼륜공적

如來應量器我今得敷展 願共一切衆 等三輪空寂

부처님께서 주신 이 발우를 지금 얻어서 펴니 원컨대 일체의 무리들이 다 함께 삼륜이 공적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삼륜이란 보시를 하는 자, 보시를 받는 자, 보시하는 물건, 이 세 가지를 말합니다. 공적하다는 것은 청정해서 아무런 흠이 없다는 뜻입니다. 보시를 하는 사람도 깨끗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보시를 받는 사람도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야 하고, 보시하는 물건도 필요에 맞는 물건일 때 삼륜이 공적하다고 말합니다. 보시를 하는 사람이 뇌물처럼 제공한다면 청정하지 못한 겁니다. 보시를 받는 사람이 필요 없는 걸 받는 것도 청정하지 못한 겁니다. 보시하는 물건이 수행에 딱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도 청정하지 못한 겁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주는 음식이라든지, 옷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의복이라든지, 아픈 사람에게 주는 약이라든지. 이렇게 딱 필요한 것이 아니거나 수행과 관계없는 물건을 보시하는 것도 청정하지 못한 겁니다. 세 가지가 모두 청정한 삶을 살겠다고 발원하면서 발우를 펴는 것이 전발게입니다. 다음 문장은 내일 강의 시간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법문이 끝나자 대중들은 모둠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설법전을 나와 정토회관으로 향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9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천일결사 수행법’을 주제로 열린법회가 이어지고, 오후에는 필리핀 JTS 이사회와 필리핀정토회 이사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하고, 저녁에는 ‘소심경’을 주제로 열린법회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2025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27

0/200

지명화

고맙습니다.

2025-03-04 10:59:50

김종근

감사합니다

2025-02-28 06:42:16

CACTUS

발우공양에 대해 설명을 잘 해주셔서 밥 먹기전 부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시작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2025-02-28 05:3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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