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백일법문 7일째 날입니다. 백일법문 기간 동안 매주 일요일에는 명상을 하기로 했습니다. 스님은 오전에 대중들을 위해 명상을 안내한 후 오후에는 정토경전대학 졸업식에 참석했습니다.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오전 10시에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400여 명의 대중들이 명상을 하기 위해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대중들은 스님에게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어떤 관점을 갖고 명상을 해야 하는지 자세하게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명상이란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인데, 소승불교에서 ‘사마디(samādhi)’라고 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선정(禪定)’이라고 하고, 선불교에서는 ‘참선(參禪)’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명상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에 대해서 일부 스님들이 반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용어는 명상, 즉 메디테이션(Meditation)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쳤다고 전해오는 선정을 닦는 법
선정을 닦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해보려는 방법은 부처님께서 직접 하셨고, 또 대중들에게 가르치셨다고 전해오는 방법입니다. 즉 테라바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위파사나 수행법을 기본으로 해서 선정을 함께 닦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수행자는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닦아야 합니다. 계(戒)는 ‘지킨다’라고 해서 지계(持戒)라고 표현합니다. 선정은 ‘닦는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지혜는 ‘증득한다’라고 표현합니다. 계행을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증득하는 자를 수행자라고 합니다. 팔리어로는 계율을 실라(Sila)라고 하고, 선정은 사마디(samādhi)라고 하고, 지혜는 반야(Panna)라고 합니다.
선정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팔정도(八正道)는 ‘여덟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도(道)’라는 의미입니다. 이 중에서 지계에 해당하는 부분이 세 가지, 선정을 닦는 데 해당하는 부분이 세 가지, 그리고 지혜를 증득하는 데 해당하는 부분이 두 가지 있습니다. 여기서 선정을 닦는 데 해당하는 부분이 바로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입니다. 첫째, 정정진(正精進)은 ‘쉼 없이 꾸준히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정념(正念)은 ‘깨어있음’ 또는 ‘알아차림’을 의미합니다. 셋째, 정정(正定)은 ‘고요한 가운데 집중되어 있다’ 또는 ‘집중된 상태에서 고요함이 유지된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요한 것만이 아니고 집중된 상태에서 고요한 것을 뜻합니다.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사마디(samādhi)’는 정정을 말하기도 하고, 정정진, 정념, 정정, 이 세 가지를 합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팔정도의 이 세 가지를 기초로 선정을 닦기에 앞서, 먼저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계율은 선정을 닦는다고 하면서 욕설을 한다든지, 선정을 닦는 과정에서 남의 물건을 뺏거나 훔친다든지, 선정을 닦는 중에 화를 내고 남을 때린다면, 그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거친 행동을 하면 마음을 고요히 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선정을 닦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마땅히 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마땅히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선정을 닦을 때는, 첫째, 자세를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긴장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몸이 굳습니다. 잘해보려고 애를 쓰다 보니 긴장이 되는 겁니다. 잠시 명상해서 큰 깨달음을 얻겠다는 욕심을 내기 때문에, 자꾸 몸이 긴장되고 마음으로 애를 쓰는 겁니다. 그래서 먼저 몸과 마음을 편안한 상태로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눈을 감고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면 금방 졸음이 옵니다. 머리를 박고 아예 코까지 고는 사람도 있고, 계속 꾸벅꾸벅 조는 사람도 있고, 안 자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있어요.
둘째, 알아차림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자세가 편안한 것만 중요하다면 잠이 들어도 되고 졸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조건도 갖추어야 합니다. 정신이 딱 깨어 있어야 해요. 아주 작은 소리, 작은 감각, 작은 마음의 움직임까지 스스로 확연하게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의를 딱 집중해서 어떤 소리를 듣거나 어떤 사물을 관찰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대부분 긴장이 됩니다. 군인이 보초를 설 때도 전방에 주의를 딱 집중하면 몸과 마음이 바짝 긴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긴장을 풀라고 하면 주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주의를 집중하라고 하면 몸과 마음이 긴장합니다. 지금껏 우리가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합니다. 편안한 가운데 주의를 집중하고 뚜렷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긴장을 풀면 졸음이 오거나 망상이 생기고, 알아차리려고 하면 긴장하고 애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이쪽으로 치우쳤다가 저쪽으로 치우쳤다가 하게 됩니다.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알아차릴 뿐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나태함과 흐리멍덩함에 치우쳐도 안 되고, 그렇다고 애쓰고 긴장하는 쪽으로 치우쳐도 안 된다는 겁니다. 이 둘을 떠나서 편안한 가운데 주의가 딱 집중되고, 알아차림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 알아차림이 분명한 것을 팔정도에서는 ‘정념’이라고 합니다. 선불교에서는 ‘소소영영(昭昭靈靈)’이라고 합니다. 뚜렷한 알아차림을 유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카르마는 나도 모르게 작용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위와 심리 현상은 대부분 나도 모르게 일어납니다. 즉 무지상태로 일어나는 거예요. 이것을 변화시키려면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무지하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뭘 모른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수행에서 무명, 무지,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알아차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마치 물고기가 낚싯밥을 물 듯이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하고, 인연법에 대해 무지한 결과입니다. 수행에서의 ‘무지’란 어떤 행위나 심리 상태가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미리 알아차림으로써 행위와 심리의 결과가 나쁜 결과로 이어지지 않도록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행위는 욕망이 일어난 후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행위가 일어날 징조를 미리 알아차리면 행위를 유발하는 욕망과 갈애(渴愛)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선정을 닦으면 행위가 일어날 징조를 미리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정을 닦는 것은 계율을 지키는 것보다 좀 더 근원적인 처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율은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에 약간의 스트레스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정은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어떤 것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알아차릴 뿐이기 때문입니다.
대념처경에서는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몸과 느낌, 마음과 법, 네 가지를 말합니다. 이것을 사념처라고 합니다. 몸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감각을 알아차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고, 동작과 자세를 알아차리고, 몸의 구성을 알아차리고, 몸의 해체 과정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앉아서는 호흡을 알아차리고, 움직이면서는 동작과 자세를 알아차리는 연습을 시작으로 느낌, 마음을 알아차리는 연습까지 나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들숨과 날숨을 뚜렷이 알아차립니다
우리가 명상을 할 때 연습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를 ‘수식관(數息觀)’이라고 합니다.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것을 뚜렷이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아차릴까요? 눈으로 보고 알아차리는 것도 아니고, 귀로 듣고 알아차리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요한 상태에서 숨이 들어오고 나갈 때는 거의 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바로 코끝과 코 주변에서 숨이 들어오고 나갈 때의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일체의 행위를 멈추고 오직 들숨과 날숨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호흡의 알아차림은 움직이거나 서서하기보다 앉아서 할 때 집중이 되고 알아차림을 유지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좌선이 끝나면 천천히 일어나서 걷는 ‘행선’을 합니다. 행선은 자신의 동작과 자세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손을 드는지 내리는지를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움직입니다. 행선은 ‘내가 움직인다’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좌선은 행위를 멈추는 것이고, 행선은 행위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왼발이 앞으로 나가는지 오른발이 나가는지, 허리를 구부리는지 펴는지, 동작과 자세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에 해당합니다. 감각 가운데에서도 촉각에 들어갑니다. 남이 구부리는 것을 아는 것은 시각으로 알 수 있지만, 자신이 구부리는 것은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움직일 때는 동작과 자세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좌선과 행선 이 두 가지를 합니다. 좌선은 동작을 멈춘 가운데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행선은 움직이면서 동작과 자세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각과 느낌을 알아차리면 내 카르마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일상에서는 이것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네가 잘못해서 화가 일어났다!’ 하고 바깥에서 핑곗거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 있는 중에 내가 엄청나게 화가 난다면, 누군가 지금 나를 화나게 한 게 아니잖아요. 가만히 앉아 있는데 심장이 벌떡벌떡 뛴다면, 원인이 바깥에 있는 게 아닙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에게 내재되어 있던 것이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증상이 일어나더라도 괜찮습니다. 명상이 잘됐다, 안 됐다, 평가할 것도 없습니다. 명상을 하다가 졸았다면 명상이 잘 안 된 것이 아니라, 내 몸의 상태가 수면 부족이거나 피로한 상태라는 것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졸린 가운데 알아차리고, 다리가 아픈 가운데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다리가 아프면 우리의 생각은 이미 통증에 가 있습니다. ‘다리를 펼까, 말까?’, ‘왜 죽비를 안칠까?’ 하는 생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호흡 알아차림을 놓치게 됩니다. 계속 그 생각에만 빠져있는 거예요.
명상은 몸에 어떤 감각이 일어나든, 바깥에서 어떤 냄새나 소리가 나든,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호흡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면 통증이 없어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통증이 있는 가운데에서도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핵심입니다.
물론 명상을 하는 데 방해꾼이 없으면 좋겠지만, 방해꾼이 있어도 알아차림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방해가 있는 상태에서 알아차림이 유지되면, 다음 단계에 더 유리해집니다. 다음 단계가 어차피 방해가 있는 가운데 알아차리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방해가 있으면 초심자는 알아차림을 유지하기가 힘들 수 있는데, 어차피 넘어야 하는 과정입니다. 몸에 어떤 증상이 있든, 밖에서 어떤 소리가 나든,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그것은 늘 있는 일이에요. 졸음도 있고, 다리 통증도 있고, 옆에서 소리 내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평상시에는 몸이 가려우면 자신도 모르게 긁지만, 명상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런 욕구가 엄청나게 일어납니다. 일어나는 욕구를 지켜보면 ‘내가 평상시에 엄청나게 움직이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제일 좋지만, 생각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뭐든지 그냥 내버려 두고, 명상하는 내내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자꾸 해야 합니다. 그렇게 알아차림이 조금 더 분명해지면 자기 자신을 알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알면 변화가 시작됩니다.”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죽비 소리와 함께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탁, 탁, 탁!”
30분간 명상을 한 후 다시 죽비 소리가 울렸습니다.
“다리를 천천히 폅니다. 다리를 펴면서 자신의 동작을 알아차립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일어나는 줄을 알고, 걸으면서도 걷는 줄을 압니다.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찬 기운과 더운 기운도 알아차려 봅니다. 천천히 움직이면서 자신의 동작을 알아차립니다.”
10분 간 포행을 했습니다. 포행을 할 때는 자세와 동작을 알아차리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중간중간에 스님이 자세하게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다시 자리에 앉아 명상을 했습니다.
“자세를 바로 합니다. 가부좌를 하고,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정면을 응시한 상태에서 눈을 편안하게 감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콧구멍 끝에 둡니다. 그러면 내가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숨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줄을 알아차리고, 숨이 나가면 나가는 줄을 알아차립니다. 숨이 가쁘면 가쁜 줄 알고, 숨이 고요하면 고요한 줄 압니다. 편안한 가운데 호흡의 상태를 알아차려 봅니다.”
다시 30분간 명상을 했습니다.
“탁, 탁, 탁!”
오늘은 명상을 안내하는 법문이 있었기 때문에 30분간 두 번 명상을 한 후 마쳤습니다.
대중들은 모둠별로 마음 나누기를 하였고, 스님은 3층 설법전을 나와 정토회관 방송실로 향했습니다.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2시부터는 온라인으로 정토경전대학 졸업식을 했습니다. 오늘은 5개월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가는 뜻깊은 날입니다. 졸업생은 대부분 교실별로 생방송을 함께 시청하고, 화상회의 방에는 개근상과 정근상 수상자들이 자리했습니다.
정토회 대표의 축사를 들은 후 축하 공연과 지난 5개월 동안의 경전대학 수업 모습과 실천 활동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이어서 정토경전대학 학장인 스님이 국내외에 1,180명의 졸업생에게 졸업장을 수여했습니다.
“졸업장을 드립니다.”
“잘 받았습니다.”
화상회의 방에서 축하의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이어서 143명이 개근상을 받고, 132명이 정근상을 받았습니다.
박수 소리를 뒤로 하고 졸업생 두 분의 소감문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굉장히 헌신적인 분이신데, 그 헌신이 저에게 오니 많이 힘들었습니다. 어머니께 괜찮다고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소용없었습니다. 저는 정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본격적으로 새벽 정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점심에 어머니와 주꾸미 비빔밥을 먹는데 매워서 ‘하-흡-하-흡-’ 하는 저를 보시고, 어머니는 저에게 ‘매우면 맨밥이랑 먹어. 매운맛이 훨씬 덜해.’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직 먹을 만해서 많이 맵다 싶을 때 먹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같은 말을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하셨습니다. 저는 점점 짜증이 올라왔고, 거기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같은 말을 5번째 반복하시면서 제 밥숟갈 위에 맨밥을 턱 얹었습니다. 그 순간 화가 확 올라왔고 밥그릇을 바닥에 힘껏 내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습니다. 저는 이런 제 마음을 보고 많이 당황했습니다.
'이게 이 정도로 화낼 일인가?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난 거지?'
사실은 어떠한지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 어차피 내가 떠먹으려고 했던 걸 어머니께서 떠줬으니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 어머니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오셨고, 조금 과하게 간섭하는 습관이 난폭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습관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그제야 제 마음이 보였습니다. '그냥 먹으면 되는 걸, 나는 굳이 이걸 꼭 안 먹어야겠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제야 제가 가진 황소고집이 보였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떠주신 맨밥을 덥석 물었고, 씹을수록 매운맛이 점점 사그라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속 화도 함께 사그라들었습니다. 요즘은 어머니의 잔소리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잔소리를 듣고 아무렇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아서 좋고, 불편하게 들리면 수행할 거리가 생겨서 좋습니다. 제 마음이 편안해진 이유는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에서 스님의 법문을 통해 마음 작용의 원리를 이해하고, 꾸준히 정진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1년 6개월 전, 아이가 친구를 때려서 상처를 입히게 된 일로 저와 가족들은 아이 친구와 그 부모님께 사과하는 과정에서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괴로움에 먹지도 않고 일상생활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가 저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나는 아이를 애쓰며 키웠는데 아이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런 의문을 가진 중에 법륜스님의 법문을 만났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나니 지금 나의 괴로움이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엄마인 나의 문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남편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예민하고 화가 많아 아이들을 체벌하는 엄격한 훈육으로 저와 갈등이 많았습니다. 저는 아이의 폭력성이 아빠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남편이 아니라 남편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엄마의 마음이 아이에게 영향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스님의 말씀이 저를 설득하였고, 저는 108배를 시작했습니다. ‘미워하고 원망해서 미안합니다’라고 남편에게 참회의 절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힘들게 절을 해야 하는지 억울해서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계속 절을 하니 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가족밖에 모르고 속이 여린 사람인데 그런 남편을 내가 참 외롭게 하고 무시했구나 하는 미안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남편은 항상 저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고마운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 없이 편하게 대하니 남편과 아이들도 어느새 편안해졌습니다. 앞으로 경전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공부를 이어가며 나의 삶 속에서 체험해 나가겠습니다.”
이어서 졸업생 일동은 바른 법으로 인도해 준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스승의 은혜’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다음으로 졸업생들이 삼배로 법을 청하자, 스님이 졸업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경전대학에서 배운 금강경, 반야심경, 선불교의 핵심 요지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정리해 주었습니다.
“정토경전대학 졸업생 여러분,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러분들은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경전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경전대학에서는 대승불교 사상과 더불어 선불교 사상을 공부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공부했고, 선불교에서는 육조단경을 중심으로 공부했습니다.
남을 도와주되 괴롭지 않은 경지를 가르쳐주는 금강경
우리는 보통 무언가를 얻을 때 기분이 좋은 것을 행복으로 삼습니다. 얻고 싶은 게 있을 때 그냥 얻기만 하면 이치에 안 맞기에 우리는 주는 행위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를 할 때는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받으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준 것에 대한 대가가 충분히 돌아오지 않을 때 마음이 괴로워집니다. 그래서 얻을 때의 기쁨보다는 베풀 때 기쁨이 크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금강경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제법이 공한 도리에서 보면, 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을 할 뿐입니다. 받고 싶은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 소극적인 삶의 자세라면, 주는 마음을 내는 것은 적극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늘 받는 것에 익숙해져서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뭔가를 줄 때,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전제가 늘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안 되면 ‘그럴 줄 알았으면 안 할걸!’ 하고 후회합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려면, 다만 주기만 할 뿐 받으려는 기대가 없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지속 가능한 기쁨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바로 금강경의 가장 중심된 가르침입니다. ‘이해 받으려 하기보다 이해하는 마음을 내겠습니다.’, ‘도움 받으려 하기보다 도와주며 살겠습니다.’ 하고 마음을 내면 부작용이 없습니다. 이런 내용은 모두 금강경의 가르침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의 관점에도 이치에 맞는 반야심경
진리의 길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유정법’이라고 합니다. 인연을 따라 그때그때 정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양자역학에서 ‘불확정성의 원리’와 비슷합니다. 인연을 따라서 시간과 공간이 정해지고, 인연이 도래하면 결과가 드러나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반야심경에서는 이치에 맞게 논리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을 수학, 물리학, 천문학, 유전공학에 비유해서 현대적으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금의 시대에 맞게 좀 더 과학적으로 이치에 맞게 공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요지는 정함이 없는 것에서 정함이 있는 것이 나타나고, 정함이 있는 것에서 정함이 없는 것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즉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입니다. 이것을 법계관에서는 ‘사사무애법계관’이라고 합니다.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의 경지가 바로 자유로운 해탈의 경지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사사무애법계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제법이 공하다고 하면, 없다고 단정 짓거나 허무주의로 느낍니다. 또 인연을 따라 드러난다고 하면, 현상에 집착해서 또 한쪽으로 치우칩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 관점을 유지할 때 내 삶이 더 자유로워집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중도의 원리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법칙이 성립할 때는 무조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 안에서 법칙이 성립합니다. 예를 들어 평면이라는 조건에서는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하나밖에 그을 수 없다는 법칙이 성립합니다. 이렇듯 항상 어떤 조건이 전제됩니다. 모든 법칙이 다 그렇습니다. 질량 불변의 법칙이 성립하려면, 원자는 변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 조건에서는 화학반응이 일어나서 다른 물질로 변화해도 질량 불변의 법칙이 성립합니다. 그런데 원자가 변하는 핵 변화에서는 질량 불변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어떤 법칙은 일정한 세계 안에서 성립하게 되어 있습니다. 현실에 적용되는 법칙은 너무 거시 세계에서도 성립하지 않고, 너무 미시 세계에서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어떤 세계에 놓이느냐에 따라 성립하는 것이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삶은 거시 세계인 동시에 현실 세계이고, 또한 미시 세계이며, 여러 세계가 중중첩첩(重重疊疊)으로 겹쳐 있습니다. 여러 세계가 겹친 동시에 나누어지고, 또 나누어지는 동시에 겹쳐 있습니다. 손을 비유로 들어 보면 ‘하나의 ‘손’이라고 하기도 하고, 다섯 개의 ‘손가락’이라고도 합니다. 오므려지기도 하고 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다’라고 정할 수가 없습니다. 필요에 의해 그때그때 인연을 따라서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거예요. 이것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이치를 이해하고 경험하게 되면 삶이 자유로워집니다. 상황에 따라 계율을 지키기도 하고, 때로는 융통성을 발휘하기도 하고, 진보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보수적이기도 하고, 애국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나라를 초월하기도 합니다. 현실에서 주어진 조건과 인연을 따라서 나투게 됩니다. 마치 물이 온도에 따라서 얼음이 되었다가, 물이 되었다가, 수증기가 되었다가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화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이런 자유를 ‘해탈’이라고 합니다. 이런 세계로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정함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는 선불교
선불교는 제법이 공한 도리에 있어서 더 파격적으로 정함이 없는 경지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잘못 받아들이면 함부로 하는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선승이라는 사람들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막행막식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균형을 잡아서 중도를 실천해야 합니다. 중도의 균형이 깨지면 그것이 진리라는 이름으로 악행이 되기도 합니다.”
이어서 경전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수행, 보시, 봉사의 삶을 계속 살려면 정토회에서 제공하는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되는지, 이번 백일법문 기간에는 어떤 강좌에 참여할 수 있는지 자세하게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현장에서 참여하고 있는 졸업생들이 즉석에서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누구든지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졸업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괴로움이 없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정토경전대학의 목표라는 스님의 말씀이 한 명 한 명의 소감 속에서 그대로 현실로 드러나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사홍서원을 끝으로 졸업식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은 수업사이트로 입장하여 교실별로 마음 나누기를 이어나가고, 스님은 방송실을 나왔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에는 독일정토회 이사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하여 2024년 사업보고와 결산, 2025년 사업계획과 예산을 검토하고 승인했습니다. 이어서 저녁 8시에는 뉴욕정토회와 뉴저지정토회 이사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하여 2024년 사업보고와 결산, 2025년 사업계획과 예산을 검토하고 승인했습니다. 모처럼 해외에 있는 정토회 활동가들과 화상으로 만나 반갑게 안부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8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정토회 천일결사 수행법’을 주제로 열린 법회 강연을 하고, 오후에는 LA정토회 이사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하고, 저녁에는 ‘소심경’을 주제로 열린 법회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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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화
고맙습니다
봉사가 만족감 뿌듯함을 가져오고 자신감을 가지게 하는거 같습니다
금강경의 의미
반야심경의 의미 잘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