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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2일째 날입니다. 첫 강의 주제는 불교를 배우는 모든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예불문’입니다. 어제는 예불문이라는 제목의 의미에 관해 설명했고, 오늘은 예불문의 첫 구절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스님은 법문을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 3층 설법전으로 향했습니다.
오전 9시부터 사시 예불을 정성껏 올린 후 10시 15분에 열린 법회 2강을 시작했습니다.
250여 명의 대중이 자리한 가운데 삼귀의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예불문의 첫 구절인 오분향을 올리는 의미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정성을 기울일 때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향을 피워서 그 향을 올리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통에 따라서 우리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때 향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인도와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좋은 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향을 종류별로 피우기도 하고, 특정한 행사에 맞는 향을 피우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얼굴이나 몸에 바르는 화장품의 향수도 종류가 다양하잖아요. 하물며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향이니 그 종류도 더 다양한 것입니다.
불자(佛子)란 부처님께 무언가를 바라고 비는 신자(信者)가 아닙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해탈과 열반에 이르고자 수행하는 사람이 불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올리는 가장 중요한 공양은 바로 수행 정진해서 얻은 인격의 향기를 공양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다섯 가지의 몸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오분법신(五分法身)’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수행을 통해서 법의 몸이 되는데, 이것을 법신이라고 하고, 이 법신에는 오분법신이 있습니다.
첫째, 계를 청정히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계를 청정히 지키면 그 몸을 ‘계신(戒身)’이라고 합니다. 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를 ‘계향(戒香)’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계를 청정히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다른 생명을 때리거나 죽이지 않고, 오히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거나 훔치지 않고, 베푸는 것입니다.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하지 않고, 아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욕설이나 거짓말하지 않고, 진실하고 자비롭게 말하는 것입니다. 술에 취해서 행패 부리지 않고, 늘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치하지 않고 검소하게 사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것입니다. 들뜨지 않고 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 없이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계를 청정히 지키는 사람의 몸이 계신입니다. 계를 청정히 지키는 몸, 그 몸에서 나는 향기를 계향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불할 때는 가장 먼저 부처님께 계의 향기를 공양 올립니다.
계를 청정히 지키는 사람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 중에도 정서가 불안하거나 들뜨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있으면 우리가 힘이 좀 듭니다. 그래서 그다음 구절에 나오는 것이 ‘정향(定香)’입니다.
둘째, 마음이 고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즐거움에 들뜨거나, 불안하거나, 침울하다면 고요한 상태가 아닙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마음이 편안해야 합니다. 어린 아들이 친구와 다투고 치맛자락을 붙들고 울면서 ‘엄마, 쟤가 나 때렸어. 혼내줘’ 하고 말하면 어떻게 하나요? ‘뭐라고? 우리 아들을 때렸다고! 어떤 놈이야? 가보자!’ 이렇게 흥분해서 아들을 때린 친구를 찾아서 야단을 칩니다. 또 야단맞은 아이는 집에 돌아가서 엄마에게 이릅니다. 그 엄마도 화가 나서 삿대질하면서 서로 또 싸우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사입니다. 그런데 수행자라면 아들에게 ‘아이고, 그랬어? 그 친구가 네게 그렇게 했구나. 우리 아들 마음고생했구나’ 이렇게 아들을 달래줘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조금 있다가 아들이 다시 그 친구와 놀게 됩니다. 어른이라면 꽁해서 며칠을 갈 일을 아이들은 5분도 채 안 갑니다. 그리고 다시 그 친구와 놀아요.
우리는 마음을 차분히 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서 엄마가 새벽 5시에 일어나 정진을 하면, 아이가 일어나서 엄마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아이들은 항상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지만, 부모는 늘 마음이 편안해야 합니다. 이것을 평정심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을 때도 늘 편안해야 하는데, 우리는 보통 난리가 납니다. 그래서 선정을 닦아서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때 뿜어져 나오는 향기가 바로 정향(定香)입니다.
부처님의 일화에서 보면, 어떤 사람이 화가 나고 괴로워서 부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딱 선정에 들어계시니까, 차마 질문을 못 하고 가만히 옆에 앉아 있다가 저절로 괴로움이 해결 돼버렸습니다.
데바닷타의 사주를 받고, 부처님을 죽이러 온 청부 살인자가 밤에 칼을 들고 부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선정에 드신 모습을 보고 칼을 찌를까 말까, 한참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불안한 마음에 그만 땡그랑 하고 칼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이리 나오너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쪽으로 도망가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부처님을 해치고 내려오면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또 다른 두 명의 청부 살인자를 배치한 거예요. 그리고 또 그 두 명을 죽이기 위해 네 명의 청부 살인자를 배치해 놓은 겁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그를 살려 주셨습니다.
옛날 선사들의 얘기를 보면, 어느 절에 도둑이 들었는데 물건을 훔치다가 조실스님에게 들켰어요. 도둑이 도망을 가다가 제자들한테 잡혀 왔습니다. 조실스님이 제자들에게 ‘그는 도둑이 아니다. 형편이 어려워서 내가 물건을 준 것이니 보내주어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제자들이 긴가민가하면서 그냥 놔줬어요. 이 도둑이 크게 감동을 받아서 몇 년 뒤에 출가를 하기 위해 그 절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데, 스스로 조실스님에게 찾아가 ‘제가 사실은 그때 그 도둑이었습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늘 들뜨는 즐거움을 추구하니까 그 반대급부로 뜻대로 안 되면 침울해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 ‘정신(定身)’이고, 정신에서 나오는 향기가 바로 ‘정향(定香)’입니다.
사람이 착하고 마음이 고요해도 막상 같이 살아보면 답답한 사람들이 있어요. 말귀를 못 알아듣고 일머리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에는 원리가 있습니다. 그 이치대로 하면 일이 쉽고 힘이 적게 듭니다. 그런데 이치를 모르면, 힘은 힘대로 들고 일은 일대로 안 돼요.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물이든 사람의 마음이든, 이치를 알아서 이치대로 해결하는 것을 ‘지혜롭다’라고 말합니다. 순우리말로는 ‘슬기롭다’ 또는 ‘꾀가 많다’라고 합니다. 꾀가 많다고 하면 보통 나쁘게 이해하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것이 꼭 지식이 많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지식이 많은 사람이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답답한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지식이 지혜에 도움이 될 때는 좋지만, 지식이 지혜를 방해할 때는 지식이 없는 것보다도 못합니다. 지혜란 사물의 이치를 알고,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을 불교 용어로 바꾸면 ‘제법이 공한 줄 안다.’, ‘세상이 연기되어 있는 줄 안다.’, ‘무아와 무상인 줄 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혜를 가지면 집착이 적어집니다. 이렇게 지혜로운 자의 몸을 ‘혜신(慧身)’이라고 하고, 그 혜신에서 나오는 향기를 ‘혜향(慧香)’이라고 합니다.
넷째,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경지를 해탈이라고 합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이렇게 하면 어때요?’ 하고 물어보면, 자꾸 ‘안 돼요’ 하면서 거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인의 말이나 상황을 가볍게 받아들여서 ‘아, 그래요? 한 번 검토해 보죠’ 하는 말이 나오지 않고, ‘그거 안 돼요!’ 하는 말을 자주 하는 겁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요청에 대해 침묵으로 허락하셨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대답이 없으면 허락하신 거예요. 이것은 부처님께서 상대의 제안을 대부분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는 말이 없으면 허락한 거예요, 안 한 거예요?”
“허락을 안 한 겁니다.”
“허락은 항상 ‘네’ 또는 ‘오케이’ 하고 말해야 허락한 거지, 아무 대답이 없으면 허락하지 않은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타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적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누가 ‘이것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할 때, 부처님이 아무 대답이 없으면 침묵으로 허락하신 거예요. 우리 주위에는 걸림이 참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슨 제안을 해도 일단 아니라고 먼저 말합니다.
해탈의 경지는 제법이 공한 도리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공이 색한 도리까지 알아야 합니다. 제법이 공한 도리와 공이 색한 도리를 모두 아는 경지는 ‘보살의 경지’라고 말합니다. 법이 공한 도리를 알면 나의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공이 색한 도리를 알아야 중생의 다양한 고민에 맞춰 교화가 가능한 거예요. 중생이 겪는 하나하나의 고통은 다 현장에서 제각각 벌어지는 일이잖아요. 중생들에게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알아라.’라고 말해서 금방 깨달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늘 제법이 공하다고만 얘기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의 인연 따라 뭔가에 걸려서 괴로워하기 때문에, 그 인연에 따라서 법문을 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인연설법이에요. 이렇게 걸림 없이 자유로운 자의 몸을 ‘해탈신’이라고 하고, 그 해탈신에서 나오는 향기를 ‘해탈향’이라고 합니다.
다섯째, 앞의 네 가지를 다 포함하여 한발 더 나아가서 스스로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해탈지견은 계를 청정히 지키고, 마음이 고요하고, 지혜로우며, 자유로운, 앞의 네 가지를 다 포함하는 용어입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스스로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로부터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자각이 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를 불신(佛身), 즉 부처의 몸이라고 합니다. 해탈지견(解脫知見)은 바로 부처의 지혜를 말하는 겁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향기를 우리가 완성했습니까? 아직 첫발도 못 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다섯 가지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불을 하면서 다섯 가지 목표를 지향하고 마음속에 그것을 뚜렷하게 그리면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예불을 할 때 정성을 다해 ‘계향, 정향, 혜향…’ 하고 선창을 하는 이유는 그런 마음을 오롯하게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속에서 ‘계를 청정히 지키겠습니다’, ‘선정을 닦겠습니다’, ‘지혜를 증득하겠습니다’, ‘해탈을 성취하겠습니다’, ‘해탈지견에 들겠습니다’ 하고 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창자가 예불문의 첫 구절을 읊으면 우리는 가만히 합장해서 그런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불문의 두 번째 구절과 세 번째 구절까지 설명을 한 후 법문을 마쳤습니다.
대중들은 모둠별로 모여서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곧바로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하기 위해 지하 1층 공양간으로 향했습니다.
충남대 명예교수와 농어촌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시고 ‘부탄 행복의 비밀’이라는 책을 펴내 부탄의 국민총행복지수(GNH) 개념을 한국사회에 적용하기 위한 연구 활동을 오랫동안 해오신 박진도 교수님이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점심을 함께한 후 평화재단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스님은 지난 12월과 2월에 부탄을 답사하고 온 내용을 공유한 후 부탄 전문가인 교수님의 의견을 경청했습니다.
“이번에 부탄을 답사하고 와서 지속가능한개발 사업 계획을 3단계로 세워 보았습니다. 1단계는 집수리, 농수로, 식수 확보 등 생활을 개선하는 일을 하고, 2단계는 축산, 과수 등 소득을 증대하는 일을 하고, 3단계는 가공하고 유통하는 과정에서 제값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일을 해보려고 합니다.
처음에 젬강 지역을 답사했을 때는 한 마을에 집이 없는 가구가 한두 채 정도 되겠다 싶어서 JTS에서 100채 정도를 지어주면 되겠다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답사에서 깊은 산골짜기까지 들어가 보니까 한 개의 치옥에 집이 없는 사람이 10가구씩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계산을 해보니까 총 200채의 집을 짓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집은 있는데 내부를 수리해야 하는 집은 총 700채 정도가 되었습니다. 트롱사 지역은 집이 없는 가구가 50채 정도 되었고, 집을 수리해야 하는 집은 300채 정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활 개선은 지금 당장 시작할 수가 있는데, 소득 증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여서 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특히 과수와 농사는 전문가가 부탄에 직접 가서 같이 살면서 가르쳐주어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을 구하기가 현재 어렵습니다. 잠깐 방문하고 오는 정도로는 기술 전수가 되기 어렵고요.”
“스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잘 되리라고 믿습니다. 저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돕겠습니다.”
박진도 교수님은 부탄에 농산물 가공 기술도 부족하지만 요리 기술도 부족하기 때문에 요리 기술을 전수할 필요성을 이야기하면서, 협동조합을 만들면 좋겠다는 제안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지역 리더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운영하려고 준비 중인데 스님에게 입학식 축사를 해달라고 요청해서 스님도 시간을 내어 주기로 하고 미팅을 마쳤습니다.
곧이어 오후 2시에는 국민통합의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스님에게 지혜를 구하러 온 정치인들과 만났습니다. 이들과 두 시간 동안 깊이 대화를 나눈 뒤, 오후 5시에는 아시아재단 이사장과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연달아 미팅을 하고 나니 해가 저물었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저녁반 회원들을 대상으로 열린법회 2강을 했습니다.
350여 명의 대중들이 3층 설법전에 자리한 가운데 스님이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오전 법회와 같은 주제로 예불문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는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돌아와서 목숨 바쳐 절하옵니다’라는 뜻입니다. 삼계도사(三界導師)는 삼계의 대스승이라는 뜻이고, 사생자부(四生慈父)는 모든 생명 가진 존재의 자비하신 어버이라는 뜻이며, 시아본사(是我本師)는 나의 본래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하는 세 가지 수식어가 앞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삼계(三界)에서 계(界)는 차원이 다른 세계를 나누는 경계를 말합니다. 인도의 전통적 세계관에서는 이 세계가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세 개의 세계로 나눠집니다. 이 세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세 개의 세계가 결합되어 있다고 봤습니다. 그러므로 삼계는 모든 세계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현대 과학에서도 이 세상을 세 개의 세계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질세계가 있고, 물질세계를 기반으로 한 생명 세계가 있고, 생명 세계를 기반으로 한 정신세계가 있습니다. 자연과학자들은 물질세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연구하는 화학, 물질이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연구하는 물리학이 그것입니다. 생물학자와 의사들은 생명 세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이 어떻게 신진대사 작용을 하게 되는지 탐구하는 학문이 생물학입니다. 의사들은 주로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는 생명 현상을 연구합니다. 요즘 각광받는 바이오는 생명을 연구하는 분야이고, 화학과 물리학은 모두 물질세계를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연구하셨을까요? 바로 정신세계를 연구하셨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물질세계에 물질의 근본 알갱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의 근본 알갱이, 철의 근본 알갱이 같은 것을 원자라고 불렀습니다. 돌턴은 원자설에서 ‘원자는 단독자이며 불변한다’하고 정의했습니다. 또한 생명계에는 종자라는 개념이 있어서 하나의 종은 결코 다른 종으로 바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세계에서는 아트만(ātman), 즉 자아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자아라고 할 것이 없다’라고 하시면서 무아(無我), 아나트만(ānatman)을 설파하셨습니다. 오늘날 생명과학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종은 결국 유전자를 말합니다. 유전자는 변형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유전자를 변형하면 종이 달라집니다. 종이 불변한다는 게 사실이 아닌 게 밝혀진 거예요. 원자 역시 더 작은 단위인 원자핵과 전자로 나눠지고,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 중성자, 중간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원자는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고, 소립자는 더욱 작은 쿼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물질세계에도 ‘이것이 물질의 근원이다’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무아는 부처님이 정신세계를 연구해서 나온 개념이지만, 이것은 생명 세계와 물질세계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대 과학이 발전해도 논리적 모순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두고 ‘불교는 과학이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부처님이 물질을 연구하신 것은 아닙니다. 또한 신통력으로 물질을 꿰뚫어 보신 것도 아닙니다. 마음을 연구하여 깨달은 법칙이 물질세계에도 일맥상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이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네 개가 있습니다. 첫째, 거시 세계의 대표적인 힘은 중력입니다. 중력이란 물질과 물질 사이에 잡아당기는 힘을 말합니다. 둘째,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힘은 전자기력입니다. 양전기와 음전기 사이에도 잡아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음전기와 양전기는 서로 잡아당기고, N극과 S극도 서로 잡아당깁니다. 하나는 전기력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력입니다. 이 둘을 합해서 전자기력이라고 합니다. 셋째, 미시 세계로 들어가 보면, 원자핵 속에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산소 원자핵에는 여덟 개의 양성자와 여덟 개의 중성자가 존재합니다. 강력(강한 상호작용)은 원자핵 내부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결합시키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양성자는 모두 양(+)의 전하를 띠고 있어 서로 전기적으로 반발하지만, 강력은 이러한 전기적 반발을 압도하는 강한 힘을 제공하여 원자핵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킵니다. 약력(약한 상호작용)은 주로 방사성 붕괴와 입자 변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베타 붕괴(β-decay)에서 중성자가 양성자로 변환될 때 약력이 작용합니다. 이렇게 전자기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원자핵 내부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것이 강력(강한 상호작용)과 약력(약한 상호작용)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에는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이렇게 네 개의 힘이 있습니다.
물질세계에는 물질의 변화를 설명하는 여러 물리 법칙과 화학 법칙들이 있습니다. 질량 보존의 법칙, 배수 비례의 법칙, 일정 성분비의 법칙이 모두 그것입니다. 그런데 핵 변화에서는 질량 불변의 법칙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질량 감소가 일어나는데, 그 감소된 질량이 에너지로 바뀝니다. 아인슈타인의 E=mc² 에너지 공식이 이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차원이 달라지면 법칙도 달라집니다. 이 차원에서는 이런 법칙이 성립하는데, 다른 차원에 가면 그 법칙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평면에서는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를 하나밖에 그을 수 없습니다. 평면에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입니다. 이것은 평면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정의예요. 그런데 곡면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무수히 많아집니다. 곡면에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어떻게 휘어졌느냐에 따라 180도보다 크거나 작을 수 있습니다. 세계가 1차원이냐 2차원이냐 혹은 3차원이냐 4차원이냐에 따라서 법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3차원의 공간에서는 벽을 뚫거나 문을 열지 않고는 바깥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4차원의 세계에서는 시간의 축을 통해 얼마든지 밖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할 수 있어요.
고대 인도인들도 나름대로 차원이 다른 세계를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세계가 욕계입니다. 욕계는 ‘먹고 싶다.’, ‘가고 싶다.’ 이런 욕구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입니다. 두 번째 세계인 색계입니다. 색계는 욕망이나 욕구 없이 다만 형상만 있는 세계입니다. 세 번째 세계는 무색계입니다. 무색계는 존재의 모양도 없고, 욕망도 없는 세계입니다. 이들을 합해서 삼계라고 합니다. 즉 삼계는 모든 세계를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는 온누리입니다. 그래서 삼계도사(三界導師)는 ‘온누리의 스승이시다’하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이 온누리의 스승 역할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밝은 지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지혜가 충만하시다.’ 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지혜를 가지고 우리가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도록 하는 스승의 역할을 합니다.
사생자부(四生慈父)에서 ‘사생’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를 지칭할 때 남녀노소라는 말을 쓰지요. 남자, 여자, 늙은 사람, 젊은 사람이란 결국 ‘모든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런 것처럼 모든 생명 가진 존재들을 태어나는 모습을 가지고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의 사생으로 분류했습니다. 태로 태어나는 것은 포유류를 일컫고, 알로 태어나는 것은 조류, 파충류, 양서류를 일컫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습생에 벌레를 넣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벌레는 알로 태어나는 생물인데, 옛날 인도 사람들은 축축한 데서 벌레가 생겨난다고 생각한 거예요. 화생이란 암수가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몸이 두 개로 갈라져서 생겨나는 생명체입니다. 아메바 같은 단세포 생물을 일컫습니다. 세포 하나가 두 개가 되고, 그것이 또 분화되어 번식하는 형태예요. 그래서 사생자부는 모든 생명의 자비로운 어버이라는 뜻입니다.
지혜로써 스승의 역할을 하실 뿐만 아니라 자비로운 어버이의 역할도 하시기 때문에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를 구족(具足)하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자비를 다 갖추신 나의 본래 스승이라는 뜻을 담은 수식어가 ‘시아본사(是我本師)’입니다.
그러므로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은 ‘온누리의 스승이시고, 모든 중생의 어버이시고, 나의 본래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절하옵니다’ 하는 뜻입니다.
시방(十方)이란 온누리에 계시는 한량없는 부처님이라는 뜻이고, 삼세(三世)란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라는 뜻입니다. 제망(帝網)은 제석천의 그물을 말합니다. 제석천에는 궁전이 있는데, 구슬로 엮은 엄청나게 큰 그물이 궁전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그물의 코는 모두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져 있다고 해요. 그물은 무수히 많은 구슬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중에 한 개의 구슬을 보면 나머지 구슬들이 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게 보입니다. 제석천의 그물망에서 각각의 구슬마다 나머지 모든 구슬의 모습이 비치는 것을 가지고 ‘중중무진(重重無盡)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실제 사실이 아닌 허황된 얘기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오늘날 우리의 세포를 보면 이와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수십조 개의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죠. 작은 세포 하나하나마다 다 우리 몸의 모든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DNA라고 합니다. 수십조 개의 세포 가운데 딱 한 개만 빼내서 복제하면 똑같은 인간이 나오는 겁니다. 이런 내용을 계속 공부하다 보면 ‘불교는 과학인가?’ 하고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죠.
중중무진 연기란 제석천의 그물처럼 서로 속속들이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연관 관계가 옆으로만, 혹은 위, 아래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지 않은 부분이 없이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 제석천의 그물과 같은 것이 찰해(刹海)입니다. 찰해는 육지와 바다 모두를 말합니다. ‘바늘 하나 꽂을 데 없을 만큼 모두 다’ 이런 뜻인데, 이 말은 세상 모든 곳을 지칭합니다.
상주일체(常住一切)는 그곳에 항상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 있다는 말일까요? 부처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제석천의 그물과 같은데, 그물을 이루는 구슬들이 모두 비치는 하나하나의 구슬마다 모두 부처님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불타야중(佛陀耶衆)에서 불타야는 불(佛)과 같은 말이에요. 뒤에 붙은 중(衆)은 무리 중자니까 불타야중은 ‘부처님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은 ‘제석천의 그물처럼 빈틈없이 모든 곳에 항상 계시는 일체 부처님들께 귀의합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첫 번째 문장은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문장이고, 두 번째 문장은 온 누리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들, 즉 다른 세계에 계시는 부처님이든, 과거세부터 미래세에 계시는 부처님이든, 일체의 부처님들께 귀의한다는 문장입니다. 이 두 문장은 모두 불(佛)에 대해 귀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 법문을 한 후 밤 9시가 넘어서 열린 법회 2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하고, 수행법회 생방송을 3층 설법전에서 한 후, 오후에는 평화재단 연구 세미나에 참석하고, 평화재단 기획위원회 회의를 한 후, 저녁에는 저녁반 회원들을 위해 수행법회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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