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부탄 트롱사 답사 6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누비(Nubee) 게옥 안에 있는 가칼 치옥의 종탕 마을과 가칼 마을 그리고 지 치옥의 셈지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하고 원고를 교정한 후 숙소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오전 8시에 첫 번째 방문지인 종탕 마을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차를 타고 해발고도 2,620m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다시 오르고 내려오고를 반복하면서 몇 개의 산을 넘었습니다. 드디어 9시 40분에 종탕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을 맞이하기 위해 주민들이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 일행이 차에서 내리자 주민들이 노래를 부르며 스님을 마을 절로 안내했습니다.
스님은 법당을 참배하고 환영식을 한 후 자리에 앉아서 버터로 만든 수자차를 마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차례로 스님에게 공양물을 올렸습니다.
먼저 부군수 멍미 님이 마을 현황을 설명했습니다. 스님은 빨리어로 삼귀의를 하며 마을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올린 공양물을 향해 축원 기도를 한 후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트롱사주의 주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네요. 주도와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하늘과는 가깝네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하늘에 있는 신들의 복을 많이 받을 것 같습니다. (웃음)
종탕 마을로 오는 길에 차창밖을 보니 물이 풍부하고 아주 맑아 보였습니다. 이 좋은 경관을 잘 유지하면 먼 미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연경관을 보기 위해 종탕 마을을 찾아올 것입니다. 방금 멍미님께서 스님이 여러분을 도우러 왔다고 설명했는데 그 말은 맞지 않습니다. 스님이 무엇을 돕겠어요? 저는 주로 부처님의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한국은 물질적으로는 잘 살지만, 정신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사람들은 ‘집이 더 크면 행복할 것이다’, ‘돈이 더 많으면 행복할 것이다’, ‘차를 사면 행복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괴로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괴로움에 빠진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속에 있는 탐진치 삼독을 버리게 되면 평안을 얻습니다.”
스님은 JTS 사업비가 한국 불자들의 보시금으로 이루어졌음을 이야기한 후 JTS 사업비를 아껴서 사용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JTS 사업의 주요 목적은 주거 환경 개선이 우선순위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JTS 사업의 대상은 주거 환경 개선이 꼭 필요한 열악한 사람임을 강조했습니다. 스님의 이야기가 끝나자 주민들이 필요한 사항을 이야기했습니다.
“저희는 지원 대상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셨지만, 종탕 마을의 주요 사업인 축산을 발전시키려면 도로포장이 꼭 필요합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을 예전에 만들었는데, 지금은 망가졌습니다.”
“여자들이 노래 부르며 문화생활을 하듯 남자들은 활쏘기를 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합니다.”
“절에 스님들의 숙소가 없습니다.”
주민들의 이야기가 끝나고 스님이 말했습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한 이야기는 JTS 지원 사업의 대상에 하나도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부터 이야기를 드렸던 겁니다. 종탕 마을에는 기본적인 생활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야기 한 절 짓는 것과 도로 건설하는 것은 모두 JTS 사업 대상에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활쏘기 시설은 더욱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생활 조건이 안 갖추어져 있다면 그것은 지원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식수가 없다면 그것은 지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주민들은 다시 스님에게 요청했습니다.
“종탕은 누비 게옥 중에 오지에 있지만 인구수는 많습니다. 예전에 한 청년이 양계장을 준비했습니다. 마을 겁(군수)도 대출금을 받도록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청년 정착 사업을 장려했습니다. 그러나 양계장을 하려면 사료도 사야 하고, 계란을 유통해야 하기 때문에 도로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종탕 마을의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결국 그 청년도 양계장을 포기하고 종탕 마을을 떠났습니다. 스님도 오시는 길에 보셨겠지만, 행사가 있으면 짐을 싣고 운반을 해야 하는데, 전부 흙길이라서 도로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시멘트로 도로를 포장하고 싶습니다.”
계속해서 주민들의 요청이 이어졌습니다.
“이곳은 높은 지대에 있다 보니 고추 농사를 한다고 해도 수확이 조금 늦습니다. 그래서 시장에 고추가 한창 많을 때에 수확이 되고 있어서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소를 키우는 사람이 많습니다. 생산한 우유를 한데 모아서 판매하려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냉장 시설을 갖추었고, 냉장시설 주변에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는 시설을 갖추는 중입니다. 그런데 지붕재가 부족합니다. 지붕재를 지원받고 싶습니다.”
스님이 다시 JTS의 사업 원칙과 계획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JTS는 3단계에 걸쳐 사업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소득 수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벼농사 방법을 바꾸거나 종자를 바꾸면 수확량이 늘어날 것인지, 못자리를 공동으로 만들어서 분배하면 일이 좀 줄어들 것인지, 농로를 어떻게 낼 것인지, 어떤 과수를 심는 것이 더 나을 것인지, 많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종탕 마을의 경우 고추를 어느 때에 어떻게 출하시켜야 가격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지 연구해야 합니다. 다른 곳과 똑같이 출하가 되면 가격이 떨어집니다. 조금 일찍 출하가 되거나 조금 늦게 출하가 되어야 제값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재배 시기를 바꾸는 방법이 있고, 창고를 지어서 보관했다가 출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제 값을 받고 판매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팔면 값도 떨어지고, 운반비도 많이 듭니다.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공동 판매를 해야 운반비도 적게 들고, 가격도 높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일차 가공해서 판매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JTS는 이렇게 세 단계를 상정하고 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지금은 첫 번째 단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1단계가 끝나야 2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소득 수준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지금 JTS 사업에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생활이 불편한 것을 개선하는 1단계입니다. 조금 편리하고 깨끗하게 살자는 것이 목적이에요.
주민들이 살 만하니, 소득을 높이는 방법을 요구하고 있네요. 그것은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스님은 종탕 마을 주민들과의 대화를 마치고, 종탕 마을 주민들을 위해 보시금을 전달했습니다. 스님이 마을 입구로 걸어 나올 때까지 주민들은 노래를 부르며 배웅했습니다. 스님은 노래를 부르며 배웅해 준 주민들에게 염주를 선물하고 가칼 마을로 이동했습니다. 12시 30분에 가칼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가칼 마을 주민들과의 대화는 가칼 마을 주민의 집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스님은 집 안에 있는 기도방을 참배하고 환영의식을 했습니다. 주민들은 농사지은 쌀과 건고추를 스님에게 공양물로 올렸습니다.
스님은 주민들과 대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집주인이 준비해 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면서 마을에서 생산되는 고추에 관해 겁(군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칼 마을은 고추 농사를 지으면 수입이 되나요?”
“누비 게옥이 고추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첫 수확물은 국왕에게 올리고, 다음 수확물부터 판매를 합니다. 가칼 마을도 고추 농사가 잘 됩니다. 그러나 과수는 잘 되지 않습니다. 예전에 사과를 시도해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점심 식사 후 스님은 주민들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JTS 프로그램은 개인이 어려운 것을 돕는 것입니다. 집이 없는 사람에게는 집을 지을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하고, 집안 환경이 열악한 사람은 집을 수리할 수 있게 재료를 지원하고, 식수가 부족한 마을에는 식수 시설을 개선하고, 농수로에 물이 유실되는 곳은 보수 공사를 합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JTS의 지원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도로를 놓아주세요’, ‘절을 고쳐주세요’ 이런 요청은 해당이 안 됩니다.
스님은 어떤 사업이 JTS의 지원 대상에 포함이 되고, 어떤 사업이 포함이 안 되는지 세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한 할머니가 집에 식수 공급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물이 없는 곳에 물을 공급하는 것은 JTS의 지원 대상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위해 1km 구간을 파이프로 연결하는 일은 지원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물을 덜 쓰는 밤 시간을 이용해서 물을 큰 통에 받아두고 써 보면 어떨까요? 시간이 지나면 정부에서 시설을 개선할 테니 그때 수도 시설을 개선하면 좋겠습니다.”
주민들의 요청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도로가 흙으로 되어 있고, 경사가 있어서 물이 흐릅니다. 그래서 차가 다니기 어렵습니다. 차가 올라갈 때 미끄러질 정도라서 시멘트로 포장을 하고 싶습니다.”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도로는 원래 JTS의 지원 대상이 아닙니다. 도로포장은 정부가 해야 할 사업입니다. 그러나 정부에 신청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정부에서 고쳐주기 전까지 임시로 수리해서 쓸 수 있는 정도로는 JTS가 지원할 수 있습니다. 일단 신청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또 다른 할머니는 자식들이 살 집이 없다며 집을 지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저는 자식이 10명이나 되는데 자식들이 직장을 다니지 않아서 다들 집을 지을 능력이 없습니다. 자식들이 살 수 있는 집을 짓고 싶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할머니는 있는 집을 고쳐서 쓰면 되지 무슨 집을 지으려고 해요?”
“제가 살아 있을 때 집을 지어 놓아야 자식들이 살 수 있습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집을 짓겠다는 것은 JTS의 지원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할머니 본인이 늙었지만 사는 동안 편리하게 살고 싶어서 집이 필요하다고 하면 지원 대상이 됩니다. 나이가 팔십이 넘은 할머니가 자식 걱정해서 요청하는 것이라면 안 됩니다. 왐링 치옥에 가보니까 자기 집을 자식들에게 내주고 본인은 집을 나와서 움막에 사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리고 JTS에 집을 지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래서 제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딸에게 집이 필요하면 딸이 와서 집을 짓고 싶다고 해야지 왜 할머니가 신경을 씁니까?”
“네, 제가 편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지원이 가능해요.”
스님은 가칼 주민들과의 미팅을 마치고, 주민들이 보시한 고추와 쌀을 다시 주민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바람이 심해지고, 입김이 나올 정도로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스님에게 따뜻한 차를 한잔하고 출발하면 좋겠다고 요청했습니다.
스님은 마을 주민들이 준비해 준 차를 마시면서 겁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겁은 스님이 마을 주민들과 대화하는 내용과 JTS의 지원 방식에 동의하며 말했습니다.
“예전에는 정부가 무조건 다 해주었지만 이제 정부도 지원을 최소로 하면서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점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오후 3시에 오늘 마지막 답사 장소인 지 치옥의 셈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셈지 마을에 있는 절에서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먼저 절을 참배하고 환영 의식을 한 후 주민들과의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JTS 프로젝트는 우리들의 생활을 개선하자는 취지입니다. 수입이 더 늘어나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지금 나의 생활 조건을 조금 더 편리하게 만드는 프로젝트입니다. 시골에 살지만 도시 사람 부럽지 않게 집을 깨끗하고 편리하게 변화시키자는 것입니다. 시골에는 노인들이 많이 사는데 다들 건강이 안 좋잖아요. 약간의 치료를 통해 조금 더 건강하게 살 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우선 집이 없는 사람에게는 집을 지어주자는 겁니다. 집은 있는데 내부 환경 개선이 필요한 사람도 개선해 주자는 겁니다. 방 안에 칸막이를 하고, 집안에 연통을 설치하고, 선반을 제작하자는 겁니다. 식수가 부족한 곳은 식수를 공급하고, 농수로가 놓여 있지만 물이 유실되고 있다면 수리하자는 것입니다.”
스님은 셈지 마을 주민들에게 JTS 사업의 목적과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귀가 잘 들리지 않고 말을 잘 못하는 할아버지가 집을 지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집을 지어주기를 요청하시는데, 지금보다 나이가 더 들면 집이 있어도 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마을 주민들 중에 할아버지를 돌봐주겠다는 사람의 집을 넓혀서 할아버지가 사는 방을 짓는 겁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방은 집주인이 가지면 됩니다. 할아버지의 방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를 도와주는 사람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젬강의 발도 치옥에 장애를 가진 노인 한 분이 계셨습니다. 먼 친척 집에 방 한 칸을 새로 짓고, 그 친척이 노인을 돌보도록 했습니다. 대신에 화장실과 응접실 등 친척 분의 집을 고쳐드렸습니다. 그렇게 하니 땅 문제도 해결이 되고, 노인이 돌아가시면 재산 문제도 저절로 해결이 됩니다.
둘째, 절 안에 할아버지가 살 수 있게 집을 짓는 겁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살도록 하면 됩니다. 절 안에 방을 3칸 정도 지어서 혼자 사는 노인들이 그곳에서 살다가 돌아가시도록 해드리는 겁니다. 마을 사람들이 절에 올 때마다 절에 사는 노인들에게 음식을 갖다 드리고, 불전에 올라갔던 음식들도 노인들이 드시도록 챙겨드리면 됩니다. 물론 절에서 살고 싶지 않고 혼자 살겠다는 노인들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마을 주민이 말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집에서 사는 것은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합니다. 혼자 살 수 있는 집을 지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마을 주민들이 의논해서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수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지 촉바와 마을 사람들이 의논해서 하시기 바랍니다.”
할아버지는 귀가 안 들려서 말을 잘 못하는 분이셨습니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주민 한 분이 수화로 할아버지와 스님과의 대화를 도와주었습니다. 마지막에 집을 지을 수 있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스님에게 합장하고 반배를 했습니다.
스님은 다시 한번 JTS 사업 내용과 목적을 설명하고 주민들과의 대화를 마무리했습니다.
“집 없는 사람에게 집 지어주기, 집안이 허술한 사람은 집안을 고쳐주기, 밭에 울타리 치기, 식수 파이프 연결하기, 농수로 보완하기, 이런 일들을 함께 힘을 모아서 해봅시다. 그래서 내가 사는 마을을 조금 더 살기 편하도록 만듭시다.”
오늘 계획했던 답사를 모두 마치고 스님은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5시 10분에 숙소에 도착한 후 스님은 부주지사와 행정관에게 셈지 마을의 집 없는 장애인 할아버지를 제도적으로 챙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며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원고를 교정한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두 개 마을을 방문하고, 저녁에는 트롱사 공무원들과 그동안의 답사 내용을 정리하는 미팅을 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달에 열린 즉문즉설 강연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어떻게 하면 자존감을 높일 수 있을까요?
“저는 최근에 행복해지려면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존감의 정확한 의미도 잘 이해하지 못하겠고, 그 범위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상사한테 심하게 잔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괜찮은 사람이니까 저 사람이 뭐라고 해도 아무 문제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존감을 높이는 건가요? 제 주변에는 큰 실수를 했다거나 어떤 죄를 지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니까 남들이 비난하든 말든 괜찮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존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자존감인지 궁금합니다.”
“보통 ‘진정한’ 이런 말이 붙으면 대부분 거짓말이에요. ‘진정한’ 이런 말을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사실을 말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을 알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착각을 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컵이 있고, 컵받침이 있고, 시계가 있습니다. 이 컵과 비교했을 때 이 컵받침은 컵보다 커요, 작아요?”
“작습니다.”
“그럼 이 시계하고 비교할 때 이 컵받침은 시계보다 커요, 작아요?”
“큽니다.”
“질문자는 이 컵받침은 한 번은 크다고 했고, 한 번은 작다고 했어요. 그러면 이 컵받침은 큰 거예요, 작은 거예요?”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이게 큰지 작은지 몰라요?” (웃음)
“작은 것 같습니다.”
“이게 크냐 작으냐 하고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작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크다고 합니다. 크다고 말하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크다는 것을 내가 인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작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게 객관적으로 작아서 내가 작다고 인지했다고 생각해요. 둘 다 자신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어떻게 저 사람은 작은 걸 크다고 말하는 거야?’, ‘어떻게 저 사람은 큰 걸 작다고 말해?’ 이렇게 서로 싸우듯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맞으니 틀리니, 크니 작으니 하면서 갈등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관찰하면 이 컵받침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에요. 다만 그것일 뿐이에요. 크다, 작다는 것은 이 컵받침에서 오는 게 아니고, 인식 기관이 인식을 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 컵받침이 컵과 같이 있을 때는 작다고 인식하고, 시계와 비교할 때는 크다고 인식을 하는 겁니다. 인식을 할 때 ‘이게 크기 때문에 크다’, ‘이게 작기 때문에 작다’ 이렇게 착각하는 거예요. ‘크다’, ‘작다’ 하고 말할 때는 그 존재가 객관적으로 크고 작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합니다. 옳으니 그르니, 맞으니 틀리니, 싸니 비싸니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그렇게 존재하는 게 아니고 인식 상에서 생겨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은 크다고 하고, 한 사람은 작다고 한다면, 누가 맞느냐가 아니고 두 사람의 인식이 다른 거예요. 한 사람은 신이 있다고 하고, 한 사람은 신이 없다고 할 때, ‘누구 말이 맞느냐’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두 사람의 믿음이 다를 뿐이에요.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 보느냐에 따라 똑같은 걸 두고도 비싸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싸다고 하는 사람도 있게 되는 겁니다. ‘이 물건은 새것이네’ 하는 사람도 있고, ‘이 물건은 헌것이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인식 상의 문제입니다.
그럼 존재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존재는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존재는 아름답거나 추한 것도 없고, 크거나 작은 것도 없고, 잘하고 못 하는 것도 없어요. 존재는 존재일 뿐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공(空)’이라고 합니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공하다’라고 표현하는데, 이 공하다는 말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근본불교에서는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그 존재에 크거나 작거나 하는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존재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더러움과 깨끗함도 없고, 크고 작은 것도 없습니다. 그냥 존재일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인식할 때는 이것을 크다고 인식할 때도 있고, 작다고 인식할 때도 있어요. 값이 비싸다고 인식할 때도 있고, 값이 싸다고 인식할 때도 있어요. 깨끗하다고 인식할 때도 있고, 더럽다고 인식할 때도 있어요. 이렇게 수만 가지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무엇도 아니지만 그 무엇도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존재의 본질입니다.
내가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열등하다는 것은 인식 상의 문제예요. 누구와 비교해서 그렇게 인식이 된 것입니다. 반에서 5등 하는 아이가 ‘나는 공부 잘한다’ 하고 생각한다면 그건 10등 하는 아이와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공부 못 한다’ 하고 생각한다면 그건 1등 하는 아이와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돈이 하나도 없을 때 만나는 친구는 좀 잘 산다 해도 1억 정도를 가진 수준이에요. 그때 내 꿈은 나도 1억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겠죠. 그런데 1억의 돈을 갖게 된다고 끝이 날까요? 안 끝나요. 1억쯤 가지게 되면 내가 만나는 사람 중에 10억 가진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럼 그 사람이 다시 비교 대상이 됩니다. 그럼 나도 10억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1억이 있을 때는 100억 가진 사람이나 1000억 가진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고, 아예 만날 생각조차 못 했는데, 10억을 가지게 되면 100억 가진 사람을 소개받거나 우연히 만나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끝이 나지 않습니다.
나이가 60이 되면 이제 뭘 새로 시작하기에는 늙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70이나 80이 넘는 사람을 만나면, 저보고 ‘아직 한창이네’ 하고 말합니다. 제가 교류하는 사회 원로들은 나이가 저보다 많아도 늘 친구처럼 지내요. 그러다가 가끔 ‘법륜스님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돼요?’ 하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70입니다’ 하고 대답하면 ‘아이고, 아직 한창이네’ 하고 말합니다. 이렇게 본래 나이가 많다 적다 할 것이 없습니다. 제가 동남아시아에서는 엄청나게 신비화되어 있어요. 동남아시아 스님들은 옛날 우리들처럼 나이 60만 되어도 노장 대우를 받고, 옆에서 행자들이 부축을 하고 다니는데, 나이 70이 된 제가 막 뛰어다니니 대단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전부 비교에서 나온 인식 상의 문제입니다. 인식 상의 문제로 인해 우리는 ‘내가 열등하다’, ‘내가 우월하다’, ‘내가 잘났다’, ‘내가 못났다’ 하는 허상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겁니다. 열등하다는 허상만이 나에게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잘났다고 하는 우월감도 굉장한 고통을 가지고 옵니다.
나는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모든 존재가 다만 그것일 뿐이에요. 이것을 자각하면 남이 크다고 하든, 작다고 하든, 깨끗하다고 하든, 더럽다고 하든, 그냥 ‘저 사람의 인식이 그렇구나’ 하게 됩니다. 과거의 습관으로 인해 처음에는 약간 기분이 나쁠 수가 있지만 지나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게 돼요. 이렇게 자기 존재에 대해 긍정성을 갖는 것이 자존감입니다.
모든 존재에 대해서 서로 다르다고 하는 관점으로 봐야지 옳고 그름의 관점으로 보면 안 돼요. 이것을 두고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의 믿음이 서로 다르고, 생각이 서로 다르고, 가치관이 서로 다르고,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겁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만이 사실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식하면 화날 일이 없어요. 서로 다름을 인정할 수 있으면 그다음은 어떻게 할지 조율을 하면 됩니다. 조율하는 방법 중에 제일 쉬운 방법이 상대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네 말대로 하자’ 하고 내가 입장을 정리하면 끝입니다.
예를 들어, 방 안의 온도 조절을 해야 하는데, 아내는 춥다고 하고, 남편은 덥다고 합니다. 이때 내가 상대에게 맞추는 게 제일 쉽습니다. 왜냐하면 상대와 의논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 네 말대로 하자’ 하고 말한 후 나는 더우면 옷을 벗으면 됩니다. 두 번째 방법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방법이 있어요. 그런데 이 방법이 가장 어렵습니다. 상대가 쉽게 동의를 안 해줘요. 제일 쉬운 것이 내가 맞추는 것이고, 제일 어려운 것이 상대가 나에게 맞추도록 하는 것입니다. 보통 힘이 있거나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아야 상대가 나에게 강제로 맞추도록 할 수가 있죠. 세 번째 방법이 합의하는 겁니다. 방 안의 온도를 중간으로 맞추자고 서로 합의를 하는 거예요. 보통은 이렇게 합의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요.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도 한 방법이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도 한 방법이고, 두 사람이 조율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이 세 가지가 다 안 되면, 각자 따로 자는 방법도 있어요. 이렇게 하나의 해결책이 아니라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신을 믿지만 상대는 신을 믿지 않는다면, 상대는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을 믿지 않을 뿐이에요. 신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신을 안 믿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존중이라고 합니다. 상대를 존중하라는 말은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라는 의미예요.
둘째, ‘상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겠다’ 이렇게 상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겁니다. 반대로 그것을 안 믿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이에요. 내가 좋다고 상대를 껴안으면 성추행이 되잖아요. 물론 본인은 변명거리가 있어요. ‘내가 너를 때렸니?’, ‘내가 너의 물건을 훔쳤니?’, ‘난 너를 좋아한 죄밖에 더 있니?’ 이런 태도는 상대를 이해하지 않고 자기 식대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것은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야’라며 자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이해를 하게 되면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내버려 두라는 말은 아닙니다. 아이를 이해하게 되면 아이에게 ‘내 생각에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고 얘기해 줄 수가 있게 됩니다. 평화의 바탕은 인정과 이해입니다. 인정과 이해 없는 사랑은 다 허구입니다. 자신의 욕망대로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먼저 자기 존재에 대한 열등감과 우월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이 자신에게 인물이 잘생겼다고 하면 우월감을 갖게 되고,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다고 하면 어깨에 힘을 주게 됩니다. 그러다가 돈을 잃어버리거나 지위가 떨어지면 한풀 꺾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 나를 삼지 않으면, 그런 것들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이에요. 이것이 자신을 지켜나가는 방법입니다.
만약 내가 돈이 100만 원이 있어서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러나 이 100만 원으로 배고픈 아이들 100명에게 밥을 사주게 되면 아이들이 먹는 것만 봐도 기분이 좋습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훌륭할까?’ 이렇게 접근하면 안 됩니다. 둘 다 자기 선택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어떤 선택이 자기 존재에 대해 뿌듯함을 느끼게 해 줄까요? 후자가 더 뿌듯합니다. 세상의 필요한 일에 내가 쓰일 때 나의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내가 누구에게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하고 구걸해서 뭔가를 얻으면, 그때 잠깐은 기쁘지만 나에게 준 사람 앞에서는 항상 기를 펴지 못해요. 여러분들은 늘 이해받고 사랑받으며 도움 받기를 좋아하잖아요. 그러니 항상 심리가 비굴해집니다. 여러분들이 늘 누구를 만나든 조금씩이라도 베풀고, 상대를 이해하고 도와주면, 육체적으로는 약간 힘들지 몰라도 나의 존재가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자존감이 올라갑니다.
우리가 방을 빗자루로 쓸다가 더 이상 빗자루로 방이 잘 쓸리지 않으면 ‘빗자루의 명이 다 됐다’ 하고 버리잖아요. 사람은 쓸모가 있어야 됩니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쓸모가 있어야 해요. 아내가 남편이 필요해서 쓰려고 하는데 안 쓰이면 어떻게 해요? 빗자루를 버리듯이 버려야 해요. 남편이 아내를 쓰려고 하는데 아내가 안 쓰이면 버리게 됩니다. 육체적 생명은 육체가 죽고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사회적 생명은 쓸모가 있을 때 생명이 있다고 하고, 쓸모가 없으면 생명이 다 됐다고 합니다. 쓸모가 있을 때 자존감이 생기고, 쓸모가 없으면 자존감이 없어지는 거예요. 자존감이 높아지려면 구걸하는 인생을 살지 마세요. 받을 때는 약간 기분이 좋지만, 구걸하면 늘 심리가 위축이 됩니다.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인 삶을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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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
감사합니다.
2025-02-18 20:41:27
임영현
자신에게 인식된 것을 가지고 논한 것에 대해서 참회합니다. 존재의 본질이 공하다는 말씀이 오늘에는 더 깊이 와 닿았습니다. 평화의 바탕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과 상대의 입장에사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씀 또한 마음의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끝으로 육체적 생명과 사회적 생명에 대한 말씀도 깊이 공감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