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01.23. 인도성지순례 13일째_회향식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발성입니다”

안녕하세요. 인도성지순례 13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쉬라바스티를 떠나 상카시아로 가서 상카시아 탑터를 순례하고, 제34차 성지순례 회향식을 했습니다.

순례단은 새벽 1시 50분에 일어나 짐을 싣고, 2시 30분에 상카시아로 출발했습니다. 차 안에서 함께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치고 단잠이 들었습니다. 푹 자고 난 후 오전 8시부터는 스님의 제안으로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성지순례 막바지이니 차량별로 소감을 나누겠습니다. 소감은 1~2분 정도로 간단히 말해 주세요. 노래를 하고 싶은 분은 한 곡 불러도 좋습니다.”

한 참가자는 성지순례를 계기로 마음의 변화를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정토회 활동을 계속할지 고민하던 중 성지순례에 참여했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까지는 좋았지만 이후에 ‘나는 정토회와 맞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차량에 담당 법사님이 계셔서 성지순례를 마친 후 활동을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에는 호텔에서 자면서 다니는 성지순례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영축산에서 예쁘게 입고 꾸민 보살님이 스님을 알아보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제 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그분들이었다면 정토회 순례단이 부러웠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어 정토회 활동을 더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일본에서 온 참가자는 성지순례에 참가하게 된 이유와 깨달음을 나누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3년 전 관세음보살 같던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이 떠난 후 저는 행복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불행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법륜스님의 유튜브를 통해 ‘신랑이 죽은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는 법문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성지순례에 참여하기 위해 정토불교대학에서 불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배움의 과정은 새로움과 감동의 연속이었고, 지금은 산나물과 채소를 판매한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통해 ‘남을 돕는 것이 내가 행복해지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스님의 제자답게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모자이크 붓다가 되어 세상에 잘 쓰이는 삶을 살겠습니다. 내년에 또 성지순례에 오기 위해 올해도 열심히 일하고, 그 수익으로 수자타 아카데미에 기부하겠습니다.”

소감 나누기가 이어지는 동안, 수신기를 통해 도반들의 경험과 깨달음을 들으며 모두가 웃고 울며 감동했습니다. 한참 소감을 나누다 보니 어느덧 상카시아 담마 센터에 도착했습니다.

담마 센터에서 도시락으로 아침 공양을 한 후 오전 10시에 상카시아 탑터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은 상카시아 탑터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마지막 순례 날입니다. 마지막인 만큼 가사도 단정히 입고, 예불을 정성껏 드려봅시다.”

“네!”

순례단은 가사를 단정히 수하고 탑돌이를 한 후 탑을 향해 서서 정성스레 예불을 드렸습니다.

잠시 명상을 한 후 스님이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오늘로써 순례의 긴 여정이 마무리됩니다. 물론 한국에 도착하려면 이틀이 더 남았지만, 순례자로서의 일정은 오늘까지입니다. 여러분이 가사를 벗는 것이 아쉬운지, 아니면 속이 시원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웃음) 하지만 오늘까지 우리는 각자의 지위를 내려놓고 순례자로서 함께 걸어왔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중고등학생도 이렇게 줄 세워서 다니라고 하면 못 견딜 거예요. 심지어 군대도 우리만큼 줄을 잘 맞추지는 못할 겁니다. (웃음) 하지만 단체 생활을 하면서 ‘내가 나이가 많다’, ‘사회에서 한자리했다’, ‘돈이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마음에 걸림이 생기고 불편함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대중 속에 섞여 앉아 있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비흡연자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은 쉽지만, 흡연자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렵듯이, 일반 사람들에게 대중 속에 있는 것이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돈이나 지위, 명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대중 속에서 흔적 없이 섞여 있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저에게 ‘스님, 깨달음의장을 호텔에서 하면 안 될까요? 제 주변에도 깨달음의장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만, 문경수련원에서 자고 먹는 것이 도저히 어렵다고 합니다. 좀 편안한 호텔 같은 곳에서 한다면 참가비는 많이 내도 좋다고 합니다. 또 성지순례도 가고 싶지만, 그런 생활은 도저히 힘들 것 같아 못 간답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법문도 몇몇 사람만 따로 모아서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옵니다.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조금만 특별 관리를 해주시면 스님이 사회적으로 더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정토회가 재정적, 사회적 활동 면에서 크게 발전할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묻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방법도 있을 수 있지만,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자신의 업(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그런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좋은 곳에 간다’는 말은 고인을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방법은 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며칠간의 단체 생활은 나도 하고 너도 하는 일이기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각자의 사정을 생각하면, 힘들어도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참여했으니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도망갈 수 없어서 여기 있었던 분들도 계시겠지만요. (웃음) 어쨌든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이번 순례는 한 분이 부상을 입고 한국으로 먼저 돌아가신 것을 제외하면 큰 문제없이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국경을 넘는 일도 예년보다 빨랐고, 버스 기사님들도 알아서 잘 협조해 주셔서 신경 쓸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여러분 덕분입니다. 법륜 스님 공덕이라면 스님이 올 때마다 이렇게 되어야 하잖아요. (웃음) 여러분과 함께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 여러분 공덕입니다. 고맙습니다."

스님은 상카시아에 얽힌 설화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경전을 독송한 후 발원문을 낭독했습니다.

“우리 부처님, 진리로 오고 진리로 가신 분,
응당히 공양받을 자격이 있으신 분,
일체 법을 두루 아시는 분,
지혜와 실천이 구족하신 분,
여실히 저 언덕을 건너가시는 분,
세상의 온갖 일을 다 아시는 분,
세상에서 제일 뛰어나신 분,
일체중생을 두루 제어하시는 분,
인간과 천신의 스승이신 분,
일체 법을 깨달으신 분,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으시는 분,
샤키야족 출신의 성자,
그분을 찬탄하고 공경하며
그분께 공양하고 예배하오며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발원하오며
목숨 마쳐 돌아가 의지하나이다......(중략)”

발원문 낭독을 마친 후, 스님과 순례단은 회향식을 하기 위해 상카시아 담마 센터로 이동했습니다. 이동하는 길에 스님은 상카시아 탑터에 머물며 수행하는 스님들에게 보시금을 전달하고, 아이들에게는 과자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담마 센터에 도착하니 석가족이 순례단을 환영하기 위해 꽃목걸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앞장서서 입장하자 행사에 참여한 석가족들이 스님에게 꽃목걸이를 걸어드리고, 꽃잎을 뿌려주었습니다.

순례단도 꽃목걸이를 하나씩 받고, 환한 얼굴로 담마 센터 안으로 걸어갔습니다.

순례단이 모두 자리에 앉자 석가족 학생들이 준비한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큰 스님이 방문하면 모든 참석자가 꽃목걸이를 걸어드리는 것이 인사라고 합니다. 스님은 처음에는 석가족 대표에게만 꽃목걸이를 받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한 사람씩 각각 드려야 한다고 해서 스님은 몇 해 전부터 모든 석가족에게 꽃목걸이를 받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공연을 하는 중간에도 석가족이 찾아와 스님에게 꽃목걸이를 하나씩 걸어주었습니다. 여성들은 꽃을 한 주먹씩 스님께 전하기도 했습니다. 환영식이 끝난 후, 스님 주위는 꽃으로 가득했습니다.

환영식에 이어서 스님이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상카시아에 담마 센터를 짓게 된 연유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곳은 상카시아입니다. 제가 이곳에 처음 성지순례를 왔을 때는 석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상카시아 탑만 참배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이후에도 몇 번 더 성지순례를 했지만 석가족과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수자타 아카데미를 짓기 시작하면서 답사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바이샬리에 들렀습니다. 바이샬리 유적지에 대해 물어보며 다녔는데 정작 바이샬리에 사는 사람들이 유적지에 대해 잘 모르더라고요. 그런데 한 청년이 아는 척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신이 나란다 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넌 어디에 사니?’ 하고 물었죠. 그러자 그 청년이 이곳 상카시아에 사는 석가족이라는 거예요. 아무튼 이렇게 인연이 되어 처음으로 상카시아에 오게 되었습니다.

상카시아 석가족 청년들과의 첫 만남

그 후 성지순례를 할 때 다시 상카시아를 방문하여 석가족 청년들을 모아 놓고 법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꽤 많이 모였어요. 그 자리에서 제가 말했습니다.

‘부처님의 법이 인도에서는 거의 사라졌는데, 이를 다시 복원하려면 누군가 헌신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왕자로만 계셨다면 불법(佛法)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부처님이 출가하셨기에 불교가 시작된 것처럼, 인도의 불교가 다시 부흥하려면 여러분들 중 누군가 출가할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윤회를 믿고 있습니다. 수없는 생을 거듭하는 중에 한생쯤은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딱 한생만 출가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제가 지원해 줄 테니 인도 불교를 다시 일으키는 초석이 되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육신만 석가족이지 불법을 모르지 않습니까? 저는 한국 사람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승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진짜 더 석가족입니다. 진짜 석가족이 되려면 불법을 알아야 하고, 한생을 바쳐서 이 일에 매진할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사람은 손들어보세요.’

제가 이렇게 말했더니 석가족 청년들 중 19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가지 일을 시작했습니다. 첫째, 수자타 아카데미 운영을 석가족 청년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때 마침 수자타 아카데미를 운영할 선생님이 부족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석가족 청년들에게 수자타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선생님 역할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석가족 청년들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들이 수자타 아카데미에 머물면서 초기 학교 건축과 운영을 맡아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둥게스와리 동네에서는 선생님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석가족 청년들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작은 절을 하나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땅은 있느냐고 물었더니 돈이 없어 땅도 못 샀다고 해서 땅을 살 수 있는 돈을 먼저 지원해 주었고, 땅을 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땅을 인도인 스님 명의로 샀는데 그 스님이 땅을 자기 소유라고 주장해서 분쟁이 발생하게 되어 절을 짓지 못했습니다. 그 사건을 겪은 뒤 돈을 잘못 지원하면 싸움이 날 수 있겠구나 싶어서 그 후에는 지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카시아에는 많은 석가족 불교인들이 살고 있고, 이들의 꿈은 그들에게 불교를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수계를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인도 법에 따르면 외국인이 와서 수계를 하면 불법적인 종교 활동이 되어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계는 인도인 스님 이름으로 하도록 했습니다.

탑을 새로 지어줄 테니 더 이상 싸우지 마세요

그러다가 어느 해 큰 행사가 있다고 저를 초대했습니다. 부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날인데, 만 명 이상 모이는 날이었습니다. 상카시아 탑의 꼭대기에 올라가면 아주 작은 힌두 템플이 있습니다. 브라만이 세워서 운영하고 있는 절인데, 이 상카시아 탑이 불교 탑이라는 게 세상에 알려지고 나서 브라만과 불자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어요. 석가족들이 불교신자가 되면서 이 탑은 불교의 탑이라고 주장하고, 브라만은 대대로 자신들이 관리해 온 탑이라고 하면서 맞섰습니다. 갈등이 심해지자 경찰까지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청년들을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평생토록 평화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런데 후손들이 벽돌 더미를 두고 ‘내 것이냐, 네 것이냐?’ 하며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불교의 정신에 맞지 않습니다. 제가 탑을 새로 지어줄 테니 더 이상 싸우지 마세요.’

이렇게 약속을 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제가 탑을 세워줘야 합니다. 그래서 이곳 땅을 사게 된 거예요. 현재 이곳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과 오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오픈 강당을 지으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입구 쪽에는 부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형상을 상징하는 큰 탑과 계단도 만들 예정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불사를 하기 위한 조건을 석가족 청년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모은 금액만큼 제가 똑같이 지원하겠습니다. 백만 원을 모으면 백만 원을, 천만 원을 모으면 천만 원을, 1억을 모으면 1억을 지원하겠습니다.’

그 제안에 모두 좋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옆에 동행하고 있던 분이 저보고 ‘석가족들이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고 말하는 거예요. 그분 말대로 도저히 진척이 안 되었습니다. 상카시아 석가족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여력이 없는 데다, 구심점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중심이 되어야만 불사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이곳에 와서 중심을 잡고 있으면 석가족들 중 많은 사람이 보시할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부를 하려고 해도 신뢰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보시를 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석가족들이 확실하게 믿을 수 있게 땅부터 샀어요. 땅을 사 놓으면 믿고 하지 않겠나 싶었는데, 그래도 진척이 없었습니다. 불법(佛法)이라는 것이 건물이 있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제가 인도에 와서 배운 것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기로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벌써 30년이 지났습니다. (웃음)

그러던 중에 저한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생겼습니다. 석가족 청년들을 불법(佛法)에 귀의하게 한 스리랑카 출신의 마하보디 소사이어티 부회장 스님이 계셨습니다. 석가족 청년들이 이 스님을 모시면서 불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님의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제가 스님께 약속을 드렸습니다.

‘스님께서 씨를 뿌리셨으니, 제가 꽃이 피도록 해보겠습니다. 스님 돌아가시기 전에 반드시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스님께서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스님이 살아 계실 때 ‘스리랑카를 떠나 인도에 와서 한평생 전법을 한 것이 헛된 일이 아니었구나’ 이렇게 느끼고 돌아가셨으면 한이 덜 됐을 텐데, 그 일을 못 해드린 게 아쉽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계속 기다릴 수는 없어서 한국에서 정토회 실무자를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일단 우리가 먼저 상카시아 불사를 시작하기로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가난한 사람들의 교육, 의료, 마을 개발에 집중했다면, 이 프로젝트는 인도에서 불법을 새로 일으키기 위한 미래의 초석을 만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 불교를 일으키기 위한 새로운 출발

상카시아 석가족들은 거의 자작농입니다. 고등학교는 대부분 졸업했고, 일부는 대학도 나왔습니다. 조사를 해보니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인도 전체 사회에서 중산층 정도의 계급과 경제 수준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에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는 둥게스와리는 다섯 세대는 내려가야 모든 천민의 카르마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깨달음을 통해 극복하면 단박에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상카시아는 그보다 쉽습니다. 두 세대만 지나도 인도 사회의 리더로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초등학교보다는 불교를 가르치는 동시에 기술도 함께 가르칠 수 있는 인터 칼리지(inter-college)나 대학 같은 교육 기관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학교 부지도 이미 구입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족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이곳에 와서 봉사를 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인도의 경제가 활성화되고 있어서 여기서도 후원자를 구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상카시아 불사가 30년째 멈춰 있긴 하지만 뿌리를 내리는 데 30년이나 걸렸으니까 앞으로는 금방 자랄 겁니다. 그래서 이곳 상카시아는 미래 불교 전파의 초석이 될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회향식을 진행했습니다. 순례단은 삼귀의와 반야심경, 청법가로 스님께 회향 법문을 청했습니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진행한 인도성지순례를 오늘 이렇게 잘 마치게 됐습니다. 요즘같이 바쁜 시대에 여러분께서는 많은 시간을 내고, 많은 돈을 들이고, 또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이 경험이 여러분들의 인생살이에 큰 공덕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열악한 조건에서 순례를 했기 때문에 얻게 되는 것들

인도 사회는 우리와 문화도 많이 다르고, 발전 정도도 달라서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여러 가지로 볼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본에 가서 열흘을 머물든지,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열흘을 머문다고 할 때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유적지만 몇 가지 볼 수 있고 말이 좀 다를 뿐 사실은 식당에 가든 호텔에 가든 길거리도 우리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인도는 발전 속도가 달라서 옛날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것도 많고, 문화 차이로 인해 외부적으로도 볼 것이 참 많습니다.

또 우리의 마음은 경계에 따라 늘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바깥에서 보는 것 이상으로 내 마음의 변화도 많이 일어납니다. 특히 환경이 어려우면 우리 마음은 평소에는 덮어놨던 것들이나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나도 모르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친구가 의리가 있는지, 사업하는 동업자가 신용이 있는지, 사랑하는 사람이 진심인지, 이런 걸 알려면 어려움에 처해 봐야 합니다. 좋을 때는 잘 몰라요. 어려움에 처해 보면 신뢰할 만한지 알게 됩니다.

부처님의 위대함을 알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려움에 처하셨을 때 그분의 여여함이 우리에게 큰 감동이 되고, 또 당시의 세상 사람들에게도 큰 감동이었을 거예요. 상황이 좋을 때는 모두 다 좋은 마음을 냅니다. 하지만 어려움에 처하면 좋은 마음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가난할 때 보시하기가 어렵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또 참는 데도 한도가 있습니다. 그 한도를 넘어서면 해탈을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어려움이 세 번만 닥치면 장벽을 못 넘습니다. 그래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이게 세 번이나!’ 이러면서 마침내 화를 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참는 데는 한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성지순례를 하는 여건이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게 열악하다고 할 것도 없지만,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삶과 비교하면 열악한 편이에요. 도로도 열악하고, 먹는 것도 열악하고, 잠자리도 열악하죠. ‘육십이 넘어 이 나이에 내가 줄을 서서 기다려야 되겠나?’, ‘이 나이에 내가 야단을 맞아야 되겠나?’ 이렇게 여러 가지 분별심을 일으킬 만한 상황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래도 평소에 믿고 존경했던 법륜스님이니까 여러분들이 이 정도만 불평하고 넘어갔지 사실은 어려운 순례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마음속에서 성질이 올라오는 거예요. 어려움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숨어있던 카르마가 솟아납니다. 그럴 때 한 마음 돌이키면 이런 어려움이 아무것도 아닌데, 돌이켜지지 않으면 철천지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지순례라도 그렇지, 이렇게 하는 게 말이 되나?’ 이러면서 집에 돌아가서도 계속 그 생각을 붙들고 있어요. 그러면 불평불만이 확대 재생산이 됩니다. ‘아무리 법륜스님이라도 이런 생활은 학대라고 할 수 있으니 고발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웃음)

하지만 이것도 지나 놓고 보면 별일 아니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 사로잡혀서 기분이 나빠도 시간이 지나면 ‘내가 그때 너무 사로잡혔었구나!’ 이렇게 자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원한이 맺힐 정도가 되면 그것은 ‘편집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순례를 한 지 보름이 지났으니까 대부분은 기분 나쁜 감정이 다 풀렸을 거예요. 설령 안 풀려도 한국 가서 또 며칠 살아보면 ‘내가 인도까지 가서 내 습관을 너무 고집했구나’ 이렇게 반성이 됩니다. 하지만 일주일 지나고 열흘이 지났는데도 안 풀리면 ‘혹시 내가 편집증은 아닌가’ 이렇게 한번 진단을 받아보시면 좋겠습니다.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발성입니다

그럼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절로 기분 나쁜 감정이 풀리게 될까요? 그것은 자발성 때문에 그래요. 아마 회사일로 이렇게 순례를 다녀오라고 했다면 쉽게 안 풀렸을 겁니다. 정신질환이 있거나 누군가가 억지로 보내서 온 사람은 잘 안 풀립니다. 만일 아내가 성지순례를 억지로 보냈다면 ‘한국 가면 아내를 혼내줘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고, 만일 부모가 억지로 보냈다면 ‘아무리 부모라도 이걸 좋다고 나보고 가라고 했나?’ 이러면서 이를 갈 겁니다. 군대, 회사, 이런 곳에서는 사로잡힌 마음이 잘 안 풀리는 이유가 자발적이지 않고 강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처가 되기가 쉬워요. 명상 수련에 참가해도 엄청나게 고통스럽잖아요? 그래도 끝나고 나면 다 풀리는 이유는 자발적으로 참가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대부분 처음에는 다시는 인도에 오기 싫다고 하겠지만 한국으로 돌아가서 좀 있으면 슬슬 인도가 그립기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발성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발성입니다. 부처님도 6년 고행을 자기가 선택해서 했으니까 그렇지 그런 고행을 누가 강제로 시켰다면 요즘 법률을 적용할 경우 학대에 해당할 거예요. 설령 자발적으로 하더라도 막상 어려움에 처하면 마음이 확 사로잡힙니다. 대신에 풀릴 때 쉽게 풀리죠. 그러나 자발적이지 않을 때는 꽁한 마음이 오래갑니다.

마지막으로 성지순례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얻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돌이켜 보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은 어떤 기적을 일으켜서 위대하신 분이라기보다는 인간적으로 정말 신뢰할 만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나요? 최소한 사람들에게 어떤 거짓말을 해서 돈을 뜯거나, 사기를 치려고 했다거나,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죠?”

“네”

“부처님의 행적을 살펴보면 지금 당장 부처님을 믿고 따르지는 않더라도 ‘이분이 참 신뢰할 만한 분이구나’ 이런 생각은 여러분 모두 가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너무 열렬하게 믿을 것까지는 없어요. 그런 믿음이 생겨도 괜찮고, 안 생겨도 괜찮아요. 하지만 적어도 부처님은 신뢰할 만한 분이고, 우리에게 손해를 끼칠 분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이곳에서 체험한 부처님의 말씀이나 인격이 앞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데 기반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동을 느꼈든 느끼지 않았든 모두 순례를 잘했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늘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처음도 좋고, 끝도 좋고, 오늘도 좋고, 내일도 좋은 길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고생은 했지만 고생을 통해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또 고생한 결과로 절약한 돈은 이곳 가난한 아이들에게 밥이 되고 책이 되고 노트가 되었습니다. 나는 희생하고 다른 사람한테만 좋은 것도 아니고, 반대로 나만 좋고 다른 사람에게는 희생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함께 좋은 것이 부처님의 법입니다. 그런 성지순례가 되었길 바랍니다.

감동을 느낀 사람은 감동을 느껴서 좋고, 별 감흥이 없고 밍밍한 사람은 밍밍해서 좋은 겁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 가서 일상으로 돌아가 보면 밍밍한 게 더 오래갑니다. 천천히 그 효과가 나타나요. 여기서 막 눈물이 나고 감동적이었던 것은 한국에 도착하는 즉시 없어져 버려서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아요. 한마디로 이러나저러나 모두 순례를 잘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너무 감동적이었다는데 나는 감동이 없다’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회향식을 하는 것을 끝으로 모든 생각을 다 내려놓고, 건강한 모습으로 한국에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법문이 끝나고 가사와 발우를 반납했습니다.

“자, 가사를 잘 접어 손에 들고 그 위에 발우를 올리세요. 무릎을 꿇고 일어나서 가사와 발우를 들고, ‘가사와 발우를 반납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머리 위로 올리면 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순례단이 가사와 발우를 머리 위로 올리며 말했습니다.

“가사와 발우를 반납하겠습니다.”

“잘 받았습니다.”

순례단이 ‘잘 받았습니다’라는 말까지 따라 하자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가사와 발우는 제가 받아야죠. 왜 여러분이 받으세요?” (웃음)

엄숙했던 반납식은 순식간에 웃음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이어서 15박 16일 동안 순례단을 위해 헌신했던 인솔 법사, 차장, 조장, 스태프들, 그리고 의료 봉사자들을 소개했습니다. 순례단은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안전하게 운전해 준 버스 기사님들께도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사홍서원을 끝으로 제34차 성지순례의 회향식을 완전히 마쳤습니다.

스님은 행사에 참여한 석가족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한 분은 70km나 떨어진 곳에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이후 석가족들이 스님과의 기념사진 촬영을 요청하여 행사장에 남아 있던 모든 석가족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녁 예불 후, 스님은 스태프들과 성지순례 평가 회의를 했습니다. 행사팀, 숙소팀, 물품팀 등 각 팀의 개선점을 하나하나 짚어 준 후 성지순례를 위해 애쓴 스태프들의 노고를 격려했습니다.

회의를 마친 후 스님은 숙소에서 원고를 교정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순례단과 함께 델리로 이동해 박물관을 안내하고, 즉문즉설 방송을 한 후 델리에 거주하는 교민을 위해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2025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50

0/200

김종근

감사합니다

2025-02-03 07:20:30

최상훈

고맙습니다 ^^

2025-02-01 17:30:29

최인자

감사합니디ㅡ. 작년 인도성지순롕에 참여했던 감동들이 새록새록 밀려옵니다. 열악한 환경과 힘들었던 것들이 쌓여 거의 마지막에는 폭발해 버리고 말았는데 나의 참을성이 거기까지구나 다시 알아 씁쓸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2025-01-30 12:20:12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