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01.22. 인도성지순례 12일째_기원정사
“붓다는 종교의식을 부정한 것 같은데, 왜 우리는 종교의식을 하나요?”

안녕하세요. 인도성지순례 12일째입니다. 오늘은 쉬라바스티에서 수행법회 생방송을 하고, 수닷타장자 탑터, 앙굴리말라 탑터, 기원정사를 참배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치고 현지 시각 6시 30분에 수행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회원들이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자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새해가 되고 벌써 1월 하순으로 넘어갑니다. 지난번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법회를 한 이후 라즈기르(Rajigir)를 거쳐서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리고, 또 여성이 처음으로 출가한 곳인 바이샬리(Vaishali)를 지나서 부처님이 열반하신 쿠시나가르(Kushinagar)를 거쳐 네팔로 넘어갔습니다. 네팔에서 랑그람 진신 사리탑과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Lumbini) 그리고 성장하신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를 순례하고 어제 다시 인도로 넘어왔습니다. 석가족이 세운 진신 사리탑을 참배하고 지금 쉬라바스티(Shravasti)에 도착했습니다.

설에 만난 가족과 안 좋게 헤어지게 되는 이유

곧 설날에 가족을 만나게 될 텐데, 우리는 좋은 마음으로 만나서 좋은 마음으로 헤어지기보다 안 좋게 헤어지는 경우가 더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보고 싶었던 가족과 오랜만에 만나고 나서 가족과 헤어질 때 왜 썩 좋은 마음이 아닐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기대가 너무 크다는 거예요. 가족이 떨어져 있으면 늘 예전에 좋았던 기억만 나서 서로에 대한 기대가 커집니다. 막상 만나면 각자 자신의 현실적인 삶에 집중하기 때문에 서로의 기억 속의 모습과 달라서 실망하게 됩니다. 내가 기억하는 예전 부모 같지 않고, 예전 언니나 동생 같지 않은 거예요. 둘째, 보통 어릴 때 가족과 함께 살면 좋을 때보다 갈등을 일으키고 상처를 입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가족과 떨어져서 살다 보면 나쁜 기억이 점점 옅어지고 좋은 기억만 남아서 예전을 그리워하며 좋은 추억으로 갖고 살아가거든요. 막상 만나서 말하는 모습이나 행동을 보면 ‘아이고, 저 꼬라지, 저 말투...’하고 예전에 상처 입었던 기억이 되살아나서 또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는 예전의 안 좋은 기억이 덮어져 있다가 만남으로 인해 되살아나는 문제가 있고, 또 하나는 그리움이 너무 간절해서 기대가 크다가 막상 만나보니 예전 같지 않아 실망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래서 명절 때 만나서 좋게 헤어지기보다 안 좋게 헤어지는 경우가 더 많은 겁니다.

한가지 더하자면, 명절에는 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누가 일을 할 것인지를 두고 갈등이 생기기가 쉽고, 특히 일은 안 하고 먹기만 하는 얄미운 행동에 기분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각자의 가족을 데려오면 그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거나 부모가 서로를 비교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큰아들과 작은아들, 큰 손자와 작은 손자, 큰사위와 작은 사위 등 서로 비교하면 속상하게 됩니다. 서로 종교나 정치적 이념이 다를 때는 그와 관련된 얘기는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명절에는 술을 한 잔씩 마시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면 술기운에 격한 말을 하기 쉽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분 좋아야 할 명절에 갈등이 생겨서 안 좋게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괜히 갔다고 후회하게 되는 겁니다.

명절을 잘 보내려면 가족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서로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갖지 말고 설령 안 좋은 모습이 보이더라도 ‘이것은 나의 옛날 상처다’ 하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해야 할 일이 보이면 내가 먼저 나서서 하고, 가족 간에 비교하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어른이라면 ‘자식 중에 누구는 어떻더라’ 하는 말을 절대 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이어서 네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1시간 30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생방송을 마치며 스님이 닫는 말씀을 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혼란스럽습니다. 바깥에서 보면 대한민국이 참 좋은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이곳에서도 한국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통령이 구속되는 일이 흔하지 않은 일이다 보니 그렇습니다. 정치적 혼란기에 이어서 앞으로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겹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일어난 일들을 국민의 뜻과 법에 따라서 민주적으로 잘 해결해야 합니다. 너무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내세우지 말고, 서로를 이해하고 껴안아서 국민통합을 우선적으로 만들어 내야 합니다. 국민통합을 기반으로 남북 간에 긴장을 완화하고 협력해서 2025년에는 대한민국이 상생하는 길을 밟아가기를 바랍니다.”

스님이 법회를 하는 동안 순례단은 7시 30분에 수닷타장자 탑터로 걸어갔습니다. 법회를 마친 스님은 바로 차를 타고 앙굴리말라 탑터로 가보았습니다. 짙은 안개가 내려 마치 비가 내린 것처럼 땅이 많이 젖어 있었습니다.

“앙굴리말라 탑터는 땅이 습해서 사람들이 앉기가 어렵겠어요. 맞은편에 수닷타장자 탑터가 있으니 그쪽으로 가봅시다.”

스님은 순례단이 도착하기 전, 앙굴리말라 탑터와 수닷타장자 탑터를 오가며 탑돌이 동선과 순례단이 앉을 자리를 점검했습니다. 법회는 땅이 덜 젖은 수닷타장자 탑터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8시가 다 되어 수닷타장자 탑터에 순례단이 도착했습니다. 먼저 탑돌이를 하고 예불을 올렸습니다.



잠시 명상을 한 후 스님이 수닷타장자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수닷타장자의 공덕을 기념하여 장자의 집터에 세운 탑으로, 기원정사의 창건자이기도 한 수닷타장자를 기리는 장소입니다.

오늘 날씨는 전형적인 인도의 겨울 날씨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날씨는 다소 이례적인 기후였고, 오늘 같은 날씨가 인도의 겨울다운 날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개가 짙게 끼어 차가 거의 통행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도 오늘은 시야가 100미터 정도는 되는 편이지만, 가끔은 2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곤 합니다. 어두운 밤에는 전조등을 켜면 되지만, 안개 속에서는 전조등을 켜면 오히려 더 안 보입니다. (웃음)

저는 인도에서 이런 날씨를 여러 번 겪어보았습니다. 안개가 너무 자욱할 때는 차를 세워두고 움직이지 못한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니면 간혹 용감하게 움직이는 차량 뒤를 따라가며 그 차의 브레이크등을 보고 길을 찾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안개로 인해 물방울이 땅으로 줄줄 흘러내리지요? 이 시기에 인도에서는 밀 농사가 잘되는데,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는 지역은 올해 날씨가 너무 따뜻해 안개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망칠까 봐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안개가 많으면 순례하기에는 불편하지만, 농부들에게는 아주 좋은 날씨입니다. 오늘같이 옷이 젖는 날씨를 불평하기보다는, '아, 이런 날씨라면 농사가 잘되겠구나' 하는 마음을 내보세요. (웃음)

수닷타장자와 부처님의 만남

수닷타장자와 부처님의 만남도 오늘처럼 안개가 자욱한 날 이루어졌습니다. 수닷타장자가 라자그라하에 있는 친구 집을 방문했습니다. 평소 그의 친구는 수닷타장자가 가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이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인을 통해 자신이 왔다고 알렸는데도 친구가 바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닷타장자는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냥 기다렸더니 한참 뒤에야 친구가 젖은 손을 닦으며 나왔습니다.

‘미안하네.’

‘무슨 일로 그렇게 바쁜가? 혹시 딸을 시집보내는가, 아니면 아들을 장가보내는가?’

‘내가 그 정도 일로 자네를 이렇게 기다리게 했겠나?’

‘그럼 무슨 일이 있는가?’

‘왕사성에 부처님이 오셨다네. 내일 아침에 우리 집에서 공양을 올리기로 했는데, 하인들이 서툴러서 내가 직접 진두지휘하느라 늦었네.’

그날 밤, 친구는 부처님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수닷타장자는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듣다가 잠을 청했지만, 다음 날 부처님을 뵐 생각에 설레어 잠들지 못했습니다. 결국 새벽에 산책을 나섰는데, 숲속에서 한 수행자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부처님 같았습니다.

‘부처님 아니십니까?’

‘그렇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부처님께서는 여러 비유를 들어 수닷타장자에게 설법하셨고, 그는 단번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수닷타장자는 부처님께 ‘이 훌륭한 법을 제가 사는 쉬라바스티 사람들도 들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쉬라바스티로 와 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쉬라바스티 사람들이 외도에 빠져 있는 상황을 오래전부터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시원해졌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침묵으로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성도 후 3년이 지나 부처님께서 쉬라바스티를 방문하셨습니다. 수닷타장자는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물 숙소를 마련했는데, 그곳이 바로 기원정사입니다. 수닷타장자는 평소 자선 활동을 많이 했고, 그래서 ‘아난드핀디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이는 ‘외로운 이를 돕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부모 없는 어린아이, 자식 없는 노인, 남편 없는 아내, 아내 없는 남자’가 외로운 이에 포함되는데, 그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선량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선한 사람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전 재산을 내놓아 부처님과 승단을 지원함으로써 덕분에 이 지역의 교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살인자 앙굴리말라의 귀의

“우리가 이곳에 오면 수닷타장자보다 맞은편에 있는 앙굴리말라 탑터에서 더 많은 감동을 받곤 합니다. 그 이유는 선한 사람이 훌륭하게 된 것보다 악인이 변화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때 더 큰 감동과 교훈을 주기 때문입니다.

‘앙굴리’는 손가락, ‘말라’는 염주라는 뜻입니다. 즉, 손가락으로 염주를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앙굴리말라는 어린 시절 집안이 좋고 매우 영리한 아이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앙굴리말라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명문 스승을 찾아 탁실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탁실라에서 앙굴리말라는 스승의 집에 기숙하며 공부를 했습니다. 스승은 나이가 많았고, 그의 부인은 젊었습니다. 당시 기숙생들은 동네에서 통학하는 학생들과 달리 스승의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앙굴리말라가 15세쯤 되었을 때, 스승의 부인과 앙굴리말라 사이에 미묘한 이성적 관계로 오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앙굴리말라가 똑똑한데다 늠름한 모습까지 보이자 부인의 사랑을 받게 되고, 이를 시기한 다른 학생들이 스승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을 했습니다.

어느 날, 부인이 앙굴리말라에게 음식을 먹여주고 있을 때 스승이 갑자기 들어와 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이후 스승은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날에는 부인과 앙굴리말라가 집에 나타난 쥐를 잡으려고 뛰어다니다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스승에게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스승이 먼 길을 떠난 틈에 부인은 앙굴리말라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앙굴리말라는 스승의 부인이므로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부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온갖 정성으로 앙굴리말라를 보살폈는데, 그 거절은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이 상처는 미움으로 변했고, 스승이 돌아온 후 부인은 자신을 보호하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없는 동안 저 아이가 나를 폭행하려 했습니다.’

결국 스승은 앙굴리말라와 부인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어 앙굴리말라를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간청하며 말했습니다.

‘스승님, 저는 더 배워야 합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이라면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스승은 ‘나는 더 이상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라고 말했지만, 앙굴리말라의 거듭된 간청에 어려운 수행방법을 알려줍니다.

‘남은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너에게 그것을 말할 수가 없다.’

앙굴리말라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하겠다고 다짐했고, 결국 스승은 말했습니다.

‘사람 100명을 죽이고 그 손가락 1,000개로 염주를 만들어 목에 걸면 승천할 수 있다.’

앙굴리말라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끔찍한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죽여 손가락으로 염주를 만들었고, 그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앙굴리말라는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 소문은 고향 쉬라바스티에도 알려졌습니다. 쉬라바스티 사람들은 집집마다 방울을 걸어 앙굴리말라가 나타나면 경고음을 내어 서로 알리기로 했습니다. 이로 인해 앙굴리말라를 잡지 못한다고 왕에 대한 원성도 높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께서 길을 가시던 중 사람들이 다급히 달려오며 말했습니다.

‘부처님, 그쪽으로 가지 마십시오. 앙굴리말라가 오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태연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래는 두려움이 없다.’

얼마 후, 앙굴리말라가 칼을 들고 나타나 부처님에게 외쳤습니다.

‘사문아, 멈추어라!’

그러나 부처님은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을 잡으려고 했지만, 아무리 뛰어도 닿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지친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을 겨우 따라와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왜 멈추라는데 멈추지 않는가?’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이미 멈춘 지 오래되었다. 멈추지 않은 것은 바로 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나는 지쳐 멈추었고, 너는 계속 가지 않았는가.’

‘여래는 살생을 멈췄고 남을 해치는 행위를 멈췄다. 하지만 너는 아직 멈추지 못하고 있다.’

그 말을 들은 앙굴리말라는 자신이 잘못된 길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부처님께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부처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도 출가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앙굴리말라는 승단에 들어가 법명 ‘아힘사(비폭력)’를 받고 수행자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이후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순례단은 부처님과 불법의 위대함에 깊이 감동하며 경청했습니다. 설명이 끝나고 경전을 독송한 후 탑돌이를 시작했습니다. 수닷타장자 탑터에서 앙굴리말라 탑터까지 두 손을 모으고 탑돌이를 한 후 기원정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순례단은 조용히 염불하며 발걸음에 집중해 보았습니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얼마 지나지 않아 탁발하는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은 한 줄로 서서 천축선원 대인스님께서 정성 들여 마련해준 사모사, 귤, 감자를 발우에 받고 기원정사로 이동했습니다.




기원정사에 도착한 순례단은 마당에 가지런히 앉아 소심경을 독송한 후 조용히 공양을 했습니다.



대중이 어느 정도 공양을 마치자, 스님이 소심경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맛있게 드셨습니까? 부처님께서 걸으신 길을 따라 우리도 탁발을 해보았습니다. 덜 드신 분들은 천천히 드시고, 화장실에 다녀오실 분들은 다녀오세요. 다 드신 분들은 책을 펼치세요. (웃음) 방금 독송한 소심경이 무엇인지 공부해 보겠습니다. (웃음)”

소심경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자리를 정돈한 후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담아 예불을 올렸습니다.




명상을 마치고 스님의 성지 안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이 우리가 늘 마음에 새기던 기원정사입니다. 연세가 드셨거나 불교에 귀의한 지 오래된 신도들은 금강경을 많이 독송했기 때문에 기원정사에 대해 굉장한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청년들은 ‘기원정사가 어디 있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싶어요.

부처님이 가장 오랫동안 머무신 곳, 기원정사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고 45년 동안 중생을 교화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즉 45안거를 하셨습니다. ‘안거’란 우기 때 움직이지 않고 3개월 동안 한곳에 머무르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45안거 중에 25안거를 이곳 사위성에서 했습니다. 안거 중 절반 이상을 사위성에서 머무르신 거예요. 그중 19번을 이곳 기원정사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르신 곳이 기원정사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적으로 기원정사가 가장 많습니다.

한국 불교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경전이 금강경인데, 금강경은 기원정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불교인들은 기원정사를 매우 중요한 성지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성조사님께서도 8대 성지를 잘 가꾸라고 하지 않으시고 5대 성지를 잘 가꾸라고 유훈을 남기셨습니다. 태어나고, 도를 이루시고, 설법하시고, 열반하신 4대 성지와 장기 주석지인 기원정사를 합해서 5대 성지라고 표현한 겁니다.

부처님이 이곳에 가장 오래 계셨으니까 온갖 이야기와 사건이 이곳에서 생겨났습니다. 부처님을 모함하기 위해 자신의 배에 박을 넣어서 부처님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는 여인의 이야기도 이곳 기원정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가난한 여인의 등불 이야기를 비롯한 대승 경전의 많은 이야기가 기원정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한 모습을 보면

부처님의 일생은 교화 6년까지는 대부분 다 시간대별로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열반하신 마지막 해도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이에는 여러 가지 교화 사례가 펼쳐지는데요. 교화 사례를 내용별로 분류해 보면, 첫째, 부처님께서는 브라만이라든지 교만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무지를 아주 날카롭게 지적해서 지혜로 절복시키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석가족들이 어제까지 자신들의 이발사였던 우파리에게 절하는 것을 머뭇거릴 때도 아주 날카롭게 지적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세속적인 허위 의식에서 벗어나도록 했습니다. 둘째, 가난한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 살인 강도를 저지른 사람들, 똥을 지고 다니는 천민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좀 지나치리만큼 자비롭게 감싸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래서 ‘지혜’와 ‘자비’가 부처님을 상징하게 된 겁니다. 지혜의 칼날은 날카롭기가 그지없었고, 자비의 품은 그윽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부처님의 또 하나의 특징은 본인에 대한 비난뿐 아니라 상가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는 별로 흔들림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비난을 견디다 못한 출가 승려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면 ‘좀 기다려 봐라!’ 하셨어요. 밥을 안 준다고 문제를 제기하면 며칠 굶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탁발을 하러가면 사람들이 욕을 하면서 밥을 안 주니까 출가 승려들도 어려움이 많았죠.

부처님께서 여성들을 출가시킬 때도 거부 반응이 많았는데, 유녀까지 출가시키니 손가락질을 많이 받았습니다. 천민을 출가시켰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는 부처님에 대한 비난도 있었지만 사리푸트라나 목갈리나 같은 브라만 출신의 제자들이 브라만인 친구들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계급 차별이 심했던 당시에는 천민을 부정하다고 여겨서 그림자만 밟아도 죽여도 되는 사회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돼지우리에서 산다고 비난하는 수준이었어요. 그런데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미 눈을 떠버렸기 때문에 별로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경전을 읽어보면 부처님을 모함하려 했던 여러 사례가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탁발하러 갔는데 ‘사대육신 멀쩡한 놈이 왜 얻어먹냐!’ 하고 막 화를 내는데도 부처님께서는 웃으면서 그 사람과 대화를 하여 교화하셨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비난에 대해서 크게 흔들림이 없으셨어요.

또 가난한 한 여인이 부처님께 작은 등불을 올린 공덕으로 ‘다음 생에 부처를 이루리라’ 하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프라세나짓왕이 부처님께 찾아와 ‘그러면 수천 개의 등불을 켜고 공양을 올린 저의 공덕은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대답합니다.

‘불법이란 그 뜻이 매우 깊어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천 개를 주고도 한 개를 못 얻을 수 있지만, 한 개를 주고도 천 개를 얻을 수 있는 미묘한 법입니다. 그러니 먼저 백성에게 여러 가지로 베풀어 복을 쌓고 자신이 쌓은 공덕을 내세우거나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훗날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함으로써 프라세나짓왕이 설복이 됩니다.”

설명을 마치고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기원정사에 해당하는 경전 내용이 길어서 독송 중간에 잠시 휴식을 했다가 이어서 독송을 했습니다.

경전 독송을 마친 뒤, 순례단은 각 차량별로 인솔법사님과 함께 기원정사를 둘러보았습니다. 스님은 그 사이에 청년들과 한 명씩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이어서 스님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원래 저녁에 천축선원에서 즉문즉설을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어제 저녁에도 날씨가 너무 추워 법회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안개와 습기로 인해 천축선원의 카펫이 모두 젖어 대중이 앉아 있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즉문즉설은 시간을 당겨 기원정사에서 바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그동안 순례를 하면서 들었던 의문에 대해서 자유롭게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네 명이 손을 들고 궁금한 점을 질문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금강경을 보면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는데 성지순례를 할 때 왜 석가모니불을 부르거나 문화적인 의식을 하는지 의문이 든다며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붓다는 종교의식을 부정한 것 같은데, 왜 우리는 종교의식을 하나요?

“금강경을 보면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종교 의식을 부정한 것 같은데 저희들은 성지순례를 와서 참배를 할 때마다 석가모니불 염불을 계속하였습니다. 이런 종교 의식이 혹시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하거나 법회를 할 때 하는 행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담마, 즉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 행사입니다. 예를 들어, 삼배를 하거나 악수를 하거나 뽀뽀를 하거나 포옹을 하는 것은 인사 문화에 해당합니다. 스님들이 승복을 입는다거나 절을 짓는 것 역시 문화입니다. 촛불을 켜거나 향을 피우는 것 또한 문화입니다. 이런 문화적 행위를 보고 ‘촛불을 켠다고 부처님께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부처님이 어두워서 오지 못하시나?’, ‘향을 켠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담마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담마, 즉 진실을 추구하는 관점에서는 불상도 필요 없고, 탑도 필요 없으며, 석가모니불 염불도 필요 없고, 절도 필요 없습니다. 종교 의식과 관계되는 모든 것은 필요하지 않으며, 그것은 단순히 문화일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진실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첫째,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는 남에게서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한 본능입니다. 이런 본능이 보장되지 않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둘째, 생존을 위해서는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생존을 위해서는 옷을 입는 것도 필요하고, 집이 필요한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렇게 먹는 것에 대한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 아귀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한 가장 첫 번째 계율이 타인을 죽이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존재가 살고자 하는 보호 본능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수행자가 해서는 안 되는 행위입니다. 두 번째 계율은 사람의 생존을 위한 기본 재산을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인도주의에서 강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존에 위협이 있을 경우 조건 없이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계율입니다. 이렇게 남으로부터 보호받고, 자기가 먹고 생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계율은 남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추행이나 성폭행이 대표적입니다. 내가 싫다고 하는데 누군가가 와서 괴롭히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는 큰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상대를 괴롭히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욕설이나 거짓말 등 말로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행위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처럼 직접적인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말로 욕설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상대의 기분이 나쁩니다. 그래서 네 번째 계율은 말로도 남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를 어기게 되면 수행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중죄라고 해서 사바라이(四波羅夷)라고 합니다. 이는 참회의 대상도 아니고 어기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이러한 행위들이 모두 범죄에 해당합니다. 폭행죄, 절도죄, 성추행죄, 사기죄 이렇게 죄에 해당될 정도로 법적으로도 금지되어 있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법에도 저촉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수행자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우선 이런 관점을 분명하게 가져야 합니다.

문화적인 것과 진실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하는 것과 손으로 먹는 것은 문화적 차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문화적 요소는 필요없지 않느냐’ 하고 주장하는 것은 ‘제법이 공하다’ 하는 생각에 빠진 겁니다. 누가 어떤 말을 해도 ‘제법이 공한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렇게 얘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문화에 너무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화를 모두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형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 문화를 모두 부정하라는 뜻은 아니에요. 이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것에 기준을 두고 한 말입니다. 문화적인 것에 너무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깨달음에 이르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절을 하면 깨닫느냐, 명상을 하면 깨닫느냐, 촛불을 밝히고 공양을 올리면 깨닫는 데에 도움이 되느냐, 이런 문화적인 부분에 종교가 너무 치우치니까 여기에 대해 비판하고 나온 것이 ‘공사상’입니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는 구절은 만약에 모양으로써 여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써 여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도란 것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형식에 너무 의미 부여를 많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일상적인 문화를 모두 부정하는 것 또한 치우친 생각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문화가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문화에 집착하게 되면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불사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종교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이렇게 문화적인 것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이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을 담아 나온 것이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이 나온 역사적 배경은, 당시 사람들이 형상에 너무 집착해 있었던 것을 비판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언어도 절대성을 갖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언어를 극복하는 다른 언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공을 절대화시키면 공이라는 상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적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오후 5시에 저녁 법회를 마쳤습니다. 스님은 기원정사에서 참선 중인 동남아 스님들에게 보시를 하고, 아이들에게는 사탕을 나누어 준 후 천축선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천축선원에서 오늘도 순례단을 위해 저녁 공양을 정성껏 준비해 주었습니다.

공양을 마치고 스님은 대인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대인스님은 한국에서 온 순례단을 위해 특별히 맛있는 쌀을 구해 정성스럽게 밥을 짓고, 밤새 사모사를 만들어 탁발 공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법사단과 스태프들도 대인스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오늘 쉬라바스티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상카시아로 가서 상카시아 탑터를 참배하고 회향식을 할 예정입니다.


2025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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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주

고맙습니다

2025-02-08 18:44:02

김종근

감사합니다

2025-02-03 06:49:35

최상훈

고맙습니다 ^^

2025-02-01 17: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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