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4.6.27 일본 도쿄(東京), 니와노 평화상 메달 증정식, 한국 교민 즉문즉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일본과 북한의 대화가 진척되기를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본 도쿄에서 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하는 날입니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한 힘찬 전철 소리와 함께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어젯밤 잠을 한숨도 못 잤어요. 기차 소리가 끊이지 않아서 차량을 세어보니 아홉 개네요.” (웃음)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6시 30분에 숙소에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정비를 한 후 오전 8시 50분에 입정교성회(Rissho Kosei-kai) 대성당으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4년 전 2020년에 제37회 니와노 평화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일본 도쿄에서 수상식을 하지 못하고 온라인으로 수상식에 참가했었습니다. 그때 상장만 전달받았고, 함께 수여되는 메달은 직접 받지 못했습니다. 4년이 지난 오늘, 입정교성회에서 메달 증정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님이 입정교성회(Rissho Kosei-kai)에 도착하자 대성당 1층 로비에서 니와노 평화재단 관계자들이 반갑게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6층 응접실로 이동하여 환영 인사를 받고 ‘보살의 길을 걷다’라는 제목의 영상을 함께 보았습니다. 입정교성회를 설립한 니와노 릿쿄의 생애와 가르침, 현재 회원들의 수행 방법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영상이 끝나고 일승보탑, 대성당 홀, 기념관을 차례대로 둘러보았습니다.

잠시 휴식을 하고 오전 11시에 입정교성회 회장이자 니와노 평화재단의 명예회장이신 니와노 니치코 님과 환담을 나누었습니다. 니와노 평화상 수상 이후에도 스님은 세계 평화와 종교 간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데요. 그동안 해 온 일들을 공유하고, 회장님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니와노 니치코 회장님은 니와노 평화상을 받았던 고 강원룡 목사님을 떠올리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17회 수상자였던 분이 강원룡 목사님인데, 종교 간의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자주 만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스님도 강원룡 목사님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며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공유해 주었습니다.

“저도 고 강원룡 목사님이 하셨던 종교 간의 대화 모임에 참여한 이후로 목사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사회 실천 활동을 함께 했습니다. 강원룡 목사님 다음에 경동교회를 이끌고 있는 분이 박종화 목사님인데, 그분을 비롯하여 6개 종교 지도자들이 매달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올해로 26년이 되었습니다. 주로 북한 인도적 지원과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일본과 북한의 대화가 진척되기를 바랍니다

현재는 남한과 북한 간에 대화가 중단되었고, 미국과 북한 간에도 대화가 중단되었지만, 일본과 북한만 대화가 조금씩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본 방문 기간에 일본의 원로 정치인들을 만나서 일본과 북한 간의 대화를 진척시킬 수 있도록 대화를 나누려고 합니다. 북한과 러시아가 군사 협력을 하게 되면서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전쟁의 위험을 줄일 수 있을지 할 수 있는 만큼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13일에는 만 명이 모여서 한반도 평화 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입정교성회의 역사를 보면서 입정교성회가 그동안 어려운 시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전쟁 후 어려운 시기에 일본 국민들에게 큰 위로와 도움을 준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도 세계 평화와 종교 간 협력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하고 대화를 마쳤습니다.

이어서 니와노 평화상 메달 증정식을 했습니다. 니와노 평화재단의 니와노 니치코 회장님이 직접 스님에게 메달을 증정했습니다.

스님도 회장님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선물을 주고받은 후 스님과 회장님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입정교성회 대성당을 나와 니와노 평화재단 이사장님과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신주쿠(新宿区)로 이동했습니다.

니와노 히로시 니와노 평화재단 이사장님을 비롯하여 사무국장, 직원들과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인사를 나눈 후 스님은 다시 입정교성회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2시부터는 입정교성회 사무실에서 일본 참의원에서 의정 활동을 했던 하쿠 신쿤 님을 만났습니다.

일본의 외교 및 국방 정책에 많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분인데,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일본의 역할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하쿠 의원님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일본에는 자주 오시나요?”

“주로 한국 교민들을 위해 강연을 하러 오는데, 최근 일 년 사이에는 일본과 북한이 대화를 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것을 일본의 정치 인사들에게 촉구하려고 세 번 방문했습니다.”

“일본에서는 2002년도부터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가 언론에 쏟아지면서 북한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안 좋아진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 위험을 없애기 위해서

스님은 한반도의 전쟁 위기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하쿠 의원님에게 몇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 위험을 없애려면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이 대선을 앞두고 있어서 최소 1년은 지나야 관계 개선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1년 안에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이 높다는 겁니다. 앞으로 1년 안에 분쟁을 관리할 수 있는 나라는 현재 일본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북한이 대화의 창구를 열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그동안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여론이 강했습니다. 그로 인해 북한과 일본 간에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20년 이상 장기화되면서 지금은 국민적인 관심이 약화된 편입니다.”

“일본이 납치자 문제를 먼저 해결하라고 북한에 계속 요구하는 것은 결국 북한과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되거든요. 그래서 제가 일본의 정치인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2002년 고이즈미-김정일의 평양 선언에 입각해서 북한과 일본의 대화를 시작하자’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선언에 납치자 문제가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납치자 문제를 전제 조건으로 하면 대화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의원님을 비롯한 일본의 정치인들이 움직여 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네, 저도 스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일본이 반발 앞서서 북한과의 대화에 나선다면

“그동안 6자 회담을 할 때 일본은 납치자 문제에 걸려서 대화에서 늘 소외되지 않았습니까. 항상 북미 대화와 남북 대화가 중심이고, 일본은 늘 대화에서 소외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어요. 북미 대화도 중단되고, 남북 대화도 중단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일본이 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일본의 외교적 입지를 넓힌다는 차원에서 과거처럼 미국이 주도하는 판에 따라가기보다는 일본이 반발 앞서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경제 대국인 일본이 외교적으로는 좀 소국처럼 움직였잖아요. 앞으로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위상을 생각하면 제가 제안한 대로 하는 게 일본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말고, 북일 관계 개선에 초점을 맞추면 좋겠습니다. 납치자 문제는 비공식적으로 다루는 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제안한 대로 저도 일본 정치인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세요?”

“내일 일본인들을 위해 통역으로 강연을 해주고, 새벽 2시 비행기로 베트남으로 가서 여러 사찰을 방문하고 스님들 교육 문제에 대해 대화를 할 예정입니다.”

“새벽 2시예요? 놀랍습니다.”

“앞으로 북한, 러시아, 미국, 중국, 일본의 관계를 잘 풀어나가는 데에 의원님이 적극 나서주시면 좋겠습니다. 중국과 미국의 패권 경쟁이 점점 격화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제3지대를 형성하여 조금 힘을 가져야 동아시아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대화를 마친 후 스님이 하쿠 의원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선물을 전달하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하쿠 의원님과 미팅을 마친 후 스님은 강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어젯밤 머문 숙소가 기찻길 옆에 있어서 기차 소리 때문에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잠시 휴식을 한 후 강연 시간이 가까워지자 강당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강연이 열리는 닛뽀리써니홀(日暮里サニーホール)은 도쿄 닛포리 역에서 도보로 약 2분 거리에 위치한 다목적 문화 공간입니다. 강연장에는 많은 봉사자들이 강연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강연을 시작하기 2시간 전부터 청중들이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교민들 200여 명이 자리한 가운데 저녁 7시가 되자 스님을 소개하는 영상이 상영되었습니다. 영상이 끝나자 스님이 무대 위로 걸어 나왔습니다. 큰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습니다.

스님이 환한 웃음을 보이며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잘 지내셨어요? 제가 작년 가을에 도쿄에서 강연을 했었는데요. 작년 강의에 왔던 분 손 한번 들어보세요. 별로 없네요. 올해 처음 오시는 분 손 한번 들어보세요.”

처음 오신 분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즉문즉설을 처음 듣는 분들이 많아서 스님은 즉문즉설의 원리와 취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지금도 ‘사람이 아무리 죄를 많이 짓더라도 강가강에 가서 목욕을 하면 그 죄가 없어진다’ 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도에 가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강가강에 와서 목욕을 합니다. 때를 벗기는 목욕이 아니라 죄업을 씻는 성스러운 목욕이라고 해서 ‘성욕(聖浴)’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 한 젊은이가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사람이 나쁜 짓을 실컷 해도 강가강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모든 죄가 없어진다고 하는데, 왜 부처님은 우리에게 힘들게 수행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래서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부처님, 저 브라만들이 말하기를 사람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강가강에 가서 목욕하고 나면 그 죄가 다 없어져서 천국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모순 같고, 사실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이는 이해가 안 되었던 거예요.

부처님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방법

만약 부처님께서 ‘그렇지 않다’ 이렇게 대답하셨다면 그건 다른 종교를 비판하는 것이 됩니다. 부처님이 다른 종교를 비판하지는 않았겠죠? 반대로 비판하지 않으려고 ‘그 말도 일리가 있다’ 하고 대답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진실을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이 맞다면, 강가강에 사는 물고기가 가장 먼저 하늘나라에 태어나겠구나.’

먼저 ‘그들의 말이 맞다면’ 하고 다른 종교의 이야기를 긍정했어요. 그다음, 사람이 물에 한번 들어갔다 나왔다고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면, 아예 그 물에서 태어난 물고기는 하늘나라에 제일 먼저 갈 것이라는 점을 짚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젊은이의 질문에 ‘그렇다’ 혹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질문자는 알아들었을까요, 못 알아들었을까요?”

“알아들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인가요?’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조금 모자라는 거예요. (웃음)

젊은이는 부처님의 대답을 듣고 ‘알았습니다. 부처님. 잘 알았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렇듯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신비한 것이 아니에요. 나의 의문과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즉문즉설이 법륜 스님이 만든 특별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원래 부처님께서 그 당시에 이렇게 대화를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무슨 불교 교리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어요. 이렇게 사람이 이치를 탁 깨닫는 이야기들을 모아서 분석해 보면 ‘이것은 무아를 뜻한다’, ‘이것은 무상을 의미한다’, ‘이것은 연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교리가 먼저 있었던 게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는 교리를 지식으로 먼저 배우기 때문에 교리를 알지만 괴로움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동국대 불교대학에서 불교를 전공하여 교수가 된 사람이 아이들이 말을 안 들으면 화를 낼까요, 안 낼까요? 남편이나 부인이 바람을 폈다면 화를 낼까요, 안 낼까요? 화를 낸다면 그가 아는 불교 교리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불교에 대한 지식이든, 기계에 대한 지식이든, 과학에 대한 지식이든, 그것은 지식일 뿐입니다. 괴롭고 행복한 것은 생각의 작용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입니다. 지식을 배우는 것은 생각의 작용이기 때문에 수행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요. 수행이란 그가 스님인지 아닌지, 그가 기독교를 믿는지 불교를 믿는지, 이런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슨 옷을 입느냐는 개인의 자유입니다. 누구나 마음을 밝히면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종교나 이념, 사상을 초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수행에 대한 대화를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즉문즉설은 불교라는 종교, 불교라는 철학, 불교라는 지식을 논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제 즉문즉설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시겠죠? 아무 얘기나 하셔도 괜찮아요. 의문이 있거나 괴로운 점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지식적인 것은 물을 필요가 없어요. 예를 들어 ‘무아가 뭡니까?’ 라는 질문은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다 나옵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 것이나 인공지능이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을 굳이 제가 대답해 줄 필요가 없잖아요. 즉문즉설은 인공지능도 대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즉문즉설을 하면 생기는 문제점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번뇌는 그 개수가 천 개, 만 개, 십만 개, 백만 개 이상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중에 만 개만 학습하도록 해서 인공지능이 즉문즉설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놓는다면, 아주 디테일한 측면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 내용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식화될 수가 있어요. ‘이런 경우는 이렇게 하는 거야’ 하는 도식은 불법이 아닙니다. 도식을 만들 수 있는 분야는 앞으로 인공지능이 다 대체할 수가 있습니다. 변호사 같은 분야는 앞으로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훨씬 더 잘할 거예요. 왜냐하면 수많은 법률을 학습시켜서 도식화를 하면 정답이 나오게 되니까요. 계산 같은 것도 제일 빨리 할 겁니다. 그러나 불법은 ‘무유정법’이라고 합니다. 정해진 답이 없어요. 인연을 따라서 그때그때 정해집니다. 인간의 삶은 만 가지의 경우가 넘습니다. 백만 가지, 천만 가지 이상이 됩니다. 그래서 정함에 있음이 없다고 해서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인연을 따라서 정해지는 것이 불법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할 때 누구라고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택시를 타면 승객, 아이를 만나면 부모, 학교에 가면 학부모, 가게에 가면 손님, 이렇게 인연을 따라서 그때그때 정해집니다. 인연이 바뀌면 또 바뀌어 버려요. 그래서 ‘제행무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고정된 실체도 없습니다. 마치 '나'라는 것이 있는 것 같지만 인연을 따라서 늘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지 고정불변하는 실체는 없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부터 차례대로 대화를 나누고 현장에서도 질문을 받았습니다. 두 시간 동안 여덟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남편이 동업을 시작한 것이 불안하며, 그로 인해 어렸을 때 동업을 해서 망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올라온다며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동업으로 망한 아버지, 동업을 하고 있는 남편, 불안하기만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굉장히 유복하게 자랐는데, 아버지가 친구 분과 동업을 하면서 크게 망하셨고, 그로 인해 좌절하셔서 알코올중독이 되시고, 가정 폭력과 도박도 하셔서 어려운 시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굉장히 열심히 살면서 나름대로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생각했고,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딸아이를 하나 두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남편이 IT 분야의 직장을 다니다가 언제까지 월급으로 먹고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퇴직하기 전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사업이란 얼마든지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반대를 하다가,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서 더 이상 반대를 못 하고 동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싫어하는 동업을 남편이 시작했는데 사람의 불안감이라는 게 적중했는지 지금 동업자와 안 좋은 관계가 되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용서했다고 생각을 했는데, 힘들어지니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다시 생깁니다. 신랑이 동업을 한 것에 대해서도 속앓이만 하고 있고, 늘 불안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용서하고, 신랑을 탓하지 않으면서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질문자는 어릴 때부터 쭉 가난하게 사는 것이 좋아요? 아니면 한 번 편안하게 살아보다가 가난해진 게 좋아요? 어느 게 더 좋아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태어날 때부터 쭉 가난하게 살래요, 초등학교 때까지 한 번 부자로 살아보다가 가난하게 살래요?”

“두 번째요.”

“그런데 뭐가 문제예요? 지금 가난하게 살지만 어릴 때 나도 한 번 부자로 살아봤다는 것은 좋은 거예요. 어떤 사람이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해서 다시 결혼을 했다가, 또 이혼을 하고 결혼을 했다고 하면서 저한테 ‘스님, 저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결혼을 세 번이나 할까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스님은 결혼을 한 번도 못 해봤는데, 당신은 무슨 복을 지었길래 결혼을 세 번이나 했나요?’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어떤 사람은 한 사람 하고도 못 살아봤는데, 세 사람을 바꿔가면서 살아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평생 한 사람하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정하니까 바꿔가면서 사는 것이 나쁜 일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안 정하면 요즘 같은 좋은 세상에 이 사람하고도 살아보고 저 사람하고도 살아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연애하다가 애인이 다른 데 가버리면 좋은 일이에요. 그 사람이 계속 내 옆에 붙어 있으면 그 사람밖에 못 사귀고, 내가 애인을 두고 다른 사람을 사귀면 바람을 피운다고 비난을 받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알아서 가버리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약간 아쉽긴 하지만 다른 사람을 사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처럼 질문자의 고민도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에요. 어릴 때 한번 잘 살아봤잖아요. 질문자는 아버지한테 고맙게 생각해야 돼요. 아버지를 잘 만났으니까 어릴 때 한번 잘 살아볼 수 있었던 겁니다. 잘난 아버지 덕분에 질문자는 잘 살아본 경험을 갖게 된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가 술 먹고 알코올 중독에 빠져서 도박을 하다가 일찍 돌아가셨으니 잘 되었잖아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질문자는 ‘어릴 때는 잘 살았는데 가난해졌다’, ‘아버지가 술 먹었다’, ‘아버지가 죽었다’ 이렇게 뭐든지 문제로 삼고 있는 겁니다. 질문자는 극복할 방법을 물었지만, 스님이 들었을 때는 극복할 일이 없어요.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극복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면 좋겠어요. ‘나는 어릴 때 초등학교까지 잘 살아봤다’, ‘가난하게도 살아본 경험이 있다’, ‘술 먹고 도박하는 아버지 밑에서도 살아봤다’ 이렇게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고 받아들여 보세요. 이런 것은 다 소중한 경험이에요. 스님이 이렇게 여러분과 즉문즉설을 할 수 있는 것도 온갖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질문자는 이런저런 경험을 해보고 지금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있어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되는 거예요. 어릴 때 아버지가 사업 실패한 것이 마음에 상처가 되어 있기 때문에 남편이 아직 실패하지도 않았는데 질문자는 계속 ‘실패할지도 모른다’, ‘갈등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 봤자 무슨 별일이 있겠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를 했는데도 질문자는 지금까지 잘 살았잖아요. 지금은 아이도 아니고 어른이 되었는데, 남편이 실패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혼해 버리고 다른 사람하고 살아도 되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당신이 사업을 한번 해보고 싶다니까 해 봐. 그러나 잘못되면 당신하고 끝이야. 잘 되면 같이 살게.’

전전긍긍하지 말고 이렇게 배짱 있게 나가면 됩니다. 지금 아무 문제가 없어요. 질문자가 어릴 때 받은 마음의 상처가 재발해서 생긴 문제에 불과하니까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됩니다. 현실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동업을 하게 되면 장단점이 있습니다. 자금이 부족할 때 사업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관계가 틀어져서 갈등을 겪을 위험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업이 못 되면 서로 책임을 물어서 헤어지고, 사업이 잘 되면 서로 가지려고 싸우게 됩니다. 그런 위험이 있으니까 동업을 안 하면 되는데, 왜 동업을 할까요? 동업을 안 하면 사업을 시작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예 시작을 못 하는 것보다는 위험 부담을 안고 해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업을 하게 되는 겁니다. 동업을 싫어하는 것도 질문자가 가진 트라우마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극복을 한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절을 하면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보세요. 질문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경험을 해본 거예요. 많은 경험을 한 것은 좋은 겁니다.

예를 들어 설악산에 등산을 갔다가 개울을 건너가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신발을 벗기가 싫어요. 할 수 없이 신발을 벗고 개울을 건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이 ‘내가 업어서 건네줄게’ 해서 신발을 벗지 않고 건너간 사람도 있겠죠. 신발을 안 벗고 건너 간 사람은 기분이 좋겠죠? 그런데 설악산 정상에 올라가서 돌아보면, 방금 전에 신발을 벗고 개울을 건넜든, 신발을 벗지 않고 업혀서 건넜든, 무슨 차이가 있어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기분이 좋은 것은 그때뿐입니다. 신발을 벗고 건넜어도 다시 신어야 하잖아요. 지나고 돌아보면 차이가 없습니다.

산을 오를 때 가파른 길로 갔다가 절벽을 타고 올라가나, 완만한 길로 올라가나, 올라온 뒤에는 과거는 그냥 하나의 추억이고 경험일 뿐이에요. 여기로 올라가면 어떻고, 저기로 올라가면 어때요? 지금 중요한 것은 정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내가 신발 벗고 왔지’, ‘가파른 길로 올라왔지’ 이것은 다 과거의 추억이고 경험일 뿐입니다.

내가 지금 여기 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예요. 어렸을 때 잘 살아도 봤고, 아버지 사업이 실패해서 가난하게 살았던 경험도 해봤고, 애 먹이던 아버지가 죽었으니까 잘 됐고, 혼자 살려고 했는데 남자 하나 만나서 결혼까지 해봤잖아요. 남편이 사업에 실패한다면,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봤듯이 실패한 남자를 데리고 살아봐도 되고, 또 요즘 같은 세상에 이혼을 해도 됩니다. 옛날에는 결혼해서 헤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같이 살아도 되고, 헤어져도 되는 좋은 시대인데, 왜 그렇게 눈물을 질질 짜고 그래요. 아무 문제없습니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살았을 뿐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동업을 시작한 남편을 탓하고 싶은데, 저도 동업하는 것에 대해 동의를 했으니까 차마 남편을 탓하지 못하고 참고 있는 중입니다. 이 괴로움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요?”

“질문자가 동의를 안 했는데 남편이 동업을 했으면, 남편을 탓할 거예요? 동의를 했고 안 했고를 따질 필요가 없어요. 지금 중요한 것은 망하면 망한 대로 살고, 흥하면 흥한 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동의를 했다’, ‘내가 동의를 안 했다’ 이런 것은 이미 지나간 얘기입니다. 아무 쓸데없는 것을 질문자가 붙들고 있는 거예요. 동의를 했는지 여부는 지금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잘 되면 잘 되는대로 살고, 안 되면 또 안 되는 대로 새로 시작하면 되죠.

안 죽고 사는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야 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 와서 살아본 것만 해도 좋은 일이잖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태어나서 한국 안에서밖에 못 살아보는데, 여러분은 일본까지 와서 한 번 살아보잖아요. 일본에서 사는 게 힘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돼요. 늙어서 한국에 가면 사회 보장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굶어 죽지는 않아요. 스님 같은 사람이 도와주기도 하고, 누구든 도와주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잘 먹고살겠다고 바라면 좀 곤란해요. 잘 먹고살려면 노력을 해야 됩니다. 먹고살 수 있는 정도에 만족할 수 있다면, 세상이 다 뒷받침을 해주기 때문에 걱정할 게 없어요. 한국이나 일본에 태어난 사람은 최소한 먹고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먹고살 수만 있으면 된다’ 이렇게 마음을 먹으면 아무 걱정이 없어요. 사회 보장 제도가 다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먹고살기만 하면 됐다’ 하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저는 개인 방을 갖지 않는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옷도 그저 남이 버린 것을 주워서 재활용을 해서 입습니다. 요즘 멀쩡한 옷을 버리는 게 많으니까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신발도 남들이 버리는 것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요. 옛날처럼 굶주리거나 헐벗을 일도 없고, 길거리에서 자야 할 일도 없어요. 요즘은 잘 곳이 없으면 재워주는 시설도 있잖아요. 부처님은 나무 밑에서 잤는데 뭐가 문제예요? 여러분은 너무 잘 살려고 하니까 걱정이 생기는 겁니다. 저처럼 잘 살겠다는 생각을 안 하면 아무 걱정이 없어요. 그래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걱정해 봤자 특별히 잘 되지도 않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그냥 아이 데리고 재미있게 살면 좋겠어요.

엄마가 계속 울고 걱정하면 아이한테 우울증이 생깁니다. 질문자는 나이 들어서 우울증이 왔지만, 엄마가 슬프게 살면 아이는 어릴 때부터 우울증에 걸립니다. 사춘기 때 벌써 우울증 증상이 나타나요. 요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우울증 증상이 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그래서 일본에는 ‘히키코모리’라고 은둔형 외톨이로 사는 청년들이 많잖아요. 밖에 안 나가고 방 안에 있는데, 이건 다 부모의 영향을 받은 겁니다. 부모가 건강하고 밖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면 아이들은 우울증이 안 생겨요.”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 남편이 말도 하지 않고 스킨십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집에 오는 것도 싫어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까요?

  • 마음과 생각의 구분이 안 됩니다.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난 일들에 대한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데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할까요?

  • 자존감이 낮아서 고민입니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생겼는데, 상대의 스펙이 좋으니까 과연 내가 어울릴까 고민이 됩니다.

  • 대학을 휴학한 후 진로에 대해 고민 중입니다. 선택에 대해 의심이 들고, 나태함도 생깁니다. 현명한 선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스님보다 더 유능하고 지혜가 많은 인공지능(AI)이 나온다면 스님은 어떻게 대응을 하실 건가요?

  • 법륜이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죽음이 두렵습니다. 불교에서는 어떻게 죽음을 바라보나요?

스님은 마지막 질문자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강연을 마무리했습니다.

“이 세상을 통제하는 기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유혹’이 있습니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던져서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 ‘협박’을 하여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방법으로 상대를 통제합니다. 외교에서는 이것을 ‘당근과 채찍’이라고 표현합니다. 사실 여러분도 이런 방법들을 다 쓰면서 살고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주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뭐 사줄게’ 하면서 유혹을 하거나, ‘말 안 들으면 회초리로 때린다!’ 이렇게 협박하거나, 이렇게 다 쓰고 있는 방법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종교에서는 ‘천당 가고 싶으면 돈을 많이 내야 갈 수 있다’ 하고 유혹을 합니다. 그래도 안 하면 ‘너 지옥 보낸다!’ 하면서 협박을 하지요. 종교가 나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인생의 모습이 그렇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유혹과 협박을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게 삶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고, 특별히 미워하지도 않으면, 협박당할 일도 없고, 유혹당할 일도 없어집니다. 편안하게 웃으며 살 수 있습니다. 남에게 보시를 할 때도 ‘죽어서 좋은 데 간다’ 하는 생각으로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을 먹게 해 주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를 받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누려야 하는 행복의 기본 조건입니다. 내가 맛있는 것을 먹는 것보다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줄 때 내 기분이 더 좋습니다. 배고픈 사람을 옆에 두고 나 혼자 맛있는 것을 먹어본들 기분이 좋을 수가 있을까요?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주는 것이 훨씬 기분이 좋습니다. 바로 이웃 땅에서 북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는 것을 생각하면 진수성찬처럼 먹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간단하고 소박하게 사는 삶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면 보람을 느끼게 되어 자존감이 생기고, 뿌듯한 마음마저 듭니다. 이것은 누군가 복을 주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협박을 당해서 하는 행동도 아닙니다. 여러분도 스스로 이런 인생이 더 나은 인생이라는 것을 느껴서 실천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큰 박수와 함께 강연을 마쳤습니다. 밤 9시가 넘었습니다. 곧바로 무대 위에서 책 사인회를 시작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길게 줄을 서서 스님과 눈을 맞추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스님 덕분에 인생이 행복해졌습니다. 건강하세요.”

마지막으로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도쿄, 파이팅!”

사인회를 마치고 봉사자들은 소감 나누기를 했습니다. 각자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서로 소개한 후 짧게 한 마디씩 소감을 말했습니다.

“어머니 따라 봉사를 왔어요. 어머니가 명상을 하고 즉문즉설을 듣고 봉사하는 모습만 봤는데 직접 와서 보니, 어머니가 왜 그렇게 활동을 하시는지 이해가 됐어요.”

“긴장은 긴장대로 하고, 실수는 실수대로 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나니 홀가분한 마음입니다.” (웃음)

“지난번에는 강연을 듣기만 했는데, 오늘은 봉사를 했어요. 강연을 듣지 못해서 아쉬울 줄 알았는데, 봉사를 하면서 더 큰 감동을 느끼고 갑니다.”

봉사를 통해 또 다른 기쁨과 보람을 맛보고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훈훈하게 해 주었습니다. 10시에는 강연장을 비워주어야 해서 봉사자들은 나누기를 마치고 서둘러 뒷정리를 했습니다.

차를 타고 신주쿠에 있는 숙소에 도착하자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오늘도 긴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일본 원로 정치인들을 만나 한반도의 평화와 북일 관계 개선에 대해 대화를 나눈 후 저녁에는 도쿄 기타구에 위치한 북토피아(Hoku Topia)에서 일본어 통역으로 일본인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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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나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살았을 뿐입니다’_()_

2024-07-01 17:20:49

이수미향

감사합니다~

2024-07-01 13:09:14

정목 혜등명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2024-07-01 11: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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