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12.15 필리핀 민다나오 방문 4일째, 알라원
“남편은 자살하고, 아들은 백혈병으로 죽고, 저는 어떻게 살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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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필리핀 민다나오를 방문한 지 4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걸어서 왕복 7시간이 걸리는 깊숙한 원시림에 위치한 오지마을 알라원을 방문해 간식을 지원했습니다.

새벽 4시, 도량석이 울리자 스님과 JTS 방문단은 기숙사 홀에 모여 새벽 예불을 했습니다.

알라원은 키탕글라드 산 해발 1,200m의 깊숙한 원시림에 위치한 오지 마을입니다. 가는 데만 3시간 30분이 걸리기 때문에 새벽 예불만 하고 일찍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이 갈 준비를 하는 사이 스님은 준비를 마치고 조용히 4시 55분에 5분 일찍 출발했습니다.

JTS 센터에서 키탕글라드 산 입구까지 가는 길은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두웠습니다. 원래는 땅이 마를 새 없이 매일 비가 오다 보니 흙에도 이끼가 끼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 요즘은 건기라 어제와 오늘 날씨가 맑아서 예전처럼 미끄럽지는 않았습니다.

30분을 걷자 원주민 마을 비석이 나왔습니다. 이 비석이 있는 곳에서 산으로 들어서면 알라원으로 갈 수 있습니다.

숨을 고르고 산으로 들어서자 정글이 펼쳐졌습니다. 이곳은 산림보호구역이라 세계에서 몇 개 남지 않은 원시림입니다. 처음에는 내리막길이 이어졌습니다. 예전만큼 한 발 내딛기가 어려운 정도는 아니었지만 물을 머금은 길은 미끄러웠습니다. 온 신경을 집중해 한 발 한 발 내디뎠습니다.

나무가 온통 이끼로 뒤덮여 초록색이었습니다. 좁은 계곡도 몇 번이나 건넜습니다. 걷는 사이 동이 트고 날이 점점 밝아졌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 앉아서 쉴 만한 큰 돌이 나타났습니다. 돌에 걸터앉아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쉬었습니다.

앉아서 쉬고 있는데 뒤쳐졌던 김홍신 작가님도 도착하셨습니다. 청년도 걷기 어려운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76세의 작가님을 모두 환영했습니다. 작가님이 자리에 앉자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자, 출발합시다.”(웃음)

스님의 농담에 한바탕 웃었습니다. 뒤에 도착한 일행도 충분히 숨을 고른 후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산을 내려오는 원주민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용분딱!” (좋은 아침이에요.)

두 시간이 지나 JTS와 원주민들이 함께 세운 다리가 나타났습니다. 물이 워낙 세차게 흐르다 보니 건너기에 위험했습니다. JTS에서 다리를 놓겠다고 했을 때, 원주민들은 처음에 자재를 가져오기가 어렵다며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그러나 시멘트와 철근을 여기까지 이고 지고 와서 결국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구경하며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리를 건너자 드디어 앉아서 쉴 수 있는 원두막이 나왔습니다. 원두막에 앉아 아침으로 가져온 주먹밥과 바나나를 먹었습니다.


다시 알라원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제 오르막길이니 먼저 가세요. 저는 천천히 가겠습니다.”

스님은 천천히 오르막길을 올랐습니다.


“이 길은 18년 전에 학교를 만들 때 대학생들이 와서 함께 만들었어요. 그전에는 이런 길도 없었어요.”

스님은 오르막길 앞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숨을 고르고 오르기를 반복했습니다.


조금 더 걷자 산 위로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 왔다!”

마지막 고개를 넘자 알라원 학교가 햇살 아래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2005년에 JTS가 알라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 당시 마을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주민은 마을리더를 포함해 단 2명이었습니다. 그분들마저도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닌 게 전부였습니다. 주민들은 학교 교육에 대한 열망이 높았지만 학교가 12km나 떨어져 있어서 통학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JTS는 주민들과 회의를 거쳐 이곳에 학교를 짓기로 결정했고, 11개월 만인 2006년 1월에 완공했습니다.


스님이 도착하자 먼저 도착한 JTS 방문단과 학생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마용분딱!” (좋은 아침이에요.)

학교 앞에서 마을 주민들은 JTS 일행을 위해 불을 피워 커피를 끓이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땀을 닦고 있는 사이 미리 삶아놓은 고구마와 토란, 카사바를 내왔습니다. 소박한 음식 속에 주민들의 정성이 듬뿍 담겨있었습니다.



스님은 무려 커피 세 잔을 마셨습니다.

“저는 커피를 안 먹는 사람인데, 여기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세 잔이나 먹었어요.”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제일 마지막에 김홍신 작가님이 뒤늦게 도착했습니다.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살 맛이 나요.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저 밑에서 올라올 때는 도망가고 싶었는데, 여기 올라오니까 살맛 나요.”

교실에 들어가니 유치원생부터 6학년까지 16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산 아래 마을로 일을 하러 내려간 사람들이 많아져서 처음 학교를 지을 때 보다 학생 수가 많이 줄었습니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스님의 제안으로 JTS 방문단은 함께 한국 동요인 ‘학교종이 땡땡땡’, ‘반짝반짝 작은 별’을 아이들에게 불러주었습니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빛나네 ♬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

그리고 JTS 활동가가 한국 노래 ‘아파트’를 신나게 춤을 추며 불렀습니다. 아이들과 학부모들도 함께 일어나서 춤을 따라 했습니다.


한국 노래를 듣고 나서 아이들은 JTS 방문단에게 필리핀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서로 가사를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함께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나서 아이들에게 과자 꾸러미를 선물했습니다. 아이들은 과자 꾸러미 앞에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이들과 JTS 방문단이 어우러져 학교 앞에서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고 나자 아이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과자 봉지를 뜯기 시작했습니다.


스님과 JTS 방문단은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학교를 출발했습니다.

올 때 오르막길은 내리막길이, 내리막길은 오르막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왔던 길을 꾸준히 걸어갔습니다.


“내려갈 때 좋았던 과보를 톡톡히 받네요.(웃음) 예전에 나이 든 활동가들도 함께 다니곤 했는데 정말 힘드셨겠어요. 나이가 들어보니 알겠네요.”

한참 내려가고 있는데 올라갈 때 만났던 원주민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쌀을 이고 다시 알라원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숨이 가쁠 때마다 가다 서다를 반복했습니다. 스님 뒤로 줄줄이 행렬을 이룬 거사님들도 함께 가다 서다를 반복했습니다.




마지막 깔딱고개에서 거사님들은 ‘힘!힘!힘!’을 외치며 오르막길을 올랐습니다.

3시간이 지나 드디어 산 밖으로 나왔습니다.

“얏호!”

JTS센터까지 걸어가며 스님은 곳곳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웠습니다. 거사님들도 함께 쓰레기 줍기에 동참했습니다. 하산길은 줍깅을 하며 가볍게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길도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12시에 센터 앞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이 가장 먼저 도착하고 이어서 JTS 방문단도 모두 무사히 센터에 도착했습니다.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휴식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전에 산행을 7시간이나 했기 때문에 잠시나마 피로를 풀었습니다.

오후 3시부터는 JTS 방문단과 필리핀JTS 활동가들이 모두 강당에 모여 필리핀JTS의 내년 사업 계획과 향후 민다나오 구호 사업의 미래 비전에 대해 의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필리핀JTS 사무국장인 향훈 법사님이 내년도 사업계획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이미 민다나오 부키드논 주 교육청과 군청에서 학교를 지어달라는 요청이 많이 들어온 상황이고, 필리핀JTS도 앞으로 농업 지원, 마을 개발, 현지 활동가 양성 등 많은 사업을 펼쳐나가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들을 해나갈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해나갈 상근활동가의 수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이야기하며 사업계획 발표를 마쳤습니다.

JTS 방문단은 상근활동가의 부족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내용에 모두가 공감을 했습니다. 변화된 상황에 맞게 어떤 방식으로 사업을 해나갈 것인지 다각도로 모색해 보았습니다. 토론 내용을 들으며 스님도 의견을 이야기했습니다.

상근활동가의 부족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정토회의 설립 원칙을 지키며 사업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인구 변화로 젊은 활동가들의 유입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업은 확대되고 있으니 그 사이에 균형이 안 맞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에 대한 대안으로 시니어 그룹에서 상근활동가를 모집하는 방안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월급을 주고 고용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분들도 있는데요. 이 사업을 진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JTS 원칙을 포기하더라도 그렇게 해보자는 의견이 있긴 합니다만, 지금까지 JTS의 모든 사업은 자원봉사 방식으로 진행해 왔습니다. 사무실 유지비나 활동가들의 이동 경비 등 경상비는 전체 예산의 3퍼센트 미만입니다. 후원자들이 낸 기부금의 97퍼센트가 수혜자에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NGO에서는 기부금의 약 70퍼센트를 사무실 유지비와 인건비로 사용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리고 국제사회에서는 사무실 유지비와 인건비를 전체 예산의 30퍼센트 이내로 사용할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JTS는 어떤 활동가도 후원금을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필리핀JTS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사업을 해나가면 좋을지 토론을 했습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한 20년 전과 상황이 많이 변했는데요. 스님은 변화된 상황에 맞게 어떻게 방향을 바꾸어나가면 좋을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곳 민다나오에서 JTS 사업을 시작한 목표는 ‘평화’입니다. 이곳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이라는 방법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필리핀 민다나오에서는 인도처럼 한 개의 지역을 맡아 사업을 진행하기보다 분쟁 지역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학교 짓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교육청에 요청해서 교사를 파견받고, MILF(무슬림 반군)에서 교사의 신변 보호를 지원받는 식으로 사업을 진행했죠. 초반에는 학교를 준공해 놓고도 교사가 파견이 되지 않는 등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변화된 환경에서 필리핀JTS가 가야 할 방향

현재는 상황이 좀 바뀌었습니다. 변화된 상황에 맞게 사업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어요. 첫째, 원주민 지역에 학교를 더 지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학교를 먼저 지어놓고 교육청에 가서 교사 파견을 요청했지만, 이제는 교육청이 학교를 지어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필리핀에서 교육에 대한 요구는 늘었지만 아직 여기에 투자할 수 있는 자금은 부족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또 JTS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커졌다는 반증이기도 하고요. JTS가 지난 20년 동안 일구어 온 성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학교 부지 선정을 할 때 JTS 활동가들이 직접 답사하고 조사해서 발굴했습니다. 산속을 몇 시간씩 걸어 다니며 조사하고 선정했기 때문에 활동가들의 노력이 엄청나게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학교 건축을 그런 방식으로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제 교육감님이 원주민 마을에 40개의 학교가 더 필요하다고 요청했어요. JTS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현재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둘째, 장애인 특수학교를 군 소재지마다 하나씩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부키드논 주에 군이 20개가 있는데, 그중 5개의 군에 특수학교를 이미 지었으므로 장기적으로 15개의 특수학교를 더 지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셋째, 무슬림 지역에도 학교를 계속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무슬림 지역에 들어가서 분쟁 해결이 잘 안 되어 학교 짓기를 중단한 곳들이 있습니다. 라나우델수르, 마긴다나오, 코타바토 등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키드논 주에만 JTS의 사업을 집중하게 된 겁니다. 다른 지역을 새로 개척할 것인가는 새로운 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장애인 특수학교를 짓는 일과 원주민 마을에 학교를 짓는 일만 해도 향후 몇 년은 그것만으로도 다른 사업을 할 여력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넷째, 학교 짓는 방식을 바꾸게 되면 예전처럼 주민들과 같이 고생해서 건물을 지으며 주민들과 교류하는 방식이 없어집니다. 예전처럼 준공식 날 서로 껴안고 눈물 흘리던 모습은 거의 사라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준공식 하는 날 고구마만 삶아놓고 먹어도 서로 껴안으며 울었는데 이런 모습이 사라진 거죠. 왜냐하면 학교 건축이 점점 관청 중심, 건축 기술자 중심으로 변하며 주민들의 노동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장애인 특수학교의 경우 군마다 하나씩 시내에 학교를 지어야 하는데, 전체 주민들에게 학교건축 노동에 참여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특수학교의 경우는 자원봉사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는 어렵고, 현실에 맞는 방식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 외 학용품 제공이나 교사 연수, 놀이터 마련 등은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습니다. 또 이미 지어놓은 학교의 일부 보수 문제가 남았습니다. 그리고 오지에 계신 선생님들을 초대해서 약간의 혜택을 드리면서 교사 교육연수를 진행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부모님들의 경제력을 좀 높여서 중학교부터는 부모가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시범 농장도 만들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소득 증대를 할 수 있도록 시범 농장을 운영하려고 했던 거죠. 이곳 토질에 맞는 품종이 무엇인지 연구해서 알려드리고, 농산물 유통 경로를 단축하고, 농사 초기에 영농비를 지원해 주는 것도 고려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센터에 와서 6개월 정도 머무르며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것까지 배울 수 있도록 계획했었죠. 교육 기간에는 이분들이 별도의 소득이 필요할 테니 이런 것도 좀 지원하고요. 그러나 인력부족으로 제대로 시행되고 있지 못합니다.

현재까지는 학교건축이 우리의 주 업무였지만 미래에는 개발 지원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JTS가 학교를 건축했던 것은 건물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주민들이 자녀교육에 대한 열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학교 건축에 참여시킴으로 해서 개인의 삶 밖에 모르던 사람들에게 공공의식을 갖게 만드는 것이 JTS 사업의 목적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땅도 기부하고, 건축 노동에도 직접 참여하면서 자연스레 공공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도록 JTS의 사업이 진행되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특수교육 등 교육의 질을 높인다는 과제가 생기면서 주민들의 참여가 배제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초창기에는 그 지역의 흙이나 나무로 건물을 지으면서 그곳 주민들의 기술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제는 콘크리트로 건물을 지으면서 그 지역의 자재를 활용할 수 없고, 그 지역 주민의 기술도 불필요해졌습니다. 현대식 콘크리트 건축 기술자와 건축업자들이 학교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죠.

앞으로는 건축 외에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법을 확대해 가며 이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교육 면에서 학생, 주민, 교사들과의 접촉면을 넓히면서 서로 감정을 교류하는 것도 필요하고요. 전반적인 사업 전환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적으로 세상의 변화 속에 살고 있고, 그 속에서 처음 정한 원칙을 지키며 사업을 진행할 형편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원칙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현실 속에 그 방식을 조금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건축은 군청과 교육청에 전적으로 맡기고, JTS는 자재를 제공하고, 대신 JTS 활동가들은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는 학용품 지원, 교사에 대한 연수, 그리고 교실 내에 여러 가지 교육 기자재의 지원, 이런 일들을 좀 더 신경 써주면 좋을 것 같아요.”

계속해서 필리핀JTS 사업에 대한 새로운 제안이나 아이디어, 여러 가지 의견들을 각자 말했습니다. 3시간 동안 질의응답과 토론을 한 후 저녁 6시에 모임을 마쳤습니다.

해가 저물고 현지 시간으로 저녁 6시 30분부터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했습니다. 한국 시간으로는 저녁 7시 30분입니다.

작년에는 JTS센터에 인터넷이 안 되어 차를 한 시간 타고 시내로 나가서 인터넷이 되는 가정집 처마 아래에서 생방송을 했는데, 한 달 전에 JTS센터에 위성인터넷 수신기를 설치했습니다. 그래서 JTS 역사상 처음으로 민다나오 JTS센터에서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한국에서 5천 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 필리핀 민다나오에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지난 일 년 동안 학교를 4개 지어서 준공식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산간 오지에 초등학교를 하나 짓고, 초등학교 8개가 모인 시골 지역에 고등학교가 없다고 해서 고등학교를 하나 짓고, 읍내에 장애인 특수학교를 두 개 지었습니다. 여기에는 장애인 학교가 외진 곳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시내 중앙초등학교 안에 장애 아동을 위한 교실을 따로 마련하는 형태입니다. 그래서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학교는 같이 다니고 교실만 다른 곳에서 배웁니다.

지금 방송을 하는 곳은 해발 1100미터 정도 되는 산 중턱입니다. 산 정상이 3000미터 정도 되는데요. 원주민들이 1200미터까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마을 중에 한 곳에서 지금 인터넷에 접속해서 여러분과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세 명이 화상회의 방에 들어와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남편이 자살하고, 아들이 급성백혈병으로 죽고 나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며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남편은 자살하고, 아들은 백혈병으로 죽고, 저는 어떻게 살아야죠?

“제가 최근 3년 동안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가족의 아픔과 슬픔을 한꺼번에 겪게 되면서 너무도 참담합니다.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내려놓은 후 아이들 셋을 잘 키우면서 지내 보내겠다고 열심히 달려왔지만 그 생활도 잠시였습니다. 아들이 갑자기 급성 백혈병을 진단받아서 하루도 채 안 되어 의식을 잃어서 17일 동안 투병을 한 뒤 제 곁을 떠났습니다. 이로 인한 상실감과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고요. 너무나 이 세상이 억울합니다. 현재 남은 두 딸을 어떻게 키우면서 견뎌야 할까요? 제가 어떻게 두 딸에게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을까요?”

“남편을 잃고 나서 자식까지 죽고,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마음의 상처가 매우 큰 상태인 것 같아요. 지금은 누가 어떤 말로 위로한다고 해서 그 아픔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왕 질문을 하셨으니 경전에 있는 옛날 얘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옛날에 아주 부잣집 처녀가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만 문제가 아니라 신분이 낮은 집 총각과 눈이 맞아 연애를 하게 됐습니다. 그 당시 사회적 조건에서는 결혼을 할 수가 없었어요. 부모님이 결코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로가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몰래 집을 떠나서 먼 곳으로 가서 결혼해 살았습니다. 그러다 아이를 하나 낳고, 아이가 세 살이 될 무렵 또 아이를 하나 갖게 되었어요. 그러나 나라에 흉년이 심해지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다 보니 기반도 없어 한 끼의 끼니도 잇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굶어 죽느니 친정은 잘 사니까 친정으로 가서 부모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숲 속에서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인도는 날씨가 따뜻하니까 숲 속에서 바로 해산을 했어요. 남편이 도와 해산을 했는데 남편이 뱀에 물려 갑자기 죽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아기를 낳으니까 피 냄새가 나서 주위에 있던 코브라가 남편을 물어 버린 겁니다. 부인은 갑자기 남편을 잃어버리게 되었죠. 그래도 사람이 살아야 하니까 핏덩이 아기를 안고, 한 아이는 손을 잡고, 친정으로 가다가 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 아이를 다 안고는 강을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큰 아이에게 내가 아기랑 먼저 건너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렇게 큰 아이는 놔두고 작은 아이를 안고 강을 건너가서 건너편에 아기를 두고 큰 애를 데리러 왔는데, 큰 애가 조급해서 혼자서 강을 건너다가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았어요. 기가 막히죠. 그래서 넋을 잠시 잃었다가 그래도 강기슭에 있는 갓난아기라도 돌봐야 되니까 다시 물살을 헤치고 건너왔는데 늑대 무리가 그 핏덩이 갓난아기를 물고 가버렸어요. 졸지에 아이 둘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다시 넋이 빠진 상태로 있다가 그래도 사람이 어떡합니까. 겨우 친정으로 와 봤더니 그 해가 흉년이라서 도적떼가 그 마을을 습격해서 집에 불을 질러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집은 잿더미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은 여인이 넋을 잃고 헤매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부처님을 찾아가 보라고 얘기했어요. 그래서 부처님을 찾아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고통을 받아야 됩니까?’ 하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정신을 차리고 깨달음을 얻어 출가를 했고 나중에 훌륭한 비구니 스님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어떤 재난이 한 번 일어나고 끝날 때가 있고, 두 개가 연달아 일어날 수도 있고, 때로는 세 개가 연달아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확률적으로는 매우 낮지만 가끔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요. 세월호의 죽은 아이를 부모가 볼 때는 날벼락이죠. 이태원에 놀러 갔던 아이의 죽음을 겪은 부모도 날벼락이지 않겠습니까? 그것처럼 확률은 매우 낮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질문자처럼 남편이 자살했다든지, 또는 자식이 자살했다든지 하는 경우는 우리 사회에도 이제 굉장히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자살률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 보니 주위에 자살한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급성백혈병 같은 희귀병으로 갑자기 죽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긴 하죠. 드문 일이긴 하지만 주위에서 가끔 그런 경우를 보게 됩니다.

코로나 백신을 맞고 갑자기 죽은 사람도 있고, 코로나에 걸려서 죽은 사람도 있고, 연세 드신 분이 아니더라도 젊은 사람 중에 죽은 사람도 있고요. 그럴 확률이 매우 낮지만 그런 일이 우리 주위에서는 일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구가 5천만 명이기 때문에 그중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이 늘 있는 거죠. 그럴 때 그 한 사람만 생각하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하나님이 나에게 벌을 주시나?’, ‘이게 나의 운명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확률적으로 보면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이 낮지만 사람이 많다 보니까 누군가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요. 장애인일 확률이 1%라면 우리 아이가 장애인일 확률은 매우 낮지만, 천 명의 사람을 만나보면 그런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는 이 집에도 있고 저 집에도 있는 거예요.

그것처럼 지금 질문자는 그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서 굉장한 충격에 휩싸여 있는데,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얘기예요. 만약 두 딸을 두고 내가 생을 마친다면 질문자가 살아 있을 때 보다 두 딸에게 더 큰 충격이 되잖아요. 질문자도 이 충격을 감당하기 어려운데 두 딸들이 이 충격을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그것은 올바른 길이 아닙니다.

이러한 불행으로 질문자가 계속 울고 있고 제정신을 못 차린다면 두 딸은 어떻겠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남동생이 갑자기 죽고 엄마는 제정신이 없는 것이 낫겠습니까? 이미 일은 일어나 버렸지만 내가 정신을 차리고 있어서 두 딸이 ‘그래도 엄마가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다’ 하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게 낫겠습니까?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자꾸 과거 이야기하지 말고 바로 지금 나의 인생을 위해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도 엄마가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는 길이 바른 길이 아닐까요?

그런 일이 안 일어나면 좋았겠지만 이미 일어났고 지금 돌이킬 수가 없잖아요. 억울해한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원망한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고, 전생 탓을 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사주팔자를 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사주팔자를 보는 곳에 가서 내 사주팔자가 그렇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또 교회나 절에 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결국은 모든 것은 내가 정신을 차리고 지금 주어진 조건에서 나도 행복하게 살고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길을 가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이 있겠어요? 점을 쳐서 당신의 운명이 이렇다고 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뭐가 있겠어요? 돈만 들지요. 자칫하면 두 딸에게 또 이런 위험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다시 돈 쓸 일만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 제가 생각할 때는 지나간 일을 자꾸 붙들고 이야기해 봐야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지금 그래도 두 딸은 남아 있잖아요? 부처님 당시의 이야기처럼 다 잃어버린 것은 아니잖아요. 두 딸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잖아요. 주어진 이 조건에서 ‘나라도 건강해서 다행이다’ 하고 관점을 바꾸면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자꾸 생각하면 내가 행복할 수 없어요, 그러나 좋은 점을 자꾸 생각하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남편이 너무 불쌍한데 남편이 자살을 한 이유를 시댁에서는 제 탓으로 돌립니다. 하지만 저는 열심히 당당하게 살아왔고, 저희 아이들도 엄마만 아니면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3자인 사람들이 엄마에게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가족인 저희들이 엄마를 응원하고 있으니 그것으로라도 만족하라고 말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마저 이렇게 되고 나니 저는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날 뿐입니다. 스님 말씀대로 저는 정말 보란 듯이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었는데 왜 저에게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지, 자신감이 조금 없어지는 상황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옛날에는 남편이 죽은 것을 다 아내 탓을 했잖아요. 그래서 여자가 남자를 잡아먹었다고도 했고요. 옛날에는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또 아들까지 이런 일이 생기니까 일부에서는 ‘봐라, 여자가 독하니 그렇게 되지 않느냐?’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사회에서도 어떤 일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전 정부, 전 대통령이 잘못했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모두가 다 현 정부가 문제다 현 대통령이 문제라고 합니다. 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어떤 사람들은 야당이 문제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당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누구나 다 말할 수는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질문자의 입장에서는 남편이 어렸을 때 시댁 쪽 가족들이 잘 좀 돌봤으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시댁 쪽에서는 질문자가 잘 돌봤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일부 사실일 수도 있어요. 내가 남편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빨리 데려가서 병원 치료를 받게 했으면 이런 일을 연기시켰거나 막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나 나도 그만큼의 성인도 아니고 내 살기도 바쁜 사람이었고, 그들 또한 그들 살기도 바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억울해하면 질문자만 괴롭잖아요.”

“제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우리 두 딸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요? 어떻게 하면 두 딸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요?”

“질문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첫째, 질문자가 안 죽는 것입니다. 둘째, 질문자가 정신을 놓고 살아서 딸들이 질문자를 걱정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신을 놓고 살아서 딸들이 할 일도 바쁜데 늘 엄마 걱정을 한다면 부모로서의 할 일은 아니지요. 제가 보기에 질문자가 딸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질문자의 능력에는 안 맞는 것 같아요. 지금은 딸들에게 걱정거리가 되지 않는 정도가 질문자가 딸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닌가 싶습니다.

질문자가 죽는 것이 딸들에게는 가장 큰 충격입니다. 질문자가 너무 우울해하거나 해서 늘 엄마 걱정을 하게 하는 것도 딸들에게는 안 좋은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딸들이 엄마 걱정을 안 하도록 늘 밝게 웃으면서 살아주는 것이 딸들을 위해서 질문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 질문자가 딸들에게 무언가를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욕입니다. 자기 삶도 못살아 제정신도 못 차리는 사람이 어떻게 남한테 무엇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본인만 그런 생각을 할 뿐이지 실제로는 딸들에게 걱정거리가 되고 있잖아요?

질문자의 불행을 자꾸 딸들의 삶에 결부시키지 마세요. 적어도 딸들이 나를 걱정하지 않도록 내 몸 하나 내 삶 하나 제대로 건사하는 것이 우선 필요합니다.”

“또 다른 화살을 맞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아이들에게 걱정거리가 안 되는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눈 후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스님은 JTS센터 앞마당으로 나갔습니다. JTS 활동가들은 장작으로 모닥불을 피워놓고 ‘민다나오의 밤’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방송을 마치고 나오자 곧바로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필리핀JTS 활동가들이 지난 20년 동안 필리핀JTS 사업을 이끌어 온 이원주 대표님에게 감사패를 증정했습니다.

“민다나오에서 활동을 잘할 수 있게 지원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모아 이 감사패를 드립니다.”

이어서 이원주 대표님이 활동가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우리 JTS 활동가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애를 써주셨기 때문에 JTS가 20년을 꾸준히 활동해 올 수 있었고 알찬 열매를 지금 맺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다음은 스님이 이원주 대표님에게 필리핀JTS 20년사 백서를 증정했습니다.

“대표님의 지난 20년 동안의 활동이 거름이 되어 민다나오의 소외된 어린이들이 잘 자랄 것입니다. 이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책을 증정합니다.”

책 속에는 JTS가 민다나오에 59개의 학교를 건축하면서 어떻게 분쟁 지역에 평화의 씨앗을 심어 왔는지 그 과정이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20년사 백서를 증정한 후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원주 대표님과 함께 동행하며 JTS센터에서 식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뒷바라지를 해준 한금화 님도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민다나오에 올 때마다 보람을 많이 느꼈어요. 학교를 지을 때마다 마을 주민들이 필리핀에서 그 누구도 자신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데 저 멀리 코리아에서 온 사람들이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가져 주니까 한이 풀린다면서 눈물을 흘리고 그랬어요. 같은 돈 천 원을 써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는 스님의 말씀을 활동 속에서 정말 많이 느꼈습니다.

특히 저는 JTS 활동가들이 먹을 수 있는 식품을 주로 공급했는데 부처님 말씀처럼 ‘수행자들을 외호하라’는 그 마음으로 했어요. 저한테는 JTS 활동가들이 정말 험지에서 수행하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대표님과 함께 20년 활동을 잘 마치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모두가 큰 박수로 두 분의 노고에 대해 깊이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작년에 필리핀JTS 20주년 행사를 했지만, JTS활동가들끼리는 오늘이 20주년 행사였습니다.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서로 나누며 노래를 한 곡씩 불렀습니다.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초롱초롱 빛났습니다. JTS 활동가들의 땀과 노력이 민다나오에 평화를 가져오는 빛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내일은 아침에 필리핀JTS 활동가들과 간담회, 필리핀JTS 이사회 구성원들과 간담회, JTS 방문단 전체 간담회를 연달아한 후 JTS센터를 출발하여 가가얀데오로 공항으로 이동해 비행기를 타고 마닐라로 가서 밤 비행기를 타고 다음날 새벽에 인천공항으로 귀국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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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하이

주어진 이 조건에서 ‘나라도 건강해서 다행이다’ 하고 관점을 바꾸면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자꾸 생각하면 내가 행복할 수 없어요, 그러나 좋은 점을 자꾸 생각하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2024-03-22 13:27:06

오주희

현재의 조건에서 행복해야 함을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2024-02-02 06:04:05

김미자

올때 오르막 길은 내리막 길이 내리막 갈은 오르막 길이 되어 있었다는 글이 마음에 와닿네요. 인생 집착할 바가 없음을 알아차립니다.
즉문즉설에서 딸들이 나를 걱정하지 않도록 내 몸 하나 내 삶 하나 제대로 건사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는 말씀 깊이 새깁니다.
같은 돈 천원을 써도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지혜로운 말씀 고맙습니다.

2023-12-25 07: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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