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7.26 수행법회, 정전 70주년 종교인 평화선언
"정전 70년, 북한 핵 동결과 북미관계 정상화부터 시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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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정전 70주년을 맞아 종교계 원로 분들과 함께 평화선언을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 3층 설법전에서 공동체 대중과 새벽 예불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종교인 평화선언 행사의 준비상황을 최종 점검한 후 오전 10시에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했습니다. 먼저 정토불교대학 입학생 모집을 앞두고 정토회 대표님이 홍보 계획에 대해 발표하고, 다 함께 전법의 의지를 다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어서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여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말 으뜸절 실천활동 모습과 스님의 농사일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본 후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사전에 두 명이 질문을 신청하여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지극한 마음이 되지 않는다며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깨달을 수 있나요?

“큰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보면 간절하고 사무치게,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삼매에 들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요. 삼매에 든다는 것은 어떤 것이고,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은 어떻게 생겨나나요?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지’ 하는 순간 의도가 들어가서 그런지 명상도 잘 되지 않습니다. 저는 보통 바깥 경계에 부딪히게 되면 간절해지게 되는데요. 저는 근기가 낮아서 그런 걸까요?”

“수행으로서의 불교와 종교로서의 불교가 섞여 있어서 그렇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소원이 성취된다’ 하는 말은 종교로서의 불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깨달음’이란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뜻합니다. 두 가지가 섞여서 ‘간절하게 기도하면 깨닫는다’ 하는 표현이 생긴 겁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면 소원이 실현된다거나 병이 낫는다고 믿는 것처럼 깨달음을 ‘얻는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법문이 나오게 된 거예요. 반야심경에서는 깨달음은 얻는 대상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보리살타(菩提薩埵)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

이 문장은 지혜도 없고 또한 지혜를 얻을 것도 없으며, 얻을 것이 없는 까닭으로 보살은 반야 바라밀다에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돈을 벌고 출세하고 지위를 얻고 병이 낫고 건강해진다는 것처럼 깨달음도 열심히 해서 얻는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지 못하면 괴로움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돈을 못 번 사람이나 출세하지 못한 사람이 한탄하듯이 수행자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한탄을 하게 되는 거죠.

‘내가 30년을 수행했는데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수행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종교로서의 불교를 믿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못 깨달으면 한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재물이나 자원처럼 얻는 대상이 아닙니다. 모든 욕망을 놓아 버리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모든 욕망을 놓아 버릴 때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어떤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극기 훈련이지 수행이 아닙니다. 힘을 얻기 위해서는 훈련을 많이 해서 힘이 생기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행은 힘이 아닙니다. 수행은 편안함입니다. 수행은 모든 고뇌의 사라짐입니다. 질문자는 깨달음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쓰고 있어요.

선불교에서는 세 가지가 합해져야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첫째, 의심해야 합니다. ‘이게 뭐지?’, ‘왜 그렇지?’ 하는 의문이 있어야 합니다. 의문이 있으면 의문을 풀기 위해 간절해집니다. ‘왜 그렇지?’ 하고 의문을 품었다가 ‘그냥 그런 것이지’ 하고 마는 게 아니라 간절한 의심을 해야 합니다. ‘이 뭐꼬?’ 하고 골똘히 몰두해야 해요. 부처님은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할까? 같이 사는 길은 없을까?’ 하고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누구한테 물어도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탐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에게 물어서 답을 얻으면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끝나는데, 어떤 사람에게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스스로 탐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럴 때 갖는 의문은 남을 믿지 못해서 생기는 의심이 아닙니다. 간절하게 ‘왜 그렇지?’ 하고 탐구하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분심(憤心)을 가져야 합니다. 몰랐다는 것에 대해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내가 왜 이런 것도 몰랐을까?’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분심입니다. 예를 들어 ‘너는 누구냐?’ 하는 물음에 ‘내가 나지, 누구야?’ 이렇게 답하면 더 이상의 진전이 없고 그냥 끝이 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묻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계속 물어야 합니다.

‘너는 누구냐?’
‘법륜입니다.’
‘그건 너의 이름이지 않느냐? 너의 이름이 뭐냐고 물었을 때 대답이 법륜이지,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너는 누구냐?’
‘스님입니다.’
‘스님은 너의 직업이지.’

‘너는 누구냐?’
‘저는 엄마입니다.’
‘그건 가족 관계 속에 너의 위치이지.

이렇게 ‘네가 누구냐?’라고 계속 탐구하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도무지 모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정말로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세상의 온갖 것을 다 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우스운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분심(憤心)이 일어나야 됩니다. 어떻게 해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았느냐는 거예요. 화를 내는 분심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바보같이 살았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분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고 하는 탐구심이 더 간절해집니다.

셋째, 이렇게 정진을 하면 마침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믿음, 즉 신심(信心)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꾸준히 정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신심이 없으면 중간에 그만 둘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선(禪)에서는 신심(信心), 의심(疑心), 분심(憤心) 이렇게 세 가지가 있어야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뭐꼬?’, ‘나는 누구인가?’ 하는 화두에 몰두하려면 세 가지가 있어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집중을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맞습니다. 뭐든지 집중을 하면 어느 순간에 ‘아, 그거구나!’ 하고 깨달음이 생기면서 관념의 벽을 뚫고 나가는 힘이 생깁니다. 이런 맥락에서 스님들이 간절함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간절하게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는 말처럼 간절하게 기도하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간절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의 성격은 내가 원해서 이루어진 게 아니고, 어릴 때 자란 환경에 의해 형성된 측면이 큽니다. 여러분은 어릴 때 형성된 그 업식에 따라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습관적으로 되풀이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 결과 여러분은 외부 자극에 의해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저 사람을 화나게 만들려면 어떤 자극을 주면 된다는 것이 정해져 있습니다. 저 사람을 유혹하려면 무엇을 제공하면 된다는 것이 정해져 있어요. 왜냐하면 어렸을 때 형성된 업식을 건드리면 그대로 반응을 하기 때문입니다. 빅테이터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행동 패턴이나 소비 패턴을 분석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로 사람을 조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조정을 안 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가진 업식 대로 반응하지 않아야 합니다. 밖에서 오는 자극에 대해 감정대로 움직이지 않아야 해요. 그래야 업식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상대가 나에게 욕하면 나도 욕하고, 상대가 나에게 화내면 나도 화내고, 상대가 울면 나도 따라 울고,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거의 꼭두각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상대가 나에게 욕을 해도 나는 웃을 수 있다면 나는 상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욕을 하는 것은 상대의 일이고 나는 웃는 거죠. 내가 울더라도 자동으로 우는 게 아니고 우는 게 좋겠다고 선택해서 우는 것은 괜찮아요. 화를 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화를 내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극이 오면 자동반응을 하게 되거든요. 이것은 업식에 따라 습관적으로 대응하는 꼭두각시와 같은 인생을 사는 겁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그런 인생을 살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남편의 자극에 영향을 받아서 꼭두각시처럼 반응을 했는데 이제는 남편이 좀 늦게 들어와도 ‘무슨 이유가 있어서 늦었나 보네’ 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예전에는 아이가 공부하지 않고 있으면 자동으로 잔소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아이가 공부하지 않고 있더라도 ‘공부하기 싫은가 보구나’ 하고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어 잔소리가 나오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아이를 위해서예요? 나를 위해서예요?”

“나를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바깥 경계로부터 점점 자유로워집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해탈’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누가 나에게 자극을 줘도 나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거죠. 그렇다고 일절 반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에요. 반응을 하더라도 자동으로 반응하지 않고 내가 선택해서 반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해나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우선 내가 꼭두각시놀음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마치 입력된 대로 움직이는 인공지능 로봇과 같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그대로 반응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도 내 안의 뭔가를 딱 하나 건드리면 순식간에 원수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탐구할 수가 있어요.

놓아버리는 것과 간절한 것은 정반대인 것 같은데 결국은 같습니다. 어떤 것에도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 놓아버림입니다. 매미소리가 들리든지, 다리에 통증이 오든지, 머리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지 놓아버리는 겁니다. 나는 오직 화두만 참구 합니다. 그 말은 다른 것에는 일절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모든 긴장을 풀고 놓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나 실제로 해보면 잘 안 됩니다. 나도 모르게 자꾸 반응을 하게 되는 거예요.

간절한 것과 놓아버린다는 것은 일맥상통합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간절해지면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지 신경 쓰지 않게 됩니다. 오직 그 문제에 몰두해 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은 놓아버리게 되는 거죠. 정반대의 방법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같은 효과를 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파사나에서는 놓아버리는 방법으로 수행하고, 선에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탐구하는 방법으로 수행합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상태에 이른다는 목표는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간절히 얻고자 할 때 쓰입니다. 그러나 정토회에서 ‘기도’라는 용어를 쓸 때는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의미로 쓰는 게 아닙니다. 나의 무지를 깨우친다는 의미로 ‘기도’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정토회에서 사용하는 ‘기도’라는 용어는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의미한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간절히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마음이 간절해지면 정신이 굉장히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분비 기관은 무의식 세계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긴장이 풀어져서 완전히 편안해지거나 아주 집중이 되어 간절해지면 앓고 있던 병마저 치유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분석해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합니다.

마음이 간절하면 신체적인 파워가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혼자서 물건을 든다면 40kg 이상을 들지 못하는 사람이 불이 나서 아기가 불에 타게 될 상황이 벌어지면 아기의 앞을 막고 있는 70kg 이상의 장롱을 순식간에 번쩍 들어 올려서 아기를 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도해 보면 장롱을 들 수가 없습니다. 이런 힘이 순간적으로 생겨나는 현상은 현실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네, 깨달음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정진하겠습니다. 꼭두각시가 아닌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을 받고 대화를 나눈 후 오후에 있을 정전 70주년 종교인 평화선언 행사에 정토회 회원들이 많이 참석해 줄 것을 당부한 후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방송실을 나온 스님은 곧바로 지하 공양간으로 이동하여 점심 식사를 한 후 프레스센터로 향했습니다. 행사 시작 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도착하여 원로 종교인분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오후 1시에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앞에 부스를 마련하자마자 원로 종교인 분들이 한 명씩 도착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기독교, 천주교, 성공회, 천도교, 불교, 원불교, 6개 종단에서 원로 종교인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올해 초부터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에서는 지금 한반도에서 고조되고 있는 전쟁 위기에 대해 많은 우려를 하고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그 결과 정전협정 70주년이 되는 7월 27일 무렵에 종교인 평화선언을 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스님을 비롯하여 김명혁 목사님, 박종화 목사님, 박남수 교령님, 박경조 주교님, 김대선 교무님, 김홍진 신부님이 심부름꾼 역할을 맡아, 종교와 종파를 초월해 33명의 종교인들이 평화선언에 동참했습니다. 그중에 오늘 기자회견장에는 22명의 종교인들이 참석했습니다.

2시 30분이 되자 국민의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했습니다.

“민족의 독립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에 대한 묵념을 하겠습니다. 특히 오늘 정전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분들과 정전 이후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산화하신 4360명의 영령들, 한국군 4268명과 미군 92명의 명복을 함께 빌겠습니다. 일동 묵념!”

이어서 박종화 경동교회 원로 목사님이 앞으로 나와 오늘 평화선언을 하게 된 취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6.25 전쟁이 멈추고 나서 정전 협정을 맺었을 뿐 아직도 한반도에서는 70년 동안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평화선언의 핵심 내용은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로 가는 출발은 북한 핵 동결과 북미 수교를 서로 합의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야 정전협정에서 전쟁 종식 선언으로 나아갈 수 있고, 더 나아가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저희 종교인 33명의 이름으로 북한, 남한, 미국 정부에 간곡히 호소하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다음은 정전 70주년을 맞아 종교인 평화선언을 제안하게 된 배경에 대해 조성기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전 사무총장, 대한불교조계종 전 포교원장 지홍스님, 권오성 KNCC 전 총무, 최성덕 원불교 원로교무, 염상철 천도교 종의원 전 의장 등 5명이 한 문단씩 발표했습니다.

이어서 각 종교계를 대표해 최부옥 기독장로회 전 총회장과 대한불교조계종 전 화쟁위원장 도법스님, 대한성공회 신부 최준기 교무원장, 나도국 원불교 전 한국종교사회복지협의회장, 주선원 천도교 전 감사원장, 그리고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사전담사제 김홍진 신부, 총 6명이 평화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정전 70주년 종교인 평화 선언

“우리는 한반도 전쟁을 막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한반도 평화에 가장 큰 위협이 된 북한 핵무기 확산을 신속히 동결하고 북미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만이 최선의 해결책이라 생각한다. 북한의 핵 무력은 독자 생존하기 위한 강경군사 노선이기도 하지만 정전 이후 지금까지 북‧미관계가 정상화되지 못한 것이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현시점에서는 북한의 핵 동결을 통한 핵 무력 고도화를 막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관련 정세의 ‘실질적 주도자’ 역할을 해온 미국의 대북정책이 크게 바뀌어 북‧미관계 정상화, 나아가 북‧일 관계 정상화를 통해 한반도를 “세계적 평화지대”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남과 북, 동북아시아 국가들, 궁극적으로는 미국과 세계 모든 국가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일이며 현시점에서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이에 우리 종교인들은 점점 고조되는 한반도 전쟁 위기를 극복하고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신속한 북한의 핵 동결과 그에 상응하는 북미 관계 정상화”가 그 출발점이 된다는 점을 미국과 한국 그리고 북한 정부에 간곡히 호소한다...”

    1. 26
      정전 70년을 맞아
      종교인 평화선언 참가자 일동

▶정전 70년 종교인 평화선언 전문, 기사 보기 [클릭]

스님은 맨 뒷줄에 서서 평화선언에 함께 동참했습니다.


다음은 박경조 성공회 주교님이 평화선언에 동참한 분들을 한 명씩 소개해 주었습니다. 한 명씩 호명이 될 때마다 큰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자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 후 종교인 평화선언을 모두 마쳤습니다. 스님은 무대에서 내려와 참석한 종교인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연합뉴스를 비롯한 여러 언론사에 그 내용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기사 내용을 확인한 후 행사 준비를 위해 수고한 평화재단 실무자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저녁반을 위한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회원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자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그동안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에서는 어떻게 하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항구적인 평화를 지킬 수 있는지 그 방안을 모색하다가 33인의 원로 종교인들이 정전 70주년에 평화선언을 하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항구적인 평화로 나아가기 위한 첫출발

오늘 평화선언을 통해 원로 종교인들은 한반도의 평화에 가장 위협이 되는 북한의 핵을 동결시키고 북미 관계를 정상화하여 한반도가 평화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북한, 남한, 미국 정부에 촉구했습니다. 정전 70주년 종교인 평화선언을 하는 행사장에 많은 정토회 회원들이 참석해 주셔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행사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나서 7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3년이나 끌며 많은 희생을 치른 6.25 전쟁이 잠정적인 휴전을 해서 정전 상태가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잠정적인 휴전을 종식하고 항구적인 평화로 나아가야 하는데 지난 70년 동안 잠정적 휴전 상태만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 다시 전쟁의 위험이 고조되고 있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70년 동안 우리에게는 수많은 전쟁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추스르고 대화를 통해 긴장을 완화시켜서 평화를 잘 유지해 왔습니다. 오늘 정전 70주년을 맞아 앞으로는 남과 북이 자기주장에서 한 발 물러나서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이어서 지난 주말에 으뜸절 실천활동 모습과 스님이 농사일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본 후 1 시간 30분 동안 즉문즉설을 했습니다.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네 명과 대화를 나눈 후 9시가 넘어서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북한 전문가들과 조찬 모임을 하고, 오후에는 ‘진보 정치의 성찰’을 주제로 평화연구 세미나를 하고, 평화재단 기획위원회 회의를 한 후, 저녁에는 여름 명상수련을 하기 위해 문경 정토수련원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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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하이

조정을 안 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가진 업식 대로 반응하지 않아야 합니다. 밖에서 오는 자극에 대해 감정대로 움직이지 않아야 해요. 그래야 업식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2023-08-29 23:08:06

바람

놓아버림이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수행이다.
로봇트처럼 입력한대로 움직이지 않는 내 인샌의 주인이 되겠습니다.

2023-08-13 08:27:22

보각

감사합니다

2023-08-07 17:3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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